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7
김동훈 지음 / 책세상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민주통합당이 우리사회의 가장 큰 현안 중 하나인 교육개혁을 위해 '국공립대 연합체제 개편'을 검토한다는 언론 기사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달 21일 국회에서 ‘대학서열화·학벌 타파를 위한 국립대학 체제 개편 토론회’를 개최해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수렴했다. 국립대학 체제 개편의 요지는 “기존의 서울대, 경북대, 전남대 등 국립대학을 하나의 연합체제로 묶어 강의와 학점, 교수의 교류를 자유롭게 허용하고, 졸업장도 공동으로 주자는 것”이다. 민주당은 국공립대 연합체제가 대학 서열화 완화와 입시 문제 해소, 고교 교육 정상화, 지역균형 발전, 대학경쟁력 강화 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민주당 대선주자 가운데 손학규 상임고문이 ‘서울대와 거점 지방국립대의 공동학위제 실시’를, 조경태 의원이 ‘서울대 학부과정 폐지 및 대학원 중심대학화’를 공약으로 내놓은 바 있다.
요며칠 인터넷이나 SNS에는 찬반 양론이 거세다. 대부분 찬반 의견의 경우를 보면 대학서열화나 학벌 타파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근거하여 말하는 듯이 보인다. 또 다른 일부는 정파적인 의견을 보이기도 한다. 서울대 김 모 교수의 경우 국공립대 연합체제(안)은 '좌익 포퓰리즘'이라고 폄하하면서 자신의 더 실현불가능한 대안을 '원칙적'이라는 이유로 제시하기도 한다.
 
만약 민주당이 자세한 내부 연구와 검토 없이 섣부르게 '국공립대 연합체제 개편' 공약을 추진한다고 해서 이를 폄하하거나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그 공약을 추진하는 취지가 '대학서열화와 학벌의 타파'라면 그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국공립대 연합체제 개편(안)'이 본래 취지에서 부족하거나 위험한 부분이 있으면 광범위한 논의를 통해서 보완하고 더 적절한 방안으로 진화시키면 될 일이다. 강준만 교수가 제안한 '서울대 학부의 단계적 축소'도 검토하고 김경근 교수가 제시한 서울대와 국공립대의 역할별, 기능별 분화도 검토해야 한다.
12월 대선을 맞이하여 아주 오랜 만에 학벌 타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박근혜나 새누리당의 정책이나 공약을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들이야 워낙 겉으로는 어떤 사탕발림을 하더라도 결국 기존 불평등과 착취 구조를 강화시키는데 혈안이 된 작자들이라...ㅋ 하지만 민주당이나 소위 '진보진영' 내부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정책대안과 제안들을 전국민적, 전사회적 논의로 확대하고 그 과정에서 학벌주의사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얻으면서 현재 수준에서 서로 가능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낼 생각을 해야 한다. 상대방의 주장과 의견을 폄하하고 깔아 뭉개려는 자세나 태도는 다양한 논의를 가로막고 감정적인 논쟁으로 치닫을 우려가 있다.
 
내 생각에 대학서열화와 학벌 타파는 단순히 '교육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학벌주의사회'는 교육부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차별을 일으키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서열화와 학벌 타파는 단순히 교육부분과 관련한 정책을 고민해서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에서는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인사정책에서 학벌 차별 완화를 추진해야 하고 대기업 등에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와 비슷한 인사정책을 추진해야 한다.(일본 전경련은 이미 그와 비슷한 정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사법부와 입법부도 행정부의 정책 취지에 발맞추어야 하며 언론과 대학 등도 이에 발맞춰야 한다. 대학의 경우에는 모대학 출신의 교수 임용을 의식적으로 줄여야하며 특히 서울대와 국공립대는 제도적으로 이를 추진해야 한다. 교육부분에서도 자체적으로 대학서열화와 학벌 타파를 위해 점수로 서열을 매기는 수능이 아니라 자격고사 같은 대학입시제도를 도입해야 하고 '우수한 성적의 학생'을 선발하여 '우수한 대학(명문대)'이 되려는 쉽고 편안한 길이 아니라 대학 내부의 교수와 연구 경쟁력을 키우고 신입생 선발능력을 제고하여 대학간 선의의 경쟁으로 '명문대'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1999년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를 발간하면서 대학서열화와 학벌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주장을 펼친 소수의 지식인 중 한 명이다. 그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지식 권력의 핵심인 대학교수로서, 사회가 제공하는 이익을 묵묵히 향유하며 침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두 발을 담고 있는 교육 현실, 나아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학자. 2000년 10월 이 책의 저자 김동훈과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을 발족시키고 인터넷 홈페이지(www.antihakbul.org)를 개설, 학벌사회의 질곡과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산적인 토론을 진행했다.  

저자는 우리의 학벌이 우리 사회의 교육뿐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방위에서 위용을 떨치고 있는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 사회를 '학벌사회'라고 명명할 때, 그것은 사회학적으로는 변형된 신분제적 가치와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임을, 정치학적으로는 사회적 권력의 배분이 학벌이라는 네트워크에 의해 파당적으로 분배되는 붕당적 사회임을, 경제학적으로는 한 사회가 생산해내는 부와 권력을 소수의 학벌집단이 독점으로 차지하는 독과점사회임을, 문화적으로는 학벌이라는 집단적 편견이 개인의 인간관계의 형성, 결혼, 취업, 자긍심 등 일상의 모든 영역에 파고들어 문화적 심리적 갈등을 빚어내는 갈등사회임을 뜻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가장 급박하고 시급한 핵심적 의제가 '학벌'이라고 판단한 저자의 이 책은 학벌체제하에서 자유롭지 못한, 조금씩이라도 그 질곡의 고통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의 피부에 와닿는 매우 구체적인 현안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우선 학벌사회를 옹호하는 견해들을 크게 경쟁동기론, 기회균등론, 능력지표론 등으로 분류하여 그 주장의 부당함을 논박한다. 흔히 학벌사회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로 경쟁에 의한 사회 활력, 공개시험을 통해 공정하고도 균일하게 제공되는 기회(예를 들면 현 입시제도), 근대사회에서 학벌은 가장 신뢰할 만한 능력 판단 기준이라는 것 등이 있는데, 저자는 다음과 같은 입장으로 이 세 가지 논리들을 비판한다. 첫째, 경쟁을 유발하는 현행 대학 입시제도는 입시 후의 전 생애에 걸쳐 '출신대학'이라는 종신형 간판에 의해 경쟁의 모티프를 앗아감으로써 우리 사회를 정체시킨다는 것(결국 진정한 경쟁체제가 아니라는 것). 둘째, 사실상 공평한 기회가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계층 이동을 고착화시키고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대물림시킴으로써 실제로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를 협소화시킨다는 것. 셋째, 현행의 입시제도가 개인의 능력 계발이나 판별과는 거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 꼭 수능성적 고득점자가 우수한 인재이거나 창조적 소수자는 아니라는 것. 명문대생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지닌 능력의 우월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 기회의 선점에서 온다는 것. 따라서 입시경쟁과 학벌에 기초한 현재의 학벌독점 현상은 어떠한 자기 정당화 근거도 갖고 있지 않은 기득권 세력의 수탈구조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학벌사회 옹호론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하여 학벌사회의 수혜자와 방조자, 피해자가 누구인지 그 이해갈등 상황에 대한 차분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뒤이어 언론의 행태, 사교육업자의 이권, 명문대생의 탐욕, 중고등학교와 교육 관청의 방조 등도 면밀히 파헤친다. 
서울대나 연고대를 졸업하지 않았다고 하여 '학벌주의자'와 '학벌주의 옹호론자'들의 편협하고 악의적인 주장에 주눅늘거나 눈치볼 필요는 없다. 악덕재벌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꼬우면 너도 돈 벌지 그랬냐?"고 말할 수 없듯이 부당하게 기득권에 편입된 '학벌독점자'들에게 구체적인 근거와 주장을 합리적으로 펼치게 되면 그들이 그렇게 날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방식으로 극소수가 절대 다수를 차별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우리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만 할 '숙제'일 뿐이다.

그렇다면 학벌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현재 한국 사회의 모든 권력의 요직을 서울대학 출신의 '학벌의식에 찌든' 동문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보았을 때, 학벌사회 극복을 위한 가장 이상적 방안으로 서울대 폐교론이 제시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의 실현불가능성을 염두에 둔 저자는 먼저 대학서열을 완화, 철폐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시급한 제도적 과제라고 말한다. 학벌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현재 고착된 대학서열 체제의 몫이 크기 때문이다. 약간 유보적이기는 하지만 대학평준화론, 국립대의 민영화를 통한 사립대와의 차별해소, 인제지역할당제 시행을 통한 비수도권 지역의 대학들에 대한 획기적 배려 등이 그 대안으로 모색되고 있다. 또한 학벌체제의 하나의 기둥인 대학입시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현재의 전국 단위 국가관리 입시제도를 즉각 철폐할 것, 대학 스스로가 다양하고 총체적인 접근에 의한 교육적 선발을 해나갈 것, 입학절차를 비공개로 하여 대학과 학생 간의 관계를 사적인 계약관계로 머물게 할 것 등이 그 제안들이다. 아울러 대학의 다원화, 개방화를 통해 학벌의식의 심리적 기반이 되는 폐쇄성을 깨뜨릴 것, 대학평가체제를 정착할 것도 덧붙인다. 물론 이러한 제도적 개혁과 더불어 학벌차별과 편견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다양한 형태로 구체적인 의식개혁 운동을 펼쳐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저자가 검토하고 제시하는 대안은 분명하지 않다. 대학평준화도 개론적 성격이고 국립대 민영화 역시 원론적인 수준이다. 인재지역할당제 정도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저자가 제시하는 '국립대 민영화 또는 독립법인화'는 본말이 전도되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꺼꾸로 풀어가는 모양새 같다. 현재 국립대학이 사립대학보다 국가재정이 많이 투입되는 문제는 사립대학의 공공성을 강화하면서 국가재정을 국립대 수준으로 투입해야 하는 방향성을 추구해야 하는 문제이지 꺼꾸로 국립대학을 사립대학 수준으로 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 스스로 책의 앞 부분에서 분석했듯이 서울대는 이미 대학서열체제와 학벌독점의 정점에 군림하기 때문에 민영화나 독립법인화처럼 운영의 주체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저자가 헷갈리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정책대안이 '공기업 민영화'처럼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처리해 버리는 꼴이다. 그건 아니다.

 

다수 피해자들의 한 목소리가 소수 수혜자들로 하여금 각성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 그런 의미에서 책의 말미에 실린 '의식개혁을 위한 일곱 가지 요구사항'은 우리 개개인도 스스로 실천할 만하다.
하나, 학벌을 묻지 않고 밝히지도 않는 관행을 정착시키자.
둘, 학벌 관념을 조장하는 언론과의 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해나가자.
셋, 학벌을 차별하는 기업들을 고발하자.
넷, 대학 특히 명문대의 학벌조장 행위를 집중 고발하자.
다섯, 고등학교의 반교육적 입시지도를 지속적으로 고발하자.
여섯, 고등학교 학생들의 목소리를 끌어내자.
일곱, 사교육 시장의 학벌 관념 조장행위에 제동을 걸자.
 
아무튼 내가 최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분야가 교육부분이었는데 마침 사회적으로 논의가 활성화되어 의미도 있고 반갑기도 하다...^^ 
 
[ 2012년 7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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