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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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과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아마도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진지한 일(자동차에 이름을 붙이는 데에도)이라면, 울티모(마지막 사람)를 아이의 이름으로 낙점한 부모의 의중에는 신비스런 열의와 든든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냄새의 자취에는 바람이 불지 않고 마음의 행로에는 질서가 없다. 울티모의 앞에는 구애되는 것이 없으며 그의 등 뒤에는 이미 걸어 온 곧게 뻗은 길과 위험한 굽이들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저 남들이 다 끝내지 못하고 남겨둔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마무리할 일을 시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p.93) 소설에서는 엔진이 고장 나서 도로변에 차를 세운 레이서나 사고를 당해 죽은 레이서를 지칭하는 것으로 ‘레티라도(물러난 사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을 리베로 파르리의 말에 대입하자면― 레티라도의 뒷일을 조몰락거리려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시작하고자 하는 일을 벌여 놓은 게 바로 다름 아닌 레티라도(우리)인 것이다. 처음 보는 건물들의 블록을 돌아나가면 ―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 도시 전체가 안개에 휩싸여 있을지 깨끗한 진열창 안에서 공작 깃털 눈알 문양을 만들어내는 여러 개의 불빛들이 있을지 알 수 없는 ― 설령 같은 곳을 뱅뱅 돌다가 ‘빌어먹을, 여기가 어디지?’ 하는 질문이 튀어나올지언정 ― 이 물음이 경이로운 이유는 ― 답이 없고, 답을 찾을 수 없으며, 이미 만들어진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레티라도 전이건 후이건 결국에는 모두가 같은 레티라도일 뿐이다) ― 울티모는 활주로를 걸으며, 제 호주머니 속에 있던 흙을 꺼내 동생의 호주머니로 옮겨 준다. 말라깽이에다가 눈은 쥐색이며 늘 주사를 맞아야 하는 사람처럼 허약해 보이는 울티모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자기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고 그것을 해내는 것에만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고 그 앞과 뒤는 그저 기다리거나 추억할 뿐이다.(p.327) 그가 꿈꾸던 막연한 미래는 천천히 걸어서 왔지만 그는 세상에서 훔쳐낸 곡선들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길 위에서 살았고 길 위에서 사랑했으며 길 위에서 죽고 자기만의 길 위에서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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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최장집 교수의 <군주론> 독해. 이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



<전진하는 진실>
<나는 고발한다...!>를 비롯해 드레퓌스 사건에 관해 저술한 격문 십여 개를 에밀 졸라 자신이 직접 엮은 선집. 졸라의 인터뷰와 해설, 화보도 들어있단다.



<아이웨이웨이 블로그>
아이웨이웨이가 2006년부터 블로그가 폐쇄당한 2009년까지 블로그에 올렸던 포스트 3천여 개 중 110여 개를 간추려 묶은 책. 그의 입에 재갈을 물려도 삶은 흘러간다.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이 책 역시 말이 필요 없다.



※ 4월은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책을 읽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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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괴 - 기후 위기는 세계 경제와 우리 삶을 어떻게 파멸시키나?
폴 길딩 지음, 홍수원 옮김 / 두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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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꽉 차 있다(The Earth is full).」 책을 시작하는 첫 문장인 동시에 이 『대붕괴』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하고도 날붙이 같은 말이다. 길딩에 의하면 2009년의 경우, 지구 전체 차원의 분석 결과를 보면 활용 가능한 땅의 140%, 즉 지구 1.4개가 있어야만 현재와 같은 경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ㅡ WWF 등에서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다. 말인즉슨,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본래 지닌 능력의 140%로 가동되고 있다는 뜻이다(앞으로 15년쯤 후면 지구가 2개는 있어야 한단다). 지구가 작동할 수 있는 허용치를 넘어 과부하가 걸리고, 또 경제 성장이 계속해서 증폭되어만 가고, 사회적 병폐를 예보하는 빈곤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기후 환경은 갈수록 악화일로로…… 그러다 꽝, 바로 '대붕괴'다. 그는 이러한 대붕괴(the great disruption)에 직면하게 되면 먼저 경제 성장이 멎은 후 이런저런 부침을 겪다 자연 환경의 조직적 붕괴를 경험할 것이라 보고 있다. 이미 140%인 현재의 초과 상태로 보건대, 그가 우려하고 걱정하는 현실을 환경운동가의 호들갑이라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우리(지구인)는 그간 수많은 환경 문제나 사회 문제를 어느 정도는 적절히 다스려 왔다고도 볼 수 있다. 길딩 자신도 인정한다. 인류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해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엄청난 위기를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해냈다고. 2차 세계대전 후의 다양한 실례가 있었고 1960년 이후 계속된 농업 부문의 녹색혁명 또한 존재했다고. 세계적인 기후 과학자 제임스 핸슨 역시 과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ㅡ 「우리는 정점을 넘어섰지만 돌아오지 못할 지점을 넘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길딩은, 소신이나 희망이 아닌, 수학과 과학을 바탕으로 한 차분하고 합리적인 분석을 해야만, 과연 시장과 기술이 우리를 이러한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번은 절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이다(p.102)ㅡ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 세계 종말 시계는 자정 5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대붕괴』는 느닷없이 '쇼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이민다. 우리 모두가 쇼핑을 중단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것이다. 나는 실제로(아주 극단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양적 경제 성장에 쇼핑이라는 것이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끔찍하게도) 길딩의 설명은 이렇다. 만약 물건을 좀 더 많이 사들인다고 해서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게 아니라 외려 여가 시간이 부족한 생활, 불만족스러운 근무, 끊임없이 쌓이는 빚의 악순환의 반복이 하나의 추세로 나타난다면 쇼핑이 대폭 줄어들어 심각한 영향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의 논리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흥미로운데, 잠시 그의 말을 간단히 인용해 보겠다. ①소비를 중단하면 소득을 위한 노동을 소홀히 하게 된다. ②빚과 신용카드가 없어지면 은행이 타격을 입는다. ③장시간의 근무 대신 여가 시간이 늘어난다. ④만약 미국인들의 소비가 감소하면 중국은(저임금 노동력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쓸 물건을 만들어내므로) 제품 생산을 중단한다. ⑤중국의 대미국 수출이 줄어들면 국제수지 흑자 역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미국 경제의 돈줄 구실을 하는 국채를 사들이지 못한다. ……장난스럽고도(동시에 우악스럽다) 위태로운 결론이 아닌가? 실제로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소비사회, 소비주의 등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재화를 소모한다'는 뜻의 소비라는 말 자체를 기꺼워하지 않게 된 것만 같다ㅡ 소비를 거부하는 안티 소비(anti-consumption)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나는 길딩의 말을 들으며 약간 동요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밑도 끝도 없이 소비가 줄어드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점차 ㅡ 양보다는 질! ㅡ 자신 개인의 삶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겪고 있는(겪게 될) 경제 위기가 물적 소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소비 심리는 급격히 줄어들게 될 것이 빤하다. 그리고 그 소비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쇼핑'이 아니던가.







길딩은 몇 년 전 곧 닥칠 생태계 붕괴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 논문의 제목은 <Scream Crash Boom(절규 붕괴 꽝)>이다. 그는 자신이 쓴 논문 내용을 이렇게 요약한다. 「1950년대 말부터 진행된 행동 촉구라는 의미의 ㅡ 절규는 거의 끝나가고 있고 ㅡ 생태계와 경제의 ㅡ 붕괴가 시작되고 있어 머잖아 ㅡ 엄청난 규모와 빠른 속도의 반응으로 ㅡ 우르르꽝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p.21) 그러나 만일 소비재 생산이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절반으로 줄어들면? 많은 사람들이 재활용을 통해 나눠 쓰는 즐거움을 누린다면? 나아가 현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구매하는 전 세계적인 운동을 벌여 가족 중심의 전통적인 영농방식이 되살아날 수 있게끔 시장 수요를 키운다면? 각국 정부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에너지 소비 축소 캠페인을 벌인다면? 별로 지닌 것이 없는 사람들이 좀 더 재산을 불릴 수 있도록, 부를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부가 줄어드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야말로 길딩다운 물음이며, 이것들은 가히 이상적인(미안하지만 뜬구름 잡는) 논의의 미심쩍은 냄새를 풍기면서도 동시에 꽤 매력적인 제안이다. 심지어 그는 『대붕괴』의 마지막 장에 들어서서, '이것이 이 책의 마지막 장이지만 내 삶이나 인류의 마지막 장은 아니'라며 오히려 출발점일 뿐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우리는 이 책처럼 인간 사회를 둘러싼 무수한 골칫거리들을 주목한 다음 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해결편을 부록으로 제시한 글들을 종종 읽어 왔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흥미롭게 톺아보았던 이유는ㅡ 전문가적 지식수준을 요구하는 그악함이 없다는 것, 곰곰 생각해 보면 근거가 명확하고 적확하다는 것, 개인의 실생활과 집단체(기업)의 실물 모델로부터 논의를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구는 꽉 차 있다. 시장과 기술이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는가? ……이번은 절대 아니다.」 우리는 역치 값을 건드리는 위기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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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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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말은 옳다. 도시는 본래 잉여 생산물이 사회적, 지리적으로 집적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 때문에 도시화는 언제나 일종의 계급 현상이었다. 잉여가 어디서, 누구에게서 추출되건 그것을 사용할 권한은 소수(예컨대 종교적 과두지배자나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심에 사로잡힌 전사)의 손아귀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p.28) 그런데 그 도시/도시화가, 온 지구를 덮었다. 하비가 주장하는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자본가는 일정량의 화폐를 가지고서 하루를 시작한 후 그 이상의 화폐를 챙겨(이윤을 얻어) 하루를 마친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도시화’가 탄생한다. 아마도 도시인(특히 돈이 많은)들에게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되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비는 극심한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신자유주의 윤리가 인격을 사회적으로 형성하는 규범으로 작용한다고 했는데, 이는 사적 소유권 자체나 사적 소유권을 신성시하는 가치관의 신자유주의적 보호는 엘리트는 물론이고 하위 중간 계급에게도 정치적 헤게모니의 한 형태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중산 계급화, 고급 주택의 건설, 도시 환경의 악화……. 그는 부르주아 이론에 통찰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적 유물론에 입각해서 높게 치솟는 임대료와 잔혹한 약탈을 지주와 상인 자본가가 노동자 계급의 생활 영역까지 파고들어 고통을 강요하는 착취의 이차적 형태라고…….」




소비는 어떤가? 멀쩡한 제품을 고장 나기도 전에 새것으로 바꾼다. 가령 10년 쓸 자동차를 3년 쓰고 버릴 때, 소비자는 자동차 가격의 30퍼센트만 지불한 게 아니다. 100퍼센트 다 지불하고, 실제로는 30퍼센트만 소비하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70퍼센트는? 그것은 아마 기호의 값일 게다. 자본주의는 사물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한 상품과 다른 상품의 차이를 소비한다. 사물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그는 자본주의를 어른들의 디즈니랜드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상품과 상품 ‘사이’를 소비하고 그 ‘차이’를 지불하기 위해 일하는 거대한 꿈의 세계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얘기해서는 다소 말랑말랑할 수 있으니 다시 하비에게로 돌아가자. 위에서 인용한 유리 같은 설명과 함께, 어쨌든 자본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작을 걸며) 재생산되기 마련이다. 여기에 자본가 계급의 권력이 도시 형성 과정을 지배할 능력이 있다면 ‘자본의 도시화’가 진행되고,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은 정치투쟁과 사회투쟁 및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하나의 장이 되어버린다. 도시를 만드는 구성 부분 중의 하나는 건설 노동자(도시 건설자)이지만 그러한 자본이 최종 소비되는 메커니즘 속에서는 이런저런 잉여 가치가 생산된다. 문제는 도시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에 투입되는 노동의 상당 부분이 임시적이고 불안정하며 이동이 심한데다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p.225)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도시 전체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 미시적 수준의 조직에 매몰된 진보 세력(노동자협동사업이나 연대경제)을 끌어내 반자본주의적 정치를 이론화하고 실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 ― 하는 물음이다. 하비는 물질적 제약을 넘어설 때 진정한 자유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마르크스를 인용하면서, 반자본주의 투쟁을 위해 도시를 되찾고 조직하는 것은 그 위대한 출발점이라고 했다. 「도시 네트워크를 통한 운동은 계급적 지배와 상품화된 시장의 결정이라는 제약을 넘어서 보편적인 인간성이 꽃피는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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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패러디다 -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5
조현준 지음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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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면 버틀러가 쓴 『젠더 트러블』의 결론 <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에서 따온 제목일까. 그러나 버틀러는 앞의 책에서 결론에 다다르기 전 이미 젠더 연기(performance)에 대해 말했다. 현재 우리는 중요한 육체성에 관한 세 가지 우연적 차원에 직면해 있는데, 바로 섹스와 젠더 정체성 그리고 젠더 연기라고 말이다. 책에서 젠더 패러디는 이렇게 정의된다. 패러디되는 원본이 제도와 규범으로 만들어진 이상성에서 기인한다면 결국 패러디는 원본이 아닌 특정 관념을 모방하는 것이 된다고(이 시점에서 벌써 원본과 모방본의 구분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젠더 패러디는 젠더가 그 양식에 따라 스스로 형태를 갖추는, 원래의 정체성 자체가 원본 없는 모방본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사실상, 그 효과로 인해 모방본의 위상을 띠게 되는 생산물이라는 것이다.」(앞의 책) 그녀에 의하면 '사람'이란 '젠더의 인식 가능성(gender intelligibility)'이라는 합의된 기준에 따라 젠더가 될 때에만 비로소 파악되기 때문에,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젠더 정체성 논의에 앞서서는 행해질 수 없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특질이 아닌 규범적 이상이며 담론적 관행의 결과라면(물론 그럴 수 있다, 아니면 이미 그렇게 되었거나), 당연하게도 논의는 더욱 더 복잡한 스펙트럼을 향해 간다. '남성'과 '남성다움', '여성'과 '여성다움'은 '나와 너'만큼 다르다.



젠더는 섹스라는 상위 카테고리 아래에 있는가? 다시 말해 젠더는 섹스의 규제를 받고 있는가? 사실 나는 버틀러의 논의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성 정체성'이라는 묘한 꼬리의 폭력성에만큼은 단순한 익살스러움 이상의 거부감을 느낀다. 성 정체성과 젠더가 한데 묶여(혹은 동일시되어) 펼쳐지는 살풍경들은 '배제당하는 삶'으로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사람이 반드시 여성다움을 지녀야 한다거나 페니스 달린 남성이 반드시 남성다워야 한다는 생각에는 나는 이미 저쪽 건너편에 있다(여성과 남성에 '다움'을 붙이는 것도 여기서는 조심스러워진다). 버틀러는 섹스와 젠더를 모두 같은 젠더라 주장하지만, (만약) 섹스(생물학적 몸의 차이)와 젠더(문화적, 사회적인 동일시 양식)로 구분하게 된다면ㅡ 그런 상태에서 보편적 합리성이라는 말을 갖다 붙여 섹스의 다양성과 젠더의 다양성을 일치시킬 수만은 없다(페미니즘이 때로는 정당하지 못한 얼굴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시에 남성과 여성을 주체와 타자로 놓을 수도 없다. 정말 섹스와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언제나) 명확하게 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리기에도, 버틀러를 읽기에도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또 헤게모니의 질서라는 것이 의심스러워지고 내부와 외부/중심과 주변의 논리에 입각해 정체성/정체성들을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저울의 한 편 위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버틀러(를 포함한 페미니즘 일반)를 정의하는 것에도 많은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심지어 '페미니즘'이 반드시 여성이라는 집단적 범주를 가정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뒤따라온다면 더욱 곤란한 것이다ㅡ 말 그대로 '트러블'이다. 그러므로 안티고네가 여성/여성다움을 대표하는지 어떤지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아니면 영원히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몸의 구멍과 요철이 주는 혼돈스러움에서 젠더라는 기표를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덧) 만약 『젠더 트러블』 읽기에 실패했다면 '주디스 버틀러 읽기'에 해당하는 이 책으로 대신할 수 있을 테지만, 어쨌거나 이것은 버틀러를 개괄하는 데 의미가 있으므로 다시 그녀의 책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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