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엉 - 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2017 부산문화재단 우수도서, 2017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북투필름 참가작 선정도서
서성란 지음 / 산지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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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불편한 내 처지를 자꾸 떠올리게 하는 소설을 만났다. 내 삶이 소설에 나올 법하다는 말은 아니고, 귀촌한 사람으로서 시골에서 이방인비슷하게 살고 있는 처지를 말하는 것. 글에 나오는 소설가 이령이나 베트남 여자 쓰엉과 닮은 점은 그뿐이다. 그럼에도 감정이입이 너무 잘 돼서는 이 책을 보며 내가 사는 곳과 내 삶에 대하여 자주 생각하게 됐다.

 

한국음식을 능숙하게 요리한다고 해도 쓰엉은 외국인일 뿐이었다. () 산골에서 나고 그곳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늙고 선량한 노인들은 낯선 나라에서 며느리를 들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인들은 여자를 믿지 않았다. 가일리에서 평생을 살다 죽는다고 해도 쓰엉은 결코 한국인이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더라도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18)

 

메콩 강 처녀뱃사공으로 살다가 한국으로 시집 온 지 7년이 된 쓰엉. 그이는 이령의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는 일로 돈을 받으며 살림을 꾸린다. 굳이 외국 사람이 아니어도 할매, 할배가 많은 시골에서 낯선 젊은이는 무조건 관심 대상이다. (귀촌 3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관심이 부담스럽다.) 그러니 마을 토박이 남자와 혼인한, 그것도 그 남자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외국 여자를 두고는 얼마나 말들이 많았을까. 보통 관심이라면 좋은 뜻으로 해석할 때도 많지만, 시골에서는 좀 다르다. 특히 마을 사람이 되겠다고 눌러앉은 낯선사람에게는. ‘신기함에서 출발해 의심경계까지 포함된 그 눈빛을 나는 알고 있다. 늙고 선량한 어르신들한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 눈빛은, 마을 토박이가 아닌 한, 수십 년을 눌러 살더라도 평생 이방인들의 뒤를 쫓아올 거라는 사실도.

 

젊은 사람들 씨가 마른 시골 동네에 무 할라고

 

마을 밖에서 온 소설가 이령은 쓰엉처럼 젊은 여자지만 외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조금은 덜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고 할 수 있으려나.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하얀집 다락방에서, 소설을 쓰고자 바깥으로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는 이령. 작은 마을에서 그이를 두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을지 안 봐도 훤하다. 그런 삶은 도시에서라면 수도 없이 많을 터인데, 작은 시골마을에선 이야깃거리를 넘어 마저 된다.

 

젊은 사람들 씨가 마른 시골 동네에 무 할라고 집을 짓고 들어앉았을까나?” 마을 할머니가 이령 부부한테 갖는 궁금증은 애교에 불과하다. (나도 숱하게 들어온 말이다.) 산길에서 이령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사고 원인에는, 이령의 몸 상태에는 관심이 없다.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부부가 지붕이 높이 솟은 집을 짓는 바람에 동티가 난 거라고, 마을에 닥친 액을 막고자 조상들이 알아서 손을 쓴 거라고 수군거렸을 뿐이다. 외지인을 대하는 이런 어이없는 이야기들이 과연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일까? 산골마을에서 외지인으로 살다 보니 왠지 남 일 같지만은 않아서 씁쓸하다.

 

시골 공동체 정서를 외면한 이령은,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조금이나마 잘못이 있다 치자. 그럼 쓰엉은? 늦은 밤 시도 때도 없이 남편과 같이 있는 방으로 쳐들어오고, 며느리 뺨 때리는 것쯤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시어머니 구박을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온 죄밖에 없다. 집에 불이 나면서 삶터도 시어머니도 불길과 함께 사라진 뒤, 술로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는 남편 종태를 돌보며 집안을 건사한 쓰엉에게 돌아온 건 남편의 의심과 폭력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수년 동안 살 맞대고 살아온 부인을, 시어머니를 죽이고자 불을 냈다고 의심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출처는 과연 어디인 걸까. 쓰엉이 베트남 여자가 아닌 한국 사람이었어도 감히 그런 의심을 품을 수나 있었을까.

 

그래, 거기서라도 멈췄다면 내 마음이 이다지도 허망하지는 않았겠지. 하루아침에 삶터와 어머니를 잃은 종태는, 원망의 씨앗을 도시에서 온 이방인들한테까지 뿌리고야 말았으니. , 신이시여! 그 씨앗은 급기야 그 이방인들의 집을, 집 안에 꼭꼭 숨어 있던 이령마저 태우는 불씨가 되고야 만다. 그리고 그 불씨는 위태하게 이어져 온 쓰엉의 삶마저 태워버린다. 남편의 거짓 증언으로 불을 낸 죄인이 돼버린 것. 정작 불을 낸 것은 남편이건만. 한국말을 잘하던 쓰엉이 조사를 받는 순간부터 갑자기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대신 가서 사실을 고발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잠시 말을 잃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이럴진데, 쓰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던, 진실을 알고 있는 마음 좋은 벙어리 동주 아저씨는 얼마나 답답하고 애가 탔을까. 나와 동주 아저씨가 현실과 소설 속 인물이라는 차이는 제껴 두고 말이지.

 

뒤엉켜 버린 시간들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녀는 동정과 위로를 바라지 않았다. 헛된 꿈을 좇아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향을 떠났고 돌아갈 수 없었다. 수년 동안 갇혀 살았지만 단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젊고 아름다웠다.” (98)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손금을 읽듯 빤히 읽히는 삶을 벗어나고자 했던 쓰엉. 바다 건너 근본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려 했다. 그 모험이, 늙고 야윈 할머니께 평생 만질 수 없었던 것을, 깨끗하고 아늑한 집을 가져다줄 수 있는 선택이라고 믿었건만. 그리하여 언제까지라도 할머니의 자랑이자 이웃들의 부러움을 사는 존재이고 싶었건만.

 

그녀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뒤엉켜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 궤도를 이탈한 열차가 어느 곳을 향해 달려갈지 짐작할 수 없었다.” (140)

 

그녀는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순응하며 살려면 고향집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말았어야 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대신 가난하고 비루하지만 안전한 삶을 선택했어야 했다.” (239)

 

쓰엉은 젊고 활기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를 꿈꿨다. 산골이 아니라 도시의 삶을 동경했던 게 죄라도 되는 것이었을까. 가난하다고 해서 고향을 떠나는 것은 위험하고 배은망덕한 일이라고 화를 내던 쓰엉 할아버지의 말씀이 무거운 납덩이처럼 내 마음속을 내리누른다. 할아버지는 쓰엉 앞에 닥칠 운명을 예견이라도 했단 말인가. 쓰엉은 정녕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인가.

 

쓰엉은 꾸억의 손을 뿌리쳤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또다시 꾸억을 외면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끔찍한 일이 벌어질 줄 알면서도 외딴집으로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그녀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239~240)

 

오토바이를 장만하고, 날마다 품을 팔러 바깥을 다니면서도,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쓰엉.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그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건 무엇이었을까. 도시의 삶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해 준 외딴집과 그 주인들이었을까. 아니면 베트남이나 산골 마을이나 벼랑 끝이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일까.

 

이방인이방인을 만났을 때

 

날이 저물면 어둠과 침묵에 싸이는 마을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명명되지 않은 채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존재였다. 쓰엉은 부피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었다.” (212)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두운 밤이다. 벌레 숨소리라도 들릴 듯한 조용한 마을이 유독 낯설게 느껴진다.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딱 저 글처럼, 우리 집이 마을과 분리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령의 하얀집처럼 외딴집이 아님에도. 내일 날이 밝기 전까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과 함께.

산골 마을에 살면서 버스를 타거나 읍내에 나갔을 때 더러 외국 여자들을 볼 때가 있다. 안 그러고 싶은데도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간다. 어디서 왔을까, 몇 살일까, 잘 살고 있을까, 이것저것 혼자 마음속으로만 물어볼 때가 많았다. 이 책을 보고 나니 그동안 내가 본 사람들 가운데, 아니 한국으로 건너온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쓰엉처럼 모질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은 없을 거라고,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겁이 난다. 어딘가에 분명 있는 삶일 것만 같아서. 어쩌면 쓰엉보다 더 지독한 모습일 수도 있을 듯하고.

 

쓰엉과 이령은 가일리라는 한 산골 마을에서 비슷한 이방인처지로 만났다. 서로 다른 까닭으로 그곳에 왔고, 그곳에 사는 것이 힘겨웠던 두 여자. ‘이방인이라는 공통분모가 둘을 엮어 주었고, 낯선 땅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주었는데……. 마을은, 아니 세상은 그 둘을 갈라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처참하게 짓밟았다. 한 사람은 목숨을 잃고 또 한 사람은 남편의 죄를 덧없이 뒤집어쓰게 하는 것으로.

이방인은 다른 나라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도 한국 사람인 이령마저 이방인으로 그려낸 소설, 쓰엉. 이 글을 읽는 내내 불편하고 아팠던 건, 나 또한 산골마을에서 외지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일 거다. ‘외지것이 어쩌구~’ 하는 소리 안 듣고 싶어서 보이지 않게 발버둥친 시간들이 자꾸 생각나서일 거다. 나름 무난하게 귀촌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내 생각뿐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고 살기는 한다만)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데, 쓰엉과 비슷한 처지로 한국에 온 많은 여자들은 이 소설을 두고 어떤 생각이 들지 너무나 궁금하다. 그 가운데 누구라도, “내가 이러려고 한국에 왔구나, 참 행복하다면서 환하게 웃어 준다면 이 불편한 마음이 좀 가라앉을 것도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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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하차피의 달 - 2010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2011 이주홍문학상 수상도서 테하차피의 달
조갑상 지음 / 산지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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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에는 이집 저집 할머니들이나 어머니들이 모여서 정구지든 묵은 김치든 그런 걸로 부침개 부쳐 먹으며 궁금한 입을 달랬잖아요. 궁금한 입이 뭐겠어요. 주전부리도 주전부리지만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얘기, 가슴에 막힌 이야길 한다는 거지. 누구 이야기든, 무슨 이야기든, 또 지어낸 얘기처럼 에둘러 한들 어때요. 제 나름으로 하고 싶은 말,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75)

 

입이 궁금한 게 아니라, 마음이 궁금해서 자꾸 소설책을 펼쳐드는 요즈음. 남들의 가슴속에 묻어둔,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나고자 이 소설 저 소설 자꾸 기웃거린다. 그렇게 나는 소설을 보며 이 아닌 마음을 달랜다. 인적 드문 산골마을에 살다 보니, 누군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텔레비전도 없이 살다 보니, 그런 시간이 더 많아진다. 글로라도 다른 사람의 삶을 만나고 그네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것, 소설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마음 하나 어떻게 먹느냐가 사는 것 그 자체가 아니냐, 그런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소.” (90)

 

죽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산 자가 맞설 수 없다.” (101)

 

그렇지, 그래. 내 마음은 내가 씻고 지우지. 지워 오기도 했을 거고.” (130)

 

살면서 숙제야 언제나 있는 거 아닙니까. 견해의 차이도 있을 수 있는 거고. 그냥 둘 건 둬야지 억지로 봉합해서야 되겠습니까.” (132)

 

조금 낯선 제목을 가진 소설 <테하차피의 달>.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담담한 이야기들은 잔잔하고도 시릿하게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삶의 허무를 견뎌보고자 종교에 지나치게 빠져든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죽고, 친척 보증을 잘못 서서 가정이 파탄 나고, 젊은 시절 사랑하던 여자의 죽음을 우연히 알게 되고, 팔순 넘은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는 식구들 이야기까지…….

 

한두 이야기를 빼고는 범상한 소재와 줄거리들이 이어진다. 빨갱이라는 누명 아닌 누명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을 지우려는 어느 형제들의 제사 풍경과 식민지 시절 부산에서 벌어진 조선 여자 살인사건을 다룬 글조차 평범한 삶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간다, 그네들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삶과 죽음에.

 

삶이 소설을 모방하는지 아니면 소설이 삶을 모방하는지는 여전히 이론의 여지가 많은 문제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갑상은 삶이 어떤 정형의 플롯으로는 온전히 포착될 수 없으며, 오히려 선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플롯을 위반하기 일쑤이고, 또한 우리들의 삶에는 그다지 의미 있는 기복이 있다기보다는 인간 개개인이 곱씹어가면서 스스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수수께끼 같은 문제가 반복해서 제기되는 것일 뿐이라는 전언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 그러니 그의 소설에 어떤 파격적인 결말이 있을 수가 없고, 어떤 대안이나 답이 제시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250~251)

 

삶의 매 순간에서 그 자체의 행위와 사건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삶은 반추를 통해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고, 그런 회상 행위를 통해서만 현재 존재하고 있는 자아의 현재로 편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해석되지 않는 과거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종의 수하물 같은 것으로, 현재 삶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53)

 

소설이 끝나고 작품해설을 본다. 소스라치게 깨닫는다. 내가 왜 자꾸만 소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는지, <테하차피의 달>을 읽는 동안 내 마음에 아스라하게 피어오른 그 감정의 조각들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아직이미사이에 놓여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그것이 가상임에도, 내 지나온 삶과 다가올 삶을 찬찬히 곱씹게 만들었다. 때론 수도 없이 나를 혼란에 빠뜨렸던 수수께끼 같던 내 지난 과거의 이야기들마저도 이 소설은 그건 너한테만 닥친 문제가 아니었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래서 나는, 파격적인 소재나 결말도 없고 어떤 대안이나 답도 내밀어 주지 않는 이 소설을 보면서 그렇게나 위안을 얻었나 보다.

 

비록 절대적인 고립자라는 유한성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런 인생 자체가 생판 남인 사람들에게 감각되고 이해되고 결국은 공유될 수 있는 바탕이 있음으로 해서 개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255)

 

그런 세상에 소설마저도 없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상처를 치유할 것인가라는, 자의식적인 질문이 그의 소설에는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소설은, 소소하지만 나름대로 절실함을 담고 있는 우리 일상의 곤혹스러움의 정체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256)

 

김경수 문학평론가의 작품해설 말미를 읽다가는 하나를 위로해 주는 것을 넘어 소설이 우리 삶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까닭을 느끼고야 만다. 소설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로 건넴으로써 그것과 만나는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때론 따뜻한 입김이 묻어나는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말보다 더 애틋하고 포근하게.

 

나 대신 울고

나 대신 아파하고

나 대신 힘을 내는

소설 속 사람들 덕에,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을

글로, 이야기로 만들어 준 작가 덕에

 

나는 오늘

울다가도 웃고

웃다가도 운다.

그러면서 마음속

상처가

후회가

미움이

아픔이

미련이

 

조금씩 옅어진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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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2010 부산시 원북원 후보도서
김곰치 지음 / 산지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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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십자가 그림이 있다. 뒤표지에는 예수가, 하느님이 어쩌고 하는 추천 글도 있다. 종교소설 같아서 다소 재미없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다. (종교라는 낱말이 재미와는 좀 멀게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런가?)

 

김곰치. 표지에 크게 써 있는 작가 이름이 좀 독특하다. 마침 소설이 읽고 싶은 날, 책장에 꽂힌 아직 읽지 않은 소설 가운데 두툼한 두께를 자랑하는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들기 전에 갖는 내 신념 아닌 신념. ‘재미없으면 읽다 말면 되지. 선입견 갖지 말고 몇 장 열어나 보자.’ 요 마음으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어라? 종교소설 아니네~ 술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한 남자의 연애와 삶이 알콩달콩 담긴 이 소설. 뜻밖에도 재미지게 술술 읽히더라니. 곳곳에 예수와 종교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는 하지만,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를 제대로 보기 위한 작가의 끈질긴 노력(?) 덕에 종교 이야기마저 흥미롭기만 하다. 이를테면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고나 할까? (여기서 비판적 지지는 좋은 뜻으로 한 말임.) 고등학교 때 미션스쿨 다니면서 상처받은 기억과 경험이 워낙 커서인지, 기독교에 관심이 잘 가지 않는데, 이 글을 보면서 성경 한두 줄 읽어나 볼까나 하는 생각 잠시 들었다. 이 책을 집어들 때처럼, ‘재미없음 말고!’ 정신으로. 다만, 성경책은 글씨가 너무 작아서, …….

 

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술이 깰 때의 고통도 사랑한다. 이튿날 술을 원망하는 사람은 진정한 술꾼이 아니다!” (76)

 

잠은 신비로와요. 하룻동안의 기억과 감정을 정리정돈합니다. 의식이 다 하지 못하는, 중요한 것 중요하지 않는 것을 가려내지요. 감정의 거품을 걷어내는 데는 잠이 최고예요.”

(249)

 

첫 문장을 보면서, 속 시원하게 웃었다. 내 생각이랑 아주 비슷해서. 아무래도 내가 술을 좋아해서일 테지. 주인공 경태가 숱하게 취하고 끊기고 널부러지고 하면서도 꿋꿋하게 을 애정하는 모습이 살갑게 다가온다. 물론, 먹을 때마다 필름 끊기는 태도는 좀 고쳤으면 싶지만. 그런 사람들이 술 좋아하는 사람들 이미지를 통째로 흐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어쨌든 술로 인사불성이 되고 나선, 눈 뜬 뒤에 어제 내가 뭐라고 했더라?’ 하면서 머리 쥐어뜯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런 경험 적지 않게 해 본 나로선 동지라도 만난 듯 푸근한 감정이 밀려온다. 잠에 대한 확실한 정리도 아주 마음에 든다. 기억해 두고픈 멋진 글귀!

 

나는 병과 죄도 하느님이 틀림없는 사랑의 노력으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작정 죄를 미워하면 안 되고, 웬만한 죄는 인생을 더 깊이 통찰하게 하는 값진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인간과 인간끼리 노력하여 해결해나가면 됩니다.” (216)

 

저 평범해 보이는 말이 왜 그리 내 맘에 꼭꼭 박히던지. 아무래도 지은 죄가 많은가 보다. 뭔가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한 저 글 때문에 마음이 막 따뜻해지면서 경태라는 사람이 다시 보였다. 생각보다 깊이가 있네!

 

사람의 삶이란 자기 안의 천 개의 방에 무엇인가를 채우고 또 불 밝히는 일이라고 나는 생 각했다.” (240)

 

이 짧은 문장 하나도 내 마음 구석으로 쑤욱 밀고 들어왔다. 내 마음속에도 빈 방, 어두운 방 고루고루 있겠다 싶으면서 그 방 하나하나에 불을 밝히고 싶은 충동도 일어나고. 역시 소설가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니깐.

 

우리 인생에 흔하디흔한, 기적도 아닌 너그러운 우연.” (22)

 

너그러운 우연이라는 말이 참 좋다. 노총각 소설가 경태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연경. 마음이 가고, 마음이 식고, 또다시 마음이 살짝 불타오르고, 그러다 결국 헤어지고. 삼십 대 후반 두 남녀 사이에 벌어진 조금은 어설픈 연애 이야기는, 글 첫 장에 나오는 저 글처럼, 누구에게나 다가올 법한 너그러운 우연이자 선물일 것이다. 가끔 짜증나고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기대 없이 펼쳐 본 책 덕에, 무언가에 마음을 기대고 싶게끔 헛헛했던 주말 오후가 꽉 차서 저만치 흘러갔다. 이 책도 나에게는 너그러운 우연으로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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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쓴다 - 2009 원북원부산 후보도서
정태규 외 27인 지음, 정태규.정인.이상섭 엮음 / 산지니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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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쓴다는 제목을 보고는 산문집이 아닐까, 생각했다. 제목 옆에 작게 소설집이라 써 있는 걸 보고, 그제야 소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읽었다. 요즘 소설이 계속 땡겨서 이거저거 찾아 읽는 중인지라. 부산 곳곳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라기에 지역문학을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소설책을 잡았을 땐 엎드리거나 누워서 볼 때가 많다. 텔레비전이나 만화책을 볼 때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니까 주로, 하릴없이 가는 시간을 붙잡아 주는 몫을 소설한테 맡길 때가 많다는 말씀. 이 책도 시작은 엎드린 자세였다. 그러다가 저절로 몸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건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마음이 찌르르해서는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 이별한다는 것,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 짧은 글마다 나를,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이어졌다. 단편소설집을 한 번에 죽 읽어낼 필요는 굳이 없건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내달렸다.

 

그곳엔 우체국이 없어서 이 편지를 부칠 수가 없습니다. 담에 이 세상 삶 다 산 후에 내가 직접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잘 있어요. 당신의 아내가.” (21)

 

저 보라색은, 하고 신영은 생각했다. 윤재가 좋아하는 색인데. 이런, , 하고 신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 그런데 나는 아직. 왜 이럴까, 윤재야.” (111)

 

그가 떠나던 날, 나는 마음을 추슬러 공항으로 나갔고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그의 부담을 좀 덜어 주고 싶었고 내 몫으로 주어진 감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감당해 내고 의연하게 행동하고 싶었다.” (128)

 

사별 또는 이별.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 흔하디흔한 삶이자 이야기들일 수 있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숨어 있다고 했던가. 가슴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을 법한 삶의 단면들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목소리들이 내 마음을 애잔하게 울린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꼭 겪었을 일인 듯도 하고, 나도 언젠간 맞닥뜨리게 될 시간인 것도 같고. 어쩌면 이미 겪은 일일 수도 있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가지는 의미는 부여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지 본래부터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거죠. 아무리 사소한 사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추억과 낭만이 깃들여 있다면, 소중한 사물이 되는 것이겠죠.” (172)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의 고통은 가슴속에서 살아 퍼덕이기에 더 깊다. 하지만 그 고통이 있어 살아낼 힘도 솟아난다.” (264)

 

어떤 이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아픔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공간. 그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는 건, 그것이 비록 가상으로 쓴 글일지라도, 나에게 추억이자 아픔이자 행복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걸 이 책을 보며 깨닫는다. 책 앞쪽 발간사에 나오는, ‘장소의 혼과 구체적인 삶의 진실을 찾아서라는 조금 어려운 듯한 제목이 그제야 내 것으로 다가온다. 다른 이의 삶을 통해 내 삶의 진실을 흐릿하게도, 또렷하게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것, 되새김질하도록 도와주는 것. 소설이 지닌 크나큰 힘이 아닐까. 소설을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이런 말을 다 쓰게 되는구나. 내 마음을 조용하게 보듬어 준 이 책 덕에.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오늘. 기대해도 괜찮을까?” (131)

 

이 책에는 실린 단편소설은 모두 스물여덟 편이다. 그 가운데 굳이 해피엔딩이라고 내밀 만한 글은 몇 편 되지 않는다. ‘은 현재 진행형이므로 엔딩이라는 말과는 모순이 되니 소설이라고 해서 해피엔딩이니 새드엔딩 같은 결말이 꼭 필요한 법은 아닐 터다. 소설은 현실삶의 진실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공간이므로. 내가 숨 쉬는 바로 지금 이 순간과 공간을 기쁘게 맞이할 희망을 조금이라도 안겨 준다면, 그것으로 소설은 제 몫을 다하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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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 정태규 창작집, 2015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정태규 지음 / 산지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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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우리일까요. 십만 명당 한두 명 걸린다는 그 병에 왜 하필 내가 걸렸을까요.”

착하게 살았소?”

그렇게 착하게 살진 못했지만 십만 명당 한두 명에 뽑힐 만큼 나쁘게 살지도 않았는데.”

(578)

 

<편지>를 쓴 작가 정태규가 아프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저 문장이 그리도 내 가슴을 후려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이가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 쉬며 살아가는 것만큼 글 쓰는 일이 소중할 수 있는 소설가에게 그 병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까지는 차마 건너짚지 못하더라도.

 

우리만큼 순수하게 죽음을 인식하고 마주하고 있는 이가 있겠어요? 그러니 무서워 말아요. 울지도 말고, 화내지도 말고, 스스로 동정하지도 말고그래요. 앞으로 남은 우리 삶이 조금 달라질 뿐이죠. 삶의 형태가 조금 불편해지겠죠. 그것뿐이에요.” (73)

 

<편지> 속 세 번째 소설 비원(秘苑)’에서는 루게릭병에 걸린 남자와 여자가 병원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가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뜻밖에 다가온 병을 마주한 두 남녀의 말과 행동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여자의 목소리를 빌려 울지도, 화내지도, 동정하지도 말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작가의 마음이 느껴져서 읽는 동안 마음이 참 아팠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슬프고 애틋하기는 흔한 일이건만, 작가의 몸과 마음 상태가 자꾸 느껴져서 그럴까. 어느 소설책보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작가의 혼이 가득 실려 있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작고 가벼운 이 책이 무겁게 느껴진다.

 

난 영원에 이르고 싶다. 정말 간절하게. 그것 말곤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게 없다. 미안하구나. 이해해다오. 그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를 불확실한 영원을 구하기 위해, 그 차가운 영원을 위해, 이 확실하고 뜨거운 사랑을 버릴 건가요. 이 어리석은 사람. 그녀는 또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148)

 

용맹정진은 승()의 일이라지만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속()의 일인 것을.”(152)

 

보살님, 하심이란 말 아시는가. 아래 하, 마음 심. 이제 그만 마음 내려놓으시게.” (154)

 

스님이 되고자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겠다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잊지 못하는 여자. 이런 줄거리 어디서 많이 본 듯하건만. 남자친구가 있는 절에 찾아가 몰래 그 사람의 수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한 여자의 모습이 왜 이렇게 마음을 시리게 하던지. 그 여자의 모습을 보며 지나가던 스님이 건넨 마지막 말처럼, 생과 사에 갈림길에서 어느덧 마음을 내려놓은, 혹은 아직 내려놓지 못해 고통스러운 작가의 혼이 글자에 그대로 실려서 그런 것일까.

 

정태규 창작집 <편지> 1부에는 이렇듯 내 마음을 아련하게도 시릿하게도 울려 준 글이 많았던 반면, 2부는 짧고 유쾌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특히 우리 집 그 인간을 볼 때는 어찌나 재미나던지 앞에서 훌쩍이던 마음이 어느새 활짝 웃고 있었다. 날마다 술이 고주망태가 돼서 돌아오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금주를 선언했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었냐면. 우연히 하루 같이 놀아준 딸아이가 글쎄, 다음 날 출근하는 아빠한테 아빠! 또 놀러 와!” 이랬다는 거 아니겠나. 생글거리며 아빠한테 손을 흔드는 아이를 버쩍 얼어붙은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았을 그 아빠의 표정이 막 떠오르면서 간만에 시원하게 웃었다. 어쩜 이렇게 재미난 순간을 딱 붙잡아서 글로 적어냈을까. 역시 소설가는 소설가다.

 

지금까지 삶을 지나치게 엄숙하게만 바라보아온 나의 엄숙주의에 대한 반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인생은 어찌 보면 별것 아니다. 우습기까지 하다. 어이없고 허망하기도 하다. 삶은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무얼 바라고 그렇게 바둥거리며 살았나 싶다. 삶은 콩트처럼 가벼울 뿐이다. () 루게릭병이 나에게 계속적인 집필을 허락한다면 새로운 단계의 글쓰기에 도전할 것이다. 두려운 것은 내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투항하는 것이다.” (208)

 

작가는 책 뒤쪽에 콩트라 할 만한 글 몇 편을 이 책에 덧붙인 배경을 풀어 놓았다. 아픔 속에서 써내려 간 글이 오히려 나를 히죽히죽 웃게 해 준 글이었다니. 그래서 더 놀랍다. 웃음 속에서도 충분히 삶의 의미를 가득 느끼게 해 준 글이었기에 더더욱.

 

작가의 말처럼 <편지>에 실린 글들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고 값지다. 콩트처럼 가볍든 지나치게 엄숙하든 모두 다 우리네 삶안에서 벌어지는 일 아니겠는가. 통속한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책 덕에 오히려 나는, 별것 아닌 내 인생을 좀 더 제대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때로 어이없고 허망함 속에 허우적대더라도, 금세 흘러가버리는 이 하루하루를 고맙게 받아들이자고 다짐마저 해 보았다.

 

헌책방 한 귀퉁이에서 만나는 낡은 잡지 표지는 아늑하고 푸근한 느낌이다. 너덜너덜한 책장 사이로 흘러나오는 눅눅한 내음도 정겹기만 하다. 그런 게 통속이라면, 난 통속한 삶을 더 사랑하며 살아가련다. 정태규 작가가 스스로 투항하지 않고 새로운 글쓰기를 계속 해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까지 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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