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냥 - 상 - 개정판
텐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가족 사냥'에서 '가족'은 주어일까 목적어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어떤 공동체가 피로 얽혀있다는 건 무척 기기묘묘한 일이므로…….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나 반대로 무책임한 태도 역시 가족의 일면이다. 새로운 가족 문제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일본의 2010년 『범죄 백서』를 보면 살인 사건의 50% 정도가 친족 살인이며 상해 치사 역시 친족이 관련된 경우가 50% 정도를 차지한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최근 이삼일가량 아침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아동학대는 물론이거니와 내 아들이 번 돈이니 며느리는 상관 말라며 마구 써버리는 시어머니, 밖에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지만 집에서는 폭군으로 변하는 남편 등 이상하리만치 일그러진 가족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면 일종의 행복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나도 마찬가지다. 마치 공포 영화를 보고 나와 '재미있었다'고 느끼는 것처럼, 『가족 사냥』을 덮고 나서 안도하는 것처럼. 「이건 소설(영화)일 뿐이잖아. 우리 가족만큼은…….」 하고. 중요한 건 이 소설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용히 손을 들고 발언을 하고 있는 거다. 자신의 이상을 좇기 위해 자녀를 희생시키는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혹여 자식에게 거추장스러울까 부모가 가족 안에서의 은거를 취하는 게 옳은 일인가? 여기에 스도 슌스케가 다니는 학교의 관리인 ㅡ 그녀의 아버지는 과거 한국에서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어 왔다 ㅡ 의 얘기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그녀는 학교를 떠나기 전 학생들 앞에서 말한다. 「여러분이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악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지도자가 고향에서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의미도 사실은 이해할 수 이해할 수 없을…….」 마지막 말은 교감에게 제지당한다.





그림은 파울라 레고의 「가족」(1988)이다. 부인과 두 아이는 아버지의 옷을 '벗기고' 있다. 성적인 뉘앙스가 아니다. 이 그림에서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쥐어 짜이는' 인물로 전락해버렸다. 정말 가족이란 공동체는 신성함 그 자체일까? 나에게는 오른쪽 창가에 있는 아이의 표정이 가장 두려워 보인다……. 가족이란 공동체는 외부와 맞서 대립하는 가족 이기주의와 집단 무의식의 모습을 취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가족 내에서의 투쟁이라는 측면도 알게 해준다. 왜 내가 가족와의 알력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소설에서 해충 구제를 하는 인물의 말을 빌리자면 가족은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용감하게 공유해 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떤 건물을 짓든 우선 토양부터 소독해야 하듯이 이 이야기의 가족 문제를 들여다보려면 근저에 깔린 가족의 썩은 지탱점을 보수해야 한다. 내 짧은 생각에, 타인에 대한 사랑은 가족으로부터 생겨난다.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욕구 ㅡ 물론 모든 가족은, 모든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ㅡ 가 강한 구성원이 있다면 사랑의 단계는 현저히 낮아지고 말 것이다. '가족'이라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자면,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이런 문제는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릇된 행복감을 얻고서 자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90년대부터 써보고 싶은 게 있었지만 그즈음에는 아직 유아학대나 아동학대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 것은 이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 표현력도 부족했고 (...) 그런 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았겠지만 소설에 대한 사회적 요청이란 측면에서는, 당시에는 강하게 느끼지 못했다. 사회가 그런 소설을 수용할 수 있는 밑바탕이 마련되지 않았다고나 할까.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와의 대담집 『소년과 아프리카』에서 덴도 아라타가 한 말이다. 그럼 지금은 사회가 변했을까. 그때는 이런 문제를 드러내놓고 얘기할 만큼 황폐해지지 않았다는 뜻일까. 『가족 사냥』에서 하나의 은유로 투영되는 흰개미의 여왕개미는 한 번의 교미로 정액을 축적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수컷(남편)과 함께 지낸다. 말하자면 가족생활이다. 사랑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인간으로 이루어진 가족도 언제나 사랑으로 유지되고 있을까? 내가 타인을 사랑하는 순간 나는 상대방으로부터의 사랑 또한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를 버리고 떠날 수도 있다. 문제는 과연 가족 관계에서도 이 동어반복이 가능하겠냐는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멘 아멘 아멘 - 지구가 혼자 돌던 날들의 기억
애비 셰어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이미 아는 물음인데도 다른 답을 취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외려 정답을 맞히는 것이 부적절해 보이는 건 왜일까. 심장은 깨져있고, 펼쳐진 침대 시트는 눅눅하고, 폐활량이 77퍼센트로 늘어나고, 684번 고속도로가 일어나지도 않을 두려움을 보여주더라도 ㅡ 끊임없이 날카로운 것들을 모으고 하루에 몇십 분씩 기도를 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월터 핫도그 가게가 무사하건 말건 ㅡ 흑마술 같은 급류를 피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애비가 일종의 자해라고 생각하는 살을 꼬집거나 머리를 때리는 행위는 나 역시 겪어서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행동들을 본 적이 있다. 대학 시절 만나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야기 속 애비와 비슷한 상황이 오면(그렇게까지 심각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엄지손톱으로 집게손가락 언저리를 마구 찔러대곤 했다. 내가 그것을 하지 못하게 잡으면 그녀는 내 손을 으스러지도록 세게 쥐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제이가 되지 못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극지에 서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진실은 결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므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본질의 문제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도 그녀와 애비가 '인간의 망실(亡失)'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님(원서 쪽을 검색해보니 거기에선 'G-d'로 표현한 것 같다)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삶과 죽음이라면, 우리는 애비처럼 지고의 진리인 인간을 통찰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활세계(lebenswelt, lifeworld)에서 뻗어간 메를로-퐁티의 아카이브가 그러하다. 「지각된 광경은 순수 존재를 갖지 않는다.」 그가 인간 개체를 '함몰'과 '주름'이라 비유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이야기로 보인다. 결국 궁극적으로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여지를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애비의 강박증을 보면 심지어 읽는 사람까지도 거기에 시달릴만한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나는 정말이지 너무도 지긋지긋했다!). 삶의 무수한 문제들 중 내가 가장 큰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오늘은 또 누가 내 손에 죽어나갈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네, 아니오'라는 양자택일을 들먹이는 우스꽝스러운 일련의 사유가 하-님의 이름에 입맞춤할 수밖에 없는 귀결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애비와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지구가 혼자 돌던 날들의 기억'으로 남기거나 아니면 지구 밑에 가라앉아서 축을 따라 함께 순회하며 연극을 벌이는 또 하나의 양자택일과 투쟁해야 한다. 그러니 ㅡ 엄마의 말대로, 쉬잇.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ㅡ 무라카미 라디오 2 ㅡ 가 나오기 십 년쯤 전에 『무라카미 라디오』(까치, 2001)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잡지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하시 아유미(大橋步)가 삽화를 그렸는데, 어찌된 일인지 예전 것에는 '사정상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오하시 씨의 그림은 빠지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란 편집부의 코멘트 하나로 마무리되어 있다. 그 사정이라는 게 뭔지 그다지 관심은 없었지만 귀찮아서는 아니겠지(설마). 이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옛날 글들을 다시 한번 죽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는 참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도 쓸 수 있고 때에 따라선 시도 쓸 수 있다. 뭣하면 이렇게 에세이를 쓰기도 하고. 『어둠의 저편』이었나 『해변의 카프카』였나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그즈음부터 하루키의 소설이 좀 부담스러워졌었던 것 같다. 왜냐고 물어도 뭐라 꼬집어서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그의 에세이는 좋다.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다. 작년 말에 나온 『잡문집』(비채, 2011)도 순식간에 읽어버렸으니까. 이 사람은 소설을 쓸 게 아니라 에세이스트였어야 했어,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2001년에 나왔던 책은 고속버스 안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는 29년간 I시(市)를 벗어난 적이 없으므로 추측컨대 서울에 사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나로서는 고속버스를 탈 일이 좀처럼 없으니 당연히 범위가 한정된다). 올라가면서 한 번, 내려오면서 두 번째 읽었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도 지금 두 번째 보고 있는데 절반가량 읽었을 때, 지금쯤 감상이라도 좀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과 달리 에세이집은 딱히 감상을 쓸 만한 얘깃거리도 생기지 않아서 불안한 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썩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예컨대 조이스의 『율리시스』 같은 걸 읽고서 2,000자 가까운 분량의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ㅡ 하루키의 에세이는 그보다는 다종다양. 그래서 도저히 잊히지 않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은 아니지만 은근슬쩍 어디에선가 불쑥 생각나는 쪽이다. '아, 어떤 글에서 이런 비슷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하고 말이다. 특유의 '몽글몽글함'이 공백을 채우고 있는 듯한 기분, 정체 모를 메뉴가 적혀 있는데도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뭐 그런 것. 그럴 땐 어쩐지 독자보다는 하루키에게 이익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쓰면서 책을 계속 읽고 있었는데 「슈트를 입어야지」 꼭지까지 와버렸다. 이건 전작의 「양복 이야기」와 비슷한 글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양복'과 '슈트' 정도일까. 그런데 이 양반은 이걸 또 글로 써버렸다. 「이 얘기도 한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언제 어디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으므로 일단 처음이라 생각하고 쓴다.」 뭐야 이거, 자기 좋을 대로잖아. 근데, 이상한 게, 이런 점이 좋다니깐, 하루키 에세이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사르 2012-07-1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맞아요. 이상해서 좋아요. ^^
하루키는 정말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은 아무런 금기도 없이 쓰는 거 같애요. 그런 자유스러움, 그런 이상함이 하루키의 매력 같애요. 저는 무라카미라디오는 아직 안 읽었는데요. 이제 읽어보려구요.

ㅋㅋ <율리시스> 읽고 2000자나! 하하. 정말 대단한 일이겠어요. 공감공감.

그레코로만 2012-07-14 11:32   좋아요 0 | URL
그쵸. 뭘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데 그런 점이 또 이상하게 보이고...ㅋㅋ
 
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누쿠이 도쿠로는 야마모토 슈고로(山本周五郞) ㅡ 과거 나오키 상을 거절한 유일한 작가 ㅡ 상을 수상한 것을 '운'이라고 했는데 어찌됐든 그건 겸손의 (빈)말이고, 내 관심사는 작가의 『통곡』을 뛰어넘는 작품이 과연 언제 나올까 하는 것이었으므로 온 신경의 초점이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통곡』 다시 쓰기'가 가능할 것인지 어떤지가 가장 궁금했으나, 일단은 거기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일단 소설 속에서 드러난 '손가락 수집가'가 피해자의 집게손가락을 취하는 이유나 그 이전에 살인을 하는 이유 자체의 연결고리는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연쇄 살인마, 정보 유출, 수직적 경찰 조직이라는 케이스가 이미 소설 속에서의 '낡은 것'이라면, 여기에 인터넷이라는 '현대의 것'을 적절히 조합한 발상이 이 작품의 묘미라 하겠다. 인터넷과 휴대 전화를 통한 살인 현장 중계는 꽤나 당혹스럽다. 이것이 자기현시욕에서 기인한 것인지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는지는 넘어가고, 역시 서술상의 흥미로운 점이라면 빠른 시점의 변화다. 하나의 군상극을 연상케 하는 이 기술은 단지 재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낡은 것'을 통해 '현대의 것'으로의 연착륙을 부각시키고 있다. '현대의 것'이라면 단연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통신망일 텐데, 콘센트에 꽂힌 지저분한 선들처럼 이야기가 진행됨과 동시에, 마찬가지로 익명의 세계라는 화두를 현실로 끌어들여와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하나의 접점에 무섭고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피력한다. 또 희한하게도 소설 속 인물(형사)들은 하나같이 중대한 문제를 떠안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가족'이다. 1차적 집단으로서의 전인적 상호관계가 결여된 가족, 밀착성과 연대성이 없고 역할수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족 간의 긴장과 의사소통의 부재. 이 문제점은 소설 속 범인인 '손가락 수집가'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이들이 고민하는 것은 모두 가족과 가정이며, 그것보다 도드라져 보이는 인터넷이나 휴대 전화 쪽이 외려 전자를 뒷받침하고 끌어주는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다. 『후회와 진실의 빛』은 외관상 '경찰 소설'이다. 수사관들의 반목과 조직 내부의 움직임에 따라 소설의 발단과 결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설정된 것임에 불과하며 ㅡ 이미 시작부터 추측을 엇나가게 하는 기교일 뿐이다 ㅡ 그 뒤에는 엄연히 불안정한 사회적 배경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제로섬으로 보이는 어떤 뺄셈의 가치가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군상의 문드러진 폐부를 물밑에 감추어 놓음으로써 '후회와 진실'의 빛깔, 과연 그것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거다.



덧) 형사 하나를 이렇게까지 몰락시킬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나마 끝까지 수사에 관여한다는 점(링컨 라임처럼?)과 왠지 '손가락 수집가'의 마음이 투영된 것 같아 조금 안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2008년
ㅡ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민주화 추세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 확산이 중단되었다.


2010년
ㅡ 2008년 이래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가 위축되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 Economist Intelligence Unit)이 발표한 '민주화 지수'의 내용이다. EIU는 5대 평가 부문으로 민주화 성과를 분석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선거 과정의 투명성과 다원주의의 존중, ②시민의 자유, ③정부의 기능성, ④정치 참여, ⑤정치 문화.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발명품은 이렇게 다각화되었고 현재인 오늘을 변화시켰음에도 때로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는 민주주의가 걸어온 길을 서술하고 있지만 어쩐지 이것이 민주주의의 '역사'라고 보기엔 조금 애매모호하다. 그것은 분명 과거부터 있어왔지만 뭔가 변화의 양상, 다시 말해 과거보다 발전되고 과거보다 뛰어난 점을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아테네의 민주주의 국가로의 변모는 쿠데타의 위험을 자각한 지배계층이 법안을 마련한 것을 그 태동으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아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이것을 뒷받침할 서술 사료라 할 만한 것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미약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중세 후기에 이르러서는 관료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선거 문화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역시 제한된 유권자에 의한 투표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로는 민주주의라고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부족했던 것들이 현대 민주주의로의 발전으로 이어졌을까? 물론 근대 유럽에서는 중앙집권화를 띠는 정부와 국가라는 개념이 강조되기는 했다. 게다가 런던의 '퍼트니 논쟁'으로 인해 대의정부 또한 주장되기에 이르렀고 사후 '수평파'라는 것을 발견해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소위 '선거 관습'이라는 것, 정치란 화두가 대중적 담론으로 떠오른 상태에서도 계속된 이러한 악습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을 잘 안다. 19세기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또한 알고 있다. 그런데 보자. 오늘날 민주주의 수립 환경을 만들겠다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대량 살상 무기 운운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수출하겠다며 이라크의 정권 교체를 시도한 그들을(이건 1차 비유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비전인가? ㅡ 더구나 이라크의 민주주의는 결과물로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구상의 많은 국가가 민주주의를 목표한다. 내가 보기엔 그것이 한계다.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라 해도 보이지 않는 '우선권'을 가진 자들은 존재한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묵살당하고, 무시당하고, 유아 취급을 받고, 권리를 박탈당한다. 로저 오스본은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이 말은 이렇게 보면 맞고 저렇게 보면 틀리다. 공동선을 향하는 과정에서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질 못하는데 어떻게 그 민주주의 자체를 말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