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
안병길 지음 / 동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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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교재로 만나게 된 이 책은 먼저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이라는 제목에 끌렸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아! 제목에 낚였다...ㅠ"라는 느낌이 얼핏 들었지만 기존의 정치학자나 이론가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방식과 조금 다른 관점과 방향을 제시한 것은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은 도입부도 조금 혼란스럽다. 저자 안병길은 이 책의 서문을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의 가면을 벗깁시다!"라면서 시작한다. 그는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소모적인 보수/진보, 좌파/우파 싸움"이라고 규정하면서 자신이 '그 망국적인 싸움을 자유민주주의라는 준엄한 칼로 잠재워 버리'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권위주의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곧바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그래서 떨떠름하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의 도입부를 쉽게 수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 좌파와 우파의 싸움이 자유민주주의와 대립하는 것인가? (결국 저자 자신도 책의 본문에서 주장하듯이) 자유민주주의의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것은 권위주의와 독재(파시즘)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와 파시즘은 한마디로 말해 상대방의 존재와 의견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주장을 떠나서 상대방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하는 이념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나 좌파와 우파의 싸움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인념대립 문제의 성격은 '대립과 싸움'이 일정 정도의 선을 넘어서 상대방의 존재를 억압하고 지우려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며, 더 나아가 보수와 우파가 권위주의와 파시즘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과 노태우, 김영삼과 이명박, 그리고 그들의 일당독재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을 공권력으로 짓누르면서 진보적인 세력과 좌파진영을 국가보안법과 형법, 각종 악법으로 탄압했다. 조중동을 비롯한 우익언론과 우익세력은 진보와 좌파진영을 포함한 비판세력에 대해 친북이니 종북이니, 빨갱이라고 매도하면서 남북분단 상황을 악용하여 비판세력 전체를 늘 공식적인 공간에서 지우고 없애버리려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 반면에 김대중과 노무현,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으로 대별되는 진보세력과 좌파진영, 그리고 비판세력의 경우 지난 10년간 정권을 잡은 기간 뿐 아니라 그 전후 기간에도 우익세력이나 우파진영을 '없애버리려고' 공권력을 동원한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사회 내의 진보, 보수세력의 태도와 입장에 대한 저자의 선입견, 혹은 대전제에 대한 비판은 이 정도에서 끝내고 저자가 제기하려는 '자유민주주의'의 본모습을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과거 독재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을 속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자유민주주의는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였다"고 규정한다. 반공만이 자유주의라고 강변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정파만이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이상향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진보세력과 좌파진영을 향해 제기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란 "개인주의에 기초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보편적 정치,사회 이념"이라고 정의를 내리면서 책의 본문에 들어간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권위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가 ‘맞짱’ 토론을 하면 권위주의자가 이길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럴까? 권위주의자는 오로지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자유민주주의자는 상대방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자의 주장이 깊어질수록 자유민주주의자는 지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전체 사회로 확대해 보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권위주의자의 공격에 약자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지금 권위주의자들이 우리의 일상과 정치에서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강자로 군림하면서 수많은 억압을 행하고 있다. 자신들이 하는 것이 오로지 선이고, 민주적이라며 거짓말까지 일삼고 있다. 사회적 약자는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권위주자의자에게 늘 당하기만 한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쳐 나갈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럴 때 자유민주주의의 속성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자유민주주의자가 많아야' 한다. 힘을 합치지 않으면 권위주의자들의 폭압에 심하게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권위주의자에게 저항해야 하고, 사회에 참여해 발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이런 자유민주주의가 잘 작동되기만 하면 약자가 충분히 강자를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적인 권위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자유와 민주가 제대로 정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저자의 전략과 방법이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저자 스스로 우리 사회에 자유민주주의자가 많지 않다고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왜곡되어 있으며, 잘 구현되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말대로 상당수 시민들이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개념부터 시작해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의 일상과 정치에 적용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합리적 선택 이론, 맞대응 전략, 게임이론 등을 활용하며 약자가 어떻게 강자에 맞서 이길 수 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저자는 우익단체에서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권위주의'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의견과 다르면 상대방을 일종의 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시각을 권위주의적이라고 정치학에서는 말한다. 반공은 선, 공산주의는 악, 그런 식이다. 따라서 반공만 자유주의라고 고집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시각이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권위주의이지 절대 반공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권위주의자의 '엉터리' 자유민주주의 가면을 벗기자고 권하고 있다. 시민 스스로 자유민주주의 기본을 깨우치고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저항하고 투쟁해야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 헌법에는 분명히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가정, 직장, 인터넷 공간, 정치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자유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보수우익에서 사용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처럼 어느 누구도 이 용어의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상태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저자는 우선 도덕, 윤리 교과서부터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개인의 권리보다는 공동체, 국가가 더 소중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자유민주주의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출발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이타주의와 공동체를 너무 강조한다. 애매모호한 공동체 잣대를 들이밀면서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착하게, 바르게, 관용을 베풀면서, 전체를 위해 살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공동체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마치 전체에 해를 끼치는 것처럼 조장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는 오히려 권위주의 분위기를 조장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이 되려면 반드시 교과서 내용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교과서에서 강조하듯 법과 질서는 시민이 지켜야 한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개인주의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교과서가 설명하듯이, 그 존재 자체가 모호한 공동체를 위해서 지키라고 하면 감동이 일어나겠는가?"
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를 살펴보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곧 자유주의에는 자유, 권리, 그리고 저항이라는 개념이 작동하고 있고, 민주주의에는 단순과반수 원칙, 주권재민, 평등이라는 개념이 작동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서로를 돕기도 하면서 우리의 생활과 정치에 작동하고 있다. 저자는 독재와 권위주의의 망령이 끊임없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국가가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하지만, 이것이 잘되지 않을 때는 시민과 개인이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저항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잘 작동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개인 스스로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남의 자유와 스스로의 자유를 잘 지켜야 하며, 부당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저항을 해야 조금이라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4대강,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 문제, 촛불시위 등 정치적 이슈를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으로 분석한다. 과연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걸맞게 자유민주주의적으로 일을 처리했을까? 저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밀어붙인다는 자체가 자유민주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대운하나 4대강 살리기도 마찬가지이다. 추진하는 쪽은 항상 공공복리를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공공은 애매하지도 않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과반수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공공의 이익이라고 하지 말고, 아예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는 권위주의적 주장을 했다면 알량한 일관성이나마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또 촛불시위 때 '정권 퇴진' 구호가 난무했다고 해서 집회가 순수성을 잃고 변질되었다고 비난했는데, 저자는 정권 퇴진 구호는 자유민주주의 속성상 하나도 문제가 될 게 없다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이 정권에 대해서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운동도 합법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 
진보, 중도, 보수라는 이념 스펙트럼도 자유민주주의 안에서 논의될 수 있을까?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사상의 자유와 정당 설립의 자유가 보장되므로 공산주의 정당도 원칙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헌법 어디를 뒤져 봐도 공산당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조항은 없다. 그러나 분단국가라는 구조 때문에 공산주의 정당이 우리나라에 발을 붙이기 힘든 것이지 공산주의 정당이 불법인 것은 아니다. 민주적이라는 조건만 충족시키면 공산당도 우리나라에서 허용된다고 봐야 한다. 곧 자유민주주의 국가에는 어떤 이념도 허용되며, 서로의 이념을 바탕으로 공정한 경쟁을 치를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제도가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시하는 원리인 '단순과반수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아직까지 민주화 이후 과반수 유효득표를 한 대통령 당선자가 없었다. 공공선택이론 관점에서 보면 이런 선거제도는 결정정인 결함이 있는 제도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단순과반수를 적용할 수 있고, 우리나라 정치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역구도의 정치 틀이 깨질 수 있고, 중도나 진보정당의 활동 폭이 넓어질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대통령 선거제도뿐만 아니라 지역주의 완화를 위해 국회의원 선거제도도 개선하자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일상과 인터넷에서 자유민주주가 더 잘 구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생활화되어야 사회나 정치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더 잘 작동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야 약자가 강자에 맞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많은 부분을 할애해 일상과 인터넷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사회 개선을 위한 성냥불 운동'을 제안한다. 이것은 "작은 곳에서, 가능성이 큰 것부터 시작해서 더 큰 부문으로 옮겨 가는 방식"이다. 곧 개인부터 잘하자는 운동이다. 조그마한 자유민주 성냥불들이 모여서 자유민주주의를 더 밝게 비추는 큰일을 해내는 것이 현실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혁명적인 변화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 지키기에 최선을 다하면 더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를 더 빨리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시기입니다. 국가와 정치인의 방종에 경계선을 그어 주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인 자유민주주의 참여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아울러서 더 많은 시민이 국가의 간섭이 필요 없는 인터넷 자유공간을 지키기 위한 조그만 성냥불을 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2012년 7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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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교문화와 입시드라마
김철훈 지음 / 문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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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지인들에게 우리 사회의 초,중,고교 학생들의 '입시지옥'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개의 경우 공감하고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우리 세대가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나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닌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40년 전이다. 학창시절에 경험했던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단편적으로 강한 기억만 남았을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이지만, 우리 세대가 다니던 학교, 특히 중,고등학교보다 현재 중,고등학교가 대학입시에 훨씬 몰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대학입시에 대해서 학교 전체가 요즘처럼 강하게 압박하지 않았다. 그런 압박은 사회나 언론, 부모나 친지, 사회문화적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는 사회도 가정도 최소한의 생존과 먹거리가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의 학교와 교육에 대해 들여다보면 볼수록 내가 경험한 학교제도나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완전히 딴판이란 것을 자주 느낀다.
 
저자는 그런 내 문제의식과 고민에 대해 좀 다른 방향을 통해 비슷한 결론이 도출되는 분석 결과를 보여준다. 그는 한국 사회의 학교문화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의 입시 문화에 대한 교육사회학적 접근으로 '비판문화기술지'를 시도한다. 역대 정부가 교육 개혁을 위해 다향하게 시도하고 처방을 내렸지만 결코 학교 교육과 문화는 변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에 대해 '다양한 이해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교육행위자들의 복합적 관계망' 즉, 학교의 사회 문화적 맥락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시도한 것이다.(문화기술지 文化記述誌 ethnography란 인간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현상을 정성적, 정량적 조사기법을 사용한 현장 조사를 통해 기술하여 연구하는 학문의 분야이다. 문화기술지는 어떤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각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을 통해 전체 시스템의 총체적 연구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학문적 용어는 어려워서 여기서 생략...ㅋㅋ)
저자는 1990년대 후반 1년 동안 'T' 광역시 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직접 관찰자 및 행위자로 참여하면서 학교현장, 학교운영, 교직문화, 학생문화 등을 기록하였다. 그 경험과 기록을 토대로 다른 학자들의 중등교육 연구내용과 일반적인 교육, 학교에 대한 연구결과를 비교하면서 해석학적 그리고 문화지판기술지 방식으로 학교문화와 사회적 맥락을 분석하였다. 저자의 학교 현장에 대한 기록과 분석은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교사와 학생을 망가뜨리고 또한 방치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학교생활 속에서 우리가 간관해 버리는 작은 일상들을 통하여 교사들과 학생들의 삶을 간략하게 그려 본 밑그림은 입시 중심 교육을 표방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생활의 문화적 주제인 '진학과 질서유지'이다. 이것은 교사와 학생들에개 끊임없이 강조되는 대학 진학을 위한 학습과 성취 수준을 높이기 위한 욕구 유보의 강조로서 교칙 준수라고 할 수 있다. 인문계 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고 내면화해야 하는 것은 진학을 위해 학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교사와 학생들은 궁극적 목표인 진학을 위해서 모든 정열을 바쳐야 한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학생들의 성공적인 진학을 위해서 교칙 준수를 강조하게 되고 학생들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통제하게 된다."

교직 문화는 반복적인 생활과 입시 중심의 현실에 적응하고 부합하는 모습인 '무력감과 형식성'으로 나타난다. 학교는 교장을 중심으로 '투입-산출모형'의 맹신으로 학생들에게 수많은 학습을 강요하며 '결과 제일주의'를 지향한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입시에서 더 많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포괄적 문제풀이 수업'을 선호한다. 입시와 관련 없는 교과는 본래의 수업 모습을 잃어버리고 국영수 등 주요 과목의 들러리 역할만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교사들은 무력감을 경험한다. 또한 업무 과중과 입시에 초점을 둔 학사행정으로 교사들은 거의 모든 일에 형식적 절차를 강조한다. 특히 학생생활기록부 작성은 일정한 틀에 맞추어 획일적으로 작성된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긍정적 보상보다 부정적 강화물로서 체벌을 즐겨 사용한다. 담임 교사들은 과밀학급을 운영하기 위해 반장 중심의 '집단주의 학급 운영'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학생들을 분류하여 그에 맞는 역할을 부여하고 학부형들의 지원체제에 대응한다. 학교 제도와 시스템이 교직문화를 지배하는 것이다.
직무에 대한 교사의 동기부여 체계는 포상, 담임 배정, 격려, 보상 등이 있다. 입시 압력과 단조로운 학교생활을 견디기 위해 교사들은 적극적인 역할 수행, 전략적 순응, 시간 때우기, 각종 취미생활이나 오락에 심취하는 것 등을 생존전략으로 채택한다. 그러나 제도적 압력에 대하여 교사들은 최소한의 경계 안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저항하기도 한다.

학생들은 억압적인 생활을 강요하는 입시 및 진학 중심의 학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다. 이것은 특히 성적에 의한 차별과 체벌이 그 전형을 이룬다. 학교는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학생들을 학습으로 유인하기 위해 의식조회, 체육대회, 종합전과 가요제 등 여러 가지 의례적 행사를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입시에 적극적인 학생이나 소극적인 학생이나 긍정적인 생활에서 소외되기는 마찬가지다.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교사에 대한 대응, 축소, 지향의 놀이문화, 대중매체와 관련된 각종 취미생활, 비행과 일탈, 낙서를 통한 자기 표현 등 여러 전략들을 사용한다. 특히 학생들은 다양한 놀이문화를 통해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키며, 동시대의 인기 있는 여러 취미생활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체벌과 좋은 수업에 기준을 두고 교사들을 분류하며, 교사의 심리나 행동 늑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신들의 승리를 연출해낸다. 학생들의 가장 두드러진 저항은 다양한 일탈과 비행을 통한 교칙 위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진학만 강조하는 학교 분위기와 학생들의 진학을 향한 열망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대부분의 저항은 순응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인문계 고등학교 문화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내부 요인은 학교 의사결정구조, 전통과 의례적 행사, 물리적 환경, 개인적 문화습성, 문화적 연결고리로서 생존전략을 들 수 있다. 그 외부 요인은 대학입시제도, 상급 교육행정기관, 대중매체문화, 학부모와 동창회, 사설입시 관련 기관, 학교 주변 업소의 상업성이라 할 수 있다. 특하 하양식 의사결정구조와 입시제도는 교사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으로 교직문화를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학생문화는 입시문화의 압력과 욕구 충족을 위한 대중매체문화의 자발적 수용이라는 이중저구 구조 내에서 무비판적, 현실순응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사설 입시 관련 기관의 상술은 학교와 가정 사이의 약간의 시간적 공백도 놓치지 않고 학생들의 삶에 파고든다. 학생들의 놀이문화를 생성시키는 지역사회의 업종들은 오락실, 당구장, 노래방 등이 있다. 학교 주변 업소의 상업성은 학생문화를 성인문화처럼 만들어 버린다."
 
 
[ 2012년 7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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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넘어서 - 2010년 개정증보판
이한 지음 / 민들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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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詩習之 不亦說乎)'... 중학교인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이다. 공부나 학습, 교육에 대해 생각할 때 문득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구절이다.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에 공자가 한 말이라지만 당연한 말이면서도 21세기에도 관통하는 더할 나위 없는 진리라는 생각도 든다. 공자의 삶을 생각해보면 공부하는 것이 군자가 되어 나라의 정책을 펼치거나 백성을 위해 일하기 위함이가도 했지만, 역으로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말 그대로 스스로가 '배우고 익히는' 것이 공부이자 학습이고 그것 자체로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는 '고행'이고 '지옥'이 될 것이다. 지난 번 읽은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애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한국 아이들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학부모들도 그렇고 교육자들도 그렇다. 그래서 총선이나 대선 때만 되면 자신이 교육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정치인들은 앞다투어 교육공약을 발표한다. 지난 20년 이상 정치인들은 이런 저런 심각한 공약을 선거 때 제시했다가 막상 정치권력을 획득하면 근본적인 교육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기보다 '대학입시제도'를 개편하거나 되먹지도 않는 명분과 이유를 대면서 섣부른 교육정책을 실시하고 결국 아이들을 더 극심한 입시지옥으로, 학부모들을 사교육 광풍으로 몰아넣는다. 이 땅의 정당과 정치인들이 과연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고통과 좌절에 진심으로 공감하는지, 관심이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여러 전문가나 교수, 학자들이 제시하는 교육문제 해결책을 읽다보면 "아! 이렇게 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싶은 내용도 보인다. 그러면서도 근본적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의식은 벗어나지 않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것은 '근대사회의 제도화'와 '인간 스스로의 자율'의 대립이다. 근대사회 이후 인류는 인간의 기본 생활과 의식주, 건강, 학습, 자치, 안전 등 모든 분야에 법과 제도를 적용하여 왔다. 외형적인 이유는 인구폭발에 따라 복잡해진 인간사회의 현상과 관계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결국 특정 집단의 '이익'이 강화되고 보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자치와 규율은 국가라는 제도와 공무원이라는 집단을 형성시켰고, 건간에 대한 관심은 '의료'와 '의사'라는 제도를 탄생시켰다. 안전은 군대와 직업군인을, 주거는 건축사와 건설회사를, 위생은 상하수도와 공기업을, 보행은 자동차와 도로를, 식생활과 더위와 추위와 어두움은 석유와 석탄과 기업과 통제기구를 가져왔다. 이 모두가 산업사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이제 사람들에게 먹거리마저 외부에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 공부와 학습 역시 학교라는 제도와 교사, 교수라는 자격증을 가진 이익집단을 형성시켰다. 근대 산업사회의 '제도화'의 공통점은 그 제도와 집단에서 벗어나는 순간 곧바로 '부정'으로 낙인찍는 것이다. 건강은 오로지 자격증이 있는 의사가, 폭력과 살인은 면허가 주어진 경찰과 군인이, 공부는 자격증이 있는 교사만 가능하다, 인간 스스로가 공부하거나 치료하거나 방어하거나 먹거리를 만들면 '국가와 법률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처벌한다. 
이런 문제의식의 요점은 한마디로 "근대사회의 제도화는 인간의 모든 자율성을 감소시키고 박탈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반 일리히()의 저작을 통해 이런 식의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의 문제제기와 비슷한 맥락에서 교육과 학교를 다룬다.

이 책은 1998년 처음 초판이 나왔고(이 책을 처음 썼을 때 필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는 저 끔찍한 선착순 달리기에서 맨 앞에 들어온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2003년 개정판에 이어 2010년 개정증보판으로 새롭게 출간된 책이다. 저자와 출판사는 초판이 나오고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의 교육 현실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애 재출간했다고 말한다. '공교육 정상화'와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한 줄 세우기 교육'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고 아이들의 삶의 질은 더욱 나빠져, 교육 문제 이전에 인권 문제로 접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국의 학교는 어떠한가? 저자는 "오늘날 학교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외치는 것은 마치 쌀을 매점매석한 뒤 모래를 섞어 팔아먹는 고약한 상인이 자기가 없으면 모두 굶어죽을 것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고 선언한다." 저자가 판단하는 바로는 학교의 진짜 역할이 다름 아닌 '사회통제' 작업과 '사회계층화' 작업이다. 학교는 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그 두 가지 본분을 다하기 위해 폭력을 생산해 내는 가해자이다. 학교교육은 무늬만 '공교육'일 뿐 그 실상은 블평등하고 억압적인 교육임을 말한다. 

저자는 한마디로 '탈학교 사회'를 꿈꾼다. 교육의 본래 가치는 자율과 자유와 평등이며 현재의 학교 제도는 이런 본래 가치를 역으로 훼손하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 교육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각종 노력, 즉 학습공동체나 학습협동체, 학회, 대안학교나 홈스쿨링 등이 활성화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또 이러한 대안 교육이 정착되기 위해 교육보험제도와 교육화폐제도, 교욱지원시설과 지식개발 사업, 분야별 평가제도와 학습네트워크를 제시학 제도적인 뒷받침을 위해 학력폐지법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 책을 페이스북에 소개했더니 일부 페친들이 '과거의 학교 이야기'라고 치부하거나 '대안학교 마케팅 교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나 역시 초판이 발행된지 12년이나 지났고 그 사이에 학생들의 인권에 대한 여러가지 노력과 진보교육감을 탄생 등으로 학교의 실태가 분명히 개선되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배움을 독점'하는 현행 학교제도가 건재하게 존재하고 여전히 입시지옥과 무한경쟁이 존재하는 한 학교가 본래의 교육가치를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국가기구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 또한 현실일 것이다. 그리고 배움과 학습을 제도가 독점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취지에 내가 동감하기에 저자의 주장과 시도에 긍정적이다.
저자가 '탈학교 사회'를 주장한다고 하여 '교육기관'과 '제도교육' 그 자체를 한꺼번에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교육'을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획일적인 강요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 2012년 7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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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사회 -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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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력을 바탕으로 한 20세 전후의 한 번의 시험으로 20세 이후 개인의 능력이 규정되어 버리는 사회. 이것이 바로 '학벌사회'의 한 단면이다. '학벌'이 독점적 지위와 구조로 자리잡고 대학서열체제의 기반으로 사회 전체를 규정함으로써 입시지옥과 사교육 광품의 근원을 형성하고 있다. 도대체 '학벌'이란 무엇이고 '학벌사회'란 무엇인가? 그 학문적, 철학적 기반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껏 강준만, 김동훈, 김경근, 정진상 등이 출간한 학벌사회와 서울대 독점, 대학서열체제 등에 대한 책을 읽어보았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그 근원을 헤집고 들어간 교수나 학자는 없었다. 김경근 교수가 <대학 서열 깨기>(개마고원, 1999)에서 '학벌'이 '재벌'과 비슷하게 한국 고유의 존재양식임을 주장했고, 김동훈 교수가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에서 '학벌'을 조선 후기 '문벌'에서 뿌리가 이어져 온 것이며 따라서 '학벌'이 한국사회를 '신분사회'로 기능토록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들의 주장을 학문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학벌과 학벌의식, 학벌사회에 대한 철학적 탐구 결과라 할 수 있다. '학벌'을 단순히 한국 고유의 사회적 특징이나 특수현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문제의 철학적, 학문적 뿌리까지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학벌'이 사회적 실체로서 존재함을 철학적으로 분석하여 개념을 규명한다. "학벌이 이렇게 공유된 학벌의식에 의해 결속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어떤 지속성을 갖는 집단적 주체가 될 때, 이 주체는 사회 속에서 일정한 질량과 외연을 가지고 작용하는 사회적 실체가 된다." 그만큼 저자는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기 위해 '실체'로서 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학벌'이 통상 진보학계에서 근대 산업사회(자본주의사회)의 사회적 구조를 분석하는 틀인 '계급'이나 봉건적 사회구조인 '신분'과 일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한국사회의 구조적 실체라 주장한다.
 
"학벌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급도 아니고 신분도 아니다. 학벌이 사회적 불평등의 기제인 한에서 우리는 그것을 계급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번 정해지면 다시 새로운 학벌을 얻지 않는 한,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계급과는 다르다. .... 이처럼 계급과 개인의 귀속관계는 본질적으로 우연적이며 유동적이다. 그러나 학벌은 다르다. 특정 학벌에 대한 귀속관계는 한번 정해지면 다른 학벌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변하지 않는 영구적 관계이다. 학벌이 좋든 나쁘든 그것이 이처럼 개인의 변치않는 규정인 한에서 그것은 같은 사회적 차별의 기제라 하더라도 계급보다는 신분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학벌차별은 계급적 차별보다 훨씬 더 나쁘다. 계급과 달리 학벌은 한번 정해지면 변치 않는다. 한번 지배학벌에 속한 사람은 영원히 그 지배학벌에 속하며 한번 낙오한 사람은 영원히 피지배계급에 머무른다. 이처럼 학벌경쟁에는 이른바 패자부활전이 없다. 스무 살 전후 한 번의 경쟁에서 뒤처지면 영원한 노예의 낙인이 찍히는 사회가 한국이다. 이런 학벌의 고정성 때문에 학벌경쟁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무한경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이 온갖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학벌이 근대적 계급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봉건적 신분에 더 가까운 개인의 고정된 지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벌은 개인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분이라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굳이 학벌을 신분이라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후천적 신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학벌이 계급과 똑같지도 않고 신분과도 똑같이 않다는 것은 학벌문제가 한국사회 고유한 불평등 기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학벌차별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사회 특유의 차별기제인 것이다."(p.123)
 
철학적 분석으로 들어가면 자못 심각해진다. 주체와 주체성, 홀로주체성과 서로주체성, 서로주체성과 사회적 주체성, 시민적 주체성, 공동주체성 등... 이런 철학적 개념으로 들어가면 조금 머리 아프긴 하다.ㅋ "이처럼 보편적 사유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욕망을 매개로 형성된 '우리'의 집단의식 속에 진정한 주체성이 설 자리가 없다. 욕망이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유하지 않는 욕망은 굴레이다. 그때 욕망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인간을 구속한다. 그런데 학벌은 처음부터 자기이익의 극대화 이외에는 아무런 보편적 이상도 담지할 수 엇는 왜곡된 공동주체이므로 참된 의미의 사유와 양립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학벌과 자기를 긴밀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탐욕스러워지고 더 멍청해지며, 마지막에는 더 노예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노예적 정신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주는 학벌의식은 더 이상 깨어있는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야수적 욕망과 모호한 감정일 뿐이다."(p.205)
 
저자는 '학벌'의 철학적 개념규정에 근거하여 '학벌의식'과 '학벌사회'를 설명하고, 학벌이기주의의 구체적인 실태와 학벌사회 및 학벌독점 문제가 결국 서울대의 문제라는 것을 밝힌다. 한국의 경우 '학벌'이 권력과 자본의 '공속'으로 진화하고 있고, 학벌이데올로기와 학벌독점의 사회문화가 어떻게 학벌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 강화하는지 그 연관성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구체적으로 학벌사회가 공교육을 어떻게 파탄시키는지도 과목별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전인교육도, 전문교육도 아닌 입시교육의 폐해는 학생들에게 '생각의 힘'을 말살시키고 '도덕'을 파탄시키며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한다.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교육의 존재가치를 없애버려 아이들이 예술을 멀리하도록 만들고 인간성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움'에 대해 무능한 존재로 양육한다.
 
제목이 말해주듯 저자는 오랫동안 고착화되어온, 최고의 학벌을 얻기 위해 인류대학 진학만을 목표로 삼는 만연된 사회풍조를 가리켜 '학벌사회'라 규정한다. 그리고 심각한 교육문제의 근본 해결점을 철옹성 같기만 한 '학벌서열'의 타파에서 찾고 있다. 나아가 문제의 거점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학벌이자 명문 서울대에 문제의 방점을 찍는다. 이 책은 학벌문제에 대한 그 동안의 선행연구를 정리함은 물론, 구체적 통계자료들을 들어가며 사회 각 분야에서 일부 학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고 지배되는 현상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학벌문제로 상징되는 우리 교육문제의 실상을 폭넓게 연구한 본격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교육의 이념을 새롭게 되새겨볼 뿐만 아니라 '대학과 전문대학의 혼성모방', '반수와 편입시험 몰두', '학문의 식민성' 등 학벌이 야기하는 대학교육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서울대 학부폐지', '대학평준화 정책', '지역별 공직할당제' 등으로 대변되는 학벌타파의 구체적 대안들을 꼼꼼히 제시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 교육경쟁력의 강화는 무엇보다 국가의 부강과 직결되는 문제다.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최선을 다해 그들을 교육하고 사회 적재적소에 진출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는 당당히 앞선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력과 권력을 얻기 위한 맹목적 인류대 선호 심리와 서열 위주의 치열한 입시경쟁은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 뿐 국가경쟁력과는 역행한다. 사회로서는 개인 능력의 지표가 학벌 밖에 없는 현 상황을 타개해야 하고, 개인으로서는 다양한 삶의 선택을 볼 줄 아는 자기의식과 안목을 키워야 할 것이다. 대학은 자율화와 특성화 교육으로 고유의 경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교육은 10년의 큰 계획이라 했던가. 정부는 하루아침에 피고지는 꽃처럼 단기성 정책을 남발하지 말고, 나무 한 그루를 심고 키우듯 앞을 내다보는 정책으로 정성을 들여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일, 특히 학벌타파를 위한 대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우리 각자가 교육문제에 관심을 갖고 작은 실천이라도 즉시 행할 때 가능한 일이다.
 
 
"애교심과 동문애가 진리에 대한 열정을 지양해버린 이런 나라에서 제대로 된 학문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 나라에서 발전하는 것은 학벌이요, 죽어가는 것은 학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어디 대학사회뿐이겠는가? 일과 뜻에 따라 모이지 못하고 학벌에 따라 뭉치고 헤어지는 씨족사회에서는 건강한 시민사회도 건강한 나라도 모두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가족적 유대를 갈구한다. 그러나 확장된 현대사회에서 그것을 채워주는 것은 학벌 밖에 없다. 그리하여 학벌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동문, 선후배를 찾아 결속하고 이를 통해 자기 이익을 도모한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든 그것을 공동의 목표와 이념을 추구하는 통일된 공동체가 아니라 이기적인 학벌문중들의 각축장으로 해체해버린다. 그리하여 학교도, 회사도, 정당도, 정부도, 아니 각종 시민단체조차도 경쟁하는 학벌문중들의 불안정한 연립체로 전락한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학벌이란 우리나라 봉건적 가족주의가 현대적 옷을 입고 다시 불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학벌문제를 근대화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애기다. 문벌이 학벌로 탈바꿈한 것은 분명히 근대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문벌이든 학벌이든 그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가족적 공동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전근대적인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학벌체제를 타파하는 것은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투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문화혁명이다."(p.217)
  
[ 2012년 7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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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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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순조 1년) 2월, 다산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으로 가는 귀양길에 올랐다. 자신의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은 신앙을 지키려다 매질을 감당하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고,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은 신지도로 귀양을 떠나면서 헤어졌다.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正祖 1782~1800)가 세상을 떠나자,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천주교를 탄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개혁 추진 세력인 시파(時派)를 종교를 빌미로 몰아내려 한 벽파(僻派)의 정치 공작이었다. 한 때 천주교에 입교한 적이 있고,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벼슬살이를 했던 다산 역시 이 음모의 표적이 되었다. 왕의 신임을 받으며 이름을 빛내던 시절은 가고, 집안은 풍지박살 난 채 쓰라린 유배의 길을 떠난 것이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초당을 짓고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유배를 떠날 때, 첫아들 학연(學淵)이 열여덟 살, 둘째 아들 학유(學游)가 열다섯 살이었으니, 아비로서 자식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걱정되는 마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다산은 자신의 마음을 담아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두 아들 뿐안 아니라 서로 만날 수 없던 둘째 형, 그리고 제자들과 서신을 교환했다. 이 책은 그렇게 보낸 다산의 편지글을 엮은 모음집이다.
 
다산은 편지에서 두 아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고 있다. 직접 곁에 두고 가르칠 수 없어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편지글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내가 밤낮으로 애태우며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너희들 뼈가 점점 굳어지고 기운이 거칠어져 한두해 더 지나버리면 완전히 내 뜻을 저버리고 보잘것없는 생활로 빠져버리고 말 것만 같은 초조감 때문이다. 작년에는 그런 걱정에 병까지 얻었다."
그는 친구를 사귀는 법, 책을 읽고 쓰는 법, 밭을 가꾸고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 등을 세세하게 적고, 효를 다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라고 아들들에게 말한다. "폐족(廢族)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겠느냐.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못되겠느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그는 모든 일이 '효(孝)'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혼자 계신 어머니를 잘 살펴 드리고 큰아버지를 아버지 모시듯 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어떻게 효를 실행할 것인지를 편지 속에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너희 형제는 새벽이나 늦은 밤에 방이 찬가 따뜻한가 항상 점검하고, 요 밑에 손을 넣어 보고 차면 항상 따뜻하게 직접 불을 때 드리되 이런 일은 종들을 시키지 않도록 해라. 그 수고로움도 잠깐 연기 쏘이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네 어머니는 무엇보다 더 기분이 좋을 것인데, 이런 일을 왜 즐거이 하지 않느냐?" 복종으로서가 아닌 나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에 대한 효(孝)는 이 시대에도 분명 사회문화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산의 편지글이 불효자인 나를 초라하게 한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강조한 것은 독서였다. 그는 정월에 독서 계획을 세운 후 그대로 실천하는 열성적인 독서가였다. 집안이 몰락하면서 아들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책을 읽고 학문을 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라며 부지런히 독서하라고 권한다. 학문으로 영달을 꾀하겠다는 사리사욕이 없을 때, 비로소 글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문에 뜻을 두어야 하며, 독서를 할 때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글을 즐겨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식들이 자신의 글을 깊이 이해하고 책을 엮어 자신이 무고하고 훌륭한 지식인이었음을 후손들에게 전해주기를 바랐다. 다산은 200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도 독서를 왜 하는지, 어떤 마음자세로 해야 하는지 다시금 깨우쳐준다.
그는 스스로가 검소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았고, 아들들에게 재물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오래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시골에 살면서 과수원이나 남새밭을 가꾸지 않는다면 세상에 버림받는 일'이라며 두 아들에게 채소를 가꾸어 보라고 권했다.
 
다산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 학연과 학유가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늘 엄격하게 격려했다. 편지를 읽다보면 선비답게 참다운 길을 가도록 준엄하게 꾸짖는 다산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특히 권세가들에게 귀양살이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라고 권유하는 아들에게 다산은 "사소한 일을 가지고 절조를 잃어버려서야 되겠느냐"며 매섭게 질책한다. 불의와 조금도 타협할 줄 모르는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1세기에 학문을 한다는 우리사회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에게 천둥처럼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편지 속에는 겉으로는 엄하게 채찍질하지만 그 속에는 자상하고 애끊는 부정(父情)이 넘친다. 어두운 유배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고달픔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직 아들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어 더욱 감동적이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뿐만 아니라, 가족간 윤리, 친인척과의 인간관계, 양계, 양잠하는 법, 심지어 친구를 사귀고 술을 마시는 법도까지 세세하게 일러주는 편지들을 보면 과연 오늘날에도 이같은 부자(父子)관계가 존재하는지 곰곰이 돌아보게 된다. 또한 유배지에서 막내아들의 죽음을 듣고 슬피 울부짖는 글과 “이달 들어서는 공사간에 슬픔이 크고 밤낮으로 가신 이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으니 이 어인 신세인가. 더 말하지 말기로 하자”와 같은 절제된 문장에서는 다산처럼 큰 선비도 어쩌지 못할 극한의 슬픔이 묻어난다.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님 정약전과도 서간을 주고받으며 변함없는 우애를 나누었다. 스스로 평생지기라 일컬었던 둘째형님에게 보낸 편지들은 서로 불우한 처지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적 깊이에 탄복하며 인생을 토로한 수준 높은 서간문학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자신보다 더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형님의 건강을 염려하여 개를 잡아먹는 법까지 상세히 알려주는 편지글에서는 둘째형님에 대한 지극한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가난한 제자들의 생계까지 염려해주는 자상한 스승의 마음씨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이 편지글들은 다산이 실학자로서 얼마나 튼튼한 현실주의적 사고와 실학사상을 지녔는지 보여준다. 과거제도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제도를 통해서만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과거공부에 힘을 기울이라고 주장하거나 애써 힘든 길로 가지 말고 지름길로 가라고 당부하는 현실적인 가르침 등이 그러하다. 지금처럼 사도(師道)가 땅에 떨어지고 교권(敎勸)이 흔들리는 때, 이 글들은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돌이켜보게 한다.

 

이 책을 소개해주신 법정스님은 이렇게 소감문을 남기셨다. "살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 아래서도 자신의 인생을 꽃피울 수 있다. 그러나 살 줄 모르면 아무리 좋은 여건 아래서라도 죽을 쑤고 마는 것이 인생의 과정. 그(정약용)는 18년 유배생할에서 260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재능과 출세를 시기하여 무고한 죄를 씌워 유배를 보낸 그때의 지배 계층은 오늘날 그 존재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귀양살이에도 꿋꿋하게 살았던 다산은 오늘까지 숨을 쉬면서 후손들 앞에 당당히 서 있다. 참과 거짓은 이렇듯 세월이 금을 긋는다."라고... 

 
이 책은 역사책 속에서만 알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산이 유배라는 천신만고의 괴로움 속에서 가족과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너무도 진솔한 한 인간의 내면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에 그 어떤 책보다 큰 지혜, 깊은 감동을 선사해준다. 다산 정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이 책이야말로 그의 삶과 사상을 들여다보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한다. 앞으로 다산의 사상과 학문세계, 개혁정책에 대해 더 공부해봐야 하겠다.
 
[ 2012년 7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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