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2010 부산시 원북원 후보도서
김곰치 지음 / 산지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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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십자가 그림이 있다. 뒤표지에는 예수가, 하느님이 어쩌고 하는 추천 글도 있다. 종교소설 같아서 다소 재미없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다. (종교라는 낱말이 재미와는 좀 멀게 느껴지는 건 나만 그런가?)

 

김곰치. 표지에 크게 써 있는 작가 이름이 좀 독특하다. 마침 소설이 읽고 싶은 날, 책장에 꽂힌 아직 읽지 않은 소설 가운데 두툼한 두께를 자랑하는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들기 전에 갖는 내 신념 아닌 신념. ‘재미없으면 읽다 말면 되지. 선입견 갖지 말고 몇 장 열어나 보자.’ 요 마음으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어라? 종교소설 아니네~ 술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한 남자의 연애와 삶이 알콩달콩 담긴 이 소설. 뜻밖에도 재미지게 술술 읽히더라니. 곳곳에 예수와 종교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는 하지만,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를 제대로 보기 위한 작가의 끈질긴 노력(?) 덕에 종교 이야기마저 흥미롭기만 하다. 이를테면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고나 할까? (여기서 비판적 지지는 좋은 뜻으로 한 말임.) 고등학교 때 미션스쿨 다니면서 상처받은 기억과 경험이 워낙 커서인지, 기독교에 관심이 잘 가지 않는데, 이 글을 보면서 성경 한두 줄 읽어나 볼까나 하는 생각 잠시 들었다. 이 책을 집어들 때처럼, ‘재미없음 말고!’ 정신으로. 다만, 성경책은 글씨가 너무 작아서, …….

 

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술이 깰 때의 고통도 사랑한다. 이튿날 술을 원망하는 사람은 진정한 술꾼이 아니다!” (76)

 

잠은 신비로와요. 하룻동안의 기억과 감정을 정리정돈합니다. 의식이 다 하지 못하는, 중요한 것 중요하지 않는 것을 가려내지요. 감정의 거품을 걷어내는 데는 잠이 최고예요.”

(249)

 

첫 문장을 보면서, 속 시원하게 웃었다. 내 생각이랑 아주 비슷해서. 아무래도 내가 술을 좋아해서일 테지. 주인공 경태가 숱하게 취하고 끊기고 널부러지고 하면서도 꿋꿋하게 을 애정하는 모습이 살갑게 다가온다. 물론, 먹을 때마다 필름 끊기는 태도는 좀 고쳤으면 싶지만. 그런 사람들이 술 좋아하는 사람들 이미지를 통째로 흐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어쨌든 술로 인사불성이 되고 나선, 눈 뜬 뒤에 어제 내가 뭐라고 했더라?’ 하면서 머리 쥐어뜯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런 경험 적지 않게 해 본 나로선 동지라도 만난 듯 푸근한 감정이 밀려온다. 잠에 대한 확실한 정리도 아주 마음에 든다. 기억해 두고픈 멋진 글귀!

 

나는 병과 죄도 하느님이 틀림없는 사랑의 노력으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작정 죄를 미워하면 안 되고, 웬만한 죄는 인생을 더 깊이 통찰하게 하는 값진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인간과 인간끼리 노력하여 해결해나가면 됩니다.” (216)

 

저 평범해 보이는 말이 왜 그리 내 맘에 꼭꼭 박히던지. 아무래도 지은 죄가 많은가 보다. 뭔가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한 저 글 때문에 마음이 막 따뜻해지면서 경태라는 사람이 다시 보였다. 생각보다 깊이가 있네!

 

사람의 삶이란 자기 안의 천 개의 방에 무엇인가를 채우고 또 불 밝히는 일이라고 나는 생 각했다.” (240)

 

이 짧은 문장 하나도 내 마음 구석으로 쑤욱 밀고 들어왔다. 내 마음속에도 빈 방, 어두운 방 고루고루 있겠다 싶으면서 그 방 하나하나에 불을 밝히고 싶은 충동도 일어나고. 역시 소설가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니깐.

 

우리 인생에 흔하디흔한, 기적도 아닌 너그러운 우연.” (22)

 

너그러운 우연이라는 말이 참 좋다. 노총각 소설가 경태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연경. 마음이 가고, 마음이 식고, 또다시 마음이 살짝 불타오르고, 그러다 결국 헤어지고. 삼십 대 후반 두 남녀 사이에 벌어진 조금은 어설픈 연애 이야기는, 글 첫 장에 나오는 저 글처럼, 누구에게나 다가올 법한 너그러운 우연이자 선물일 것이다. 가끔 짜증나고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기대 없이 펼쳐 본 책 덕에, 무언가에 마음을 기대고 싶게끔 헛헛했던 주말 오후가 꽉 차서 저만치 흘러갔다. 이 책도 나에게는 너그러운 우연으로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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