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 탱고를 찾아 떠나는 예술 기행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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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가르델의 「포르 우나 카베사(Por una cabeza)」를 오랜만에 들었다. 자그마한 미니 CD가 초판 한정으로 책 뒤에 함께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저 자글자글한 소음마저 달큼하달까.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음악은 너무나 세련되고 매끈해서 날카롭기까지 한데 비해 카를로스 가르델의 음성으로 듣는 건 아련할 정도다. 섹스가 육체의 위로라면 탱고는 영혼의 위로다, 라는 카피가 헛되지 않게 『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유려한 묘사와 함께 곁들여진 사진으로 아르헨티나의 무더운 밤을 맛있게 담아냈다.

 

 

 

그날, 탱고 공연을 보고 나온 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밤하늘에 초승달이 위태롭게 떠 있던 날 (...) 알 파치노가 주연한 영화 《여인의 향기》 포스터였는데 거기엔 이렇게 써 있다. 「잘못하면 스텝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추면 돼요.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지요.」 (...) 조금이라도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절대 출 수 없는 춤. 저런 춤을 추는데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순간, 벽에 붙은 포스터의 글씨가 이렇게 읽히기 시작한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돼요. 마음이 엉키면 그게 바로 사랑이죠.」


ㅡ 이병률 『끌림』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 탱고가 원래 남자들끼리 추던 춤이라는 걸. 부두 이민자들이 외로움을 달래려고 서로 부둥켜안고 추던 춤이라는군. 유흥가를 찾은 노동자들이, 육체의 만족은 얻었지만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자기들끼리 탱고를 추었단다. 그렇게 시작된 탱고는 노랫말도 붙여지고 반도네온 등의 악기로도 악단이 구성됐으며 점점 하류층에서 중상류층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음악을, 우리는 너무나도 유명해진 「포르 우나 카베사」로 오늘날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알게 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시각장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도서관장까지 했던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탱고의 가사도 썼다는 것. 허, 이래서야 정말 나는 탱고란 문화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던 거였다……. 다시 책을 보자면 이건 비단 탱고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아르헨티나라는 도시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도 말했다. 「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너무나 좋아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 도시를 좋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은 질투심과 같은 사랑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일본어가 아니라 에스파냐어를 전공할 걸 그랬나…….

 

에이, 그냥 가르델의 노래나 들어보자.

▶ (클릭) http://youtu.be/SJ1aTPM-d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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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평 - 퇴짜 맞은 명저들
빌 헨더슨, 앙드레 버나드 지음, 최재봉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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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인 책을 읽었을 때 「이걸 책이라고! 뭐 이런 게 다 있어!」, 나는 이렇게 욕하며 책을 집어던진다. 물론 그게 나쁜 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내 취향이 아닐 뿐이고,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니까 ㅡ 하긴 그럴 정도면 끝까지 읽기도 전에 중간에서 책 읽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반대로 몹시도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면 감상문 따위를 적으면서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는다. 이런저런 검색까지 해가며 '어려운 말들'도 좀 섞어가면서. 참 바보같은 말이지만 나는 '사악한' 서평은 쓰고 싶지 않다. ①작가가 우연히도 내가 써놓은 감상을 읽고서 좌절에 빠질 것이다. ②그 책을 구입하려던 사람이 내 감상 따위에 구애되어 구매버튼을 클릭하는 걸 주저할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생각에서는 아니다. 나는 비평보다 나쁜 것은 칭찬의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또 어떤 서평들은 유감스럽게도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하나의 작품을 놓고 정말이지 악랄하게 평가하는 일은 하지 못하겠다. 내 일개 감상이 파급력을 갖는다는 생각에서도 아니고, 언젠가 내가 악평을 퍼부은 책의 작가가 몰래 내 뒤를 캐 나를 납치한 다음 손톱 밑에 엄청나게 큰 바늘을 꽂으며 고문할 거라는 상상 때문도 아니다. 각설하고 여기서 얘기할 건 '악평'에 대해서다. 『악평』에 담긴 '악평.' 왜 이렇게도 훌륭한 작품에 고약한 평가를 내렸을까 하고 의구심을 갖는 대목도 있고, 역시 '이런 평가는 당연해' 라며 동의를 표하게 되는 구절도 있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책을 들여다보자.

 

 

제인 오스틴에 관하여

나는 사람들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왜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보기에 오스틴 소설은 어조가 조야하고 예술적 창의성도 형편없으며 영국 사회의 빌어먹을 관습에 갇혀 있는 데다 (...) 이 작가의 머리를 사로잡고 있는 단 하나의 문제는…… 결혼할 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 차라리 자살이라면 더 존중할 만할 것이다.

ㅡ 랠프 월도 에머슨, 『일기』(1861)

 

 

오노레 드 발자크에 관하여

이야기를 꾸며 내는 데에서나 인물 창조 및 구성에서나, 또는 열정을 그리는 데에서 상상력이 부족하다……. 프랑스 문학에서 드 발자크 씨의 자리는 이렇다 할 만한 게 없다.

ㅡ 외젠 푸아투, 『르뷔 데 되 몽드』(1856)

 

 

『위대한 개츠비』에 관하여

F. 스콧 피츠제럴드 씨는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로맨스든 멜로드라마든 아니면 뉴욕의 상류 사회를 곧이 곧대로 묘사한 것이든, 바보 같은 이야기다.

ㅡ 『새터데이 리뷰 오브 리터리처』

 

 

『마담 보바리』에 관하여

플로베르 씨는 작가가 아니다.

ㅡ 『르 피가로』

 

 

『율리시스』에 관하여

『율리시스』를 다 읽었다. 이 소설은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 책이 산만하다. 상쾌한 느낌이 없다. 허세가 많다. 상식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적인 의미에서도 상스럽다. 내 말은, 일급의 작가라면 글쓰기에 대한 존중 때문에 이렇게 속임수를 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ㅡ 버지니아 울프

 

 

『햄릿』에 관하여

조야하고 야만적인 작품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라면 아무리 상스러운 사람들이라도 참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술 취한 야만인이 쓴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ㅡ 1768년에 볼테르가 한 말, 『볼테르 작품집』(1901)

 

 

『파리 대왕』에 관하여

……극도로 불쾌하다.

ㅡ 『뉴요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 관하여

……거창한 약속들과 배달되지 않은 선물들로 가득한 책.

ㅡ 『커멘터리』

 

 

『악평』에는 이보다 더 심하고, 보다 악랄하고, 작가의 노고를 망쳐버리는, 시쳇말로 요즘의 불온서적이라 느낄 법한 악평과 작가들에게 보낸 가혹한 거절 편지의 내용도 실려 있다.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공공 도서관이 『허클베리 핀』을 금서로 지정하자 마크 트웨인이 「이제 2만 5천 부는 더 팔릴 거야!」라며 기뻐했다는 '환영받은 악평'의 경우는 애교로 넘어가자. 어쨌든 나 역시 모든 작가들에게, 이 책의 편집자 빌 헨더슨이 서문에 써놓은 말을 해주고 싶다. 「당신들이 웃어 넘기기를, 그리고 계속해서 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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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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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떠오르는 추상의 이미지와 눈[雪] 그리고 가족이라는 점에서 영화 《씬 시티(Sin City)》, 페터 회, 로스 맥도널드가 복합적으로 버무려졌다(이런 이유로 좋은 작품이라 말하는 건 아니고). 그런데 너무 많은 걸 집어넣어서일까.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점은 좋았지만, 반대로 조금 빡빡한 감이 없지 않아 독자의 원활한 개입이란 측면에선 그리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과연 등장의 의미가 뭘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곰팡이 제거반은 체호프의 '발사되지 않은 총'처럼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동시에 범인의 살인 동기 또한 내 타입은 아니었다. 그럼 대체 『스노우맨』의 뛰어난 점은 뭔가. 내가 보기엔 '밸런스'다……. 일단 만들어지면 자연스레 녹기 마련인 눈사람의 태생적 명제를 끌어온 것은 매력적으로 보이며, 북 트레일러에 너무 구애된 나머지 초반부터 일종의 '장면'들이 텍스트 읽기를 재촉한다. 과감한 생략과 더불어 과하지 않은 디테일한 연출은 긴박한 속도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독자의 상상을 부른다(앞서 독자의 개입이 힘들다고 한 건 내러티브에 있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 것이다). 말 그대로 텍스트가 그대로 하나의 미장센이 되는 거다. 처음 주인공 해리 홀레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그것도 곧 분산되고 만다. 대부분이 '쓸모 있는' 조연들이었고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역할이 적절하게 부여되어 있으므로.

 

 

또한 현실감. 이 소설에서의 현실감이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리얼리티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면 독자가 받는 보상은 적거나 없다. 그래서 『스노우맨』을 읽게 되면, 허구적 실재를 일단 수용한 후엔 텍스트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만 힘을 소진한다 ㅡ 그래도 나는 이 여정을 끝낸 후에 「이런 소설은 200페이지쯤은 더 있어도 되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니까 이 작품은 독자의 열의를 꺾지도 않고, 극심한 묘사로 혼란을 초래하지도 않으며, 지나치게 심미적 매력에 얽매이지 않았으면서도 영민한 요령으로 '밸런스'를 유지한다. 읽으면서 얼핏 불륜의 죄악 혹은 불륜의 처벌이란 논제를 피력하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그건 아니었다. 말인즉슨 『스노우맨』이 내포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혼전순결'이나 '혼후(後)순결' 따위의 단세포적 이야기가 아니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나아가 '가족신화(family myth)'라고 여겨질 수 있는 거다 ㅡ 이건 가족이란 공동체의 합의된 거짓말로 가장된 것이다. 물론 자칫 확대해설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알레고리에 메스를 들이댄다는 방증은 상당히 농후하다. 왜 작가는 해리 홀레와 독자에게 라디오의 음성을 통해 바다표범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왜 스퇴프의 유전적 결함을 소설의 키워드로 설정했는가? 왜 여기에는 인간의 짝짓기라는 통계가 등장하는가? 뭐, 짚어가면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스노우맨』은 본질로 설정한 문제에 스스로 답하는 폐쇄적 구조에서 살짝 비껴나 있다. 이것이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준다는 식의 예술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이 소설이 소위 명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은, 얄팍한 속임수가 없고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속성을 꽤 차분히 조합했다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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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2-04-2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곰팡이맨에 삘받아서 눈팅만 하다 댓글 남겨요.
김전일로 추리를 배운 전 곰팡이맨이 당연하게도 범인인줄 알았지 뭡니까 ㅎㅎ

그레코로만 2012-04-28 09:47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그놈, 뭔가가 있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버려서 약간 실망(?)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혹 다음 시리즈에 그 곰팡이 제거반을 다시 등장시킬 의도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ㅎㅎ
 

 

 

나는 커뮤니케이션북스 지만지 시리즈의 보급판(문고본이라 하긴 힘들지만)이나 범우문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일신추리문고, 과거 열린책들의 Mr. Know 시리즈, 그리고 북스피어의 에스노벨(에스프레소 노벨라) 등등, 이 정도밖에 문고본 혹은 페이퍼백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알고 있는 문고본 형식을 띤 책들은 이게 다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한국 출판시장에 나온 문고본은 희귀할 정도다. 국내 출판시장의 여러 가지 특성도 있겠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싶다. 물론 수요도 썩 많아 보이지는 않으나 공급 역시 원활치 않은 게 사실이다. 반대로, 출판사의 경영상의 이유도 있겠으나 독자의 인식 역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책의 본질은 읽는 데에 있는 것이지 소장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니 당연히 하드커버는 소장가치가 높다, 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진정 책을 아낄 마음이라면 장정에는 구애되지 않아야 하는 게 맞다. 물론 외형에서 오는 소장의 가치(장기 보관)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모든 경우에서 질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ㅡ 당연히 문고본이라 해서 다음날 바로 책 귀퉁이가 찢겨져버린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값싼 종이를 사용한다거나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다는 이유로 문고본이 싫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당최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문고본이란 '태생적으로 그런 것이다.' 이를테면 가수들의 정규앨범과 미니앨범의 차이쯤 되려나. 당연히 여기에는 기획부재로 인한 무분별한 작품 선정이나 고전의 재탕은 없어야 한다. 참신한 기획과 정가제도(유통구조 개선도 함께) 그리고 독자들의 인식제고가 동반된다면 문고본의 활성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생각이다(정말 그럴까?) ㅡ 덧붙여 잠재적 수요를 깨우는 기획 역시 필요하다. 심지어 문고본으로 선집이 아니라 전집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컨대 한 작가의 저작을 출간하기로 결정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비록 졸작일지라도 모두 다 출간하는 기획 말이다(열린책들 홍지웅 대표의 말).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 작가의 작품이 '뜨면' 다른 출판사에서 저작권 계약을 하고 출간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게 최대의 문제로 남는다. 전집을 내고자 하는 출판사에게 선의로 저작권을 양보하는 일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모든 경우에 해당될 수는 없다. 어쨌든, 에스노벨 시리즈 001 『위대한 탐정 소설』(북스피어, 2011)의 발행인의 말에 적힌 것처럼 ①장르 문학 작가가 썼다면 픽션도 좋고 논픽션도 좋다, ②분량은 길지만 않으면 단편도 좋고 중편도 좋다, ③어떤 책에는 논픽션 하나만 실릴 수도 있고 어떤 책에는 단편 두 개만 실릴 수도 있고…… 와 같이 자유롭게 출간하다보면 독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분명히 반응하게 되어있다. 왜? 좋은 기획이 있으면 구입하는 독자가 있으므로. 그럼 그게 꼬리를 물고 자꾸만 문고본이 생산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문고본(또는 페이퍼백)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그리고 앞서 다소 희망적으로 휘갈긴 게 사실이지만…… 한국 출판시장에서의 문고본이 성공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한다. 그럼에도 얌체같은 생각에, 누군가는 꼭 문고본을 출간해줬으면 한다. 진부한 말이지만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어도 ㅡ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ㅡ 좋은(재미있는) 책은 반드시 독자가 알아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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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 불야성 시리즈 1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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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 세이슈(馳星周) ㅡ 홍콩 배우 주성치의 이름을 뒤집어놓고 일본어로 발음한 필명 ㅡ 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불야성』 단 한 권으로(물론 시리즈가 있긴 하지만) 사람 진을 다 빼놓으려고 작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알고 있는 하드보일드 쪽이라면 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 정도밖에 없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극의 전개와 묘사며 인물의 조형이며 독자까지 배신하는 철저함이며, 뭐 하나 뛰어나지 않은 게 없다. 정말 오랜만이다, 한 자리에서 내리 읽게 만드는 작품은. 하드보일드의 태생적 특질, 여기서는 선택, 선택만이 살 길이다. 어딘가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인공이 붙잡아야 하는 끈은 바로 거기다. 당연히도 나는 슈미트(Carl Schmitt)를 떠올리게 된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질자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존재적으로 어떤 타인이며 이질자라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을 조금 과장하자면 '적을 상정하지 않으면 내 존재는 성립할 수 없다'라는 결론이다(그의 '국가의 독재'라는 건 차치하고). 물론 근저에는 정치적 카테고리에서의 편가르기라는 식의 비관적 논제가 깔려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나는 이 논리에 지적 같은 건 할 수 없다. 당장 집 밖에만 나가면 모든 게 정치적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불야성』에는 '좋은 놈'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윗대가리로부터의 시혜로 존속하거나 그 윗대가리가 되거나. 아니면 철저한 아웃사이더가 되거나. 하지만 그 아웃사이더 역시 뭔가가 필요하다. 먹잇감이다. 결초보은의 관계든 채권채무 관계든 상관없다. 최대한 타인에게 빚을 만들고, '보험'을 들어두고, 머리를 굴린다. '구성된 주체'와 '구성하는 주체' 정도의 차이쯤 될까. 신주쿠는 그들을 지켜주는 가이아처럼 여겨지니 말이다. 그럼으로써 소설은 인간이란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무색케 만든다. 자연스레 리좀 같은 복잡다단한 뿌리줄기를 옮겨 다니긴 하지만 그 끝엔 벽이 있어서 ㅡ 에포케(epoche), 즉 자의든 타의든 '판단 중지'가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아무리 자유스런 코뮤니즘을 외쳐도 신주쿠는 그것과 일국사회주의 양자의 모습을 띠며 산소를 빨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다. 이쯤 되면 교훈 아닌 교훈은 뭘까? 친구는 가까이, 적을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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