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7
김동훈 지음 / 책세상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민주통합당이 우리사회의 가장 큰 현안 중 하나인 교육개혁을 위해 '국공립대 연합체제 개편'을 검토한다는 언론 기사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달 21일 국회에서 ‘대학서열화·학벌 타파를 위한 국립대학 체제 개편 토론회’를 개최해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수렴했다. 국립대학 체제 개편의 요지는 “기존의 서울대, 경북대, 전남대 등 국립대학을 하나의 연합체제로 묶어 강의와 학점, 교수의 교류를 자유롭게 허용하고, 졸업장도 공동으로 주자는 것”이다. 민주당은 국공립대 연합체제가 대학 서열화 완화와 입시 문제 해소, 고교 교육 정상화, 지역균형 발전, 대학경쟁력 강화 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민주당 대선주자 가운데 손학규 상임고문이 ‘서울대와 거점 지방국립대의 공동학위제 실시’를, 조경태 의원이 ‘서울대 학부과정 폐지 및 대학원 중심대학화’를 공약으로 내놓은 바 있다.
요며칠 인터넷이나 SNS에는 찬반 양론이 거세다. 대부분 찬반 의견의 경우를 보면 대학서열화나 학벌 타파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근거하여 말하는 듯이 보인다. 또 다른 일부는 정파적인 의견을 보이기도 한다. 서울대 김 모 교수의 경우 국공립대 연합체제(안)은 '좌익 포퓰리즘'이라고 폄하하면서 자신의 더 실현불가능한 대안을 '원칙적'이라는 이유로 제시하기도 한다.
 
만약 민주당이 자세한 내부 연구와 검토 없이 섣부르게 '국공립대 연합체제 개편' 공약을 추진한다고 해서 이를 폄하하거나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그 공약을 추진하는 취지가 '대학서열화와 학벌의 타파'라면 그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국공립대 연합체제 개편(안)'이 본래 취지에서 부족하거나 위험한 부분이 있으면 광범위한 논의를 통해서 보완하고 더 적절한 방안으로 진화시키면 될 일이다. 강준만 교수가 제안한 '서울대 학부의 단계적 축소'도 검토하고 김경근 교수가 제시한 서울대와 국공립대의 역할별, 기능별 분화도 검토해야 한다.
12월 대선을 맞이하여 아주 오랜 만에 학벌 타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박근혜나 새누리당의 정책이나 공약을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들이야 워낙 겉으로는 어떤 사탕발림을 하더라도 결국 기존 불평등과 착취 구조를 강화시키는데 혈안이 된 작자들이라...ㅋ 하지만 민주당이나 소위 '진보진영' 내부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정책대안과 제안들을 전국민적, 전사회적 논의로 확대하고 그 과정에서 학벌주의사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얻으면서 현재 수준에서 서로 가능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낼 생각을 해야 한다. 상대방의 주장과 의견을 폄하하고 깔아 뭉개려는 자세나 태도는 다양한 논의를 가로막고 감정적인 논쟁으로 치닫을 우려가 있다.
 
내 생각에 대학서열화와 학벌 타파는 단순히 '교육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학벌주의사회'는 교육부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차별을 일으키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서열화와 학벌 타파는 단순히 교육부분과 관련한 정책을 고민해서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에서는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인사정책에서 학벌 차별 완화를 추진해야 하고 대기업 등에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와 비슷한 인사정책을 추진해야 한다.(일본 전경련은 이미 그와 비슷한 정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사법부와 입법부도 행정부의 정책 취지에 발맞추어야 하며 언론과 대학 등도 이에 발맞춰야 한다. 대학의 경우에는 모대학 출신의 교수 임용을 의식적으로 줄여야하며 특히 서울대와 국공립대는 제도적으로 이를 추진해야 한다. 교육부분에서도 자체적으로 대학서열화와 학벌 타파를 위해 점수로 서열을 매기는 수능이 아니라 자격고사 같은 대학입시제도를 도입해야 하고 '우수한 성적의 학생'을 선발하여 '우수한 대학(명문대)'이 되려는 쉽고 편안한 길이 아니라 대학 내부의 교수와 연구 경쟁력을 키우고 신입생 선발능력을 제고하여 대학간 선의의 경쟁으로 '명문대'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1999년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를 발간하면서 대학서열화와 학벌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주장을 펼친 소수의 지식인 중 한 명이다. 그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지식 권력의 핵심인 대학교수로서, 사회가 제공하는 이익을 묵묵히 향유하며 침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두 발을 담고 있는 교육 현실, 나아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학자. 2000년 10월 이 책의 저자 김동훈과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을 발족시키고 인터넷 홈페이지(www.antihakbul.org)를 개설, 학벌사회의 질곡과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산적인 토론을 진행했다.  

저자는 우리의 학벌이 우리 사회의 교육뿐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방위에서 위용을 떨치고 있는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 사회를 '학벌사회'라고 명명할 때, 그것은 사회학적으로는 변형된 신분제적 가치와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임을, 정치학적으로는 사회적 권력의 배분이 학벌이라는 네트워크에 의해 파당적으로 분배되는 붕당적 사회임을, 경제학적으로는 한 사회가 생산해내는 부와 권력을 소수의 학벌집단이 독점으로 차지하는 독과점사회임을, 문화적으로는 학벌이라는 집단적 편견이 개인의 인간관계의 형성, 결혼, 취업, 자긍심 등 일상의 모든 영역에 파고들어 문화적 심리적 갈등을 빚어내는 갈등사회임을 뜻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가장 급박하고 시급한 핵심적 의제가 '학벌'이라고 판단한 저자의 이 책은 학벌체제하에서 자유롭지 못한, 조금씩이라도 그 질곡의 고통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의 피부에 와닿는 매우 구체적인 현안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우선 학벌사회를 옹호하는 견해들을 크게 경쟁동기론, 기회균등론, 능력지표론 등으로 분류하여 그 주장의 부당함을 논박한다. 흔히 학벌사회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로 경쟁에 의한 사회 활력, 공개시험을 통해 공정하고도 균일하게 제공되는 기회(예를 들면 현 입시제도), 근대사회에서 학벌은 가장 신뢰할 만한 능력 판단 기준이라는 것 등이 있는데, 저자는 다음과 같은 입장으로 이 세 가지 논리들을 비판한다. 첫째, 경쟁을 유발하는 현행 대학 입시제도는 입시 후의 전 생애에 걸쳐 '출신대학'이라는 종신형 간판에 의해 경쟁의 모티프를 앗아감으로써 우리 사회를 정체시킨다는 것(결국 진정한 경쟁체제가 아니라는 것). 둘째, 사실상 공평한 기회가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계층 이동을 고착화시키고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대물림시킴으로써 실제로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를 협소화시킨다는 것. 셋째, 현행의 입시제도가 개인의 능력 계발이나 판별과는 거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 꼭 수능성적 고득점자가 우수한 인재이거나 창조적 소수자는 아니라는 것. 명문대생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지닌 능력의 우월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 기회의 선점에서 온다는 것. 따라서 입시경쟁과 학벌에 기초한 현재의 학벌독점 현상은 어떠한 자기 정당화 근거도 갖고 있지 않은 기득권 세력의 수탈구조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학벌사회 옹호론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하여 학벌사회의 수혜자와 방조자, 피해자가 누구인지 그 이해갈등 상황에 대한 차분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뒤이어 언론의 행태, 사교육업자의 이권, 명문대생의 탐욕, 중고등학교와 교육 관청의 방조 등도 면밀히 파헤친다. 
서울대나 연고대를 졸업하지 않았다고 하여 '학벌주의자'와 '학벌주의 옹호론자'들의 편협하고 악의적인 주장에 주눅늘거나 눈치볼 필요는 없다. 악덕재벌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꼬우면 너도 돈 벌지 그랬냐?"고 말할 수 없듯이 부당하게 기득권에 편입된 '학벌독점자'들에게 구체적인 근거와 주장을 합리적으로 펼치게 되면 그들이 그렇게 날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방식으로 극소수가 절대 다수를 차별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우리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만 할 '숙제'일 뿐이다.

그렇다면 학벌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현재 한국 사회의 모든 권력의 요직을 서울대학 출신의 '학벌의식에 찌든' 동문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보았을 때, 학벌사회 극복을 위한 가장 이상적 방안으로 서울대 폐교론이 제시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의 실현불가능성을 염두에 둔 저자는 먼저 대학서열을 완화, 철폐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시급한 제도적 과제라고 말한다. 학벌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현재 고착된 대학서열 체제의 몫이 크기 때문이다. 약간 유보적이기는 하지만 대학평준화론, 국립대의 민영화를 통한 사립대와의 차별해소, 인제지역할당제 시행을 통한 비수도권 지역의 대학들에 대한 획기적 배려 등이 그 대안으로 모색되고 있다. 또한 학벌체제의 하나의 기둥인 대학입시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현재의 전국 단위 국가관리 입시제도를 즉각 철폐할 것, 대학 스스로가 다양하고 총체적인 접근에 의한 교육적 선발을 해나갈 것, 입학절차를 비공개로 하여 대학과 학생 간의 관계를 사적인 계약관계로 머물게 할 것 등이 그 제안들이다. 아울러 대학의 다원화, 개방화를 통해 학벌의식의 심리적 기반이 되는 폐쇄성을 깨뜨릴 것, 대학평가체제를 정착할 것도 덧붙인다. 물론 이러한 제도적 개혁과 더불어 학벌차별과 편견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다양한 형태로 구체적인 의식개혁 운동을 펼쳐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저자가 검토하고 제시하는 대안은 분명하지 않다. 대학평준화도 개론적 성격이고 국립대 민영화 역시 원론적인 수준이다. 인재지역할당제 정도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저자가 제시하는 '국립대 민영화 또는 독립법인화'는 본말이 전도되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꺼꾸로 풀어가는 모양새 같다. 현재 국립대학이 사립대학보다 국가재정이 많이 투입되는 문제는 사립대학의 공공성을 강화하면서 국가재정을 국립대 수준으로 투입해야 하는 방향성을 추구해야 하는 문제이지 꺼꾸로 국립대학을 사립대학 수준으로 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 스스로 책의 앞 부분에서 분석했듯이 서울대는 이미 대학서열체제와 학벌독점의 정점에 군림하기 때문에 민영화나 독립법인화처럼 운영의 주체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저자가 헷갈리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정책대안이 '공기업 민영화'처럼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처리해 버리는 꼴이다. 그건 아니다.

 

다수 피해자들의 한 목소리가 소수 수혜자들로 하여금 각성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 그런 의미에서 책의 말미에 실린 '의식개혁을 위한 일곱 가지 요구사항'은 우리 개개인도 스스로 실천할 만하다.
하나, 학벌을 묻지 않고 밝히지도 않는 관행을 정착시키자.
둘, 학벌 관념을 조장하는 언론과의 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해나가자.
셋, 학벌을 차별하는 기업들을 고발하자.
넷, 대학 특히 명문대의 학벌조장 행위를 집중 고발하자.
다섯, 고등학교의 반교육적 입시지도를 지속적으로 고발하자.
여섯, 고등학교 학생들의 목소리를 끌어내자.
일곱, 사교육 시장의 학벌 관념 조장행위에 제동을 걸자.
 
아무튼 내가 최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분야가 교육부분이었는데 마침 사회적으로 논의가 활성화되어 의미도 있고 반갑기도 하다...^^ 
 
[ 2012년 7월 11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입시병
김종주 / 하나의학사 / 1990년 3월
평점 :
절판


인터넷 포탈 '다음'에서 '입시병'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상당히 많은 카페글, 웹문서, 블로그, 뉴스, 지식 등이 펼쳐진다. '입시병'도 병이기 때문에 몇몇 신경정신과 명의로 관련 정보를 인터넷 카페에 직간접적으로 올려져 있다. 뉴스나 신문에서는 교육문제나 대학입시 등과 관련하여 기사 내용 중에서 '입시병이 한국의 학생들에게 존재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다루기만 할 뿐, '입시병'을 제목으로 하는 심층적인 기사를 거의 제작, 보도하지 않은 것 같다.
인터넷에 올러와 있는 몇 개의 신경정신과 의사들의 경우 입시병의 원인을 당사자와 가족에게서 찾는다. "가장 큰 원인은 아이의 성격에서 기인한다(양창순)"라거나 "가족의 과잉기대나 본인이 일류집착증에 빠진 경우, 사전 준비 없이 고3에 진입한 경우, 입시 실패 경험이 있는 재수생, 내향적 소심형에 많다(소예정신과의원)"라고 진단한다. 기독교상담실의 경우 우리가 과거에 교과서에서 읽었던 "이유 없는 반항기"라는 상투적인 설명을 기본으로 하면서 "과거 성적이 부진하고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는 경우, 내향적이거나 소심하고 강박적인 성격을 가진 경우, 진로 선택에 갈등이 많은 경우, 부모나 자신의 보상심리로 인하여 일류 집착증에 빠진 경우, 부모-자식간의 대화가 단절되고 불화가 있는 경우, 각성제나 수면제를 남용하는 경우, 기존에 정신적 질환이나 만성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라고 분석한다.
이런 식으로 신경정신과 의사들이 신문이나 방송, 교육관계자들에게 '입시병'의 원인을 분석, 진단하고 있으니 대책이라고 해봐야 학생 개인이 호연지기를 키우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식이거나 가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부모들이 아이들을 압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 김종주 역시 기본적인 진단 역시 앞에서 이야기하는 다른 의사들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는 것은 저자의 경우에는 학생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서 상당수 발견되는 입시병을 지적하고 대신 학생들에게서 병의 원인을 찾지 않고 있다. 저자는 아동들의 발달 과정에서 아동들이 가정이나 부모에게 어떻게 영향을 받는 지를 주로 분석하면서 학부모들의 과잉 기대와 시험과 성적에 대한 무언의 압박, 그리고 사회 전체적으로 대학입시를 전쟁처럼 생각하고 덤벼드는 사회문화적 현상이 학생들과 학부모 스스로의 '입시병'을 초래하는 것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저자가 직접 병원에서 상담하고 진찰한 학부모나 학생들의 '입시병' 증상과 사례는 매우 심각한 편이다. 신체에는 아무런 의학적 이상이 없음에도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의사에게 찾아와 불면증, 두통, 속쓰림, 울렁증을 호소한다. 다행스럽게도 입시병의 기간이 짧은 보통의 경우에는 대학입시가 끝나고 학생이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입시병 증상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증상이 오래 전에 나타났거나 증상으로 인해 가정에서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한 경우, 또는 학생이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 삼수를 하는 경우에는 학생 뿐 아니라 학부모들까지 입시병이 만성질환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게 되면 입시병의 증상은 당사자의 신체적인 질병으로까지 발전하여 오랜 시간 고통스럽게 지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통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입시병은 치유되는 확률이 겨우 25%에 불과하다. 해마다 75%는 죽든가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죽음에 가까운 심한 후유증을 남기기 때문에 입시병이 무서운 병이다"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학부모들, 즉 부모 세대가 스스로 입시병을 앓게 되고 학생들의 입시병을 발병시키는 이유를 한국사회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요인에서 찾는다. 학부모의 부모세대에게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자란 성장배경과 더불어 압축성장에 따르는 가장들의 산업전선 몰입으로 가정에서 부부간에 애정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현실을 기본적인 사회적 배경으로 지적한다. 이 경우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내 인생의 전부'라는 목표로 설정하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또는 만족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가문의 대표 선수'가 되기도 하고 부모들의 '악세사리'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이나 재능을 찾고 발휘하는 데서도 교사들 뿐 아니라 학부모들 역시 방해세력으로 등장한다.
 
한창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성장하고 스스로를 알아 나가면서 인격을 형성하고 재능과 적성을 찾아서 열중해야 할 아이들을 12년간 학교와 학원, 시험과 숙제와 공부로 묶어 두고서 어찌 아이들에게서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바라는 것일까...
 
정치권과 정부, 사회 각계각층이 난마처럼 얽혀있는 법적, 제도적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것도 당면한 주요 과제이지만, 학부모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 각성하고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도 동시에 절실하다는 것이 저자의 요점이다. 법과 제도와 문화를 바꾸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오늘도 내일도 압박과 스트레스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받고 좌절하기 때문이다.

[ 2012년 7월 10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토피아 이야기 멈퍼드 시리즈 2
루이스 멈포드 지음, 박홍규 옮김 / 텍스트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힘든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하루하루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우도 있고, 말년에 접어든 노인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듯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수능시험과 대학입학이라는 고지를 넘어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청소년들도 있고 공무원시험이나 대기업 취업, 창업이나 노래실력을 통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 아이들의 분유값과 유치원비, 사교육비나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택대출 원리금을 갚거나 새로 오픈한 커피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살아가기도 한다.
즉, 사람들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살아갈 희망'을 간직하면 하루하루의 즐겁거나 힘든 과정을 겪어나간다. 살아갈 이유나 희망이 없으면 인간은 좌절할 뿐 아니라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 품은 개인적인 꿈과 희망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왜소해지거나 포기하게 되고 주어진 현실과 조건에 만족하거나 불만족스럽더라도 '살아갈 이유'가 있거나 '희망'이 있으면 사람들은 힘든 오늘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현실에서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개인이 사회적인 꿈을 꾸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
 
우리사회에서도 언젠가부터 꿈과 희망이 금기어가 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잦아들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헛된 꿈이었고 이데올로기이자 선전에 불과했던 "부자되세요" 마저 이제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가족, 친지 중에서 그리고 지인이나 이웃 사람들 중에서 이전보다 삶이 나아진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학부모가 된 어른들은 사교육비와 주택대출금에 쪼들리고, 실업과 폐업의 고통에 시달리고, 젊은이들은 학자금 대출상환과 비정규직, 구직난, 전세난, 육아의 두려움 속에서 짖눌려 살고 있다. 양극화와 빈부격차는 피부로 절감된다. 이러한 정황은 각종 통계수치에서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앞으로도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왜냐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할 정치권과 정부, 언론, 지식인들이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개인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으며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기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점 무기력해지고 좌절하고 있고 사회는 전체적으로 활력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할 이유'는 남아있지만 '살고 싶은 희망'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희망과 비전을 새로 만들고 제시하고 외치고 싸워야할 젊은이들과 체제 저항세력이자 대안세력들마저 그 희망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내 대안세력이라고 할 만한 집단은 정치분야와 사회,학문분야에 일부 존재한다. 경제분야와 문화분야에는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분야의 대안세력이라 할 만한 통합진보당은 최근 당 내분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고, 한동안 회복기가 필요해 보인다. 사회분야의 각종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20세기보다 존재감이 더욱 사그라든 채 '존재감'만 남아있다고 생각된다. 언론과 학계에는 대안세력이라고 불러줄 만한 집단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이미 실패가 검증된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이들도 있고 사회주의와 비슷한 또 다른 '주의'를 내세우는 이들도 있다. 관념화된 단어와 개념을 붙잡고 버티는 이들도 있고 가야할 길을 잃어버려 방향을 서서히 유턴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내가 현재의 상태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불의와 부정에 저항하는 개인과 집단이 여전히 다수 존재한다. 그들은 양심적이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희망적인 비전과 정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컨대 그들은 비판적이고 저항적이지만 대안을 제시하고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비전과 정책은 말과 자료집 속에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시도되지도 검증되지도 못하고 있다. 그들은 모여서 논의하기 보다 흩어져서 서로 싸우기에 바쁘고 공통점을 가지고 무언가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보다 상대방의 시도를 폄하하기에 바쁘다. 과거의 이념과 방식을 못벗어나고 있고 자그마한 권력을 놓고 서로 옹졸하게 다투고 있다. 구체적인 현실과 사람 속에서 대안과 비전을 만들기보다 말과 주장으로서, 힘과 권력을 먼저 취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스스로 먼저 성찰하고 상대방을 포용하려 하기보다 상대방의 잘못을 꾸짖고 욕하고 제거하고 주도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내가 부정적인 것이다.
 
과거에 보였던 것 같은 희망이 이제 잘 보이지 않는다. 아득하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놓쳐버린 것이 무엇일까?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 그리고 희망에 대해 생각할 때 이 책이 도움이 되었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동양식 개념과 사고방식이 강한 우리들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물론 저자가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유토피아를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존에 서구에서 논의되고 존재해왔던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책은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휴머니스트로 알려진 루이스 멈퍼드(1895~1990)의 처녀작(1922녀누초판 발간)이자 94년 평생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도시학자, 역사학자, 문예 비평가, 건축 비평가 등으로 활약하면서 현대인에게 진정한 유토피아의 비전을 제시했고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했던 멈퍼드의 총 28권 저작을 일관하는 주제가 문명의 비판과 현대 사회의 개혁이라면 이 책은 그런 멈퍼드의 사상을 집약한 책이기 때문이다. 멈퍼드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쓴 이 책을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뒤에 초판의 내용 그대로 재간행을 승인한 것만 보아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멈퍼드는 "유토피아란 인간이 처한 환경에 대한 반응이자, 주어진 현실을 인간적 형태로 바꾸려는 시도이며, 언젠가 구현될 미래에 대한 예견"이라고 정의한다. 그가 분류하는 유토피아에는 도피 유토피아와 재건 유토피아가 있다. 저자는 서구 유토피아의 전통에서 두 가지 유형의 유토피아를 모두 다루되 플라톤에서 H.G.웰스에 이르는 도피 유토피아의 고전적인 예들을 설명하고, 재건 유토피아를 사회적 신화와 사회이론가들의 당파적 유토피아로 구분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인 1922년에 처음으로 출판된 이 책은 인류가 공통의 목표를 위해 이기적 쾌락을 거부하고 거대도시의 혼란을 지역주의 질서로 재건해 나아가야 한다는 멈퍼드의 시대를 향한 열망을 담고 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과 모어 등 대표적인 유토피안들은 한낱 몽상가나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당대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한 '현실주의자'들이자 '현실적 불만분자'들이었으며, 특히 이들은 대단히 구체적으로 대안적 유토피아의 지리적, 제도적 조건을 제시하면서도 전체 인간 사회의 조화를 으뜸으로 하는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의 소유자들이었다.
전후 재건의 의지와 희망에서 출발한 이 책의 유토피아 과거 읽기와 미래 전망이 2010년을 사는 우리에게 유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명화와 함께 날로 심화되어 온 세분화와 전문화 그리고 편파성으로 인해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더 이상 통합적으로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현대인은 멈퍼드가 선별한 유토피안들의 전체론적 시각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인간 생활을 '잡다한 우연사의 혼합'으로 보고 상호 관련되는 유기체적 전체로 보지 못한다면 진정 더 좋은 삶,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현실의 이상적 비판'과 '미래의 현실적 구상'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으니까...
 
인류의 대다수에게 가혹했던 20세기 주류 문명, 21세기 들어와서도 한국에 엄청난 질곡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자본주의의 극복과 또 그 대안으로서 21세기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인상 깊은 문장 :
 
- 플라톤의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나타난 사회적 붕괴의 시기에 쓰였다. 그 신랄한 어투는 필경 플라톤의 눈에 비친 희망 없는 상황에서 나왔으리라. 토머스 모어가 상상의 나라를 위한 기초를 세운 시기도 마찬가지로 무질서와 폭력의 시대였다. 즉 유토피아는 낡은 질서인 중세와, 새로운 관심이자 체제인 르네상스 사이의 간격을 메우고자 만든 다리였다. (p.27)
 
- 모어는 인간의 본능에 자기주장이나 과시욕이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영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귀금속을 경멸했다. 황금은 변기나 노예의 쇠사슬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진주는 아이들에게 주어 어릴 때는 그것을 자랑하거나 즐기도록 하되 그 뒤에도 인형이나 장난감으로 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유토피아에서는 화려한 옷이나 보석이 유행이 지난 것으로 취급됐다. (중략)
단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경작하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고 마시며, 명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고 꿈꾸며 창조하는 것, 즉 살아 있는 현실을 붙잡고 환상을 물리친다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 사람들이 취하는 생활방식의 본질이다. 권력과 부와 권위와 명성은 추상적인 것이고, 사람들은 그 추상적인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이러한 신세계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괴물이 되는 기회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인간의 주된 목표는 인간으로서 최대한 성장하는 것에 있다.(p.86)
 
- 자연적으로 발생한 지역과 자연스럽게 집단화된 사람들 대신, 국가주의 유토피아는 측량 기사가 그은 선에 따라 국토라고 하는 영역을 확립하고 그 영토의 주민을 모두 국민이라는 단일한 불가분의 집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국민이란 권리와 권력의 측면에서 다른 모든 집단에 우선하는 집단이라고 가정됐다. (중략)
달리 말하면 국경선은 그 주민이 국민으로 행동하는 한에서, 주민이 세관, 이민국, 국경 경비대, 교육제도를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지불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러한 상상의 경계선을 허가 없이 넘고자 하는 다른 집단을 죽여서라도 저지하려는 경우에만 존속된다. (p.229)
 
- 당파적 유토피아(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최종적 비판, 즉 일방적 개혁운동의 치명적인 결점은 바로 일방적이라는 점에 있다. 이러한 당파성은 개별 계획안의 토대가 되는 여러 사실과의 관계나, 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 태도에서 나타난다.
당파성의 근본을 이루는 심리는 법정에서 변론하며 그 논증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찾는 변호사의 심리와 유사하다. 이러한 정신적 태도는 말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설령 공동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가 생긴다 해도, 사실에 대한 개인의 태도가 사실 그 자체보다도 중시되고, 마침내 사실이 무시되는 정도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미국 남부의 일부 백인 집단은,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진위를 따지지도 않고 그 흑인 남성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러한 집단 행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잔인한 측면을 부각한다. 인간은 본래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하는 쪽이 먼저다. 왜냐하면 심리학자가 말했듯이 생각은 억제된 행동이고, 태어나면서부터 억제란 우리와 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한 분노에 몸을 맡겨 장애를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장애로부터 후퇴하여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우회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것인가 하는 어려운 선택에 부딪힐 때, 우리의 본능적 충동은 전자를 따르게 된다.
이는 자본가 조직의 성장에 수반한 인간의 무서운 고뇌를 보고 사회주의자들이 소유와 이윤이라는 문제에만 관심을 쏟고, 그 결과 사회주의화 계획에 의해 개선이 가능한 조직과 분배, 그리고 관리하는 산업 현장의 구체적 문제를 무시했다는 예를 보면 알기 쉽다. 이처럼 한 문제의 특정한 면에 관심이 집중되면, 특정한 해결책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문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게 된다. 인생은 짧고 목전의 필요는 더욱 크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해결이나 치유는 더욱 급박하게 되어 각 당파의 활동가들은 사실을 완벽하게 확인하고 자료를 철저히 조사하는 대신 너무나도 안이하게 '상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결점은 인간의 거의 본능적인 당파적 성향에서 비롯되고 당파성을 유지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중략) 당파성에 따르는 두번째 결함은 공동체를 수직적으로 분할하고, 인간 생활 속의 수평적 연대와 충성심에 대립하는 가공의 적대감과 동족의식을 조장한다는 점이다.(중략)
당파적 인간이 간과하는 것은 저속한 생활에도 인간으로서의 확실한 기쁨이 있고, 대다수 인간에게는 결국 그것이 실천할 수 있는 생활일 뿐만 아니라 본래적으로 충족된 좋은 생활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존 어빈의 희곡에 나오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대신에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기병대와 인디언, 사회주의자와 자본가, 금주법 지지자와 반대자를 대치해도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마찬가지다. 복잡하게 얽힌 인간의 생활은 사실 그러한 범주를 넘는 여러가지 관계로 성립한다. 그러나 당파의 인간은 유토피아 사상과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회 일반의 관계를 경시하고, 사회를 '주의'에 봉사하게 하며, 사회관계를 무시하여 '운동'에 몸을 바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당파주의의 가장 큰 죄악이다.(p.258~261) 
 
[ 2012년 7월 08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마음 같은 그녀
이정희 지음 / 학고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3월 국회의원 총선거 준비단계에서 개인적, 집단적 기득권을 양보하고 민주통합당과 야권단일후보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진보신당을 포함한 전체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4.11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애초 목표였던 교섭단체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여 통합진보당의 조직력의 한계를 보여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권단일후보 협상을 성공리에 끌어낸 정치력에 대한 내 평가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통합진보당의 어설픈 '3자 통합'과 유기적이지 못한 정당운영구조, 당원들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내부 관료주의, 불안정한 내부 의사결정구조 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통합진보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달성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 책은 지난 3월 그런 정치력을 보여준 이정희 대표가 총선을 앞두고 발간했다고 하여 구입한 것이다. 이미 예비후보에 출마한 친구 등 정치인이 발간한 책 여러 권을 구입했지만 출판기념회 또는 개인적인 인연이 아닌 나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구입한 첫 번째 정치인 저서였다. 그리고 연이어 유시민, 문재인, 안철수, 박근혜, 김문수 등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에 대한 책을 읽은 후에 한꺼번에 서평을 써보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치인의 책을 구해서 읽는다는 것이 여간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았다. 세미나 교재나 내가 개인적으로 독서계획을 세운 책을 읽기도 시간이 빠듯했다. 아무래도 대통령 선거일정이 더 가까워져야 몸이 움직이려니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난 5월 2일 '통합진보당 부실,부정선거 의혹 사태'가 발생했고 지금까지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5월 한 달은 가히 '광기'의 시기였다. 확인되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부정과 부실 의혹'이 통합진보당 진상조사위원회라는 공적 조직을 통해 '사실'로 규정되어 전사회로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하루아침에 통합진보당은 '부정선거당'이 되었고 비례후보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사퇴 요구'에 직면했으며 '선 진실규명 후 사퇴여부 결정'을 내세우며 이를 거부한 4명, 특히 당선자 신분인 2명은 본인들의 구체적인 잘못도 없는 상태에서 '부정하고 비도덕적인 정치인'으로 매장되었다. 이정희 대표 또한 그 과정에서 '마녀사냥'의 희생물이 되었다. 진실은 필요 없었다. 바닥 아래 내동댕이 쳐진 통합진보당의 도덕성과 신뢰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만이 요구되었다. 나는 그 한 달 동안, 그리고 그 이후 과정에서도 우리사회 내부에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광기'와 '파시즘'과 '차별의식'을 목격했다.
참담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정의와 진실, 인간존엄성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주권재민과 법치주의 등 서구 근대사회가 수 백년 동안 피를 흘리며 쌓아온 인류의 지성이 이제 겨우 60여년 밖에 안된 한반도 남단에, 그것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인류의 지성을 우리 스스로의 것으로 체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고통과 좌절과 희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정희 전대표는 진실이 드러나면서 차츰 우리들 속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활할지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난 과정에서 그녀의 정의와 진실을 향한 그녀의 진정성, 이념이나 정파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과 소중함을 사랑했던 그녀의 진정성, 희생과 상처를 스스로 감수한 그녀의 진정성을 내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은 [김준식의 문학이야기 http://www.djjb.kr/html/6_2.html]를 참조하시길.. 나는 문장력이 짧아 진정성을 표현할 수가 없으니...ㅠ) 나 뿐 아니라 수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진정성과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희는 동년배의 일반적인 성장과정을 거친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피아노를 잘 쳤던 어린 시절, 두부공장을 하며 평생 일밖에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 해마다 여름이면 물이 차올라 주인집으로 피신했던 지하 단칸방 생활. 가족 여행은 물론 외식조차 쉽게 할 수 없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이를 위해 아버지 두부공장의 철제 책상에서 공부했다. 그녀가 대학입시를 준비할 당시에는 그래도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기였다. 1987년 당시 학력고사 인문계 여자 전체 수석으로 서울대 법과대학에 합격했다. 24년이 지난 최근에는 이정희와 같은 중하층 서민의 자식이 서울대에 가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 어려워졌다.
물론 그런 그녀에게도 뜻밖의 열등감이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내내 신문 한 장 읽지 않고 사진선다형 문제만 풀며 단순하게 살아온 나에게 대학과 사회로 열린 문은 육중하고 거대했다. 열등감을 느꼈고 많이 긴장했다”(p.40)고 고백한다. 6월 항쟁을 겪으며 민주주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스스로 알지 못하는 ‘내면의 궁핍’이 컸다.
그 궁핍을 채우고자 이십대의 이정희는 땀 흘리는 노동 현장의 삶을 열망했다. 하지만 그 노동의 일상이 낯설고 두려웠다. “겨울에도 따뜻한 물로 매일 머리를 감을 수 있는 집을 떠나 찬물조차 쓸 수 없는 곳”(p.42)으로 가는 게 두려웠노라고 토로한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1980년대를 살았던 대다수의 '건강한 대학생'들의 두려움이자 부채의식이었다. 당시에는 적지 않은 수의 대학생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노동현장으로 투신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잘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에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의 좌절감은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고 내면의 궁핍을 채워나간 계기는 여성운동이었다. 여성운동의 이론과 경험을 공부하고 공감하면서 비로소 알고 싶은 것이 생겼고,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열망이 생겼다. 그녀는 십대의 마지막 시간과 이십대의 절반을 여성운동을 하면서 보냈다.
한편, 가족은 오늘의 이정희를 있게 한 또 다른 힘이었다. 이 책에는 평생 두부공장을 하며 일만 하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 열한 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부부의 연을 맺은 남편과의 연분홍빛 연애, 공동육아와 대안 학교를 통해 키워낸 두 아이에 대한 사랑, 그리고 몇 년 전 뇌종양으로 돌아가신 시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빠짐없이 드러나 있다. 특히, 일하는 엄마로서 제때 아이들을 챙겨 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절절하다. 그래서 가족은 그녀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존재, 살아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나의 뿌리가 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고마운 존재”(p.69)다.

이정희의 삶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18대 국회의원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인권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이는 어떤 거창한 명분이나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착하게 살자’라는 삶의 신조를 ‘정말 끝까지’ 지키려는 우직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정치는 모든 것을 거는 일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책임지는 일이며,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방편이다. 하지만, 소수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으로 살아온 지난 4년간의 뼈저린 경험을 통해 힘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진보 집권의 생각이 움텄다. 그것은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겪은 쌍용자동차 파업 같은 슬픈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쌍용차 사태 이후, 힘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집권해야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생겨났다. 다시는 이런 전근대적인 인권 유린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노동자들이 노동자들과 싸우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정리해고 앞에서 무기력한 정부가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하게 물을 수 있는 정부를 만들고 싶었다.”(p.126)
이런 슬픈 패배를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해 그녀가 내린 정치적 선택은 통합진보당의 결성이었다. 더 이상 밥상 위에 놓인 ‘소금’처럼 제한된 역할이 아니라, 진보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밥상 자체를 새로 차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통합진보당을 통해 옳은 것이 반드시 이기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정의, 자유, 평등, 인권, 평화, 민주주의, 경제 개혁, 복지 등과 같은 공동체의 기본 가치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그 지향점을 노동 존중 평화복지국가로 제시한다.
 
안타깝게도 이 책을 발간한 지 3개월 만에 통합진보당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그녀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져가는 듯이 보인다. 그녀는 지난 5월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스스로 안고 '침묵의 형벌'을 자처했다. 그녀는 지금 이 책 속에서 꾸었던 꿈의 크기와 높이보다 더 커다랗고 깊은 어둠 속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 어둠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과정을 복기할 것이다. 나는 그녀가 사태의 궁극적인 원인과 책임을 외부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않고 스스로에게서 찾아내기를 바란다. 모든 과정은 상대적이과 상호작용을 통해 벌어진 일이지만 언제나 자신이 그 전개과정에서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번 기회를 스스로가 더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낙관적이고 강해지는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그녀 스스로가 말했듯이 정치는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권력과 돈으로 잠시 힘은 가질 수 있지만, 그 무엇으로도 끝까지 함께하는 마음은 얻지 못한다. 마음은 오직 마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그 마음들을 모아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정치라고 나는 믿는다.”(p252)  
 
[ 2012년 7월 07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어려서부터 '종교'에 대해서는 그렇게 좋거나 긍정적인 기억이 없다. 초중고에 다니면서 배운 아주 상식적인 수준으로 종교의 역할이나 기원 등에 대해 알 뿐이다. 개인적으로 개신교에 대한 기억은 크리스마스 때 과자를 준다고 찬구가 꼬드겨서 한 두번 교회를 갔던 기억과 고교시절 KSCM(Korean Student Christian Movement)라는 무슨 비공개 모임에 한 두번 가고 수련회까지 참석한 후 재미 없어서 그만둔 기억이 있다. 대학에 올라와서는 1학년 겨울방학 때 개신교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세미나 모임에 몇 차례 참석했을 뿐이다. 고모와 누나가 독실한 개신교인이고 성품이 착해서 교회 다니면서 봉사활동하는 모습에 "그렇게라도 사회활동하면 좋은거지"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불교의 경우에는 사찰을 몇 번 구경갔을 뿐 별로 접촉할 기회가 없었고 카톨릭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종교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기억과 느낌이 존재한다. 개신교의 경우 국내의 상당수 교회나 목회자들이 '몸집 불리기'에 매진하는 모습, 지하철과 광장 등에서 만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광신도, 대학시절 학교 광장에서 미친듯이 울고 기도하던 CCC 회원들, 언론에 간간히 터자는 목회자들의 비리와 부패와 범죄행위가 나에게 '종교의 부정적인 상징'이 되었다. 대신 빈민들이나 농민들, 노동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다가가고 그들을 위해 처벌과 고통을 감내하는 개신교 목회자들의 모습은 개신교에 대한 긍정성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 느낌은 불교와 카톨릭, 천도교 등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다만, 천주교의 경우 비리나 부정이 많이 기사화되지 않았고 1987년 '박종철 고문차사 은폐조작'을 폭로하는 등 자유와 정의와 평등을 위해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내가 늙어서 만약 종교를 가진다면 카톨릭이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몇 년 전까지 종교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종교란 이데올로기의 일종이고 인류 문화의 하나 정도로 생각했고 '인류의 많은 문화유산 중 하나'로 치부하고 살았다. 종교 이외에도 내가 궁금하고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은 것은 무진장했으며 주변에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종교를 가진 이들 조차도 '종교를 가지는 것을 회의'하게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몇 년 전부터 종교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언젠가 성경, 불경, 코란 등 주요 종교서적을 한 번 읽어봐야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몇몇 종교인들의 삶과 저서를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종교의 가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법정스님이 돌아가신 후 읽게된 스님의 저서를 통해 불교 뿐 아니라 종교 전반에 대해 갚게 다사 생각하개 되었다. 그 뒤 법정스님이 추천해주신 책들 중 <끝없는 여정>, <비노바 베베>,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그리스인 조르바>, <승려와 철학자>,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등을 연이어 읽으면서 종교에 대해 점점 더 알고 깨닫는 바가 늘어난다.(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궁극적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법정스님이 불교에 대해 흐릿하게나마 '눈을 뜨게' 해주었다면 아베 피에르 신부의 이 책은 나에게 기독교(개신교와 카톨릭)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었다. 

피에르 신부는 성경이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하느님, 믿음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깨트려 주었다. 나는 지금껏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내세에서 천당'에 가기 위해, '그분의 아들인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에르 신부는 그런 믿음을 비판한다. 
그는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며, 그것이 그분의 본질을 이룬다." 따라서 그에게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우리가 또는 그들 스스로 비신자로 부르는 사람들 간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확신한다.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라뜰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길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그는 성경 귀절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나누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자문했는지를 묻는 것이라고 말한다.
피에르 신부는 하느님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 저 멀리 우주 어딘가에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사랑하는 사람 하나하나의 존재 속에, 풀뿌리와 작은 벌레 속에도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한 피에르 신부는 올바른 선교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통상 국내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은 가도와 찬송, 무슨무슨 성경공부모임, 노숙자들에개 점심 제공, 정기적으로 사회적 약자 도우미 활동 및 성금 모금, 가정이나 개인을 ?아다니며 선교활동하는 것을 자신들의 주된 신앙생활로 삼고 있다. 
하지만 피에르 신부는 '엠마우스 공동체 운동'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에게 단순히 '먹고 입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주었고 그들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단지 '인종적인 이유로 학살당하는' 유대인의 탈출을 도와 나치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이 책에서 피에르 신부는 솔직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얘기함과 동시에, '더불어 사는 기쁨', '나눔의 철학', '실천하는 사랑' 등, 이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핵심적인 메시지들을 그 이야기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삶의 '기쁨'은 결코 멀리 있거나 거창한 것이 아님을, 목이 마를 때 물 한모금 속에서도 무한한 기쁨을 맛보게 되듯이, 이웃과 더불어 베풀고 나누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데서 오는 것이며, 타인이 바로 내 삶의 '기쁨'이라는 단순한 진리와 깨달음을 얻기에 이른다.

출판사의 책 소개가 재미있다.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선정한다. 그리고 이 설문조사에서 8년 동안 무려 일곱 차례나 1위에 오른 인물이 있다. 올해로 아흔 살을 맞는 노사제 피에르 신부. 연예인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기경이나 교황도 아닌 그냥 보통의 성직자에 불과한 그에게 사람들은 왜 그토록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걸까? 바로 이 책에 그 답이 담겨 있다. 이 책은 현재 전세계 44개국 350여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빈민구호 공동체 '엠마우스(Emmaus)'의 창시자인 피에르 신부의 자전적 기록이자, '노사제가 우리들에게 털어놓는 고백성사'이다."

 

한국 내 기독교 목회자들과 신도들, 특히 개신교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한다. 피에르 신부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 내 개신교 목회자의 90% 이상이 '종교적 광신자'이고 종교를 신앙이나 영성이나 사랑이 아닌 권력과 부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니... 


* 인상 깊은 문장 :

- 오늘날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회교 등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광신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혼동한 데서, 종교에 대한 개인적 추구가 정치적 권위에 대한 욕망으로 전환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절대자에 대한 개인적 탐구는 성스러움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의 정치적 탐욕으로 변질되어버란 절대자는 온갖 형태의 광신을 향해 열린 문과 같다.(p.133)

- 예수께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이외의 그 무엇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실천에 옮기고자 애쓰다 보니 나는 일평생 사랑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p.180)
 
[ 2012년 7월 05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