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알스버그는 그림책 작가중에서 지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일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어른과 같은 지적 즐거움을 느끼기엔 아이들의 나이가 좀 더 필요로 하고, 그림의 기괴함에 거부 반응을 보일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어른의 입장에서 알스버그의 그림책은 어른들이 충분히 지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데 고개를 끄덕일 것이며 그의 그림책의 묘미는 이야기의 결론 혹은 결론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게 만드는 반전에 있다는 데 크게 부정할 것 같지는 않다.

 

정교하면서 약간은 기고함이 감도는 이 흑백의 그림책 또한 작가 특유의 재치 있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앨런은 헤스터 아줌마로부터 자신의 개 프린츠를 하루만 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개를 하루 돌봐주기로 한다. 앨런이 프리츠를 돌보는 도중에, 낮잠을 자고 잠자는 앨런을 깨운 프리츠는 산책을 가게 된다. 앨런과 프리츠는 산책 도중에, 은퇴한 마술사 압둘가사지의 집앞에서 멈추었고, 마술사 압둘가사지의 집에는 개는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경고장을 읽게 된다. 앨런은 그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돌아가려는 찰나에, 개 프리츠는 마술사 압둘 가사지의 집으로 맹렬히 뛰어 들어가고 앨런은 그런 프리츠를 잡기 위해 같이 뛰어든다.

 

 

 

앨런은 프리츠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만 놓치고 마법사 압둘가사지와 만나게 된다. 그는 압둘가사지에게 개가 들어온 것에 대해 사과를 하지만, 압둘가사지는 이 집에 들어온 이상 개가 오리로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오리가 다시 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비법도 없고 단지 시간만이 해결해준다는 대답과 함께.

 

앨런은 오리가 변한 프리츠를 데리고 압둘가사지의 집을 나오는데, 오리가 된 프리츠가 갑자기 그의 품에서 날아올라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오리로 변한 프리츠를 찾을 수 없어, 미안한 맘으로 헤스터 아줌마의 집으로 돌아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한다. 미안해 하는 앨런에게 이 세상에는 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위로하며 헤스터 아줌마는 앨런을 집으로 돌려보내다. 그리고 앨런이 집으로 돌아가자 마자 헤스터 아줌마는 앞마당에서 뛰노는 개 프리츠를 발견한다. 여기까지의 줄거리만으로 반전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그림책 맨 마지막 장면에서  헤스터 아줌마의 말 한마디와 프리츠 물고 온 소품 하나를 보고 그 동안의 이야기가 플래쉬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 게 된다. 혹시 앨런의 꿈이 아니였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그런데 나는 크리스 알스버그 그림책의 반전의 묘미를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그림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그림책 통털어서 가장 멋진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앨런이 은퇴한 마술사 압둘가사지의 집으로 막 들어가려는 저 장면을 보면서, 힘든 혹은 고달픈 일상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얼핏 저 장면은 알둘 가사지의 집으로 앨런이 들어가는 장면일 뿐이다. 더 이상 그 어떤 부연설명이 필요한 장면은 아니겠지만, 나는 저 장면을 앨런이 소년에서 막 사춘기의 성장기로 접어드는 부분을 묘사해 놓은 은유로 해석하곤 한다. 혹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을 때의 통과의례의 모습을 은유한 것이라고.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을 거치게 되고 그 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닐 것이다. 어른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길 혹은 통로는 저 그림에서처럼 길고 어두울 수 있으며, 옆길도 없는 저 길을 어떻해서든지 빠져 나와야 한다. 단지 분명한 것은 길의 끝에 작지만 환한 빛이 있다는 것이다. 그걸 희망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또 다른 통로로 들어갈 수 있는 시작일 수도 있겠지만, 깊은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오면 빛이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의 발걸음은 좀 더 희망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심리적 요인이든 사회적 요인이든 간에 굴곡이 없었다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우리 주변에는 부딪히고 부대끼면서 고통 받고 상처 받으며 고민하면서 더 힘차게 딛고 일어서거나 주저 앉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거쳐가야 하는 저 인생의 어두운 터널.

 

선거 결과를 보면서 한순간 내가 깊은 터널 속에 갇혀 버린 것 같았다. 한웅큼의 욕이 입밖으로 터져 나오고 한동안 분노가 차 올랐는데, 갑자기 알스버그의 저 장면이 떠오르면서, 아, 그렇지, 세상이 언제 뭐 내가 원하는 식으로 빙글빙글 돌아 갈 수 있겠냐. 세상이 내 기분을 맞춰준 적이 몇 번이나 있다고 이런 일로 절망할 수 있겠냐는 오기가 불쑥  솟아 올랐다.

 

그리고는 내가 내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걸어갈 때 할 수 있는 일은 주저 앉지 않는 것 그리고 터널 너머에는 꼭 빛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버텨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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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4-13 03:52   좋아요 0 | URL
내가 좋은 꿈을 꾸면서
밝은 사랑으로 생각한다면
온누리는 내 아름다운 뜻대로
천천히 거듭나리라 느껴요.

이렇게
좋은 꿈, 밝은 사랑, 아름다운 뜻을
살가이 어우러지면서 '길 하나 바라기'를
하는 사람이 아직 많지 않을 뿐이지만요.

기억의집 2012-04-13 17:51   좋아요 0 | URL
네, 그래야겠지요.
세상사 왜 이리 힘든지 뜻대로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뜻대로 되서 좋았을 것 같은데^^

마립간 2012-04-13 08:07   좋아요 0 | URL
제 서재에 댓글을 남겨주셨는데, 인사차 글을 남깁니다.

기억의집 2012-04-13 17:53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생각이 좀 별나서 다른 분께 덧글다는 게 조심스러운데,
거부감 없으셨다니 저로선 다행입니다.
 
누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빵가게님,

제가 님이 올리신 글에, 반발해서 즉흥적인 감정으로 악플 달 때, 님이 제 악플을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지우거나 혹은 후폭풍이 일거라고는 어느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

 

만약 님께서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보자마자 지웠더라면, 오히려 저는 그런 악플을 단 죄책감과 수치심에 끙끙 앓았을 거에요. 그나마 님이 저를 상대해 주었기에, 저는 감정적인 찌거기가 남지 않았습니다. 대응 글 쓸 때도 감정적으로 화가 나서 쓴 게 아니고요.

 

그리고 사실 저는 님의 글이 싸가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건 정말 진심입니다. 제 나이 이제 마흔 중반을 바라보는데, 제가 산 세월이 꽃이었다면, 개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거에요. 하지만 지금까지 산 세월만큼 많은 일을 겼다보니, 저는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생각을 처리하는 방법과 과 감정조절이 대담한 면이 좀 있습니다.

 

일단 원인 제공은 저였고, 격한 감정적인 대응의 글이 있을 거라고 예상해서 그런지, 그냥 님의 글이 젊음(님의 글을 읽으보면 30대로 느껴지던데, 아닌가요?)으로 읽혀졌고, 그런 식으로 쓰는 것은 나의 악플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 어떤 정치적인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면 반대편의 지향점을 가진 사람과는 분명

싸울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구요. 그렇다고 뭐 막무가내로 싸운다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살다 보니, 삶에 있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어떤 관계든, 지향점이든, 목표든 간에  균형을 잡고 산다는 것이 가장 비겁한 일이구나 하는 점입니다.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절대 얻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저는 이런 싸움이 결코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전 생각이 정말 별나지 싶습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채 어떤 문제에 대해 무게추가 중앙에 있었다면, 결코 우리의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겠지요.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싸웠기에 지금의 녹색당이 존재하는 것이고, 여성의 참정권을 얻기 위해 많은 여성들이 싸웠기에 참정권을 얻어 남성들과 대등하고 투표할 수 있는 것이고, 인종차별에 대항하여 흑인들이 싸웠기에 인종차별법을 폐지한 것이고, 게이들 또한 치열하게 싸웠기에 그들의 권리를 획득한 게 아닐까요. 역사가 균형의 중앙에만 섰다고 생각하면 멋진 20세기는 없었겠지요.

 

님이 민주당과 김용민을 한심하게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으셨으니깐,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시비거는 저 같은 사람이 있어, 서로 니가 잘못 생각했네, 잘했네 이러면서 서로의 입장을 내세워 싸워야 서로 들고 있는 카드를 알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전들 민주당이 이뻐 보이겠습니까? 서로의 선을 파수병처럼 지키며 침묵과 외면만 했더라면, 상대방의 패를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저는 님의 글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잘 못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화이트로 수정도 했구요. 단지 나이가 들면서, 이상하게 주변 상황에 맞춰 카멜레온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고 모난 돌로도 사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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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2-04-10 18:54   좋아요 0 | URL
모난 돌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맘에 모난 돌이 콕 박히네요. 전, 가끔 자조하듯이, 닳고 닳았다.고 얘기하는데요, -> 둥글둥글하게 살아야지 -> 좋은게 좋은거지(-> 젤 싫어하는 말이에요) .. 뭐, 이런 비약 아닌 비약. 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라, 누가 '모난 돌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 말해주는 것이 신선하게 와닿아요. 의견의 다름과 표현의 다름은 흘러가는 거고, 뭐랄까, 이런건 남는것 같아요.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저도 너무 둥글어지지는 말아야지!
... 라고 말하면, 욕 먹겠지요? ㅎㅎ

기억의집 2012-04-10 19:28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의 매력은... 아시죠!
둥근하이드님을 떠올리니~ 어색해요. 하이드님은 지금 이대로가 젤 좋습니다.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둥글어지시긴 하셨어요.
예전에 좋은 게 좋은거지 뭐, 이런 식으로 둥글게 둥글게~ 살았는데, 살다보니 그게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구요.
명박오년차에 저는 정치색도 그리고 정치적으로 많이 변했는데, 이런 둥근 성격으론 계속 제자리더라구요. 그래서 어느 날 아, 이런 태도로 있지 말자. 내가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입장을 뚜렷히 밝히고 행동으로도 실천해보자,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친정엄마와 정치적 입장차가 커서 쌈밖에 안 나니깐 갑자기 변할 수 없지만, 저도 서서히 모나게 변할려구요. ㅋ~

건조기후 2012-04-10 19:34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댓글 보니까 생각나네요. 오래전인데, 12살 연하 대학생이랑 결혼했다고 화제됐던 KBS 아나운서 이름이 김네모 였어요. 이름 특이하다 했는데 부모님께서 둥글둥글 살지 말고 주관대로 각지게 살라고 지어준 이름이라고 하더라구요 ㅎ 둥글둥글한 것도 좋지만 사람이 좀 각잡을 일에는 똑부러지게 고집 세우는 게 멋있어요.

기억의집 2012-04-10 19:39   좋아요 0 | URL
와우~ 너무 멋진 부모님이세요.
진작에 알았더라면 울 아들 이름도 네모나 세모로 생각해 보는 건데.
제가 요즘 울 아들한테 신신당부하는 게, 너가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똑바로 말하라고 그래야 상대방이 너가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상대방이 기분 상하더라도 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해요. 저의 아들이 엄청 내성적이거든요. 말주변도 없고, 우물쭈물하고. 악랄한 애들 만나면 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파란놀 2012-04-10 20:11   좋아요 0 | URL
좋은 마음을 품으면
누구나 좋은 삶을 누린다고 느껴요.

봄비 다시금 촉촉히 내리는
좋은 하루가 지나갑니다.

기억의집 2012-04-12 14:29   좋아요 0 | URL
아침에 일어나 선거결과부터 봤는데, 휴~
좋은 맘이 안 일어요.
정말 실망스럽네요,
실망스러워요.

2012-04-10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2 0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군자란 2012-04-12 09:42   좋아요 0 | URL
삶에 있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어떤 관계든, 지향점이든, 목표든 간에 균형을 잡고 산다는 것이 가장 비겁한 일이구나 라는 말에 동감합니다.하지만 세상사는것이 그리 쉽지 않더군요. 어쩌면 빵가재님의 모습도 제 일부인것 같기도 하고, 용감하게 모난돌처럼 부딪치는 님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구요. 어쨋든 오늘 아침 선거결과가 내 마음을 무척이나 쓸쓸하게 합니다.

기억의집 2012-04-12 10:01   좋아요 0 | URL
미투요~
아침에 일어나 컴 키고 기사 보니 실망스럽고 맘이 무겁네요.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입맛도 안 나 밥도 먹기 싫네요. 저는 그래도 당근 150석은 거뜬히 해 치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접전이니.. 울 나라에 이렇게 권력의 비리도 눈 감아 주고, 사리사욕으로 눈이 멀어도 보수라는 이름으로 눈감아 주는 것에 놀랐어요. 어디 보니깐 30대 엄마들이 새누리당 지지한다는 말에 놀라기도 하고. 휴,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들만이 들떠서 잔치 벌였나봐요. 보수사이트 하나 뚫어서 거기서 회유작전을 펴는지 할까봐요.

2012-04-13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3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2-04-16 20:47   좋아요 0 | URL
도대체 뭔일이 있었던겁니까????
역시..음~~
님은 용감하시군요.
믿음직스러워요.
큰언니세요.^^

기억의집 2012-04-17 13:56   좋아요 0 | URL
ㅋㅋ 용감하긴요. 나꼼수편이라도 들면 무슨 나꼼수 신도들로 매도 당하는 게 싫어서 그랬어요, 그리고 사실 저는 무식해도 좀 뭉쳐보자는 의도였구요. 휴, 다 지나간 일이네요^^
 
흑백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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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뿐만 아니라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않아, 미야베 미유키의 이전 괴담소설을 읽으면서도 무서움을 타지 않았는데, 이번 미야베 미유키의 이 소설은 제법 무서움을 탔다. 지금이야 시간이 지나 무서움이 흐릿해졌긴 하지만, 한동안 새벽에 화장실에 가는게 무서워 이불 속에서 갈까말까 망설이다 볼일 보러가거나 잠자는 남편 옆에 착 달라붙어 잤을 정도였다.

 

1,2,3 에피소드는 그런대로 괜찮다. 무섭다기 보다는 상당히 표현이 은유적(얽히고 얽힌 인간관계의 복합적인 마음같은 것)이어서, 그렇지 그럴 수 밖에 없겠지 나같아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었을거야, 이러면서 캐릭터에 수긍하면서 읽었는데, 네번째 이야기인 <마경>은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이미지화 되면서 소름이 짜악 끼쳤다. 단순히 생각하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는데, 내 무의식 속에 거울과 관련하여 안 좋았던 무엇인가가 있었는지, 거울 속에 어떤 대상이 숨어 있다고 상상하니, 우리집 목욕탕 거울속에서도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무서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동안 소설을 읽고 내가 만들어 낸 알 수 없는 정체의 이미지에 무서움을 느끼다보니, 퍼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왜 무서움을 느끼는 것일까? 무서움을 느낀다는 것은 죽기 싫다는 강력한 감정적 반응의 즉각적인 표현이 아닐까, 만약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공포감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공포를 느껴야할 만한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포감을 갖는다면, 무엇때문에 우리는 공포감을, 무서움을 느끼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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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친정엄마가 시골(시골이라고 해봤자 경기도 근처지만 어릴 때부터 붙어버린 이 말이 영 떼어지지 않아)땅에 뭐라도 심겠다며 같이 내려가 땅 좀 일구자고 해서, 아침 일찍 경기도 근교로 차를 몰고 내려 갔다. 

 

친정엄마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고무장화로 갈아 신고 호미로 땅을 일구는데, 정말 죽어 나는 줄 알았다. 한동안 추웠던 날씨는 우라질 왜 이리 더운지, 추울 줄 알고 입고 간 패딩은 로봇옷처럼 답답하고 땡볕에 땀은 줄줄 흐르고, 자갈 많은 땅이라 기계가 일굴 수가 없어 호미로 땅을 파고 흙을 가운데로 모으는데,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쭈구린 채 땅을 일구다가, 두시간도 안 돼  더 할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나가 떨어졌다. 우리 옆의 땅에서 작업하시는 할아버지는 기계로 땅을 일구시는데, 그것도 쉬워보이지는 않는 것은 매한가지.

 

내가 나가 떨어지니깐 엄마도 할 맘이 더 이상 안 생기는지 이 정도면 됐지 뭐, 다음에 와서 씨나 뿌리자면서 자리를 떨고 일어나셨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냉이라도 캐자고 하시는데, 솔직히 내 눈엔 냉인지 민들레인지 좀처럼 구분이 가지 않아, 주머니속에 넣어 두었던 쿠키 먹으면서 건성건성 따라다녔다. 엄마는 열심히 냉이 캐고 나는 빈둥거리며 쿠기와 싸 가져온 커피 홀짝 거리는데, 날씨는 화창해서 더할 나위 없이 좋긴 좋았다.

 

허나~ 나보고 농사 지으라고 하면 그 화창한 날씨와 공기 좋은 땅에서, 바람만으로도 배부를 것 같은 곳에서 나는 도망갈 것이다. 허허.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엄마가 캔 냉이. 가져가서 먹으라고 해서 고추장에 무쳐 봤다. 된장으로 무칠까하다가 새콤달콤하게 해서 먹는 게 낫겠다 싶어 고추장, 조청,설탕,식초, 들기름을 넣고 조물조물(울딸은 내가 나물을 무칠 때 조물조물이라는 말을 쓴다고 놀리곤 한다)넣고 무쳐봤다. 빨가니 봄날의 식욕을 돋구는, 村스러운 입맛을 가진 나.

 

 

 

 

 

역시 나는 내 손으로 흙을 일구고 씨를 뿌려 열매 맺어 수확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종자라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고 왔다.  평생 시골에서 농사로 세자식 키워내고 장에 나가 땅에서 그때그때 거둬들인 농산물을 파시는, 90도로 굽어진 고모의 허리를 보면서, 삶의 고된 흔적을 보는 것같아 언제나 안쓰럽다.

 

나는 고모와 같이 흙과 함께 하는 노동으로 우직하게 살아가지 못할 것 같다.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장담하지도 못할 것이니 말이다. 그게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간에 말이다.

 

아니, 농사의 댓가가 무서워 자신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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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9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0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애들 방학이 끝나면 좀 더 편할 줄 알았더니, 더 바쁘다. 애들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엄마네 집에 들러 잠깐이나마 말벗 좀 해 주고 집에 와 아이들 간식이나 밥 차려주고 공부 좀 봐주면, 벌써 하루 해가 다 간다. 내 집에서 엉덩이 바닥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다보니, 삼월 들어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 그나마 요 며칠 감기가 걸려 방바닥이 날 불러, 눌러 붙어 있기는 한데, 그것도 잠시 애들의 요구 사항이 많아 드러누워 있는 게 쉽지가 않다.

 

어제는 몸이 너무 무겁고 힘들어서 전기 장판에 드러누워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흑백>을 읽다가 어느 새 잠이 들었다. 그리곤 열두시 무렵에 다시 깨서 물 한잔 먹고 안방에 들어가 편히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 청소 끝나고 어제 마저 읽던 <흑백>을 읽으려던 찰나에 책에서 발견한 접힌 부분.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접어놓은~

 

난 책을 접는 사람이 아니다. 책을 깨끗이 읽고 싶어서 그렇기 보다는 읽고 팔아 치우는데 목적이 있어, 읽던 페이지를 접는 일이 좀처럼 없다.

 

그.러.나 미야에 미유키는 내가 수집하는 작가라 책장을 접을 수 있긴 하지만, 한 번 벤 습관은 도통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수집하는 두 명의 작가 킹이나 미야베 미유키의 책들은 대부분 깨끗하다. 그러기에 어제 내가 스르륵 눈이 감길 때 아무리 읽기 찾기 쉽게 한다고 책을 접는 사람은 절대 아닐터.

 

책 읽다가 졸려 읽은 부분 그대로 책을 마루 바닥에 엎어둔 것을 접어서 다음 날 내가 찾아 읽기 편하도록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미스터리의 해답을 방금 학교가 파한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풀었다. 아이들하고 놀고 싶다는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네가 어제 책 접었냐고 ? 그랬더니 자기가 어제 엄마가 자길래, 접어 두었단다.

 

이러니 내가 우리 딸을 이뻐할 수 밖에.. 어떨 땐 내가 너무 큰애와 확연하게 차이를 두나 싶어 두 아이들 다 무뚝뚝하게 대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쁜 행동을 하는 딸애한테 솔직히 맘은 더 간다. 아직도 그림책을 열심히 읽은 우리딸. 설빔을 보니 연초에 찍은 사진 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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