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쓴다 - 2009 원북원부산 후보도서
정태규 외 27인 지음, 정태규.정인.이상섭 엮음 / 산지니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부산을 쓴다는 제목을 보고는 산문집이 아닐까, 생각했다. 제목 옆에 작게 소설집이라 써 있는 걸 보고, 그제야 소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읽었다. 요즘 소설이 계속 땡겨서 이거저거 찾아 읽는 중인지라. 부산 곳곳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라기에 지역문학을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소설책을 잡았을 땐 엎드리거나 누워서 볼 때가 많다. 텔레비전이나 만화책을 볼 때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니까 주로, 하릴없이 가는 시간을 붙잡아 주는 몫을 소설한테 맡길 때가 많다는 말씀. 이 책도 시작은 엎드린 자세였다. 그러다가 저절로 몸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건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마음이 찌르르해서는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 이별한다는 것,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 짧은 글마다 나를,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이어졌다. 단편소설집을 한 번에 죽 읽어낼 필요는 굳이 없건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내달렸다.

 

그곳엔 우체국이 없어서 이 편지를 부칠 수가 없습니다. 담에 이 세상 삶 다 산 후에 내가 직접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잘 있어요. 당신의 아내가.” (21)

 

저 보라색은, 하고 신영은 생각했다. 윤재가 좋아하는 색인데. 이런, , 하고 신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 그런데 나는 아직. 왜 이럴까, 윤재야.” (111)

 

그가 떠나던 날, 나는 마음을 추슬러 공항으로 나갔고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그의 부담을 좀 덜어 주고 싶었고 내 몫으로 주어진 감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감당해 내고 의연하게 행동하고 싶었다.” (128)

 

사별 또는 이별.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 흔하디흔한 삶이자 이야기들일 수 있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숨어 있다고 했던가. 가슴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을 법한 삶의 단면들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목소리들이 내 마음을 애잔하게 울린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꼭 겪었을 일인 듯도 하고, 나도 언젠간 맞닥뜨리게 될 시간인 것도 같고. 어쩌면 이미 겪은 일일 수도 있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가지는 의미는 부여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지 본래부터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거죠. 아무리 사소한 사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추억과 낭만이 깃들여 있다면, 소중한 사물이 되는 것이겠죠.” (172)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의 고통은 가슴속에서 살아 퍼덕이기에 더 깊다. 하지만 그 고통이 있어 살아낼 힘도 솟아난다.” (264)

 

어떤 이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아픔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공간. 그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는 건, 그것이 비록 가상으로 쓴 글일지라도, 나에게 추억이자 아픔이자 행복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걸 이 책을 보며 깨닫는다. 책 앞쪽 발간사에 나오는, ‘장소의 혼과 구체적인 삶의 진실을 찾아서라는 조금 어려운 듯한 제목이 그제야 내 것으로 다가온다. 다른 이의 삶을 통해 내 삶의 진실을 흐릿하게도, 또렷하게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것, 되새김질하도록 도와주는 것. 소설이 지닌 크나큰 힘이 아닐까. 소설을 잘 모르는 내가 감히 이런 말을 다 쓰게 되는구나. 내 마음을 조용하게 보듬어 준 이 책 덕에.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오늘. 기대해도 괜찮을까?” (131)

 

이 책에는 실린 단편소설은 모두 스물여덟 편이다. 그 가운데 굳이 해피엔딩이라고 내밀 만한 글은 몇 편 되지 않는다. ‘은 현재 진행형이므로 엔딩이라는 말과는 모순이 되니 소설이라고 해서 해피엔딩이니 새드엔딩 같은 결말이 꼭 필요한 법은 아닐 터다. 소설은 현실삶의 진실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공간이므로. 내가 숨 쉬는 바로 지금 이 순간과 공간을 기쁘게 맞이할 희망을 조금이라도 안겨 준다면, 그것으로 소설은 제 몫을 다하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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