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 소설은 어떻게 쓰여지는가
정유정.지승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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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는 여름에 보아야 제맛이라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럴 것이다. 냉방이 잘 되는 영화관에서 오싹하고 으스스한 기분으로 1시간여를 보내다 보면 흐르던 땀도 쏙 들어갈 테니 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공포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싫어한다고 말하는 게 더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공포 영화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으로 출발한 것이 차츰 '공포영화 기피증'으로까지 발전한 셈인데 그 출발점은 아마도 로브 라이너 감독의 '미저리'가 아니었나 싶다.

 

'미저리'가 내게 안겨준 공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극 중 주인공인 애니가 소설가 폴을 자신의 집에 납치하여 감금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는 스토리에 나는 꽤나 충격을 받았었다. 책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작가를 팬으로서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나는 즐겨 읽었던 스티븐 킹의 작품마저 멀리 하게 되었다. 단순히 '미저리'의 원작자가 스티븐 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의 전문 인터뷰어로 잘 알려진 지승호 작가와 소설가 정유정의 대담집이자 정유정 작가의 영업비밀(?)을 다룬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영화 '미저리'에 얽힌 개인적 경험이 떠올랐다. 정유정의 소설 대부분을 읽어보았던 나로서는 흥미 있는 주제이기도 했고 내가 비록 '미저리'의 애니와 같은 사생팬은 아니지만 정유정 작가의 은밀하고 솔직한 속내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로 가는 첫걸음은 자신의 장르라고 짐작되는 분야의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분석하면서, 해부학을 공부하듯 하나하나 읽어야 한다. 노트를 마련하고, 장르, 구조, 플롯, 상징, 인물의 성격, 문장 등을 세세하게 기록하면서 연구해야 한다. 특히 본인에게 재미있거나 인상 깊었던 소설이라면 책장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공부하길 권한다(내 경우, 스티븐 킹의 <미저리>와 <사계>가 그랬다). 하다 보면 어떤 패턴을 볼 수 있게 된다." (p.69)

 

총 6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 '등단을 향한 여정', 2부 '이야기와 이야기하는 자', 3부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법', 4부 '초고-어차피 90프로를 버릴 원고', 5부 '1차 수정-그 장면이 필요 없다면 과감히 지워라', 6부 '탈고-이제 원고를 거꾸로 읽어보라'에서 짐작되는 것처럼 정유정 작가의 집필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빼어난 소설가는 선천적인 재능에 의해 탄생하는 게 아닌가 막연히 생각했던 고정관념이 이 책을 읽는 순간 말끔히 사라지게 된다. 프로 작가는 다른 전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부단한 공부와 각고의 노력에 의해 서서히 만들어진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삶 바깥에서 들이닥치는 통제 불가능한 힘, 나는 그것을 '운명의 폭력성'이라고 부른다. 소설을 통해 운명의 폭력성과 마주 선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저항하고, 어떻게 극복하는지, 혹은 침몰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최현수의 세계가 반드시 '댐'이어야 했던 이유다." (p.125)

 

글을 잘 쓰는 법에 대해 킹은 "하루에 4시간에서 6시간씩 읽고 써라. 만약 여러분이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좋은 작가가 될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라고 했다. 정유정 작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는 사실과 간호사라는 전문직을 과감히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섰다는 점 등 일반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지점이 있기는 하지만 정작 작가는 그런 이야기보다는 소설가가 꿈인 작가 지망생이 소설의 집필 과정에서 부딪치게 될 여러 상황을 선배 된 입장에서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진정한 이야기꾼으로 남기 위한 작가만의 비법을 전수하는 셈이다. 초고을 쓰는 단계에서부터 탈고까지, 소설을 완성하는 전 과정에 대해 세세히 들려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최고로 좋을 것이다. 그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건, 의지와 능력이 대립하는 경우다. 내 경우 전자를 포기한다. 프로라면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는 걸 인정하면, 포기 못할 것도 없다. 나는 SF를 좋아하지만 이야기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이 장르는 독자로만 만족한다." (p.251)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을 다 읽은 독자라면 이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쓸 준비만 하면 된다. 초고를 쓸 노트와 소설이 완성되기까지의 길고 긴 시간 동안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생존하는 것처럼 참을 인(忍) 자 세 개만 가슴에 품으면 된다. 언젠가 당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줄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홀린 듯 읽어줄 훌륭한 독자가 될 준비를 갖추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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