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지음, 김동수.박수철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본 극우세력의 혐한 시위가 그저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은 때에, 엊그제 뉴스를 통해 또 하나의 뜨악한 보도를 접했다. 얼마 전 산사태가 발생한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빈집 털이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돈다는 것이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을 집어 들고 한창 읽어나가는 와중에 90년 전 일어난 일이 지금 다시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의 지진 이래로 일본이 갖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지한다. 지금 일본은 관동대지진이 있었던 1923년 당시를 기해 매년 9월 1일을 방재(防災)의 날로 지정해서 피난 훈련 등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도 그때의 학살은 제쳐두고 있는 실정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은 불령선인(不逞鮮人, 일본의 식민통치에 반발심을 갖고 소요 등을 일으킬 염려가 있는 조선인)이란 말로 조선인들을 차별했다. 그리고 곧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 / 우물에 독을 풀어 넣었다>와 같은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했다. 일본 군부는 특히 재해가 일어난 1일부터 즉각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조선인'이란 표현을 쓰면서 군인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총기에 착검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위의 유언비어와 같은 사실을 목격했다거나 방화범의 검거가 확인된 적은 없었으며 증거 또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들었다'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의 말은 믿음이 가질 않는다. 스스로가 '유언비어'라 발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무대신이라는 자가 그 유언비어에 편승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은 3.1운동을 기점으로 조선 독립운동에서 고조되었던 사회주의 노선을 잠재우기 위한 술책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실제로 당시 발생한 한두 건의 방화를 두고서 급속히 확산된 유언비어가 결국엔 계엄령으로 이어졌고, 훗날 조선인의 학살과 사회주의자 색출이라는 두 갈래의 노선이 드러난 것을 보면 그렇다.




대지진으로 도쿄 시내는 피난민 등의 혼잡이 극심한 형세였는데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 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이라고 잘못 믿어버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駒込) 경찰서로 끌고 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결과,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 일본 군부의 「계엄령에 관한 연구」에 나오는 대목 (본문 p.108)




허구의 범죄로 의심되는 보고도 무척 많았는데, 이런 것은 한두 건이 아니므로 전부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눈에 띄게 앞뒤가 맞지 않는 사실 중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지진이 발생한 당일(9월 1일), 요코하마께 사는 야마구치 세이켄이라는 자가 피난민들을 모아놓고서 조선인들이 밤에 일본인을 습격하려 한다는 설이 있으니 서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선전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니시자카 가쓰토라는 경찰고등과장의 진술은 이와 약간 다르다. 그는 9월 2일 오전 5시경 야마구치 세이켄에 대한 보고를 접해 현장에 나갔는데, 부근 이재민들을 모아 식량자급 방법에 관해 연설하고 있었다고 판단되어 불온한 언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경고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을 의심한다. 바로 일시의 차이이다. 야마구치라는 자는 당국에 '유언비어는 9월 1일 밤 8, 9시경 이후에 들었다'고 진술했단다. 그렇다면 그가 열었다는 피난민대회는 언제 있었던 것이며, (무리해서 본다면) 나아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는 점도 의심된다. 나중에 야마구치 세이켄은 폭동을 일으켰다는 조선인 두목으로 바뀌어 졸지에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란에 저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든다. 유언비어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조선인 멸시관 등에서 발생했을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있었던 사소한 조선인 범죄를 침소봉대하여 소란을 야기했을지 모른다는 점 등이다.



이 유언비어에 앞서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일본 관헌이 조선인을 다루었던 방식도 희한하다. 한국병합 후 일본에 상륙한 조선인은 일정 양식의 명부에 등록해야 했는데, 이것과 관련해 고안된 「조선인 식별자료에 관한 건」이란 것이 있다. 잠깐 언급해보자면 이런 식이다. ①골격과 외모: 신장은 내지인과 차이가 없으나, 자세가 바르고 허리나 등이 굽은 자가 별로 없음. / 뒷머리는 목침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체로 납작함. ②예식과 음식: 인사를 나눌 때 웃어른은 짐짓 의젓한 태도를 보이려는 습관이 있고, 아랫사람이 어른을 대할 때는 엉덩이를 뒤로 빼고 몸을 구부리는 습관이 있음. / 책상다리를 할 때 왼발을 오른발 위에 올리고 무릎과 무릎을 교차시키는 것이 일반적임. / 부인을 정면에서 보지 않고 측면에서 보는 습관이 있음. ③풍속: 얼굴을 씻을 때는 먼저 양손을 충분히 씻은 후에 얼굴을 씻음. ④코를 풀 때 종이를 쓰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손으로 푼 다음 기둥이나 기타 식물의 잎사귀 등에 거리낌 없이 이를 닦는다. / 서류(증명서나 편지 등)를 보관할 때는 아주 작게 접어 돈 주머니나 봉지 속에 넣어두는 풍속이 있음. ㅡ 정말이지 면밀한 관찰이라고 해야 할지 황당무계하다고 해야 할지 알쏭달쏭한 대목이며, '멸치가 물고기인가 조선인이 인간인가'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조롱과 차별 속에서 살았던 조선인들의 처우가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피난민 무리를 오인하고, 불령선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죽여도 좋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관헌이 자경단을 부추겨 조선인을 학살케 하고, 매스컴이 그런 당국의 확성기 역할을 하고……. 관헌이 교사/하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재향군인회, 소방대, 청년단 등의 자경단은 거주 지역의 화재나 도둑 수색 등의 본래의 임무를 벗어나 엽총, 일본도, 몽둥이, 도끼, 죽창 등을 가지고서 조선인들을 마음대로 죽였다(살인 방식 또한 잔인무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후에 자경단은 관헌에 의해 돌연 팽(烹) 당하고 만다. '유언비어는 거짓말이었고 학살은 큰 실책이었다'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을 예견한 관헌이 수많은 자경단원 중에서 '불량스런' 자경단을 표적으로 삼아 검거하여 국가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대리범죄자로 만들어간 것이다.(p.234)





일본 관헌은 관동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관한 각종 서류(의 수치)를 주먹구구식으로 작성했으며 나중에는(유언비어가 그저 유언비어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 뒤) 조선인들을 불령(不逞)과 양(良)으로 구분하는가하면 도로 정비와 동포의 사체 처리에 조선인들을 강제로 사역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반 이재민들과 학살된 조선인들을 한데 모아 혼조(本所)에 있는 피복제조장 터를 사체처리장 삼아 불태우는 데 동원되었다. 또한 일본정부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도쿄 부근 조선인을 나라시노 포로수용소에 수용해 전시 포로 취급을 하기에 이른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조선인들에게는 면회의 자유, 통신의 자유, 심지어 귀국의 자유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인 학살로 시작된 것은 사회주의자 색출과 말살로 이어졌고, 이 나라시노 수용소는 조선인 '주의자'를 색출해내는 데 적당한 밀실로 작용했다. 재해 아래에서의 민족박해가 이데올로기 말살책으로 확대된 셈이다.(p.302-307)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백색테러는 지금도 똑같은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을는지 모른다. 관헌이 자경단에게 조선인을 떠넘겨 학살케 하도록 선동한 것처럼, 현재 아베 정권의 망언에 영향을 받는 (극우) 일본인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것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같은 사회파 추리소설의 일부분이 아니다.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며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2014년 개정판.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이 궁극의 책을 읽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땅뺏기>

빼앗는 자들에겐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률을, 빼앗기는 자들에게는 기아를 주는 ‘땅뺏기’의 실상.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대규모 토지를 무상이나 헐값에 매입하거나 장기 임대하는 것. 과연 상생인가 기생인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거 역시 설명이 필요 없는 과학자이고, 그가 전해주는 역사의 갖가지 사료들을 언제나 우리를 매료시킨다. 본성과 천사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이채롭다.



<프리덤 서머 1964>

1964년 여름 목숨을 건 백인 청년학생들이 미시시피로 가는 버스 앞에 섰다. 같은 시각 또 한 무리의 미국 젊은이들은 수렁에 빠진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이 공포와 좌절, 희망과 용기의 온상지에서 부르짖는 프리덤 서머. (김승옥의 단편과 비슷한 제목이지 않은가?)



<원자력 프로파간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에 관한 광고들이 사라졌다. 대다수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원자력이 안전하다고 믿도록 만든 그 문제의 프로파간다. 책은 실제로 게재됐거나 방송된 광고들 250편을 그대로 담았단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14-09-06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원자력 프로파간다 당장에 검색들어가네요
감사합니다
 
냉혹한 이야기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김보은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저리 옮겨 다닌 시체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된다. 야생동물 보호구역, 스리 파인스의 어느 곳에서. 심하게 굶주린 이들이 잔뜩 무리 지어 살고 있는 야생동물 보호구역. 그들은 서로를 주저하면서도 이따금씩 생채기를 내는가하면, 바깥으로부터 숨어는 있지만 자신들 역시 과거에 외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그리고 그들 어제의 과거가 곪기 시작해 기어이 오늘 살갗 위에서 터지고야 만다(악마가 언제나 구석진 곳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도서추리의 냄새가 나는 『냉혹한 이야기』는 짧았던 프라하의 봄의 상처가 더쳐 모든 것이 거의 변하지 않는 마을 스리 파인스에서 곪아터진다ㅡ 마을 주민 클라라의 말처럼 스리 파인스에는 시체를 만들어내(야 하)는 소명이 있는가 보다. 여느 때처럼 가마슈는 누구든지 의심하면서도 누구나의 집에 들어가(초대되어) 차를 마시고 저녁을 대접받으며(흔쾌히!), 종국에는 하나의 인간이 죽기 전과 후의 과정을 밝혀냄으로써 피해자와 범인을 안타까워한다. 그의 신념대로 모든 것은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전혀 괜찮지 않은 ㅡ I'm Fine('F'uck up, 'I'nsecure, 'N'eurotic, 'E'gotistical) ㅡ 상황이다.(p.136) 범인(이라고 여겨지는 자 또는 용의자)의 (거짓)말[言]은 입속에서 썩는가하면 공기 중으로 뿜어져 졸렬하고 참혹한 경우에 불거지는 악감정과 거친 언사처럼 다른 사람의 가슴에 박혀 그대로 응고된다. 불쾌한 일이다. 가마슈는 그/그녀를 시큼한 피클처럼 절이고 절여 질겁하게 만들고, 스리 파인스의 주민들은 아귀가 잘 맞는 하나의 작은 편대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들이 친구로 여겼던 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거짓으로 밝혀짐에 따라 이내 등을 돌리고 만다. 루이즈 페니의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이 『냉혹한 이야기』는 오리를 데리고 다니는 미친 시인 루스(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아닌가)가 써내는 단편적인 시의 구절이 혼란스레 떠다니는 가운데 심농의 냄새가 물씬 흘러넘친다. 물론 심농은 『명탐정 코난』마냥 속전속결이지만(코난의 경우 주간만화 연재 중 3회 안에 사건 해결을 해야 한다는 대원칙이 있다) 매그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가마슈란 감성적 인물의 존재로 인해 결코 쾌적하지 않은 실제의 삶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암호가 약간 아쉽긴 하나(물론 '키워드'가 중요했지만 결국엔 '시간문제'였으므로), 소설은 매력적인 캐릭터의 환원과 함께 인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제반에 눈을 돌림으로써 이야기가 갖춰야 할 튼튼한 골격을 쌓았다는 느낌이다. 여러 개의 선택지 중 고를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고 결국엔 범죄의 길에 들어선다ㅡ 이 당연하게 보이는 맥락은 필연적으로 그들 사회와 역사(과거)에 귀결될 수밖에 없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스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에는 적어도 실제로 발생한 사건 그대로의 사실뿐 아니라 첨삭이 뒤따른다. 이것은 곧 편집을 의미하며 그러한 행위의 많고 적음에 따라 오웰과 헉슬리의 우려를 반드시 동반하게 된다. 물론 사건을 단순 보도하는 것이라면 언론과 서기의 구분이 없겠지만. 뉴스(news)라는 단어의 탄생을 놓고 전 세계('N'orth, 'E'ast, 'W'est, 'S'outh)의 모든 일을 전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시시콜콜한 사건 사고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ㅡ 보통의 표현대로라면 '주문하지 않은 요리를 강제로 먹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뉴스는 상품으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특히 상품성이 없는 소식은 뉴스라고 불리기도 어렵게 되었다(심지어 그것들은 지나치게 파편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투쟁과 갈등, 모순의 구조가 존재해야만 그것은 소위 뉴스거리로의 변용이 가능한 셈이다. 이러한 반목과 다툼이 없다면 텔레비전이건 신문이건 그들은 뉴스로 다루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습, 그러니까 어촌의 조용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누구도 그것을 뉴스라고 여기지는 않을 ㅡ 사건의 중요도를 '낮음'이라고 판단하거나 아예 주시하지 않는다 ㅡ 것이다(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이것의 문제점은, 만약 우리가 특정 지역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통하는 게 뭔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한다면 비일상적 상태를 측정하거나 그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이다.(p.98) 다시 말해 우리가 안정적인 상태를 알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나중에 발생한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ㅡ 비교대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일상이라고 느껴지는 어떤 상태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하며 뉴스를 전달하는 제공자 역시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ㅡ 나는 지금 대차대조표를 보고 있는데 부채와 자본 혹은 흑자와 적자 가운데 오로지 적자만을 주시하며 직원들을 닦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뉴스의 선별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디를 가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우려와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충격적인 사건을 더는 충격적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면역성을 키운다.



리프먼은 『여론』에서 뉴스의 본성에 관해 이렇게 썼다. 「뉴스는 어떻게 씨앗이 땅속에서 싹트는지를 말해주지는 않지만, 언제 처음으로 싹이 지표면에 나왔는지를 말해줄 수는 있다. 심지어 뉴스는 누군가가 말한 일이 실제로 땅속의 씨앗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줄 수 있다. 뉴스는 싹이 예정된 시간에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줄 수도 있다.」 그는 뉴스가 사회조건의 반영이 아니라 스스로 헤집고 나오는 어떤 측면에 관한 보도라 말한 바 있다. 어떤 명시적인 것, 확실히 정의할 수 있는 사건의 진행 모습, 그리고 그것이 기정사실이 될 때까지 뉴스는 있을 법한 진리의 바다와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만약 뉴스를 제공하는 언론이 하나같이 같은 사실만을 전달하고 똑같은 결론만을 말한다면 그들 중의 몇은 파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과 그에 따른 관점 차이의 역치를 벗어나 대표성 없이 흐물흐물하고, 객관적 기준의 부재에 따른 '떡밥'에 불과해서도 안 될 일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자극적 타이틀과 내실 없는 정보에 피로를 느끼며 기사를 분석해내는 능력 또한 점차 마비된다. 정보량의 증가가 일종의 생산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이다(일정 수준을 넘는 정보는 정보가 아니라 축적된 기록에 불과해진다). 태양의 위치가 아닌 시계의 알람으로 방향 상실을 예방하는 오늘날의 뉴스는 과거보다 양도 많아졌고 질적으로도 발전했다. 그러나 거대기업에 대항할 소비자의 간섭이 필요한 것처럼, 뉴스와 정보의 맥락에서도 단순히 제공자와 수용자로 이분되는 논리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 우리 스스로가 뉴스를 거부하고 평화로운 상태, 즉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모습'을 알아챌 수는 없을까? 이어폰을 빼고서 거리와 행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질감이 드는 다른 종족을 다루듯 혹은 치매를 앓는 노인을 꺼리듯 아이를 대하는 데이비드를 탓할 수는 없다. 그의 아내 해리엇도 마찬가지. 기어이 태어나고야 만 로즈메리의 아이 같은 그들의 다섯째 아이 벤에 관한 이 소설은, 어떤 유형의 윤리관도 뚫지 못하고(레싱 자신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떤 비난도 쏟아내기가 어렵다. 해리엇은 입을 열어 타이르는 교육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어린 벤으로 하여금 자신을 버렸던 공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새로운 훈육의 방식을 터득했고, 자신의 바로 그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곧 다가올지 모르는 공포에 치를 떤다. 사악한 유아기의 벤은 보호는커녕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오물의 틈바구니에서 방치되었다가 다시금 모성애를 되찾은 해리엇의 손에 의해 이탈과 합류를 경험한다. 제 형들과 누나들을 위협하던 (여전히 악마 같은) 벤은 바로 위 형의 목을 조르는 것에는 실패했으나 개를 죽이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하루 종일 집 밖을 서성인다. 만약 보통의 가정이라면 어떨까. 노년으로 접어든 남녀와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아들딸이자 부모인 중간자를 건너 뛰어 모종의 계약이 성립되곤 한다. 가족의 변화, 그러니까 조부모와 손주라는 관계가 탄생하게 되면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동맹 관계가 맺어지고, 가정의 헤게모니가 조부모로부터 부모로 이양되는 시점(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시기)에서 그들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부모보다는 늙수그레하며 너그럽기까지 한 조부모와 좋은 한 쌍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개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제 형마저 살해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벤은 외할머니까지 상처를 입게 만들며, 데이비드와 해리엇으로 시작된 이 일가를 파탄으로 몰아넣는다. 그들의 '다섯째 아이'는 한 가정 안에서 정신 이상자 혹은 괴물 취급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레싱은 다운 증후군을 앓는 아이를 등장시킴으로써 벤을 그보다 더 몰아세우기에 이른다. 물론 해리엇이 벤을 되찾아 오는 것을 온전히 모성애를 발로로 하여 진행된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반대의 경우에도). 그녀는 어머니의 역할에 집착한 나머지 아이가 아닌 자신을 위해 한 번 버렸던 벤을 미친 듯이 갈구하지 않았나. 그녀는 벤으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가족들을 껴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벤에게 사랑을 쏟지도 않았다. 수용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 바로 이 '범위와 한계'라는 것이 간섭함으로써 이 소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인물들이 이물질로 생각하는 벤에게 나 역시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벤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에게 또한 어떠한 사랑의 감정도 들지 않게 된다. '인간이란 종족은 동물과 달리 (이성이란 녀석이 끼어들어) 야만스럽지 않다'는 특성은 인간 스스로가 정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규약을 만들고 때에 따라서는 위대하게 보이는 알쏭달쏭한 함의를 만들었다. 어떤 동물의 어미가 기형의 새끼를 버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설사 혐오스럽게 보이더라도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그건 동물들의 세계잖아.」).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경우라면 어떤가. 그 꺼림칙한 허상과 공포의 세계가 『다섯째 아이』 속에 들어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