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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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식인(知識人)'이란 '지식'을 통해 시대의 담론을 제기하고 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며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들을 말할 것이다. 한완상 교수는 <민중과 지식인>에서 지식인을 '민중과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고 진실을 증언하며 의식화되지 못한 즉자적 민중을 의식화된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대자적 민중'이라고 정의했고, 차병직 교수는 '사색과 탐구의 결과를 인간의 삶의을 향상시키는데 적용할 수 있는 형태로 체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군사독재자와 기득권자에게 날카롭게 비판한 이들을 지식인이라 불렀다. 지난 70~80년대에 '지식인'이란 단어에는 소명의식과 도덕성, 날카로운 지성, 민중에 대한 따뜻한 감성, 대나무 같은 절개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식인에 대한 인식과 개념이 불분명하다.(김대중 정부 시절 '신지식인' 심형래라는 정책처럼 지식인의 개념에 혼란을 주고 성장과 돈벌이가 최고임을 지식인 사회에 강요한 부분도 크게 문제를 야기했다. 나 역시 2000년대 초반부터 '먹여살리지 못하는 지식은 무의미하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강변했었다..ㅠ)

지난 2008년 경향신문에서 실시한 "1987년 민주화 이후 20년간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이 누구인가?"라는 각계각층 지식인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이는 백낙청 교수였고 그 다음은 리영희, 최장집, 강준만, 강만길, 김우창, 신영복, 박현채, 박원순 순이었다. 이들은 활동하던 당시에도,지금에도 모두 지식인으로 인정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유일하게 1990년대 이후 활동을 시작한 이는 강준만 교수다.(강교수는 2000년대 말부터 활동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서울대 총장 출신 정운찬씨는 이명박 정부에서 '경제계의 동반성장'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정말 이 정권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정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한 때 야권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그가 왜 '단군 이래 최악의 정권'이라는 이 정권에 복무하면서 세간의 비웃음을 사고 있을까?
조국 교수도 진중권 교수도 지식인으로 대접받고 있고 스스로를 '진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SNS 상에서 조국 교수와 진중권 교수에 대한 평가는 무척 다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이나 관료 집단 못지않게 문제 많은 집단의 하나는 대학을 비롯한 지식사회다. 그런데 그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일을 누군가 해야 했다. 그 첫 번째 장을 [경향신문]이 기획기사를 통해 열었고, 그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책은 그 양과 질에서 우리 언론 사상 최초로 시도한 지식인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다. 현장의 기자들이 악전고투 끝에 만든 지식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이자 변론문이다. 2007년 4월부터 9월까지 4개월이 넘는 연재 기간 동안 지식사회를 긴장시킨 지식인 건강진단서다.

한국처럼 학문 내지 지식에 대한 보상체계가 각별한 사회는 흔치 않다. 정치권은 늘 학자와 전문가를 우대했다. 정부마다 이들을 동원해 각종 위원회와 자문기구를 만들었다. 지식사회, 지식경제는 기본이고 지식기반이니 신지식인이니 하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언론 역시 스스로의 판단을 이들 지식인의 권위를 빌어 기사화하곤 했다. 이 책의 발간사에서 송영승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지적하듯, “한국 언론의 대학에 대한 일종의 지적 콤플렉스는 유독 심하다.”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권위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쉽게 도전받지 않는 특권을 향유해 왔다. 사회적 견제가 약하다고 해서 지식인 집단 내부에서 자기 조정 내지 자정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논문 중복 게재, 정치적 소신 뒤집기는 예사가 되었다. 학자적 양심이라는 용어가 무색하게, 심각한 표절행위를 한 교수가 대학 총장이나 장관이 될 수 있는 것이 한국 사회다. 학문 활동에 전념하는 지식인이 무능하게 평가되고, 누가 더 기금을 많이 끌어올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게 평가된다. 오늘날의 대학은 최고의 성장산업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학문의 전당도 아니고, 비판적 지성이 살아 숨쉬는 곳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지식인이 누리는 정치적,사회적 영향력과 권력의 크기는 학자적 양심과 반비례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식인 집단과 대학의 현실이 이렇게 되도록 어떻게 방치될 수 있었을까? 이 책이 마주하는 문제는 근본적이고 도전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을 그저 학문의 영역에서 기능하는 엘리트로만 생각하면 잘못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한국의 지식인은 “특별한 계급”이다. 학벌 체계의 수혜자로서 다른 부분의 엘리트들과 쉽게 친분을 맺을 수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무시 못할 연고 자본을 보유한 특권층이자 기득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최고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지적했듯이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문제의 핵심적인 고리 중 하나가 '엘리트의 권력 독점'이고 그 중에 지식인들이 포진해 있다. 그 앨리트 독점을 깨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진정한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는 이루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지식인 사회는 크게 변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지식인은 나름대로 시대적 소명 의식과 도덕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독재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통해 진리와 정의를 나름대로 일치시키고자 한 지식인도 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민주화의 대의를 위해 실천하기도 했다. 민주화와 더불어 지식인은 그런 의무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공직을 맡거나 정부에 참여하는 일 때문에 눈총을 받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기는커녕 부러움과 따라 배우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같은 지식인을 찾아 보기는 어려워졌다. 


물론 이 책이 과거와 같은 “저항적 지식인 상”에 대한 낭만적 노스탤지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지식인 문제를 공직 참여나 정치 참여에서 찾는 것도 아니다. 민주화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지식인의 분화는 불가피하다. 또한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라는 점도 인정한다. 문제는 분화와 참여가 아니라 “지식인과 권력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에 있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지식사회가 권력에 의해 식민화되거나 아니면 거꾸로 지식이 영향력 획득을 위한 투자처가 되는 현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그다지 불편스럽지가 않다.

무엇이 민주화 이후 지식인들의 죽음을 불러왔는가?
시대적인 배경으로는 인터넷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지식이 대중화되어 과거의 지식인상이 효력을 잃었고 상당수의 비판적 지식인이 정치권에 편입된 후 기성 정치권의 모습에 동화되면서 신뢰를 잃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계화' 시대라는 현상과 미국 편향적인 학계의 속성으로 자본,시장,서구에 편향적인 학문이 반복되었고,..
특히 여러가지 이유로 미국에서 유학하는 것이 당연시된 풍토가 한동안 지속되는 과정에서 미국 박사학위가 없으면 대학, 연구소, 기업에 취업하기 힘들어져버린 종속적, 기생적 분위기가 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미국 박사학위가 곧바로 그 사람의 학문적 전문성이나 성숙정도를 입증하지는 못했다.

구체적으로 지식인의 죽음의 원인을 따져보면 권력과의 관계를 살펴야 할 것이다. 즉, 정치권력에 대한 지식인의 줄서기, 기업 식민지가 되어버린 대학, 문확마저 권력화되어 버린 사정, 시민운동의 권력과의 관계 등 모든 권력 분야와 지식인들의 관계는 지식인 집단에서 순기능이 아니라 역기능으로 작용했다.
군사정권과 김영삼정권에서 정치권,행정부애 참여한 지식인들은 소위 '어용 지식인'으로 지탄받았으나, 김대주정권과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동안 권력에 소외되었던 일부 지식인들이 소신이나 자질과 관계없이 정권에 참여하면서 어느새 자식인들은 정치권과 관료의 등용문이 되어버렸다. 또한 강력한 정치권력이 사라지는 대신 일부 언론이나 지식인 집단은 스스로 자신들이 정치권력을 '창출,배출'하고 '조종'하려고 의도적으로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그 한 편에 조중동과 윤여준 같은 이가 있고 다른 편에는 오마이뉴스와 참여정부 관료출신 학자들이 있다.

 
[ 군사정권과 민간정권에 복무한 지식인 통계 ]

 

 

그런 현실은 참여정부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현실은 자본의 지식인 통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이것이 재벌의 권력화를 의미하는데, 참여정부 시절 드러난 삼성의 비자금 사건은 재벌이 막대한 자금력으로 정치권력을 창출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한국사회 전체에 뿌리내리려 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재벌들은 또한 '삼성장학금' 같은 형태로 민주주의의 공정한 작동 축인 언론을 길들이고 있고 비자금과 억대 연봉으로 사법부를 장악하면서 길들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균관대와 중앙대 등 '지성의 요람'인 대학을 인수하여 재벌의 노동력을 국민의 돈으로 키우기 시작했으며 연구기금이나 프로젝트 기금을 통해 대학과 교수들을 통제하여 재벌에 유리한 연구결과와 언론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박정희 군사장권 이래 99% 국민의 희생 아래 정부의 온갖 특혜를 통해 덩치를 키워온 재벌이 민주화된 사회 이후 사회적, 국민적 책무보다 오너 일가족의 탐욕과 세습을 위해 정부를 배후조종하고 세금을 찬탈하고 정치권과 학계를 조종하여 천년만년 1%의 기득권을 누리려고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지식인 길들이기'는 한 축이란 할 수 있다.
정부개혁, 경제개혁, 재벌개혁, 사법개혁이 동시에 추진되지 않으면 지식인 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재벌독점의 횡포와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재벌과 관계 맺은 지식인 ]

대학이 어떻게 권력과 재벌에 무력하게 되고 '지성의 전당'에서 권력과 재벌의 '시녀'로 전락했는지는 20대 초반이던 대학생 김예슬양의 <김예슬 선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김예슬 선언> 이후에도 대학과 교수집단과 학생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연이은 자살에도 정치권, 정부, 지식인, 언론들은 잠시 관심을 기울이다가 내내 잠잠해졌다.

대학의 문제는 권력과 재벌 뿐 아니라 학문의 편향, 서구(특히 미국)에 편중되어 있는 현실이 많은 문제를 가져오고 있다. 모두 미국식이라면 비판의식 없이 무조건 추앙하고 받아들이려고만 하는 한국사회의 정치권, 관료, 재벌, 학계, 언론계의 행태가 교수 구성원과 박사학위 현황과 무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시민단체 역시 정치권력에 참여했으나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 경험을 안고 있다.

 


이반 일리히가 지적한 '자율적인 인간과 사회'는 한국의 지식인 세계에서도 필요할 것이다. 지식인의 죽음을 가져온 구조적, 제도적인 문재는 지식의 독립성과 자율성의 침해라고 생각한다. 정치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언론에 좌우되지 않는, 이념이나 특정 정권에서 독립된, 자본이나 규제에서 독립된 지식의 자유, 그리고 지식인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유, 연구의 자유, 양심의 자유, 선택의 자유가... 어떤 분야의 연구, 어떤 방향의 연구가 평가나 지원의 기준이 아니라 그 연구의 결과물이 창조적이고 독립적인지, 분명한 성과물을 낸 것인지, 국민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인지가 평가와 지원의 가준이 되어야 하고 그 평가 역시 정부관료나 특정 학술조직이나 단체가 아닌 지식인 집단과 시민단체, 집단지성이 참여하도록 개방하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지적하는, 지식의 독립과 창조성을 가로막는 정책, 그리고 학술진흥재단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자난 2008년에 인터넷과 언론, 정치권, 검찰에서 벌어진  '미네르바 사건'은 현재 우리나라 지식인의 무능함과 비겁함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대학 교수, 학자, 관료, 연구소 박사들은 별다른 공부나 학위도 없던 미네르바가 세계경제 및 한국경제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판단하는 수준만도 못했다. 그 사건은 정치권과 행정부 관료들의 무능함(아니면 국민들에 대한 속임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미네르바가 지적하는 '달'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고 오히려 미네르바의 '손가락'을 문제 삼아 그를 구속시켜 버렸다. 그 과정에서 경제분야 지식인이나 언론인들, 학자들은 아무런 발언을 하지 못했다. 그가 법원에서 최종 무죄로 풀려난 것은 얼마나 정치권과 검찰이 무능하고 미련한지 보여주었고 개인이 그 과정에서 고통받고 망가졌음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은 정치권과 정부가 무책임하고 불법적인 공권력을 사용하고 있음을, 제도개혁과 검찰개혁이 절실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마지막으로, 나 역시 개인적으로 관심이 큰 지식의 대중화, 집단지성은 지식인을 대체할 수 있을까? 책 속의 주장은 반반인데 대체로 부정적이라 할 수 있다. 고병권씨만이 집단지성, 지식의 네트워크가 지난 시대의 지식인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향신문의 이 기획에 참여한 다수의 기자, 학자들은 민주화 이후 20년간 지식인의 죽음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인 사회가 피폐해졌음에도 여전히 21세기에 맞는 '지식인'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20세기 말부터 몰아닥친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에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다만, 그들은 지식인 스스로가 자기 부정과 자기 갱신을 통해 시대에 맞도록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것도 주장한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다른 영역의 엘리트들과 다름없이 평범해지고, 영악해지고, 무규범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간 지식사회에 부여했던 존경과 권위의 위임은 이제 철회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한마디로 이 책은 지식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워짐에 대한 한국사회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보고서다. 

처음 제기한 지식인의 개념과 정의로 본다면 나는 여전히 이 땅에 지식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식인의 기준이나 역할이나 활동은 20세기와 많이 다를 것이다. 지식인이 지식을 독점해서도 안되고 지식이 많다고, 또는 높다고 하여 일반인들을 내려다보아서도 안될 것이다. 지난 '황우석 사건'에서도 드러났듯이 바야흐로 지식과 정보가 지식인이나 전문가만이 독점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올바르게 지식을 생산하여 그 지식을 사회와 99%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시대의 담론을 제기하고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여론을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그런 방식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김동춘, 최장집, 김용옥, 박원순, 정태인, 김종철, 박홍규 등도 있고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조국, 장하준, 감광수, 선대인 등도 있다.

다만, 21세기 지식인은 20세기와 다른 방식으로 대중들과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대중들은 집단지성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단지성은 일방적으로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서로 공개하고 소통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발전하고 진화하기를 원한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과 블로그, SNS는 새로운 지식 소통방식과 체계로 진화하고 있다.

[ 2012년 2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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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 - 차베스의 상상력, 21세기 혁명의 방식 새사연 신서 2
김병권. 손우정. 안태환. 여경훈. 이상동. 정희용. 한우림 지음 / 시대의창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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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언론에 베네수엘라에 대한 기사가 뜬 적이 있다. 차베스 대통령이 베네수엘라에 투자한 다국적 석유기업(엑슨모빌 등)의 자산을 국유자산으로 몰수한 것에 대하여 다국적 기업들이 국제중개기관에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차베스 대통령이 미국과 다국적 기업의 입김에 좌우되는 국제중개기관의 판정을 거부하면서 남미 차원에서 별도의 기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 사건은 한미FTA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인 '투자자-국가 제소(ISD)'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사람들도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대학시절 이후 남미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 칠레 아옌데 대통령이 군부 쿠테타에 의해 무너지고 쿠테타군과 싸우다 죽은 것, 해방신학에 대한 남미 신부들의 책이나 글 등이 대부분이었고 헬비오 소토의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를 숨어서 본 기억 정도에 불과하다.
당연히 베네수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지금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베네수엘라에 대한 내 첫 번째 기억은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1998년이었을 것이다. 1998년 겨울이라면, 1997년 말 대통령 선거와 IMF 구제금웅의 여파로 그동안 일하던 건축설계라는 업종을 떠나 부동산 개발업체에 처음 입사한 때였다. 국내 언론에서 베네수엘라 선거나 차베스 대통령 당선자에 대해 짧은 단신을 얼렸겠지만, 당시의 내 관심분야와 의식상태로는 차베스에게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화두 중 하나는 "1% 기득권의 지배에서 벗어난 99%의 사회"이다. 2012년 한국에서는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연달아 치러진다. 야당과 시민사회, 그리고 상당수의 깨어있는 시민들은 "99%를 위한, 99%에 의한, 99%의 정치"를 외치고 도전하고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지금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러한 '99%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인정된 바 없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립국을 나눌 것도 없이 소위 '지배엘리트' 혹은 '특권층'에 의한 지배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니 입헌민주주의니 하는 것은 형식적인 허울만 있는 것이지 사실상 '99% 정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지배엘리트, 지배계층이 0.1%에 불과한 것이냐, 아니면 1% ~ 5% 정도로 많은 지배층이 구성되어 있느냐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감히 베네수엘라야 말로 '99% 정치'를 직접 실현시키는 과정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비록 이 책에 나타나지 않은, 내가 모르는 베네수엘라의 약점이나 위협요소가 있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1998년부터 2006년까지의 베네수엘라에서는 '99% 정치'가 동일한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차베스의 집권 기간 동안(반혁명과 자본가 파업이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경제성장 뿐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 즉 경제, 교육, 건강 등 모든 분야에서 99% 민중들의 삶이 개선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베네수엘라의 혁명, 그들의 정치를 '99% 정치'라고 하는 이유는 혁명의 내용과 주체, 방법이 '99% 정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1998년 새로이 확정된 베네수엘라 헌법을 들여다 보면 '99%'를 위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볼리바리안 써클'과 '주민자치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을 살펴 보면 '99% 정치이자 행정'임을 알 수 있다.
베네수엘라 혁명의 핵심역량은 '볼리바리안 써클'이라 할 수 있다. 이 써클은 정당도 아니고 노동조합이나 주민자치조직도 아닌 자발적인 '대중적 정치조직'이다.(초기 모습은 '노사모'와 비슷하게 출발하였다) 2003년 기준으로 무려 220만명이 이 써클 소속이다. 베네수엘라 인구가 2,700만이니 유권자를 80% 정도로 감안하면 2,160만명 중 10%가 넘는 정치적인 시민들이 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차베스는 1998년 베네수엘라 선거 혁명 이후 기존 행정조직이 아닌 자발적인 주민자치조직을 유도하여 그 조직, 즉 '주민자치위원회'를 통하여 새로운 정부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고 집행하고 평가하고 수정하고 있다. 주민자치위원회는 베네수엘라 전역에 2006년 현재 12,000~16,000개 정도이며, 개별 주민자치위원회는 도시는 200~400가구, 농촌은 20~30가구, 원주민은 10가구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대략 전국 가구의 50% 전후가 주민자치위원회를 조직하여 차베스 행정부와 협력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남미라는 지역적 상항에서, 베네수엘라의 역사적 과정에서 출발한 차베스와 한국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차베스는 자신의 조국 베네수엘라의 특성과 문화, 국민적 수준과 요구에 입각하여 1% 기득권이 지배하는 베네수엘라를 99%가 지배하는 국가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그것도 무장투쟁이나 무력혁명이 아니라 아주 평화적이고 헌법과 선거라는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
분명히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혁명은 한국에서 99%를 위한 정치, 민주주의와 99%를 위한 사회를 원하는 이들이 배우고 연구해야할 점들이 무수하게 들어 있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들의 주요 관심사를 중심으로 베네수엘라 혁명을 다루었기 때대문에 실제 전개상황 또는 해석이 많이 다를 여지도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차베스나 베네수엘라 혁명에 대해 기록하거나 분석한 다른 책들을 곧이어 읽으려 한다.
그럼에도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1998년부터 10년 동안 진행한 '혁명'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하 '새사연')]과 저자들이 2006년 연구원을 설립하고 그 해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을 처음 발간한 후, 두 번째로 이 책을 발간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아직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을 읽어보지는 못했다.ㅋ)

지금도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정파와 관계없이 차베스 대통령과 베네수엘라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다. 인구 2,700만 명, 2005년 GDP 규모 세계 55위, 연간 국방 예산이 미국의 0.3퍼센트 수준에 불과한 베네수엘라의 어떤 점이 미국 정부를 이렇게 긴장하게 만들었을까? 이 보고서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2006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한 번 재선에 성공한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식 ‘21세기 사회주의’의 행보를 한층 더 가속하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의 변방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이 이내 전 세계로 퍼져 20세기를 ‘혁명의 시대’로 규정짓게 만들었듯이, 2007년 신자유주의의 세계 체제의 변방 베네수엘라에서 진행 중인 혁명이 새로운 혁명으로써 도미노를 예고할지, 미국에 맞선 신자유주의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는지를 분석했다. 
'새사연'의 젊은 연구자들은 베네수엘라 혁명이 21세기에 일어난 사실상의 첫 혁명이라는 점에 관심을 두고 그 종적 진행 과정과 사회 체제의 횡적 단면을 해부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구조적 변화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혁명이 갖는 독자적 특성을 정치, 경제, 산업, 사회 그리고 국가간 지역 협력체 모델 등 분야별로 추적해 들어갔다. 

이 책은 전체 일곱 개의 장으로 나뉘어 베네수엘라 혁명을 분석하고 대안을 전한다. 

우선 제1장은 베네수엘라의 사회경제적 현황과 혁명 전개 과정을 압축적으로 요약한 개요다. 20세기 후반 베네수엘라 혁명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들을 위해 경제적, 정치적 현황과 혁명 진행의 단계별 특징을 정리했다. 

제2장은 베네수엘라 혁명의 정치적 특징을 살펴본다. 베네수엘라 혁명의 눈에 띄는 특징인 선거 혁명과 합법적인 혁명과정에 대해 분석했다. 차베스의 위로부터의 개혁이 민중의 주체적 참여를 이끌어낸 과정, 이렇게 창출된 아래로부터의 힘이 혁명을 급진전시킨 메커니즘을 살펴본다. 

제3장은 이른바 베네수엘라 방식의 ‘참여민주주의’의 실체와 특성을 분석한다. 기존의 포퓰리즘이나 국가주의로는 해석될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참여민주주의의 구체적 사례로 정치 조직인 '볼리바리안 서클'과 자치 조직인 '주민자치위원회'를 중점 검토하여 ‘한국의 참여정치’와 어떤 점에서 근본적으로 구분되는지 시사점을 찾는다. 

제4장은 경제 변혁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찰한다. 베네수엘라 사회의 내부 경제 변혁 과정, 경제 구조의 변화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참여와 역할,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경제 모델의 지향점 등을 검토한다. 
신자유주의가 일반화된 이후 소규모 공동체나 운동 단체 차원이 아닌, 한 국가 전체의 경제 운용 방향이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벗어난 첫 사례가 베네수엘라라고 할 때, 새로운 경제 모델의 실험은 베네수엘라의 경제 규모와 상관없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또한 차베스 자신이 목표로 하는 21세기 사회주의의 성패 여부도 결정적으로는 이 경제적 실험에서 좌우될 것이다. 

제5장에서는 베네수엘라 ‘석유경제 체제’를 별도의 주제로 분리하여 분석한다. 국내 언론에는 흔히 차베스가 석유산업의 막대한 이익을 통해 정권 기반을 유지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실상은 베네수엘라 국부의 절대 비중을 차지하는 석유산업의 개혁 자체가 혁명의 가장 어려운 난제였다. 4년여가 넘는 단호한 투쟁을 통해 이룬 석유산업 개혁 과정은 달라지는 것은 없고 말만 무성한 한국 사회의 소위 ‘개혁 피로증’과 너무도 대조적인 장면이 목도된다. 이 험난한 석유산업 국유화 과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 할 수 있다.

제6장은 남미 지역 공동체를 향한 차베스의 독특한 구상과 지역 협력 방식을 정리했다. 클린턴 정부 시절부터 추진된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자유무역 협정(FTAA) 결성 시도는 차베스 정권 등장 이후 좌초 상태다. 최근 미국식 경제통합 모델을 추종하는 한미FTA 협정과 대척점에 선 남미 공동체 구상은 대안적 통상 전략과 대외 경제 전략 구상에 강한 영감을 제공해 준다. 

마지막으로 맺는글은 이번 연구를 결산하면서 베네수엘라 혁명이 지니는 함의와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을 종합 정리한다. 지난 시기에 진보가 주장한 ‘혁명’은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말이자 불온한 용어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 ‘IT 혁명’ ‘경영 혁명’ 등 혁명이라는 용어는 오히려 경영자 층과 보수 진영에서 더 일반적으로 쓰는 말이 되었다. 이제 21세기 혁명은 무엇을 추진하고자 하는 혁명인지 그 혁명은 어떤 방식과 경로를 통해 이루어지는지 나름의 결론을 도출한다. 
저자들은 베네수엘라 혁명의 특징을 무장투쟁보다 단호했던 선거 혁명, 몰수 없는 혁명, 민중의 헤게모니로 추진되는 혁명, 파괴보다는 창조가 중심인 혁명, 국민의 지배 강화로 관료주의를 넘는 혁명으로 규정한다. 지구 상에 존재했던 많은 '혁명',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회주의 혁명'과 다른 베네수엘라 고유의 '21세기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 부록으로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헌법’ 전문을 번역하여 참고 자료로 달아놓은 것은 이 책의 실천적 목적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베네수엘라 혁명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거혁명’과 ‘헌법을 통한 합법 혁명’, ‘국민이 동의한 헌법에 기초하여 구질서와 제도를 기저에서부터 바꿔 나가는 가장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혁명’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남미는 1980년대만 하더라도 종속 이론, 파울로 프레이리의 민중 교육 이론 등 활발한 사회운동의 성과를 반영한 여러 이론과 실천 활동이 소개되고 보급된 지역이다. 그러나 1990년대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진보적 담론이 썰물처럼 철수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관심도 급격히 식어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는 스웨덴, 덴마크, 독일 등 사회민주주의적 영향이 강한 유럽 사회 모델에 대한 관심이 들어섰다. 
그러나 '새사연'은 한국이 세계 11위권인 GDP 규모, 반도체와 IT를 위시한 신산업의 발전, 수출의 지속 성장 등 OECD 선진국에 비견할 경제 성과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화라는 관점에서는 오히려 유럽보다 남미가 시사점이 많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19세기부터 전개된 노동운동의 강력한 기반을 바탕으로 2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 노사 간 사회 대타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유럽 모델은 노동자의 노조 가입률이 10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한국 사회에 원용한다는 자체가 그리 타당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남미 지역은 대체로 한국 사회보다 10여 년 먼저 IMF 신세를 지면서 신자유주의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사회 양극화의 심화, 비정규직과 실업자의 대거 양산, 공공 부문의 약화와 시장주의의 일방적 득세, 성장 엔진의 결여 등 한국 사회가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가 노정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민중들의 자구적 노력 경험도 그만큼 축적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이 책에서는 생활인들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한국 사회의 대안을 찾겠다는 새사연의 지향이 엿보인다. 일반적 학술 연구서와 달리 외국의 사례만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세부적인 함의와 방법론을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실정에 대비하고 비교 검토하며 시사점을 집요하게 파헤친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예컨대 “조중동 등 발목을 잡는 언론 때문에 개혁이 어렵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온 참여정부의 자기변명이다. 이에 대해 이 책은 차베스 집권 당시 5개 주요 상업방송 전부와 10개 전국적 주요 일간지 가운데 9개가 노골적인 반차베스 진영으로, 이들 언론은 심지어 2002년 4월 반차베스 군부 쿠데타를 직접 홍보하고 함께 모의까지 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들 반 차베스 언론의 대부격인 시스네로스 그룹의 매출액은 조선일보의 열 배 규모이고 중남미 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임을 알게 되면 현 정부의 변명은 상당히 궁색해 보인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대해 ‘포퓰리스트’라는 미국 언론의 기본 관점이 국내에도 별 문제의식 없이 횡행하는데, 중남미 각국을 대상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국민 여론과 민주주의 성숙도를 조사 평가하는 ‘라티노 바로메트로’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재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적 진전과 국민들의 정치적 만족도는 중남미 최고 수준이다. 룰라 대통령의 브라질을 훨씬 능가한다. 
후보 시절 “사진 찍으러 미국에 가지는 않겠다”고 호언했다가 정작 당선되고 나서는 상당한 저자세로 미국을 다녀온 노무현 대통령에 비해 차베스는 유엔총회 연설장에서 부시를 “악마, 독재자”로 부르며 훌닦을 정도로 강경한 모습을 보이지만 미국과의 교역량을 늘리는 실용성을 결코 잃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미국 중서부의 빈민들에게 석유를 무상 공급하는 등 공화당 정권이 아닌 미국 시민을 상대로 한 여론 선전전에도 능하다. 


이 책은 2007~2008년에 어떤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 친구는 아마도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을 지지하였거나 한국사회에 새로운 철학과 정책, 방식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선물로 받았음에도 예의에 어긋나게 4~5년 동안이나 책꽂이에 꽂아놓고 지금까지 읽지 않았다는 애기... 책을 읽고나니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생각과 더불어 선물로 받았음에도 읽지 않고 나버려 두었다는 미안함이 컸다.
아무튼, 고맙다 기억나지 않는 친구야!! ㅋ

[ 2012년 2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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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생명, 인간 - 그 통합적 이해의 가능성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6
장회익 지음 / 돌베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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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저서로는 작년 4월 <공부의 즐거움>(2011, 생각의나무), <이분법을 넘어서>(2007, 한길사)를 읽은 후 세 번째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나는 '온생명'에 대한 개념을 앍고 있었다. 오래 전에 '온생명'에 대한 내용을 어떤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제목은 기억할 수가 없다. (오래전에 읽었기 때문에 남겨 놓은 서평도 없고...ㅠ)
아무튼 그 때 '온생명'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읽으면서 서구 중심의 현대물리학 이론이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하는 생명, 생명현상, 생명체계에대해 크게 공감했었다. 내 생각에으로도 대기 중의 산소, 지구 상의 물 등 비생명체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생명체'가 독자적으로 '생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박테리아 같은 무수한 원시생명체가 인간의 몸 구석구석에 자리잡고서 인간의 소화작용을 돕는 등 생명활동에 영향을 끼치는데 어찌 인간이 '스스로' 또는 '혼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한국의 물리학계를 대표하는 중진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학문의 통합과 소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과학철학 연구에 주력했다. 그러면서 과학자의 시선으로 폭 넓은 인문학적 주제들을 연구했다. 그 결과 탄생한 '온생명' 이론은 생명과 자연의 본질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사회와 문명 문제에 대한 혜안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양립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나'와 물질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 답을 얻기 위해 칸트의 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아 물질, 생명, 인간에 관한 현대 과학의 논의를 거친 후 다시 칸트의 철학으로 되돌아 오는 선순환적 논의를 전개한다.

저자가 처음 칸트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약 40년 전의 일로, 그때는 물리학을 좀 더 깊이 이해하자는 의도에서 칸트의 철학을 학습했는데, 지금은 같은 이유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논의로 이 책을 출발하는 것이다.

1장 [칸트 철학과 현대 물리학]에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여기에 몇몇 본질적인 수정을 가함으로써 이것이 현대 물리학의 메타적 구조를 이해할 이론적 토대로 활용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특히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재해석해 칸트 철학이 지닌 현대적 의미를 찾아내고, 현대 물리학의 철학적 바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한다.

저자는 우리는 머릿속에 설혹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본인 스스로 완전한 것으로 여기는 내용들, 즉 ‘앎의 틀’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형성된 이러한 틀은 실제로 인간이 생각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지적 과정을 생각할 때 기존의 ‘앎의 틀’과 ‘앎의 체계’, 곧 오감을 통해 새로 공급되는 내용(정보)들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앎의 틀’을 바탕으로 해서 물질세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담아내는 ‘앎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와 함께 고전 물리학과 고전역학이 물질세계에 대해 일부는 설명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것을 모두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앎의 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앎의 틀’ 즉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 한 명확한 설명은 불가능하기에, 결과적으로 패러다임을 바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저자는 이 같은 오늘날의 과학 상황에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철학 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혜안들이 번쩍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타난 그의 인식론은 전통적 의미의 형이상학이라기보다는 과학에 대한 메타이론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며, 실제로 칸트는 뛰어난 과학자였다고 주장한다. 이때 칸트 철학의 중요한 특징은 지성과 감성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인데, 현대 과학으로 설명하면 지성은 ‘앎의 틀’, 감성은 ‘앎의 체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생명,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하고 복합적인 주제로 나아갈 때도 앎이라는 주제를 논의의 중심에 놓는다. 저자는 칸트 이후 우리가 얻은 중요한 교훈은 ‘앎의 틀’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물론 체계적인 학습 과정에 넣을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도 근본적으로 심화된 가설이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저자는 물리학에 관한 한 양자역학뿐 아니라 고전역학까지 아울러 적용하는 앎의 틀 설정이 가능함을 보였으며, 이를 더 넓은 학문 분야로 확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 지금 가지고 있는 소신이라고 밝혔다. 

2장 [물질현상과 생명현상]에서는 물리학을 통해 밝혀진 물질의 존재 양상을 바탕으로 생명이라는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핀다. 또한 우리의 일상적 생명 개념이 매우 불완전한 것임을 지적하고, 의미 있는 개념으로서의 생명은 낱생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생명을 통해서, 그리고 온생명과 낱생명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밝힌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며, 또 이 점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
우리는 대체로 지구상에 있는 여러 물리적 대상들 가운데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살아 있는 것’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성격,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을 특징짓는 성격을 ‘생명’이라 부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대상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전이되는 현상을 보고, 이를 일러 ‘죽는다’ 또는 ‘생명을 잃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별 탈이 없어 보이는 이러한 생명 개념이 실제로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살아 있는지의 여부를 통해 우리가 판단하는 ‘생명’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생명현상, 곧 ‘살아 있음’을 가능하게 해 주는 요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또 무엇까지 구비되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것이 구비되어 이것들이 일으킬 현상이 ‘살아 있음’이라 불릴 그 무엇에 해당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서로 간에 긴밀한 연결망을 이루면서 그 안에 ‘생명현상’을 이루어 낼 이 전체 체계를 하나의 실체로 파악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명현상이 자족적으로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기본 단위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를 저자는 우리가 기왕에 지녔던 생명 개념과 구분해 ‘온생명’(global life)이라 불러 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온생명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저자는 ‘온생명’은 “더 이상 분할하면 생명현상으로의 존립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생명이 갖추어야 할 필수 단위임과 동시에,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결정적인 지원이 없이도 생존을 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명이 지니는 자족적 단위이기도 하다”고 역설한다. 이때 하나하나의 세포들은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때에 한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의 조건부적 단위이며, 이를 ‘온생명’과 구분해 ‘낱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생명 연구가 실패를 거두고 있는 것은 온생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생명을 낱생명적인 관점으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렇듯 ‘온생명’은 개별적 생명체(낱생명)가 다른 생명체와 갖는 모든 관계를 포괄하는 총체로서의 생명이며, 온생명이 기존의 생명 개념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지구상에 나타난 전체 생명을 하나하나의 개별적 생명체들로 구분하지 않고 그 자체를 하나의 전일적(全一的) 실체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저자가 제시한 온생명 사상의 강점은 기존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여기에 인문학적 사유를 겸해 생명에 대한 일관성 있는 구도를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근대 기술 문명이 낳은 환경 위기에 직면해 생명 존중과 지구 생태계 보전이라는 절박한 문제를 우리에게 일깨우는 데도 매우 적절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3장 [물질과 의식의 양면성]에서는 생명체가 중추신경계를 비롯한 일정한 하드웨어를 마련할 때, 이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가 형성되고 이것이 지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드웨어의 내면성이라 이를 수 있는 ‘주체의식’이 출현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물질과 의식의 양면성에 대해 깊이 있게 검토한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물질이 가장 먼저 존재하고, 거기서 생명이 출현하고, 그 가운데 다시 인간이 태어난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보면 인식의 주체인 ‘나’가 먼저 있고, 나의 의식을 통해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나’와 물질은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이에 대해 물질과 의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 받아들이기 힘든, 대단히 문제가 많은 주장이라고 지적한 다음, 인간이 물질세계를 의지적으로 움직이는 아주 묘한 존재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 나갈 수 있는 상황을 인간이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을 누리는데, 어떻게 물질이 이렇게 구성되어 자유의지대로 살 수 있게 뒷받침까지 해 주는지, 인간은 ‘굉장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여기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온생명과 낱생명 간의 긴밀한 연결망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는 자신의 이론을 연관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의식은 각각 세포나 조직 같은 낱생명적인 의식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전체가 서로 엮어지고 유통이 되면서 마치 온생명이라는 하나의 큰 그릇이 담긴 내용물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온생명 전체로 보면 하나의 큰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하겠지만, 각각의 낱생명 입장에서 보면 하나로 연결된 전체 의식의 한 복사본에 다시 자체 특성을 가미한 변이본을 지니게 되는 셈”이라고 한다.

또한 저자는 전체로서는 온생명 의식을 이루는 가운데, 그 안에 다시 서로 간에 많은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또 독자적인 양상을 유지해 가는 낱생명 의식이 나타나며, 이러한 여러 층위의 의식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으면서 ‘의식세계’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시 말해, 생명의 진정한 모습은 온생명과 낱생명 간의 긴밀한 연결망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온생명 이론은 물질현상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생명현상을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우주가 시작된 이래 은하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태양을 비롯한 항성들이 형성되었다. 항성들은 우주 안에 가장 흔한 물질인 수소 원자핵들이 모여 에너지 면에서 조금 더 안정적인 헬륨 원자핵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여분의 에너지를 내뿜는 거대 핵융합반응체다. 이는 천체물리학적으로 가능한 현상이며, 우리가 알다시피 우주 안의 수많은 별들이 모두 그렇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지구, 성간 물질 등 별이 아닌 많은 다른 물질들이 또 있다. 이런 보편적 현상들을 모두 인정한다고 할 때, 생명이라는 것은 이것들이 어떻게 되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우리의 관심사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얻은 것이 온생명이다.

4장 [나와 너 그리고 우리 - 삶과 앎]에서는 낱생명의 주체로서 우리에게 친근한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성격을 온생명의 주체인 ‘큰 나’와의 관계를 통해 고찰한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이성이 출현하는가를 살핌으로써 논의의 출발점이었던 칸트의 철학으로 되돌아와 선순환적 논의를 시도한다.

앎이 무엇이라고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삶의 세계를 정신의 차원에서 재구성해 현실 세계에서 부딪칠 여러 삶의 단편들을 예행 또는 반추할 수 있게 해 주는 기능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앎이라고 하는 것은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마련해야 할 가장 소중한 내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앎의 성격 또한 삶의 양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앎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눈으로 보아서 알고, 남에게 들어서 알고, 책을 읽어서 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부지런히 보려 하고, 들으려 하고, 읽으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최근 알려진 학습 이론을 인용해 인간의 정신 활동 중에서 가장 필수적인 ‘앎’의 과정에 대해 쉽게 설명한다.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아서 알고, 남에게 들어서 알고, 책을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사고의 상대성 원리'를 통하여 주체-객체의 관계에 대한 앎, 통합적 지식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 과정은 끊임없는 선순환적 과정을 거치겠지만...


저자는 서구 학문에 기초한 기존 자연과학이나 인문사회과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인식체계와 생명체계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사고방식을 제시한다. 언듯 저자의 이론을 접하면 소위 '허접'하고 단순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대물지식, 대생지식, 대인지식의 개념이나 낱생명, 보생명, 온생명의 개념이야말로 인간이 자신과 외부의 존재에 대해 통합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낀다.

서구의 학자들과 생태운동가, 서구의 인식방법론과 인식체계 내에서 공부한 국내 학자, 지식인들들은 나와 너와 우리, 인간과 자연과 우주에 대해 종합적으로 사고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서구의 학문방법론 자체가 서로간의 연관성 자체를 무시하고 쪼개고 나누고 해석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서구의 사고체계, 프레임,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것이 21세기에 새로운 방향을 찾고 창조하는 츨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정보는 많으나 유익한 정보를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날의 정보 홍수 속에서, 부적절한 외래어나 수사를 남발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게 자신의 정신세계와 학문 세계를 그려 낸 이 글의 가치가 더더욱 빛난다. 저자의 학문적 무게는 깊이 있는 통찰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라는 출판사의 추천사에 깊이 공감했다.

[ 2012년 2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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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삐딴 리 - 전광용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39
전광용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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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전광용은 1919년 한경남도애서 태어나 경성경제전문학교,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거쳐 1953년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5년 조선일보에 단편 소설 <흑산도>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1962년 이 작품 <꺼삐딴 리>로 제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988년 작고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책은 저자의 단편소설 작픔을 모아놓은 것이다. 책 속에는 <꺼삐딴 리>를 포함하여 '흑산도', '진개권', '지층', '해도초', 'GMC', '사수', '크라운 장', '충매화', '초혼곡', '면허장', '곽 서방', '남궁 박사', '죽음의 자세', '세끼미' 등 15개 작품이 실려 있다.

저자의 작품에 대해 해설을 하는 평론가 김종욱은 "1960년대에 발표된 전광용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물질적인 환경이나 신체적인 외양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중략)... 문제는 이러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삶 또한 왜곡된다는 사실이다. 지금과는 다른 우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증오심에 사로잡혀 폭력을 쓰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내면에서 찾지 못한 채 사회의 규칙과 질서에 전면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인간적인 타락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작품 중에서 <꺼삐딴 리>는 왜곡된 인간 심리를 민족적,역사적 차원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경우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는 서울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면서 종합병원에 버금가는 명성과 수입을 올린다. 그는 일제 감정기 동안  '국어 상용의 가'라는 액자를 받기 위해 아이들을 일본인 소학교애 보내 일본어만 쓰게 강요하고, 마침내 잠꼬대까지 일본어로 할 정도로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밉보일 것이 두려워 형무소에서 풀려난 사상범을 외면한다.
이인국 박사의 이러한 행동은 식민지인이라는 열등감을 벗어던지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인들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일본인과의 교제에서 열등감을 벗어던지고 "떳떳한 구실"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인국 박사가 "내선일체의 혼인론"을 통해서 심리적인 우월감을 얻었다는 것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인국 박사는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진주하자 다시 지배자의 언어인 러시아를 익히고 우연한 기회에 스탠코프 소좌의 수술에 성공함으로써 재기하게 된다. 이러한 면모는 월남한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병원의 고객을 권력층이나 재벌과 같은 부유층으로 제한하고, 영어를 부지런히 배우는 것이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독자들이 일제 치하, 해방,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동기를 겪으면서 민족사적 비극과 역경을 이겨낸 정신적 승리자가 아니라 자기 일신만을 위한 처세술로써 민족적 위기를 외면했던 정신적 패배자를 만나게 해준다. 속물근성에 젖은 지식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과 같은 일제 시대의 지식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수 천명의 친일부역자들은 '친일,부일'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 속의 이인국 박사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속물적 지식인, 부도덕한 지식인, 권력지향적 지식인은 살아 남아 한국 현대사에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이 작품은 저자의 실제 인생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평론가 이시형은 <인간 수호의 서신 - 전광용론>(현대한국문학전집 5, 신구문화사)에서 전광용을, 작품의 소재를 앉아서 구하는 작가가 아니라 직접 현장을 찾아다니는 "발로 쓰는 작가"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 직접 체험할 뿐 아니라 간접 경험에서도 소재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문단 데뷔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광용의 창작 방법론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저자 본인도 <전광용, 정한숙>(산구문화사, 1968)에서 "내가쓴 작품에는 현지의 답사에서 힌트를 얻거나 취재한 것이 적지 않다. '흑산도'는 흑산도의 학술답사에서, '진개권'은 휴전선 오지에 있는 찬구의 미군 쓰레기칸에서, '지층'은 태백산맥의 탄광에서..."라고 직접 애기한 바 있다.

한국은 민족의 위기를 외면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헌신한 친일 반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현대사를 이어 왔다. 그런 현대사가 해방 후 60년 동안 한국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쳐왔는지는 오늘의 현실이 뼈저리게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특히 민족과 다수의 국민, 약자와 정의를 외면하고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영합하는 자들이 지식인들의 상당수를 구성하고 있으며, 사회 전체에 공동체의 이해와 공존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물들이고 있는 중이다. 

21세기 이후에도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을 위해... 한국사회 공동체를 되살릴 수 있는 철학적,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모범이 확산되어야 할텐데...

[ 2012년 2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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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 2 - 주체사상과 유일체제 1960~1994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6
이종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역사비평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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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근현대사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무척이나 왜곡되어 왔다. 물론, 자력이 부족하니 타력에 의해 좌지우지된 측면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조선 왕조 500년은 체제의 구성원이 모두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자멸하였다.
왕권은 정조 임금 이후로 외척에 의해 농간을 당했고 체제의 지배세력인 사대부와 관료들은 체제 내부의 역량을 키울 생각은 없이 '상호 괴멸적인 당파투쟁'에 몰입하여 외세의 침입을 자초하였고 중산층과 민중들 역시 무력하기만 하였다.
결국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격화되어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고 일본은 철저하게 조선을 약탈하고 체제 자체를 폭력으로 붕괴시켰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 역시 자력이 아닌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한반도가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 되어버림에 따라 이념의 양극단이 남북에 고착화되었다.

반도 남단 한국의 현대사는 나름대로 대다수에게 알려져 있고 연구결과도 많지만, 정보가 차단되어 있는 북한에 대해 일반인들은 '베일에 싸인 장막'처럼 잘 알 수가 없었다. 동서 냉전이 무너지고 냉전 이념이 부분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제 한국 내 학자들도 북한을 연구하여 결과물을 일반들에게 선보이기 시작한지 한 참 되었다. 
이제는 남북통일이 '민족적 소원'인지마저 희미해지고 있지만, 한국 내에 냉전수구세력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을 모르면 앞날을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나 천안함 침몰 사건 등이 일어날 때마다 한국사회와 99%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통일이니 연방이니를 떠나 남북 화해와 교류, 남북 협력과 평화체제가 더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책은 공부모임의 새해 첫 교재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연말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후 북한이 김정은으로 후계체제를 구성하는 계기가 있었기에 선택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약속이 겹쳐서 새해 첫 번째 공부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ㅠ (그래도 책은 꼭 구해서 읽지만...ㅋㅋ) 이 책과 더불어 정창현씨의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2011)도 같은 날 교재였다.
 
<북한의 역사>는 2권짜리 시리즈다. 해방부터 1950년대까지의 초기 북한사를 다룬 1권과 사회주의 건설이 본격화되는 1960년대부터 김일성 사망 시기까지를 다룬 2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1권은 계간 [역사비평]의 전 편집주간이자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서 진보사학계의 한 축을 든든하게 지탱해왔던 김성보 교수(연세대학교)가 집필을 맡았고, 60년대 이후 현대 북한사의 서술은 참여정부 시절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며 학술과 정책 양면에서 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북한 전문가로 이름을 높인 세종연구소 이종석 수석연구위원이 맡았다. 이념과 정치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북한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서 그 안에서 통일과 상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진지하고 내실 있는 접근이 기대된다.

김성보, 이종석 두 필자는 공히 ‘자료의 부족’을 일찌감치 고백하며 ‘북한사 바로알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자의적인 판단으로 섣불리 단정 짓는 것이야말로 지금까지 남북관계를 꼬이게 만들었던 우리 내면의 함정이었다. 오늘날의 북한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은 바로 오늘날의 북한을 있게 한 과거의 역사를 편견 없이 실증적으로 되돌아보는 데 있다. 북한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북한을 이해할 수 있고, 역사에 기반한 깊은 이해야말로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갈 전망을 밝히는 초석이 될 것이다.

시리즈 두 번째인 이 책에서는 대체로 10년 주기로 열린 조선노동당 4, 5, 6차 대회를 기준으로 주체사상이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어떻게 지배했고, 강력한 대중동원력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유일체제가 어떻게 체제위기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지 객관적이고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밝히고 있다.
시기구분에 입각한 체계적인 교과서 구성으로 북한의 역사 구비 구비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편, 장마다 별도로 다뤄야 할 중요한 테마나 역사의 굵직한 흐름에서 간과하기 쉬운 사람 사는 모습의 면면을 ‘스페셜 테마’로 배치해 입체적인 이해를 도왔다. 정치?경제적인 ‘결정적 장면’들 외에 북한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 스케치까지 다양하게 배치된 화보 역시 <북한의 역사 2>를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저자는 한때 북한 역사 전개의 기둥이자 근본가치였고 그들의 자랑이었던 주체사상과 유일체제가 어느 시점부터 체제위기를 심화시킨 근본원인이 되었다는 역사적 역설을 차분하게 파헤친다. 주체사상은 맨처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완하는 특수한 실천전략으로 제기되었다. 
이 사상이 독재자 개인에 의해 전유되어 ‘김일성주의’라 불리고 개인숭배 시스템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자, 북한사회는 일체의 물적, 외적 조건을 주관주의적으로 무시하고 오로지 대중의 ‘혁명적 의지’와 수령에 대한 충성심에 기대어 속도전을 펼치는 방식으로만 사회 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단계에 오른 사회가 그 이상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성 있는 개인들의 창의력에 기반한 혁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북한사회가 당도한 위기는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선택한 실용주의 노선처럼 자기 사회의 발전단계를 객관적으로 직시하면서 사회구성원의 창의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개혁개방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북한의 공식 입장도 그렇고 한국사회 내부에서도 어떤 이들은 북한의 고립과 경제파탄이 북한 내부의 사정보다 미국 등 서구열강과 남한의 적대행위가 더 크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남한의 적대행위와 압박이 북한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게 우호적인 중국이 오랫동안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현실은 북한이 미국에게 핑계를 댈 수 만은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수 많은 인민들이 굶주리고 죽어가는 국가 현실을 고려할 때, 주체사상이나 김일성주의, 수령론이나 후계자론, 속도전이나 3대혁명기수론 등 북한이 내부체제에 동원하고 있는 사상, 정책은 내 이성과 판단으로는 수긍하기 어렵다. 아프리카나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등과 같이 당장 북한 영토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 2012년 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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