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노혜숙.유영일 옮김 / 양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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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어느 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불현듯 책 제목에 이끌려 구입했다.
아마도 당시 나이 과거와 미래가 많이 혼란스럽고 답답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무언가에 홀리기도 한 것 같고 ’10년 연속 아마존 베스트셀러’라는 표현에 넘어간 듯...
 
책을 읽기 위해 처음 붙잡은 것은 3월 초순 경이었는데, 거의 한 달 만에 읽었다. 읽기가 무척이나 어렵고 지루했고 어디 절이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저자의 글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미래를 생각하여 현재를 희생하지 말라는 말은 기억에 남지만, "지금이 아닌 삶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선언은 선뜻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나서 역시나 그다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얼핏 ’이 사람이 통일교나 새로운 종파같은 종교를 탄생시킬 수도 있겠다’라는 느낌이 들긴 했다.  
 
깨달음을 찾는 사람들 중 일정한 부류에게 21세기 영적 교사로 추앙받고 있는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내일이나 10분 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으로 삶을 좁히라고 촉구한다. 바로 거기에 참다운 평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1997년 출간과 동시에 폭발적인 호응을 받으며 단숨에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가 된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무수한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출판사와 번역자 왈... 아마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동시에 올라있는 책이 100권이 넘지 않을까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이성과 과학적 사유구조가 지배하고 있는 서양에서 저자의 외침은 실로 짧은 기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고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 의식의 심오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특이했나보다. 그는 어떻게 하면 마음의 노예가 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날의 삶 속에서 선연한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를 깊이 다룬다. 그의 가르침은 저 멀리 떨어진 세계의 것이 아니고, 특별한 수단이나 방법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지금 이 순간’ 깨어 있으라는 것뿐이다. 모든 답은 그 안에 들어 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지금 이 순간’ 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독자 스스로 시간도 공간도 없는 ‘지금 여기’에서의 현존 상태에 강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책을 읽는 가운데 새로워진 의식 속에 직접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함으로써 독자들이 지금 이 순간의 변화를 체험하도록 유도하려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과거의 굴레나 최근 어마어마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면 모를까...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간단히 전하면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평화를 위한 깨달음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방법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그러자면 우리는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나 바깥세상이 아닌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거의 끊임없이 생각을 하면서 언제나 불행했던 과거를 돌아보고 두려운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다음과 같이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삶은 지금이다. 지금이 아닌 삶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지금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지금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영원한 현재야말로 우리의 전체 삶이 펼쳐지는 무대이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남을 것이다. 지금만이 마음이 제한하는 범위 너머로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있다. 지금만이 시간도 없고 형태도 없는 존재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다.’

 

하지만, 저자의 '지금 여기서'가 잘 다가오지는 않는다. 말이나 글로서는 느끼기가 어려운 것인지... 



- 출판사 책 소개 -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 때문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도리어 불안해하고, 결국은 그칠 줄 모르는 그 생각의 행렬이 소음이 되어 내면의 고요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의견을 내놓고 추측하고 판단하고 비교하고 불평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등의 마음의 생각들을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아가 만들어지고,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 자기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고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 영원한 현재로 들어가라고 요구한다. 영원한 현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마음이 만든 허구에서 벗어나라, 마음속에서 나를 찾지 말라고 조언하며, 영원한 현재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세미나와 강연, 개인 상담을 통해 받은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책은 인간 의식의 심오한 변화,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창조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해 일관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노예가 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나날의 삶 속에서 선연한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톨레는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는 동시에 독자 스스로 시간도 공간도 없는 ‘지금 여기’에서의 현존 상태에 강하게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생생하게 깨달음을 맛보도록 한다.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무수한 형태의 생명체 너머에는 영원한 ‘오직 하나의 생명’이 자리한다. 그것은 저 너머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 안에도 깃들어 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히 부수어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 자신,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생각이 정지되었을 때만 그 본질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충만하고 강렬하게 집중하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존재’ 상태를 느낄 수 있다. 마음의 헤아림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있음’의 상태에 활짝 깨어 있으면서 그 느낌, 그 앎에 머무는 것이 밝은 ‘깨달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깊은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겹겹이 쌓여 있는 사고의 층을 헤치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우리 내면의 그곳, 진리를 듣고 알아차리는 그 자리에 도달할 것이다. 그 자리에 이르게 되면 가슴이 벅차고 충만한 느낌이 들면서 내면에서 뭔가가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다지 주변에 소개하고 싶지 않은 책...
그리고 책 산 것을 후회하는 몇 안되는 책... 
 
* 저자 소개 :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
종교나 사상에 관계없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는 정신적 스승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런던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고, 오랫동안 마음공부를 하여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NOW],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등의 베스트셀러를 발표했습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 강연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 2010년 4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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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사회 - 동녘신서 101
아비샤이 마갈릿 지음, 신성림 옮김 / 동녘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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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지난 10월 공부모임에서 선정되어 세미나를 진행했던 것이다.
 당시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참석자들이 '모욕이 일상화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우려를 공감했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의 신뢰가 붕괴되면서 나타나는 자살과 왕따, 집단괴롭힘과 소수자에 대한 박해 등에 대한 이야기 중에 '품위'와 그 반대인 '모욕'에 대한 의견이 있었다. 개인에 대한 모욕, 집단에 대한 모욕, 소수자에 대한 모욕, 직위와 권위에 의한 모욕, 권력에 의한 모욕, 정치적인 이유에 의한 모욕, 제도에 대한 모욕 등...

 금년(2011) 초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연쇄자살(4명) 상황을 지켜보면서 엄기호씨는 4월 15일자 프레시안에 "카이스트의 유령들... 그들을 못 보는 당신도 괴물이다"라는 기고를 실었다.
 자살사태의 직접적인 배경은 MB의 교육관료가 카이스트 총장으로 임명한 서남표가 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이유로 2008년 도입한 '징벌적 장학금 제도'였다. 상대평가 기준 평균 학점 3.0 이하부터 장학금을 뱉어내야 하는데 2.0이 되면 그 금액이 무려 600만원이 된다. 과학기술입국을 취지로 설립한 국립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서로를 짓밟고 넘어야하는 정글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평균 아래로 내려가는 학생들을 패자로 규정하고 징벌에 처하는 이런 제도에 말로 학생들에게모욕, 치욕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2009년 10월 조국 교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 자 있다.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가 바로 '품위있는 사회'이다. 생존권을 외면하는 재개발을 추진하고 이에 반대하는 철거민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강경진압하는 현 정부의 행태를 정당한 법치라고 할 수 있을까? '공무집행'의 외관을 띤 정부의 행위야말로 '제도적 모욕'의 예이다. 그리고 장례도 미루고 7개월 이상 이러한 모욕에 맞서 싸 우는 사람들이야말로 '품위있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생소한 개념과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엄기호씨와 조국 교수의 관점을 고려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좀 더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저자는 '문명화된 사회'와 '품위있는 사회'를 구분하는데, 구성원들이 서로 모욕하고 않는 사회는 '문명화된 사회(개인만의 괸계와 관련된 미시윤리적 개념)'라고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고 않는 사회는 '품위있는 사회(전체 사회구조와 관련된 거시윤리적 개념)'라고 구분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은 1부. 모욕의 개념, 2부. 존중의 근거, 3부. 사회적 개념으로서의 품위, 4부. 사회제도의 검증, 맺음말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사람이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를 다룬다. 여기서 저자는 두 가자 주장을 주장을 비교하는데, 하나는 통치제도의 존재자체가 모욕감을 느낄 이유라도 말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주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떤 통치제도도 모욕감을 느낄 이유를 제공할 수 없다는 스토아학파의 주장이다. 두 가지 주장에 대해 저자는 통치제도가 반드시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제외한다.
 그는 품위있는 사회의 이념이 반드시 권리의 개념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권리 개념이 없는 사회라 하더라도 품위있는 사회에 적합한 명예와 모욕을 개념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 명예의 개념으로 적합한 것은 자기존중의 개념으로, 자부심이나 사회적 명예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2부에서는 인간을 존중해야 할 정당한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루고 세 가지 유형의 정당화를 제시한다. 첫째는 적극적인 정당화로, 사람들이 존중받는 자격을 갖게 하는 인간의 공통된 특성에 의존한다, 둘째는 그런 특성이 존재할 가능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인간을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가 존중의 원천이라고 제안하는 회의적 정당화다. 마지막 소극적인 정당화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적극적이었다 회의적이다 근거는 없지만 그들을 모욕하는 일을 피해야 할 정당성은 있다고 주장한다.

 3부에서는 어떤 사람을 인간 공동체에서 거부하는 일이자 기본적인 통제력을 상실을 의미하는 모욕 개념을 다룬다. 저자는 모욕의 이런 두 측면이 사회구조 안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의 인간성을 표현하는 특정 생활양식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애기한다.

 4부에서는 복지제도가 처벌제도 등 주요 사회제도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작용했다 할 방식을 다룬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품위있는 사회'와 존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를 비교,검토한다. 즉 ‘정의로운 사회’와 ‘품위 있는 사회’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정의로운 사회가 각자가 기여한 바에 따라 사회적 명예의 분배가 차등적으로 분배되는 사회라면, 품위 있는 사회는 더 나아가 그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즉, 명예가 훼손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는 반드시 품위 있는 사회여야만 한다고 본다. 하지만 어떤 사회는 그 성원들에 대해 정의로울 수 있지만, 그 사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방인)에 대해서는 모욕을 행사하는 사회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지, 아니 더 나아가 그런 종교집단들이 그 구성원을 어떻게 대하는지, 여성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규범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정의로운 사회가 반드시 품위있는 사회는 아닐 가능성이 있으며 서로 다른 이론이나 개념을 포괄하는 관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만, 그는 정의로운 사회보다 품위있는 사회를 확립할 가능성을 낙관한다.

 저자의 결론은 '인간의 존엄성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회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는 평등주의적 사회정의 이념과 관련된 여러 문제 상황을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에 초점을 두고 한층 더 나아간 ‘품위 있는 사회’라는 인간다운 사회에 관한 또 다른 규범적 이념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한 ‘품위 있는 사회’는 결국 하나의 사회에 있는 ‘제도들’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보다 더 급하게 실현해야 하는 사회이며, 현실적으로 정의롭지 않더라도 이 사회는 반드시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품위 있는 사회’는 사회가 제도를 통해 구성원들을 존중하는 사회이고,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들이 정당한 이유로 모욕감을 느낄 그런 조건들과 싸우는 사회다.
 그는 이런 사회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로 인간의 존엄성을 들었다. “사람들이 무엇을 모욕하고, 또 어떤 것을 존중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로 사람으로서의 자기-존중(자존심)을 부정하고 사람을 사람 아닌 존재로 다루는 현실에 대해 “사람을 어떤 ‘물건’이나 ‘기계’로 또는 ‘동물’이나 ‘인간 이하’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 대한 무시는 사람을 그 표현과 감정과 기분의 변화 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보지 않는 방식으로, 충분히 또는 세심하게 보지 않거나 마치 사물이나 동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것-낙인찍기)은 인간의 공동체로부터 배제시키거나 거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품위 있는 사회'에 한국 현실을 비춰보면 어떨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소수자에 대한 모욕과 국가권력 및 제도에 의한 모욕이 '일상다반사'라는 것이다. 조금 사정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장애인에 대한 모욕은 폭력의 수준으로까지 여전히 나타나고 있고 성소수자에 대한 제도적 모욕은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여성에 대한 무의식적 모욕과 폭력행태는 집권당의 대표에서 '강추행'이라는 별명을 얻는 국회의원, 대학교 내에서의 집단 성폭행, 술자리에서의 성추행, 일상적인 성희롱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군인과 학생에 대해 폭력과 모욕을 제도적으로 근절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는 인간을 존중하고 모든 인간에 대한 모욕은 잘못임으로 그 사회는 자신의 품위 문제를 단순히 어떤 국적이나, 시민권이 있는 사회 구성원에게만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거주는 하지만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도 존중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때리지 마세요, 저도 사람입니다”라는 한국어부터 배우는 우리 현실에 비춰보면, 우리는 그들을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품위 없는 사회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등시민”으로 자기-존중(자존심)에 손상을 입게 되는 시민이다.

 저자는 또한 품위 문제를 문화적인 부분으로 연결시켜 설명한다. 포르노그래피가 사적이 아닌 공적의 목적으로 사용되거나, 동성애자들처럼 사회적 소수자의 생활양식을 문화가 외면할 때, 사회가 충분히 여력이 있지만,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구축하는데 노력하지 않는 것도 상당히 모욕적인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연고주의나 학벌주의도 특정 집단의 배제의 원리가 작동하므로 사회의 품위를 훼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사회에 보이지 않게 제도화 되어 있는 속물근성, 사생활, 관료제, 실업사태 등까지도 그 본성은 상당히 모욕적인 속성이 있다. 특히 복지제도는 겉으로는 한 사회의 품위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대상자들을 동정이나 자비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부끄럽고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면 결과적으로 모욕적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차등급식'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누구도 모욕되지 않고, 어느 누구도 기회에서 배제되지 않으며 참여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자기존중이 보장되고 ‘사회제도들’에게 모욕받지 않는 사회, 무턱대고 모든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똑같이 어떤 것을 나누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존중을 누리면서 사는 사회...
 저자가 제사하고 있는, 현대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평등주의적 사회정의의 이상은 정말 중요하고 본래적으로 가치 있는 인간 존엄성의 보장이라는 가치 지향을 중심으로 재정립되거나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장과 경쟁을 만능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저물어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념이라는 잣대만으로 사회를 구분하고 규정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이제야 그것을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이해관계가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거대한 물결처럼 어떤 방향으로 함께 흘러가는 느낌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는 대신 꾸준하게 추구해야 할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더욱 절실하다. <품위있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아는 누구를 모욕하지 않았는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익숙한 제도와 문화로 인하여 누군가를, 어떤 집단이나 계층을 무의식적으로 모욕하고 있지는 않은가...


 참고로  '품위'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으로 정의한다. 책의 제목 <품위있는 사회>의 원제목인 'decent'의 사전적인 의미는 '점잖은,친절한,예절바른'이다. 따라서 역자는 책의 내용과 저자의 취지에 맞게 책의 제목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과연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을 왜 '품위있는 사회'로 정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면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반 일리히의 저서 의 한글번역본의 제목을 <학교없는 사회>로 정하여 독자들에게 저자가 학교를 없애자고 주장한 것처럼 편견을 심어버린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국어 사전이 유명무실화되기 시작했다. 2천여 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이 온갖 불법과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면서 "정의"가, 전두환의 파트너 노태우가 수천억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떠들면서 "보통사람"이, 국가를 수익모델이 삼은 가카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토건국가를 만들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면서도 '4대강살리기' '녹색성장' '공정사회'를 외치면서 "살리기"와 "녹색"과 "공정"이라는 단어가...ㅠ

[ 2011년 12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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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의 조건 - 나눔과 희망의 전도사 박원순 에세이
박원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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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에서 나타나듯이 박원순씨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만 해도 "나눔과 희망의 전도사"를 자처했다.
세계 최초의 직업이라는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 : 한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사회의 설계 및 디자인 방법을 고민하는 직업)의 명함을 들고 다니던 박원순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사회상은 아주 단순하다.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사회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첫발을 ‘기부와 나눔’이라고 단언했다. 기부와 나눔을 21세기 키워드라고 믿는 그는 이성적인 기부를 권했다.

그러던 저자는 지난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다음 날부터 서울시장으로서 공직을 시작했다.
왜 그는 공직에 출마했을까?
2010년 6월 전국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시 야당으로부터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를 권유받고도 거절했던 그가 1년이 조금 지난 후 마음을 바꾼 것이다.
 
언론기사에 나타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주변에서 문제제기한 것이 크게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당신만 편하게 지내고 시람들의 절망에 대해 왜 몸을 던지지 않느냐", "강연때마다 사회변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면 '왜 그걸 실천할 수 있는 공직으로 가지 않느냐'는 질문을 수천번 받았다",  "이명박 정부들어 정부와 시민사회의 균형과 협력관계, 감시 시스템이 완전히 깨졌다", "무상급식 문제만 해도 야당과 시민사회와 논의해 풀 수 있는데 쓸데없이 정치쟁점화되면서 어마어마한 경비가 낭비됐다"고 직접 말했다.
또한 2009년에 불거진 국정원의 사찰과 MB정권의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에 대한 외압도 한 원인이 될 것이라는 애기도 전해진다.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박원순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길을 되짚어보면, 그가 정치인이나 관료보다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로 이어지는 삶의 궤적을 따라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중간지대, 즉 NGO 쪽에서 한국사회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1% 기득권들과 그 대리인인 MB정권, 관료기관, 우익언론, 우익정당은 기본적으로 작동되는 사회시스템마저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연장선 상에서 박원순의 NGO 활동도 불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앞으로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직을 잘 수행해 나갈 지, 3년 후 서울시장 선거에 재선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지 그렇지 않을 지도... 본인 스스로 재선하여 서울시를 "시민이 시장이 되는 지자체"로 만들겠다는 다짐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3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고 유권자들이 판단하겠지...
 
이 책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던 저자가 서울시장에 나선 이유보다 그 전에 국정원 사찰까지 받아 자신의 활동과 단체의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박원순이 계속 가고자 했던 길에 담겨있는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를 통해 자신이 실천하고자 했던 '나눔과 기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여러가지 사례들 속에서 발견한 희망을 이야기...
 
그는 "사실 우리가 지금 가난해서 불행하거나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가난한 탓에 불행하고 힘든 것이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삶의 가치를 외형과 물질에 두기 때문이다. 물질과 상품은 행복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요소일 수는 있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역으로 우리들 스스로가 정작 잘 사는 것이 무언인지,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소중했던 가치들, 나눔과 배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 마음, 따뜻한 이웃 간의 정, 형제애, 부모에 대한 공경과 존경, 공동체 정신, 농부들이 정성들여 키워 열매를 맺은 쌀 한 톨과 배추 한 잎까지도 귀하게 생각하는 그런 마음들을 다 잃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자기를 희생해서 사회와 공동체를 위하는 헌신, 세상에 바른 목소디를 내고 기꺼이 좋은 사회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용기도 사라졌다...
그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편하고 든든한 직장이라고 공무원과 교사가 인기라고 하는데, 이런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은 사회가 희망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더 인간적인 사회, 더 합리적인 사회, 더 민주적인 사회, 국민과 지구촌 시민들이 더 행복한 사회, 지속가능한 미래가 담보되는 사회, 누구나 자신의 인격과 삶을 풍요롭게 실현하는 사회, 누구나 절망하지 않고 좋은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어야 한다.”

미국의 부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도 부자들이 갖고 있는 기부의 습관에 있다. 빌 게이츠도 4년 동안 자기 자산의 60%인 20조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박원순은 스탠포드 대학을 방문했을 때, 미국의 기부 문화를 직접 보고 깜짝 놀란다. “도서관 건물에서부터 그 안의 장서에 이르기까지 큰 대학건물에서부터 작은 벤치에 이르기까지 기부되지 않은 것을 찾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기부의 형식은 다양하다. 돈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가진 재능일 수도 있다. 소리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오태양 군은 틈틈이 무료 공연을 기부한다. 나눔의 습관이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생각 때문이다. ‘사랑의 고물상’이라는 별칭이 있는 아름다운가게는 기부 받은 물건을 팔아 나온 수익을 전부 공익을위해 쓴다.
지금은 상당히 널리 퍼진 1% 나눔운동은 자기 수입의 1%를 기부하자는 운동이다. 가게에서 나오는 수입의 1%, 책 판매 수입의 1%, 강연료의 1% 등 전국에 106개의 점포가 있는 아름다운가게에 1%씩 기부하는 사람은 4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어떤 것이든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1%를 이웃과 나누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훨씬 더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실제로 무엇이든 기부한 사람은 보람과 즐거움을 얻는다.
 
“눈앞에 굶주리는 사람을 보고 돈을 내는 즉자적이고 감성적인 기부보다는 어느 쪽에 돈을 내는 것이 사회의 풍요와 발전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인지 잘 판단하는 이성적인 기부로 바뀌어야 한다. 상속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 있고 훌륭한 삶이며 삶의 성취인 자산을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인지 철학적으로 성숙해야 한다.”

저자는 정부의 예산만으로는 빈부격차의 양극화를 해소할 수 없다고 본다. 일반인의 힘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해 100억대를 모금하고 매출하는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가 100개, 1000개가 되면 그 과정에서 고용이 창출되고 또 수많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사회마저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헌 물건을 거래하다보면 일자리뿐만 아니라 서로 소통을 하게 되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지역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장까지 된다.

저자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재단법인제도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던 돈이 재단법인에 출연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재단들이 편법 상속의 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 발전에서는 재단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토크빌에 따르면 19세기 NGO가 활성화했는데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NGO의 역할이 필수적인데, 이를 뒷받침한 게 시민들이 자벌적으로 참여하여 재정적 기원을 아끼지 않은 재단이었다는 것이다. 15년 전에 이미 미국의 재단은 4만 개가 넘었고 자산도 300조가 넘었다 하니 어마어마하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이 재단들이 개인재단이라는 것이다. 재단 재원의 90% 가까이를 개인이 기부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재벌의 재단이 지배적이고 이들은 NGO 지원에 인색하다. 향후 한국이 질적으로 도약하려면 개인재단이 많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NGO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이 책은 강조한다.
우리가 바라는 대안적 사회, 좀 더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기업은 기업이되 일반기업처럼 이윤만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기업처럼 수익과 효율성을 추구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적 기업은 공공의 이익이나 사회적 목적을 기업이라는 형식을 통해 추구하고 달성하려는 것이다. 사회적 목적 실현을 위해 이윤의 대부분을 재투자한다.”

새로운 기업 정체성의 모델로 사회적 기업은 그만큼 중요하다. 결국 21세기에는 어떻게 하면 기업이 공동체와 자신의 지역에 공헌할지 생각하는 않으면 기업의 성장과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현장 그 자체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저자는 2006년부터 지금(2010년)까지 지역투어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나라 농촌과 지역을 구석구석 돌며 리더들을 만나 지역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발전을 위한 과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인 것이다. 지역을 살려 전체를 살려가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동일 건물 건축금지 조례에서 보듯 개성 있는 도시 만들기, 지역 특산물 사업, 다랭이마을에서 보듯 단점이었던 환경을 오히려 장점으로 되살리는 사업 등이 좋은 사례라고 지적한다.
은퇴한 사람들의 제2의 삶을 돕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96세까지 산 피터 드러커는 “60세 이후 30년 동안이 내 황금기였다”고 말한다. 희망제작소에서는 전문직 은퇴자들에게 사회공익을 위해 일하는 비영리단체에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호스피스 운동을 오랫동안 해온 능행 스님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매우 안타까워했는데 특히 재산을 미리 정리하지 않는 것은 남은 사람들에게 큰 짐을 지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만 제2의 갑부이며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던 왕융칭의 유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유언한다. “돈은 하늘에서 잠시 빌린 것이니 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고. “자식이 능력이 있으면 물려줄 필요가 없고, 자식이 무능하면 물려주더라고 간수할 수가 없다”는 이유다.

이 책에는 세계의 구두쇠 할머니들 이야기도 등장한다. 라디오 한 대도 없이 살거나, 남루한 아파트에서 살거나 한겨울에도 전혀 난방도 하지 않고 살다가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전재산, 많게는 수백억에서 수십억원을 공익을 위해 쓰라며 사회에 돌려주고 간 사람들.
말 그대로 ‘개미같이 벌었지만 거지같이 살다가 정승같이 기부한’ 사람들이다.
나눔의 길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도 만날 수 있다. 가게의 수익 중 1%를 기부하다가 여덟 형제 남매 모두 아름다운재단의 기부자로 이끈 사람, 택시 승객에게 기부하라고, 좋은 일에 돈을 쓰라고 쉼 없이 권하는 택시 기사, 저소득 지역 공부방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가 되어 해마다 선물을 하는 기업, 생명나눔실천회를 만들고 안구와 장기 기증운동을 벌이다 운명하자 자신의 몸마저 의과대학 실험실에 남기고 간 스님, 엄혹한 시절 변호사로서 모범을 보여주었던 선배의 이야기까지.

“운동은 늘 마이너리티 운동이다.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일을 가지고 온갖 고난 끝에 마침내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지지하도록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사회운동의 본령이다.”

참여연대, 아름다운가게,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까지 어찌 보면 무모하고 사회를 바꾼다기에는 ‘너무 낭만적일 것 같은’ 비전과 방식으로 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박원순은 이 책에서 보듯 우리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사회의 설계 방법과 디자인 방법을 얻고 함께하기 위해 발로 뛰고 있다. 희망제작소에서 벌여오거나 벌이고 있는 작은 지자체에 대한 컨설팅, 지자체 공무원에 대한 교육, 조례연구소, 주민자치 클리닉, 간판문화연구소, 공원연구소 사업 등도 그런 실험들이다.
‘21세기 실학운동’의 일환인 희망제작소의 모험이 어디까지 갈지 어떤 결과를 얻어갈지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시장 출마를 내 맘대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한 사회의 거대한 시스템과 문화가 일부의 노력만으로, 특정 집단만의 힘으로 바꾸어질 수 없기 때문에 시민사회단체의 자발적인 '나눔과 기부' 문화와 더불어 정부,정치권의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박변호사가 출마한 것이라고...
박변호사 말대로 정부 예산만으로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정부의 노력 없이 민간의 자발적인 운동만으로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없는 것은 더욱 당연한 사실이다.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으로서 지자체의 정책을 통해 새로운 거버넌스와 '나눔과 기부'를 구현할 정책을 선보이고 민간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여 변화된 사회문화를 만들어내기를 기대해본다...
사실 박원순이라는 인물이 떠난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가 지금까지의 발전과 성과를 계속해서 만들어낼 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책 속에 들어있는 박변호사의 NGO 활동이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나는 아주 모범적인 일이라 평가하고 싶다. 특히 다른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지난 날을 돌아보면... 그는 '나눔과 기부'라는 키워드로 한국사회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그럼에도 시민사회단체에서의 그의 노력은 아직 크게 결실을 맺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2010년 기준으로는 '나눔과 기부'를 시작한 지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고(7년 정도?) 한국사회의 문화와 정서가 제대로 그의 문제의식을 받아주지 못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나 역시도 주변에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럴 정도로 한국인 1%에게까지 영향이 확대되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한 '나눔과 기부' 운동을 공권력을 악용하여 방해한 현 정권과 집권당, 기득권 세력은 정말이지 무지몽매하고 악질이었다.
 
저자가 서울시장이 되어 정책으로 구현하고 여전히 시민사회단체에서 '나눔과 기부' 운동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도 애초에 저자가 가졌던 문제의식, 즉 "잃어버린 가치의 회복"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나눔과 기부' 운동을 활성화하는 것으로도, 빈민구제정책을 펼치는 것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의 문화와 시스템, 소통과 참여, 개방과 공유가 어우러져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하고 또 진행해야 할 지 막막하기는 하지만...
 
[ 2011년 12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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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으로 산다는 것 - 개정판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 40대, 그들은 누구인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2005년 기준으로 40대들이 처해있는 현실과 그들의 느낌,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태도와 방법을 제시하려 한다.
 
먼저, 저자는 한국의 40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낀세대, 어정쩡한 세대
- 진화와 도태 사이에 있는 세대
- 마지막 주산세대이자 첫 번째 컴맹 세대
-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의 부양을 기대할 수 없는 첫 세대
- 조기은퇴 대상자에 속하는 세대
- 안정과 변화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갖고 있는 모순된 세대
 
저자가 보고 듣고 느끼는 40대는... 시간은 거침없이 흘렀지만,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직장에서, 가정에서 자신 있게 호기도 부려보지만 예전에 없던 불안감과 두려움이 엄습하며.... 지금껏 이곳저곳에 씨 뿌리고 열심히 뛴 것 같은데, 지금에 와서 텅 빈 들판에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 신세라는 느낌이 든다... 
 
386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40대. 그들을 가리켜 불행한 세대라고도 한다.
대한민국의 40대는 변화무쌍하고 굴곡진 세월을 살아온 세대다.
20대에는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에서 청춘을 불사르기도 했고, 30대에는 IMF를 맞아 주변사람들이 ‘조기퇴직’이라는 불운을 당하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또 산업시대에서 정보시대로 넘어오면서 살아남기 위해 숨 가쁘게 적응한 세대이기도 하다.
겪어온 역사적 환경도 남다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선제 쟁취, 6월 항쟁에 이어 동서 냉전이 붕괴되고 지구 전체로 자본주의가 확장되는 것과 동시에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분단국가의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과연 한국사회에서 40대만이 불행할까?
배운 것, 가진 것 하나 없이 일제시대에 태어나 혼란스러운 해방과 6.25전쟁을 겪고 4.19혁명과 5.16 쿠테타의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한 가족 먹고 살기도 힘들게 연명하면서 자식들을 건사한 우리 부모세대와 전쟁 전후세대가 40대보다 더 불행하지 않을까?
 
아니면, 40대처럼 5.18민주화운동이나 6월 항쟁을 겪지도 못하고 뒤늦게 태어나 한국 자본주의 성장의 혜택도 보지 못하고 IMF 이후에 대학에 입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여 이전 세대들이 구축해놓은 체제와 기득권에 밀려 오로지 입시지옥, 취업전쟁과 비정규직 신세를 면치못하는 20대~30대가 어찌보면 더 불행한 것이 아닐까?
 
그만큼 굴곡지고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오면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대한민국의 40대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누구나 마흔이란 나이를 맞게 되면 삶에 대한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우리 부모세대나 선배세대들고 그렇고 우리의 후배들 역시 40대가 되면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어느 세대건 나이가 든 후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궤적을 떠올리며 허탈해지기 마련이다. 첫사랑 열병에 몸살을 앓던 20대와 달리, 이제는 인생의 허허로움에 몸살을 않게 된다. 직장에서, 때론 가정에서 자신 있게 호기도 부려보지만 예전에 없던 불안함과 두려움이 자주 엄습한다. 지금껏 이곳저곳에 씨 뿌리고, 열심히 뛴 것 같은데 지금에 와서 내가 살아온 이유와 살아갈 이유들이 흔들리고 있다. 인생의 이정표 위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갑자기 막막하기만 하다.
 
세대를 떠나 부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자식을 둔 한 가정의 버팀목이 된 그들이 마흔 고개를 넘으면서 때론 울고 싶어도 울 수도 없는 감추어진 속내를 한번쯤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떨까? 이 책은 386세대를 떠나, 누구나 닥쳐오는 40대의 고민과 방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기업 임원으로 있는 저자 역시 탄탄대로를 달려온 순조로운 이력서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40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 동시대의 아픔과 고민, 못다 이룬 꿈과 미련에 대해 저자는 현실을 맞대 듯 솔직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한민국에서 40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희망 찾기를 진솔하게 이야기하려 한다.

평생 뼈 빠지게 일해 처자식 먹여 살리고 집 장만해 이제 한숨 돌릴 때쯤이면 인생은 어느 새 내리막길이더라는 마흔 가장들의 자조 섞인 목소리는 우리 모두가 드러내놓지 않는 인생의 비애를 안겨주는 한 단면이다.
직장에서 사오정 운운하면 지레 내 나이를 손꼽아 겁먹고, 강남불패다, 하면 그곳으로 진입 못한 패자의 느낌에 주눅이 들고, 이 사회가 조기 유학이다, 하면 또 어떻게 해서든지 애들을 유학 보낼 궁리를 하는 사십대에서 바로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
또 마흔에 이른 나이라면 누구나 직장에서건, 사회에서건 한번쯤 좌절을 겪어보았을 것이다.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십여 년 이상을 일해 왔어도 어느 날 기업은 난데없이 감원,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른다. 극심한 고용불안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40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나이듦에서 오는 초조함’이다. 누런 황금 들판을 바라보며 추수의 기쁨으로 들뜨기보다는 오히려 다가올 세찬 겨울이 한없이 두렵다. 행여나 주위의 누군가가 갑자기 쓰러지면, 내게도 곧 닥쳐올 일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한다.
모든 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다가오기도 하고,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며 닥쳐오기도 한다. 이렇게 이 시대의 마흔 가장들은 40대 사망률 1위인 나라에서 ‘나는 아니겠지…’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음은 사실이다.

매일 매일 생존의 치열한 전쟁터와 다름없는 직장생활은 또 어떤가. 매출은 만만치 않고, 점점 커가는 아이들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교육비는 지금껏 벌어오는 월급만으로는 벅차기만 하다.

더군다나 회사란 조직은 자신의 이런 고군분투에 대해 전혀 인간적인 따뜻함조차 보이지 않는다. 해가 지기 전까지 소리 없는 전쟁터에서 하루 종일, 1년 365일 전투를 치르고 있지만 너나할 것 없이 이렇게 힘겹게 싸워야만 먹고 사는 세상이 때로는 야속하기도 하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아침 출근 행렬길에서 어떤 날은 아무런 굴레와 책임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도 싶은 유혹도 강하게 느낀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40대는 남달리 겪어온 시대적 환경이 다른 만큼 강하다. 의지와 성취동기도 강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또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에 있다 보니 책임감도 무척 강하다. 그래서 전날 늦게까지 남아 일한 피로가 채 가시지 않아도 가장과 아빠라는 사랑스런 이름을 달고 오늘도 씩씩하게 출근길에 나선다.

이 같은 불안과 절망을 희망으로 180도 변화시켜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각 개인이 불안과 절망을 이겨내기 위한 여러가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개인적인 노력으로 얼마큼이나, 얼마나 많은 개인들이 불안을 이겨내고 희망을 일으켜세울 수 있을까...
자신의 세대만, 각 개인이나 가족이 불안을 이겨내 이후 그들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이들과 10년, 20년 후 자식세대들은 또 어떤 사회적 현실을 맞이할까... 
 

역으로, 저자가 열거하는 심정과 느낌들은 인간의 역사 이래로  40~50대들이 겪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아닐까...
그렇게 세대에 세대를 이어 조금씩 조금씩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가끔은 뒤로...) 밀고서 역사위 뒤안길로 퇴장하는 것은 아닐까...
 
저자의 애기하는 40대의 애환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냥 겉으로 존재하는 현실과 당사자들이 느끼는 감정만을 열거할 뿐... 그렇기 때문에 다분히 소박하고 무기력한 희망을 제시할 뿐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런 느낌과 모습들이 당연한 것인지 아닌지, 다른 나라나 다른 시대에는 어떠했는지, 일부의 모습인지 전체의 모습인지, 개인의 노력으로 가능한지 아니면 사회적, 전체적인 방향과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아무런 분석도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 2010년 4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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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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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노동의 종말>에 이은 저자의 기념비적 역작이다.

저자는 통신과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개양상을 ;접속의 시대(The Age of Access)'라 정의하고 '접속의 시대'에 대한 구체적인 현상과 증거를 밝힌다. 또한, '접속의 시대'가 도래한 이유와 그 이전 자본주의와의 차이점, 향후 전망을 제시하면서 독자들이 이에 대비할 것을 당부한다. 동시에 '접속의 시대'가 가져올 폐해를 경고하면서 그 대안을 함께 제시하고자 한다.

18세기에 유럽에서 시작된 시민혁명, 르네상스, 근대화, 산업생산은 세계의 주요지역을 봉건주의 시대에서 '사적소유'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대를 가져왔고 자본주의는 '소유의 시대'를 의미한다.
1990년대부터 '정보화시대'라는 말이 대두되었고 이제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정보화'라는 말에 전혀 거부감이나 이상한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내내 이루어진 첨단과학의 발전은 세계 방방곡곡을 1일 생활권으로 지리적으로 단축시켜 놓았고 인터넷을 대표되는 기술혁명은 빛의 속도로 세계인들이 정보를 접하고 전달하고 결정하는 시대로 바꾸었다. 

'변화'와 '혁신', '효율'과 '시장'을 내세우며 300년간 공룡처럼 커지기만 하던 자본주의는 '소유'에 근거한 '변화'와 '혁신'에 한계를 느끼고 스스로 '소유의 시대'에서  '접속의 시대'로 점차 변화하고 있다.
이미  20세기 말부터 북미와 유럽에서는 자동차, 주책, 전자제품, 공장, 도소매 등 다양한 시장 영역에서 '소유'를 확대하는 것이 불리함을 깨닫고 '접속'을 중심으로 기업들이 경영을 재편하고 있다.
즉, 20세기 말부터 제기되어온 '신자유주의'는 결국 '접속 자본주의'를 애기하는 것이고 21세기 자본주의의 중심은 '접속'이 '소유' 대신 모든 존재가치와 부를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산업시대는 지난 300년간 '소유'가 인류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에 '소유'의 범위를 정의하기 위한 싸움에 수많은 세대의 정치적 정열이 소진되었다. 근대의 정치 형세는 무엇보다도 계급과 계급 사이에 형성된 전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상류층, 자본가층, 권력층, 노동자농민층, 빈민층은 물리적 자본을 가용하고 물자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재산을 분배하는 최선을 방안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한마디로 생산수단을 누가 장악하고 인간 노동의 결실을 누가 주도적으로 분배할 것인가를 놓고 정치세력이 좌우로 갈라져 대립해왔다.
접속의 시대에는 좌우가 대립하는 정치가 내재가치와 효용가치가 갈등을 빚는 새로운 사회구도에 흡수될 것이다. 한마디로 문화적 정체성, 문명의 존엄성이 그 자체로 인류의 목적이냐, 아니면 상품 생산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냐라는 갈등이 될 것이다.

글로벌 거대독점기업들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대규모로 생산하여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고객의 관심과 시간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기업의 생존 조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상품을 판매하는 것에서 관심을 돌려 고객을 감동시키는 서비스, 고객을 감동시키는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서 상품을 팔지 않고 그냥 준다. 그리고 상품의 유지관리와 체험에서 오히려 장기간의 수익을 확보하려 한다.
(이러한 세계적인 추세는 한국사회에서도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요즘 누가 핸드폰을 돈을 지불하고 사는가? 복사기,복합기를 임대하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냉장고도 거의 무상으로 제공한다.)

 '접속의 시대'에 몇 십년 내에 글로벌 기업들은 지역, 국가, 지구의 접속권을 독점권을 획득할 것이다. 또 기존의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삶을 영위했다면, 이제 자신의 체험과 삶을 팔아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소유'를 기초로 계급과 인간을 나누었다면, 앞으로는 '접속' 여부가 사람들을 가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미디어와 인터넷, 체험과 문화 상품에 길들여진 세대들이 지구상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시기가 도래하면 '문화'와 '문명'은 도태되고 문화상품이 인간을 점령할 것이다.

'접속의 시대'에는 체험과 놀이와 문화가 상품의 중심을 차지할 것이다. 심지어 타인의 시간, 타인의 배려와 애정, 타인의 공감과 관심을 돈으로 사는 경우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심지어 인간관계도 상품화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점점 상품화되고 공리와 영리의 경계선은 점점 허물어질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21세기 자본주의가 바야흐로 ';소유의 시대';에서 '접속의 시대'로 전화되고 있으며, 이 대세를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두 가지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한다. 
첫째는, '접속'의 불평등이다. 최근 몇 십년 동안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은 '부익부빈익빈'을 가중시켜 왔고 이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은채 '접속의 시대'가 도래하면 더욱 심각한 상황이 재연될 것이라는 점과 공익적,인권적인 관점에서 '접속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제기한다.... '부익부빈익빈'은 신자유주의가 더욱 심화시켜 왔으며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인류의 심각한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
두번째, '접속의 시대'에 인류 문화와 문명의 고유가치, 생물 다양성과 함께 문화의 다양성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노력을 게을리할 경우, 문화자본주의와 인류는 스스로 자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수 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저자가 이 책을 발간한 것이 2001년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저자의 뛰어난 분석력과 통찰력이 돋보였다. '접속의 시대'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전망은 우리에게 세계경제의 거시적인 안목을 키워주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우리도 또한 적어도 지구상의 흐름을 방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동시에 비판적인 관점에서 '접속의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한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 2010년 5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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