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지식인(知識人)'이란 '지식'을 통해 시대의 담론을 제기하고 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며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들을 말할 것이다. 한완상 교수는 <민중과 지식인>에서 지식인을 '민중과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고 진실을 증언하며 의식화되지 못한 즉자적 민중을 의식화된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대자적 민중'이라고 정의했고, 차병직 교수는 '사색과 탐구의 결과를 인간의 삶의을 향상시키는데 적용할 수 있는 형태로 체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군사독재자와 기득권자에게 날카롭게 비판한 이들을 지식인이라 불렀다. 지난 70~80년대에 '지식인'이란 단어에는 소명의식과 도덕성, 날카로운 지성, 민중에 대한 따뜻한 감성, 대나무 같은 절개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식인에 대한 인식과 개념이 불분명하다.(김대중 정부 시절 '신지식인' 심형래라는 정책처럼 지식인의 개념에 혼란을 주고 성장과 돈벌이가 최고임을 지식인 사회에 강요한 부분도 크게 문제를 야기했다. 나 역시 2000년대 초반부터 '먹여살리지 못하는 지식은 무의미하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강변했었다..ㅠ)

지난 2008년 경향신문에서 실시한 "1987년 민주화 이후 20년간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이 누구인가?"라는 각계각층 지식인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이는 백낙청 교수였고 그 다음은 리영희, 최장집, 강준만, 강만길, 김우창, 신영복, 박현채, 박원순 순이었다. 이들은 활동하던 당시에도,지금에도 모두 지식인으로 인정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유일하게 1990년대 이후 활동을 시작한 이는 강준만 교수다.(강교수는 2000년대 말부터 활동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서울대 총장 출신 정운찬씨는 이명박 정부에서 '경제계의 동반성장'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정말 이 정권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정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한 때 야권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그가 왜 '단군 이래 최악의 정권'이라는 이 정권에 복무하면서 세간의 비웃음을 사고 있을까?
조국 교수도 진중권 교수도 지식인으로 대접받고 있고 스스로를 '진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SNS 상에서 조국 교수와 진중권 교수에 대한 평가는 무척 다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이나 관료 집단 못지않게 문제 많은 집단의 하나는 대학을 비롯한 지식사회다. 그런데 그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일을 누군가 해야 했다. 그 첫 번째 장을 [경향신문]이 기획기사를 통해 열었고, 그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책은 그 양과 질에서 우리 언론 사상 최초로 시도한 지식인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다. 현장의 기자들이 악전고투 끝에 만든 지식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이자 변론문이다. 2007년 4월부터 9월까지 4개월이 넘는 연재 기간 동안 지식사회를 긴장시킨 지식인 건강진단서다.

한국처럼 학문 내지 지식에 대한 보상체계가 각별한 사회는 흔치 않다. 정치권은 늘 학자와 전문가를 우대했다. 정부마다 이들을 동원해 각종 위원회와 자문기구를 만들었다. 지식사회, 지식경제는 기본이고 지식기반이니 신지식인이니 하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언론 역시 스스로의 판단을 이들 지식인의 권위를 빌어 기사화하곤 했다. 이 책의 발간사에서 송영승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지적하듯, “한국 언론의 대학에 대한 일종의 지적 콤플렉스는 유독 심하다.”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권위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쉽게 도전받지 않는 특권을 향유해 왔다. 사회적 견제가 약하다고 해서 지식인 집단 내부에서 자기 조정 내지 자정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논문 중복 게재, 정치적 소신 뒤집기는 예사가 되었다. 학자적 양심이라는 용어가 무색하게, 심각한 표절행위를 한 교수가 대학 총장이나 장관이 될 수 있는 것이 한국 사회다. 학문 활동에 전념하는 지식인이 무능하게 평가되고, 누가 더 기금을 많이 끌어올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게 평가된다. 오늘날의 대학은 최고의 성장산업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학문의 전당도 아니고, 비판적 지성이 살아 숨쉬는 곳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지식인이 누리는 정치적,사회적 영향력과 권력의 크기는 학자적 양심과 반비례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식인 집단과 대학의 현실이 이렇게 되도록 어떻게 방치될 수 있었을까? 이 책이 마주하는 문제는 근본적이고 도전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을 그저 학문의 영역에서 기능하는 엘리트로만 생각하면 잘못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한국의 지식인은 “특별한 계급”이다. 학벌 체계의 수혜자로서 다른 부분의 엘리트들과 쉽게 친분을 맺을 수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무시 못할 연고 자본을 보유한 특권층이자 기득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최고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지적했듯이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문제의 핵심적인 고리 중 하나가 '엘리트의 권력 독점'이고 그 중에 지식인들이 포진해 있다. 그 앨리트 독점을 깨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진정한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는 이루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지식인 사회는 크게 변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지식인은 나름대로 시대적 소명 의식과 도덕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독재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통해 진리와 정의를 나름대로 일치시키고자 한 지식인도 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민주화의 대의를 위해 실천하기도 했다. 민주화와 더불어 지식인은 그런 의무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공직을 맡거나 정부에 참여하는 일 때문에 눈총을 받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기는커녕 부러움과 따라 배우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같은 지식인을 찾아 보기는 어려워졌다. 


물론 이 책이 과거와 같은 “저항적 지식인 상”에 대한 낭만적 노스탤지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지식인 문제를 공직 참여나 정치 참여에서 찾는 것도 아니다. 민주화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지식인의 분화는 불가피하다. 또한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라는 점도 인정한다. 문제는 분화와 참여가 아니라 “지식인과 권력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에 있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지식사회가 권력에 의해 식민화되거나 아니면 거꾸로 지식이 영향력 획득을 위한 투자처가 되는 현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그다지 불편스럽지가 않다.

무엇이 민주화 이후 지식인들의 죽음을 불러왔는가?
시대적인 배경으로는 인터넷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지식이 대중화되어 과거의 지식인상이 효력을 잃었고 상당수의 비판적 지식인이 정치권에 편입된 후 기성 정치권의 모습에 동화되면서 신뢰를 잃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계화' 시대라는 현상과 미국 편향적인 학계의 속성으로 자본,시장,서구에 편향적인 학문이 반복되었고,..
특히 여러가지 이유로 미국에서 유학하는 것이 당연시된 풍토가 한동안 지속되는 과정에서 미국 박사학위가 없으면 대학, 연구소, 기업에 취업하기 힘들어져버린 종속적, 기생적 분위기가 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미국 박사학위가 곧바로 그 사람의 학문적 전문성이나 성숙정도를 입증하지는 못했다.

구체적으로 지식인의 죽음의 원인을 따져보면 권력과의 관계를 살펴야 할 것이다. 즉, 정치권력에 대한 지식인의 줄서기, 기업 식민지가 되어버린 대학, 문확마저 권력화되어 버린 사정, 시민운동의 권력과의 관계 등 모든 권력 분야와 지식인들의 관계는 지식인 집단에서 순기능이 아니라 역기능으로 작용했다.
군사정권과 김영삼정권에서 정치권,행정부애 참여한 지식인들은 소위 '어용 지식인'으로 지탄받았으나, 김대주정권과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동안 권력에 소외되었던 일부 지식인들이 소신이나 자질과 관계없이 정권에 참여하면서 어느새 자식인들은 정치권과 관료의 등용문이 되어버렸다. 또한 강력한 정치권력이 사라지는 대신 일부 언론이나 지식인 집단은 스스로 자신들이 정치권력을 '창출,배출'하고 '조종'하려고 의도적으로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그 한 편에 조중동과 윤여준 같은 이가 있고 다른 편에는 오마이뉴스와 참여정부 관료출신 학자들이 있다.

 
[ 군사정권과 민간정권에 복무한 지식인 통계 ]

 

 

그런 현실은 참여정부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현실은 자본의 지식인 통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이것이 재벌의 권력화를 의미하는데, 참여정부 시절 드러난 삼성의 비자금 사건은 재벌이 막대한 자금력으로 정치권력을 창출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한국사회 전체에 뿌리내리려 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재벌들은 또한 '삼성장학금' 같은 형태로 민주주의의 공정한 작동 축인 언론을 길들이고 있고 비자금과 억대 연봉으로 사법부를 장악하면서 길들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균관대와 중앙대 등 '지성의 요람'인 대학을 인수하여 재벌의 노동력을 국민의 돈으로 키우기 시작했으며 연구기금이나 프로젝트 기금을 통해 대학과 교수들을 통제하여 재벌에 유리한 연구결과와 언론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박정희 군사장권 이래 99% 국민의 희생 아래 정부의 온갖 특혜를 통해 덩치를 키워온 재벌이 민주화된 사회 이후 사회적, 국민적 책무보다 오너 일가족의 탐욕과 세습을 위해 정부를 배후조종하고 세금을 찬탈하고 정치권과 학계를 조종하여 천년만년 1%의 기득권을 누리려고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지식인 길들이기'는 한 축이란 할 수 있다.
정부개혁, 경제개혁, 재벌개혁, 사법개혁이 동시에 추진되지 않으면 지식인 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재벌독점의 횡포와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재벌과 관계 맺은 지식인 ]

대학이 어떻게 권력과 재벌에 무력하게 되고 '지성의 전당'에서 권력과 재벌의 '시녀'로 전락했는지는 20대 초반이던 대학생 김예슬양의 <김예슬 선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김예슬 선언> 이후에도 대학과 교수집단과 학생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연이은 자살에도 정치권, 정부, 지식인, 언론들은 잠시 관심을 기울이다가 내내 잠잠해졌다.

대학의 문제는 권력과 재벌 뿐 아니라 학문의 편향, 서구(특히 미국)에 편중되어 있는 현실이 많은 문제를 가져오고 있다. 모두 미국식이라면 비판의식 없이 무조건 추앙하고 받아들이려고만 하는 한국사회의 정치권, 관료, 재벌, 학계, 언론계의 행태가 교수 구성원과 박사학위 현황과 무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시민단체 역시 정치권력에 참여했으나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 경험을 안고 있다.

 


이반 일리히가 지적한 '자율적인 인간과 사회'는 한국의 지식인 세계에서도 필요할 것이다. 지식인의 죽음을 가져온 구조적, 제도적인 문재는 지식의 독립성과 자율성의 침해라고 생각한다. 정치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언론에 좌우되지 않는, 이념이나 특정 정권에서 독립된, 자본이나 규제에서 독립된 지식의 자유, 그리고 지식인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유, 연구의 자유, 양심의 자유, 선택의 자유가... 어떤 분야의 연구, 어떤 방향의 연구가 평가나 지원의 기준이 아니라 그 연구의 결과물이 창조적이고 독립적인지, 분명한 성과물을 낸 것인지, 국민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인지가 평가와 지원의 가준이 되어야 하고 그 평가 역시 정부관료나 특정 학술조직이나 단체가 아닌 지식인 집단과 시민단체, 집단지성이 참여하도록 개방하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지적하는, 지식의 독립과 창조성을 가로막는 정책, 그리고 학술진흥재단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자난 2008년에 인터넷과 언론, 정치권, 검찰에서 벌어진  '미네르바 사건'은 현재 우리나라 지식인의 무능함과 비겁함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대학 교수, 학자, 관료, 연구소 박사들은 별다른 공부나 학위도 없던 미네르바가 세계경제 및 한국경제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판단하는 수준만도 못했다. 그 사건은 정치권과 행정부 관료들의 무능함(아니면 국민들에 대한 속임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미네르바가 지적하는 '달'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고 오히려 미네르바의 '손가락'을 문제 삼아 그를 구속시켜 버렸다. 그 과정에서 경제분야 지식인이나 언론인들, 학자들은 아무런 발언을 하지 못했다. 그가 법원에서 최종 무죄로 풀려난 것은 얼마나 정치권과 검찰이 무능하고 미련한지 보여주었고 개인이 그 과정에서 고통받고 망가졌음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은 정치권과 정부가 무책임하고 불법적인 공권력을 사용하고 있음을, 제도개혁과 검찰개혁이 절실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마지막으로, 나 역시 개인적으로 관심이 큰 지식의 대중화, 집단지성은 지식인을 대체할 수 있을까? 책 속의 주장은 반반인데 대체로 부정적이라 할 수 있다. 고병권씨만이 집단지성, 지식의 네트워크가 지난 시대의 지식인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향신문의 이 기획에 참여한 다수의 기자, 학자들은 민주화 이후 20년간 지식인의 죽음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인 사회가 피폐해졌음에도 여전히 21세기에 맞는 '지식인'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20세기 말부터 몰아닥친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에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다만, 그들은 지식인 스스로가 자기 부정과 자기 갱신을 통해 시대에 맞도록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것도 주장한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다른 영역의 엘리트들과 다름없이 평범해지고, 영악해지고, 무규범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간 지식사회에 부여했던 존경과 권위의 위임은 이제 철회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한마디로 이 책은 지식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워짐에 대한 한국사회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보고서다. 

처음 제기한 지식인의 개념과 정의로 본다면 나는 여전히 이 땅에 지식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식인의 기준이나 역할이나 활동은 20세기와 많이 다를 것이다. 지식인이 지식을 독점해서도 안되고 지식이 많다고, 또는 높다고 하여 일반인들을 내려다보아서도 안될 것이다. 지난 '황우석 사건'에서도 드러났듯이 바야흐로 지식과 정보가 지식인이나 전문가만이 독점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올바르게 지식을 생산하여 그 지식을 사회와 99%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시대의 담론을 제기하고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여론을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그런 방식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김동춘, 최장집, 김용옥, 박원순, 정태인, 김종철, 박홍규 등도 있고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조국, 장하준, 감광수, 선대인 등도 있다.

다만, 21세기 지식인은 20세기와 다른 방식으로 대중들과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대중들은 집단지성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단지성은 일방적으로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서로 공개하고 소통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발전하고 진화하기를 원한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과 블로그, SNS는 새로운 지식 소통방식과 체계로 진화하고 있다.

[ 2012년 2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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