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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사회 - 동녘신서 101
아비샤이 마갈릿 지음, 신성림 옮김 / 동녘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지난 10월 공부모임에서 선정되어 세미나를 진행했던 것이다.
당시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참석자들이 '모욕이 일상화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우려를 공감했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의 신뢰가 붕괴되면서 나타나는 자살과 왕따, 집단괴롭힘과 소수자에 대한 박해 등에 대한 이야기 중에 '품위'와 그 반대인 '모욕'에 대한 의견이 있었다. 개인에 대한 모욕, 집단에 대한 모욕, 소수자에 대한 모욕, 직위와 권위에 의한 모욕, 권력에 의한 모욕, 정치적인 이유에 의한 모욕, 제도에 대한 모욕 등...
금년(2011) 초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연쇄자살(4명) 상황을 지켜보면서 엄기호씨는 4월 15일자 프레시안에 "카이스트의 유령들... 그들을 못 보는 당신도 괴물이다"라는 기고를 실었다.
자살사태의 직접적인 배경은 MB의 교육관료가 카이스트 총장으로 임명한 서남표가 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이유로 2008년 도입한 '징벌적 장학금 제도'였다. 상대평가 기준 평균 학점 3.0 이하부터 장학금을 뱉어내야 하는데 2.0이 되면 그 금액이 무려 600만원이 된다. 과학기술입국을 취지로 설립한 국립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서로를 짓밟고 넘어야하는 정글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평균 아래로 내려가는 학생들을 패자로 규정하고 징벌에 처하는 이런 제도에 말로 학생들에게모욕, 치욕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2009년 10월 조국 교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 자 있다.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가 바로 '품위있는 사회'이다. 생존권을 외면하는 재개발을 추진하고 이에 반대하는 철거민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강경진압하는 현 정부의 행태를 정당한 법치라고 할 수 있을까? '공무집행'의 외관을 띤 정부의 행위야말로 '제도적 모욕'의 예이다. 그리고 장례도 미루고 7개월 이상 이러한 모욕에 맞서 싸 우는 사람들이야말로 '품위있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생소한 개념과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엄기호씨와 조국 교수의 관점을 고려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좀 더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저자는 '문명화된 사회'와 '품위있는 사회'를 구분하는데, 구성원들이 서로 모욕하고 않는 사회는 '문명화된 사회(개인만의 괸계와 관련된 미시윤리적 개념)'라고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고 않는 사회는 '품위있는 사회(전체 사회구조와 관련된 거시윤리적 개념)'라고 구분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은 1부. 모욕의 개념, 2부. 존중의 근거, 3부. 사회적 개념으로서의 품위, 4부. 사회제도의 검증, 맺음말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사람이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를 다룬다. 여기서 저자는 두 가자 주장을 주장을 비교하는데, 하나는 통치제도의 존재자체가 모욕감을 느낄 이유라도 말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주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떤 통치제도도 모욕감을 느낄 이유를 제공할 수 없다는 스토아학파의 주장이다. 두 가지 주장에 대해 저자는 통치제도가 반드시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제외한다.
그는 품위있는 사회의 이념이 반드시 권리의 개념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권리 개념이 없는 사회라 하더라도 품위있는 사회에 적합한 명예와 모욕을 개념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 명예의 개념으로 적합한 것은 자기존중의 개념으로, 자부심이나 사회적 명예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2부에서는 인간을 존중해야 할 정당한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다루고 세 가지 유형의 정당화를 제시한다. 첫째는 적극적인 정당화로, 사람들이 존중받는 자격을 갖게 하는 인간의 공통된 특성에 의존한다, 둘째는 그런 특성이 존재할 가능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인간을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가 존중의 원천이라고 제안하는 회의적 정당화다. 마지막 소극적인 정당화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적극적이었다 회의적이다 근거는 없지만 그들을 모욕하는 일을 피해야 할 정당성은 있다고 주장한다.
3부에서는 어떤 사람을 인간 공동체에서 거부하는 일이자 기본적인 통제력을 상실을 의미하는 모욕 개념을 다룬다. 저자는 모욕의 이런 두 측면이 사회구조 안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의 인간성을 표현하는 특정 생활양식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애기한다.
4부에서는 복지제도가 처벌제도 등 주요 사회제도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작용했다 할 방식을 다룬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품위있는 사회'와 존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를 비교,검토한다. 즉 ‘정의로운 사회’와 ‘품위 있는 사회’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정의로운 사회가 각자가 기여한 바에 따라 사회적 명예의 분배가 차등적으로 분배되는 사회라면, 품위 있는 사회는 더 나아가 그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즉, 명예가 훼손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는 반드시 품위 있는 사회여야만 한다고 본다. 하지만 어떤 사회는 그 성원들에 대해 정의로울 수 있지만, 그 사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방인)에 대해서는 모욕을 행사하는 사회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지, 아니 더 나아가 그런 종교집단들이 그 구성원을 어떻게 대하는지, 여성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규범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정의로운 사회가 반드시 품위있는 사회는 아닐 가능성이 있으며 서로 다른 이론이나 개념을 포괄하는 관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만, 그는 정의로운 사회보다 품위있는 사회를 확립할 가능성을 낙관한다.
저자의 결론은 '인간의 존엄성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회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는 평등주의적 사회정의 이념과 관련된 여러 문제 상황을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에 초점을 두고 한층 더 나아간 ‘품위 있는 사회’라는 인간다운 사회에 관한 또 다른 규범적 이념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한 ‘품위 있는 사회’는 결국 하나의 사회에 있는 ‘제도들’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보다 더 급하게 실현해야 하는 사회이며, 현실적으로 정의롭지 않더라도 이 사회는 반드시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품위 있는 사회’는 사회가 제도를 통해 구성원들을 존중하는 사회이고,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들이 정당한 이유로 모욕감을 느낄 그런 조건들과 싸우는 사회다.
그는 이런 사회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로 인간의 존엄성을 들었다. “사람들이 무엇을 모욕하고, 또 어떤 것을 존중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로 사람으로서의 자기-존중(자존심)을 부정하고 사람을 사람 아닌 존재로 다루는 현실에 대해 “사람을 어떤 ‘물건’이나 ‘기계’로 또는 ‘동물’이나 ‘인간 이하’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 대한 무시는 사람을 그 표현과 감정과 기분의 변화 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보지 않는 방식으로, 충분히 또는 세심하게 보지 않거나 마치 사물이나 동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것-낙인찍기)은 인간의 공동체로부터 배제시키거나 거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품위 있는 사회'에 한국 현실을 비춰보면 어떨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소수자에 대한 모욕과 국가권력 및 제도에 의한 모욕이 '일상다반사'라는 것이다. 조금 사정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장애인에 대한 모욕은 폭력의 수준으로까지 여전히 나타나고 있고 성소수자에 대한 제도적 모욕은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여성에 대한 무의식적 모욕과 폭력행태는 집권당의 대표에서 '강추행'이라는 별명을 얻는 국회의원, 대학교 내에서의 집단 성폭행, 술자리에서의 성추행, 일상적인 성희롱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군인과 학생에 대해 폭력과 모욕을 제도적으로 근절하고자 하는 노력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는 인간을 존중하고 모든 인간에 대한 모욕은 잘못임으로 그 사회는 자신의 품위 문제를 단순히 어떤 국적이나, 시민권이 있는 사회 구성원에게만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거주는 하지만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도 존중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때리지 마세요, 저도 사람입니다”라는 한국어부터 배우는 우리 현실에 비춰보면, 우리는 그들을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품위 없는 사회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등시민”으로 자기-존중(자존심)에 손상을 입게 되는 시민이다.
저자는 또한 품위 문제를 문화적인 부분으로 연결시켜 설명한다. 포르노그래피가 사적이 아닌 공적의 목적으로 사용되거나, 동성애자들처럼 사회적 소수자의 생활양식을 문화가 외면할 때, 사회가 충분히 여력이 있지만,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을 구축하는데 노력하지 않는 것도 상당히 모욕적인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연고주의나 학벌주의도 특정 집단의 배제의 원리가 작동하므로 사회의 품위를 훼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사회에 보이지 않게 제도화 되어 있는 속물근성, 사생활, 관료제, 실업사태 등까지도 그 본성은 상당히 모욕적인 속성이 있다. 특히 복지제도는 겉으로는 한 사회의 품위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대상자들을 동정이나 자비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부끄럽고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면 결과적으로 모욕적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한동안 논란이 되었던 '차등급식'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누구도 모욕되지 않고, 어느 누구도 기회에서 배제되지 않으며 참여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자기존중이 보장되고 ‘사회제도들’에게 모욕받지 않는 사회, 무턱대고 모든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똑같이 어떤 것을 나누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간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존중을 누리면서 사는 사회...
저자가 제사하고 있는, 현대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평등주의적 사회정의의 이상은 정말 중요하고 본래적으로 가치 있는 인간 존엄성의 보장이라는 가치 지향을 중심으로 재정립되거나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장과 경쟁을 만능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저물어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념이라는 잣대만으로 사회를 구분하고 규정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이제야 그것을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이해관계가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거대한 물결처럼 어떤 방향으로 함께 흘러가는 느낌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는 대신 꾸준하게 추구해야 할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더욱 절실하다. <품위있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아는 누구를 모욕하지 않았는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익숙한 제도와 문화로 인하여 누군가를, 어떤 집단이나 계층을 무의식적으로 모욕하고 있지는 않은가...
참고로 '품위'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으로 정의한다. 책의 제목 <품위있는 사회>의 원제목인 'decent'의 사전적인 의미는 '점잖은,친절한,예절바른'이다. 따라서 역자는 책의 내용과 저자의 취지에 맞게 책의 제목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과연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을 왜 '품위있는 사회'로 정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면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이반 일리히의 저서 의 한글번역본의 제목을 <학교없는 사회>로 정하여 독자들에게 저자가 학교를 없애자고 주장한 것처럼 편견을 심어버린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국어 사전이 유명무실화되기 시작했다. 2천여 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이 온갖 불법과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면서 "정의"가, 전두환의 파트너 노태우가 수천억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떠들면서 "보통사람"이, 국가를 수익모델이 삼은 가카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토건국가를 만들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면서도 '4대강살리기' '녹색성장' '공정사회'를 외치면서 "살리기"와 "녹색"과 "공정"이라는 단어가...ㅠ
[ 2011년 12월 0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