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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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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깜깜절벽이라 치더라도, 인간은 어떠한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모든 것에 걸쳐 (우리를 기껍게 해줄) 패턴을 찾으려는 동물인가? 굴드는 말한다. 사람들은 모든 사건에서 원인과 의미를 찾아야만 하며 그러한 편향을 스스로는 '적응주의'라 부른다고. 그러고는 잠시도 동을 두지 않고 덧붙인다. 그것은 삼라만상이 합치해야 하고, 어떤 목적을 가지며, 가장 강한 입장에서는, 최고여야 한다는 관념이라고 말이다. 이 주장은 옳은 것일까? 그렇다. 일말의 의심 없이 옳다! 이것은 굴드가 판다의 엄지와 타자기의 자판 문자 배열을 풀어내면서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두 가지 경향이라며 언급한 것들 ㅡ 우연성(contingency)과 지속성(incumbency) ㅡ 과 묘하게 섞여 들어간다. 예측할 수 없는 선행 사건들의 연쇄와 반복적 지속이 안정성을 확보함에 따라 우리는 더욱 더 (때로는 비합리적인) 수용적이게 되어 특정 현상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굴드 자신도 짜증스러울 정도의 (그럼에도 독자들이 흔쾌히 흥미롭게 읽어 줄) 일화들과 우연찮은 법칙(이라 부를 수 있다면!)들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ㅡ 이를테면 히라코테륨(말의 선조에 해당)의 작은 키를 언급하며 교과서의 절대 다수가 히라코테륨의 크기를 '폭스테리어'로 비유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ㅡ 이런저런 문헌들에서 폭스테리어의 비유가 다른 동물보다 우세해지는(인기를 얻는) 지속성의 과정(교과서 베끼기의 관행)에서 뻗어나간 ㅡ 그의 둘째 아들이 고등학생이었을 적 배우고 있던 생물학 교과서에서 발견한 '수치스러운 문장' ㅡ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과 생물의 변화에 대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과학적 설명이다. 원한다면 다른 이론을 연구할 수 있다.」 ㅡ 에 분개했는데, 이미 확립된 다른 이론들에서 이런 식의 권유를 하는 경우는 없다며 익살스런 비유를 한다 ㅡ 「대부분의 민족들이 중력을 인정하지만, 여러분은 원한다면 공중 부양에 대해 조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가 구체라고 생각하지만, 원한다면 평면일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ㅡ 창조론자들의 압력에 굴한 교과서와 그들의 베끼기와 더불어(사실 이것은 소소한 일화일 뿐이다), 히라코테륨과 폭스테리어의 괴상한 연정(戀情)에서 수상쩍음을 느끼고 그것에 에세이 한 편을 바칠 정도로 굴드 역시 불가해하기까지 한 우스꽝스러운 패턴을 좇음으로써, 그의 뒤통수에 눈이 하나 더 있어 모든 것을 보았을지언정 어쨌든 우리보다 조금 더 박식할 뿐 결국엔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뒤통수에 달린 눈은 잊어버리자).





포유류 존재의 갈림길로 지목된 버제스 셰일의 유일한 척삭동물이었던 피카이아(pikaia)의 생존, 수정란을 삼켜 위 속에서 올챙이를 기른 다음 입으로 어린 개구리를 낳는 오스트레일리아 개구리 ㅡ 「수면으로 올라오더니 몸의 옆쪽 근육을 수축시키면서 입으로 여섯 마리의 올챙이를 힘차게 뿜어냈다」, 암컷 몸무게의 약 25퍼센트를 차지하고(책에 삽입된 엑스선사진을 보면 '무지막지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종 두 개에서 심지어 세 개의 알을 낳으며 그 간격이 33일 정도라는 키위(의 알), 조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나는 디마지오의 기록에 평을 한 야구 해설가 존 홀웨이에 대해 굴드가 잘못된 가정이라 퉁을 놓은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며, 야구에 대한 굴드의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는 그의 저작 『풀하우스』 3부에 대거 등장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굴드가 아니면 어디서 들을 수 있겠나 ㅡ 투정을 부리자면, 너무 많고, 너무 자잘하고, 이러한 잡다한 것들을 죄다 외워 젠체하고 싶게 만들 정도로 눈을 번쩍 뜨게 만든다. 볼테르가 '신은 항상 대군을 편든다'고 했다지만 실은 이런 말도 있다. 「신들은 그들이 없애고자 하는 자를 일단 미치게 만든다.」 우리는 굴드의 글에서 미칠 정도의 흥분과 쾌감을 얻는다(그렇다고 그가 베수비오 화산을 타고 내려온 유독가스처럼 우리를 죽이려든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말대로, 더 많다고 해서 항상 더 좋은 것은 아니지만 더 많으면 아주 달라질 수는 있다는 주장 역시 옳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자연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현실 속에서(맙소사!), 그 자연이라는 대상이 항상 우리의 (잘못된) 직관에 부응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또한 새로운 질적 변화와 함께 효율적이고 풍부하고 다채로워지는 복잡다단한 사고의 흐름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온다. 그러나 지구는 영원히 지속된다.」(p. 667) 이따금씩 메스머주의자들의 '용기를 북돋는 열광'이나 '도취를 낳는 일체감', 즉 전쟁 통의 요란한 북과 나팔 소리, 흥행꾼들이 고용한 박수 부대, 군중행동을 유도하는 선동꾼들이 나타날 때면 우리는 굴드와 같은 (스스로가 칭한) 장인들의 입을 주시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사람이 그럴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형편없는 교육과 문화 전반의 격려 부재로 인해 그것을 발휘하지 못할 뿐이라고 고쳐 쓰고자 한다.」(p.275) 프랭클린과 라부아지에의 이야기를 하며 뜬금없이 '기요탱 박사와 기요틴'을 부득부득 끄집어내고 있을지라도(자세한 이야기는 12번 에세이 <이성의 사슬 대 엄지의 사슬>을 참고하라, 굳이 이것을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 평하지는 않겠다), 때로는 이와 혀가 다 뽑혀 나올 정도로 웃음을 주는 굴드는 진정 이 시대의 배턴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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