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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ㅣ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평점 :
생명을 키우고 생명이 자라는 곳은 어디나 부산하다. 부산하고 소란스럽다. 여름의 숲이 시끄러운 것도 그런 까닭이다. 생명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우렁찬 울음소리로 생명의 탄생을 알리고 온갖 소리와 함께 자신의 삶을 꾸리다가 소리와 함께 정적 속으로 사라지는 것,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이라면 소리는 곧 생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이 생명의 생성과 소멸을 다루는 것이라면 역사 또한 과거의 소리를 재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역사학자 이덕일이 쓴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500년 역사의 방대한 기록을 책으로 읽는다는 건 침묵 저편으로 물러났던 과거의 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다.
"기전체 역사서는 체제는 깔끔하지만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는 부족하다. 반면 태조 이성계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날자별로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은 현장의 생동감이 그대로 살아 있다.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당시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p.5 '들어가는 말' 중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인터넷으로 열람, 검색하는 서비스가 처음 시작되었던 건 2005년 12월이었다. <칼의 노래>를 썼던 김훈 작가는 언젠가 그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대학 2학년 때 '난중일기'를 읽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으며 '난중일기'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서운 글이었다고 작가는 회상했다. '절망만이 가득하고, 적으로 가득한 희망 없는 세상에서도 인간은 살 수밖에 없구나'라고 가르치고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나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인터넷으로 처음 접했을 때 그 방대한 기록도 기록이려니와 기존의 역사서와는 달리 마치 어제 기록한 듯한 생생한 느낌으로 인해 가슴이 마구 뛰었었다. 나는 비록 글재가 없어 <조선왕조실록>을 책으로 쓰지는 못했지만 이덕일 작가 역시 나처럼 가슴이 뛰었던 게다. 김훈 작가가 30여 년 동안 이순신 장군을 가슴에 품고 지내다가 쓴 책이 <칼의 노래>인 것처럼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 역시 10년간의 구상과 5년간의 집필 끝에 이루어낸 노력의 산물임을 밝히고 있다. 조선 왕조 500년 장대한 역사의 서막을 여는 인물은 태조 이성계이다.
"이성계는 일곱 살 어린 정도전을 기꺼이 스승으로 삼았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주군으로 삼았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신하이자 스승이었고, 이성계는 정도전의 군주이자 제자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자체로 고려 왕조를 폭풍 속으로 몰고 갈 조짐이었다. 그 조짐이 겉으로 불거진 것이 바로 이성계의 토지 개혁 상소문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물론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도 그 의미를 읽은 사람이 없었다." (p.145)
원나라 사람으로 동북면에서 여진족과 함께 생활하던 '변방 촌뜨기'가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귀순하여 급기야 조선 왕조 500년을 이어가는 기틀을 세우게 되었는지, 우리가 텔레비전과 여러 역사서를 통해 수도 없이 보고 들었던 그 장대한 역사의 시작이 작가의 치열한 사료 연구와 생생한 필체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고려 왕조의 모순을 파악하고 겸손과 섬김의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소통과 실천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이성계는 결국 권좌에 오르지만 자식들끼리 죽고 죽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가혹한 운명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태조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혁명적 토지 개혁을 단행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고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 짊어질 수 있는 극도의 증오를 동시에 받으면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가는 저승에는 함께 이 왕국을 만들었으나 먼저 왕국을 떠난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는 언제나 그랬듯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p.356)
한낮의 열기가 아스팔트를 녹일 정도로 뜨거웠던 오늘, 그런 열기 속에서도 말매미 소리가 요란했다. 한 뼘 생명이 자라는 소리. 원나라의 제후국이었던 고려가 역사 속으로 스러지고 태조 이성계의 조선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생명 탄생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는다는 건 기나긴 생명의 윤회를 따라 장구한 숨소리를 듣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