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완역 전습록 신선명문동양고전대계 36
왕양명 지음, 김학주 옮김 / 명문당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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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양명(王陽明) 저, 김학규 역 <신완역 전습록(傳習錄)>을 읽고 / 2005. 02., 752쪽, 명문당

《전습록(傳習錄)》은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 호는 陽明), 즉 왕양명(王陽明)의 제학설과 교계(敎戒) · 서간 등을 그 제자들이 편집한 것이다. 역자는 중국 사부총간(四部叢刊)의 <왕문성공전서 王文成公全書> 38권을 기준으로 주역(註譯) 했다. 양명사상(陽明思想)을 파악하는 데는 《왕문성공전서》 전체를 숙지해야겠지만 《전습록》을 정성껏 읽으면 왕양명의 사상은 대체로 이해된다고 전해진다.
"전습(傳習)"이라는 말은 《논어(論語)》 〈학이(學而)〉 제1(第一)의 "전(傳)한 바를 익혔(習)는가"에서 나온 것이라 하는데, 즉 이 명칭은 스승인 왕양명으로부터 전수받은 학문을 제자들이 잘 체득하여 익히고 있는지 어떤지를 스스로 반성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왕양명의 학문은 주자학(朱子學)에 대한 반성 내지는 육상산(陸象山) 학문의 계승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는 주자학의 역사와 양명학 태동에 대한 주역자의 분석과 평가다.
"남송 시대 주희는 한당(韓當, ? ~ 227년)의 훈고(訓詁)에 힘쓰던 학풍을 바꾸어 공자와 맹자의 전통을 이어받고 그들의 정신을 밝히는 것을 학문으로 목표로 삼아 대성시켰다. 주자학은 육조(六朝, 229년 ~ 589년) 이래로 도교와 불교에 의하여 다듬어진 철학적인 사유를 끌어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인생과 사회도덕을 논하는 광대한 규모로 공자사상을 확장시키고 있어서, 그 논리체계는 유가사상의 장관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송으로부터 원나라, 명나라를 통하여 주자학은 관학(官學)으로 학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규모의 광대함은 오히려 학문의 통일을 잃게 하였고, 정연한 논리는 끝에 가서는 관념의 유희로 전락하여 번잡한 형식주의로 빠지는 경향이 생겼다. 그리하여 이미 주자와 같은 시대에 육상산은 ‘마음이 곧 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주자의 형식주의적인 학문을 반대하였다.”
“왕양명은 바로 육상산의 학문을 계승하여 직설적이고도 간단명료한 학문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그 학문을 ‘육왕(陸王)의 심학(心學)’이라 세상에서 부르게 된 것도 그들이 내면적인 마음의 수양에 학문의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다만 주역자는 왕양명의 학문이 단번에 깨달아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일생을 두고 여러 단계로 발전을 거듭하였다고 평가한다.

<전습록> 한 번 읽고 내가 ‘양명학’을 알았다고 어디가서 설명할 수 있는 수준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전습록>을 시작으로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게 된 셈이다.

주역자는 왕양명의 학문의 요점을 여섯 가지, 즉 심즉리(心卽理), 격물치지(格物致知), 지행합일(知行合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사상마련(事上磨鍊), 양지(良知)라고 정리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여섯 가지가 아니라 심즉리, 지행합일, 치양지(致良知), 세 가지로 설명하기도 한다.

심즉리(心卽理) : ‘마음이 곧 이’라는 것은 이미 육상산이 주장한 이론이다. 왕양명은 그것을 “마음이 곧 이이다. 천하에 또 마음 밖의 일이나 마음 밖의 이(理)가 있겠느냐?” “마음 밖에 이가 없고,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로 발전시켰다. 주자는 마음과 이와 물건의 이를 독립시켜 각기 다른 것으로 보았으나 왕양명은 그러한 안팎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울지만 마음이 없다면 아름다운 빛깔도 고운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즉 “마음이 있는 곳이 바로 사물이 된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는 게 마음의 본성이다”라는 주장이다. 주자는 ‘사물의 본성이 바로 이’라고 했지만 왕양명은 ‘본성이 바로 이’라고 주장한다.
=> 현대적인 상식이나 철학에 비추어보면 인간의 존재와 관계 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나 현상을 자신(개인)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겪어야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다만, ‘성즉리’라는 개념으로 주자학 또는 성리학(性理學)이 관벽학문과 고시학문으로 전락해버린 당시 시대상황을 타개해버리기 위해서였다는 취지는 고려할 만 하다. 
당시 주자학은 왕들의 왕권 강화의 재료로써 전락됐다. 그래서 주자학은 도덕적인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윤리를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을 한 학자가 바로 왕수인이다. 그는 당초 도덕적인 측면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학자였으며. 그래서 왕수인도 주자학을 믿었지만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그는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 : ‘격물’과 ‘치지’는 원래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 중 두 조목으로서 주자도 매우 중시한 것이다. 주자는 ‘격(格)’을 ‘이르는 것[至]’이라고 보고 ‘물(物)’을 ‘사물의 이치[理]’라 풀이하였다. ‘치(致)’는 ‘추궁하여 얻는다’는 뜻으로 ‘지(知)’는 ‘지식’으로 보았다. 따라서 주자의 ‘격물치지'란 “만물에 대하여 그 이치를 추구하여 그에 관한 지식을 모두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왕양명은 ‘격’이란 ‘바로잡는다[正]’로, ‘물’이란 ‘일[事]’이라 풀이하고, ‘치’는 ‘이르는 것[至]’이며 ‘지’란 ‘참된 앎’ 곧 ‘양지(良知)’라 풀이하였다. 따라서 왕양명의 ‘격물치지’는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하고, 참된 앎을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는 “내 마음의 양지를 모든 사물에 이르게 하면 모든 사물은 올바른 이(理)를 얻게 된다. 내 마음의 양지를 이르게 하는 것이 치지(致知)이고, 모든 사물이 올바른 이를 얻게 하는 것이 격물(格物)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성의(誠意)’나 ‘정심(正心)’, ‘수신(修身)’도 모두가 ‘격물’과 같은 것이 되며, 이것은 마음의 수양을 통하여 깨닫는 올바를 이치를 실천하여야 하는 적극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게 된다.

지행합일(知行合一) : 따라서 왕양명에 의하면 ‘치지’란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앎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그는 “앎이란 행동의 시작이며, 행동이란 앎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음식을 먹어보아야 참맛을 알고 효도를 행해야만 참 효도를 알며, 아픔도 자기가 경험을 통하여 참된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지인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양명학의 ‘지행합일’이 대해 현대 한국인들이 상식 수준으로 알고 있던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상식으로 ‘지행합일’은 보통 “제대로 알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다. 즉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리(天理)와 인욕(人欲) :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고, 성인은 ‘천리를 순수히 보존하고 인욕을 버리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송대 이래 중국학자들의 이상이었다. 왕양명이 학문의 실천 원칙으로 내세운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린다’는 것도 이것을 계승한 것이다. 천리와 인욕의 구별을 처음부터 부정한 육상산과는 다르다고 평가된다. 이런 점에서는 왕양명이 육상산보다는 주자학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보는 게 옳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그러나 ‘마음이 곧 이’라는 왕양명의 전제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린다’는 공부방법이 모순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주자는 ‘본성이 곧 이’이기 때문에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린다’는 방법과 조화가 되지만, 왕양명의 마음에는 감정이나 욕망이 포함되어 ‘마음이 곧 이’가 되기 때문이다.

사상마련(事上磨鍊) : 왕양명은 한때 제자들이 세상의 공리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좌하여 마음의 수양을 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자들이 움직이기를 싫어하고 게으름만 피우게 되어 유가의 본시 성격을 벗어나는 경향이 생겼다. 그리하여 만년에는 직접 일을 통하여 올바른 마음가짐과 일처리를 해나가도록 이른바 ‘사상마련’을 주장하게 된다.
‘사상마련’이란 ‘모든 일이나 모든 기회를 수양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환경이나 개인의 욕망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지행합일’과도 통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길을 가거나 앉아 있거나 언제 어느 곳이건 수양의 장소가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양지(良知) : ‘양지’는 만년에 이르러 왕양명 학설에 중심을 이룬 것이다. 그는 ‘양지’란 두 글자는 "실로 옛부터 성인들이 서로 전하여 온 한 점의 골수이다”고 말하면서 양지를 깨우쳤던 기쁨을 ‘통쾌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발을 움직여 춤을 추었다’고 말한다. ‘양지’란 <맹자(孟子)>의 진심상() 편 등에 보이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본시부터 지니고 있던 진실한 지혜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양명에 이르러서는 가장 진실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바로 마음의 본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어느 경우에는 양지란 바로 천리에도 통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왕양명은 학문을 한다는 것은 이 ‘양지를 이루게 하는 것(致良知)’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왕양명의 ‘양지’는 진실한 시비 판단의 기준이 될 뿐만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생성한 본체와도 비슷한 것이다. 그는 ‘양지란 바로 조화이 정령이다’고 하였고, 또 ‘풀 나무나 기왓장 돌 같은 것도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고도 말하였다. 
=> 그래서 왕양명의 ‘양지’는 관념론이나 주관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지’란 바로 ‘도’이며 ‘하늘’이라고도 한 것을 보면 개인을 초월한 자연의 섭리 같은 객관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왕수인의 ‘양명학’ 및 사상과 관련하여 좀 더 공부해야 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왕수인의 삶일 것이다. 이 책이나 인터넷에서는 왕수인이 문무를 겸비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명나라의 위기를 여러 번 구한 충신이었다고 평가하지만, 다른 평가도 존재한다. 강신주는 그의 책 <철학 VS 철학>에서 왕수인을 체제옹호자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왕수인이 명나라 조정의 명령을 받아 진압한 여러 외적의 침입, 반란이나 ‘도적’은 실제 먹고 살기가 고단했던 명나라 농민들의 난과 봉기도 여러 차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책을 읽으면서 동양고전을 공부하겠다며 겁 없이 전습록에 도전한 것을 후회했다. <전습록>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아니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기》(禮記)나 주자(周子)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먼저 공부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기》(禮記)나 《대학》(大學), 《중용》(中庸)이라는 고전이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제자들과 후학들이 해석한 것이니 내가 그동안 한두 번 읽은 <논어>와 <맹자>의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동양고전에 대한 학습이 부족해서인지 주역이나 한글 해설이 매끄럽지 않고 설명도 분명치 않게 느껴졌다. 물론 전적으로 동양 고전을 직접 읽고 분석하여 주역할 능력도 되지 않는 국내 학자의 일본책 번역서를 읽은 나의 불찰이다.
혹시 양명학을 공부하고 싶거나 <전습록>을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 정인재가 번역한 <전습록 1,2>(2007 청계)나 김동휘의 <전습록 : 조선이 거부한 양지의 학문>(2010 신원문화사)를 추천한다. 양명학이나 <전습록>을 개략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독자는 ‘수유너머’ 고미숙씨기 기획한 <낭송전습록>(2014 북드라망)이 적당할 것이다.

[ 왕양명의 생애 ]

왕양명은 여요(餘姚-현재의 저장 성에 속함)에서 태어났다. 1481년 10세 때에 진사에 1등으로 올랐다. 11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던 도중 금산사에서 시부를 지었는데, 그 지혜가 타인을 놀라게 했다. 17살 때 부인 제씨(諸氏)를 남창(南昌)에서 맞이했는데, 혼례날 집을 나가 우연히 근처 산중에서 도사(道士)와 양생설을 논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앉은 채로 밤 새우기도 했다. 
21세 때는 향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는 낙방하였다. 수도 북경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주자가 남긴 책을 구해서 공부했는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그것 나름의 이치(理)가 있으니 그 이치를 끝까지 캐물어야 한다(格物窮理)"는 주자의 말을 실천하겠다고 관서에 있는 대나무를 7일 동안 바라보았지만 병이 들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주자학을 불신하고, 환멸감을 느끼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28세에 회시에 합격하여 비로소 관리가 되었다. 공부(工部)를 거쳐 이듬해에 형부 운남 청리사주사가 되었다. 30세에는 강북에서 형벌을 받은 죄수를 심의, 기록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사이에도 승방을 방문하기도 하고, 도사에게 도를 묻기도 했다. 31세 때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해, 양명동에 집을 짓고 도가의 도인술을 수련한다. 도교와 불교의 허망함을 깨닫고 정신이 안정된 양명은 다음해에 항주의 서호에서 요양하였고, 33세에 북경에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동지를 모아놓고 성학(聖學)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정치에 연루되어 35세 때에 귀주(貴州) 용장(龍場)에 유배되었다.

45세부터 3년 동안 강서, 복건의 각지에서 설치던 무장 도적떼를 토벌하고, 영왕(寧王) 신호(宸濠)의 난을 평정하는데도 공을 세웠다. 무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하자 왕수인은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지고,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를 겸하게 되었다. 이 때 나이 50세였다. 이듬해에 수인의 아버지가 죽어 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3년상을 마친 뒤에도 복직하지 못하고 56세까지 고향에서 아무 임무도 없이 지냈다. 그 사이에 양명은 양지(良知)의 학설을 수립했고 제자들에게 이를 가르쳤다.  
왕수인의 나이 56세가 되던 5월에 광서의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7월에는 팔색단등협의 이적을 토벌했는데, 그 소굴을 소탕해서 다년간의 우환을 한방에 제거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타지에서 정무를 행하면서 건강이 악화된 그는 광동성 경계에서 광서로 들어가던 도중에 숙사[宿舍]-숙소-에서 타계했다. 가정 7년(1528년) 10월 29일, 그의 57세의 나이였다. 유언은 "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였다고 한다.

[ 2015년 3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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