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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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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는 적어도 실제로 발생한 사건 그대로의 사실뿐 아니라 첨삭이 뒤따른다. 이것은 곧 편집을 의미하며 그러한 행위의 많고 적음에 따라 오웰과 헉슬리의 우려를 반드시 동반하게 된다. 물론 사건을 단순 보도하는 것이라면 언론과 서기의 구분이 없겠지만. 뉴스(news)라는 단어의 탄생을 놓고 전 세계('N'orth, 'E'ast, 'W'est, 'S'outh)의 모든 일을 전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시시콜콜한 사건 사고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ㅡ 보통의 표현대로라면 '주문하지 않은 요리를 강제로 먹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뉴스는 상품으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특히 상품성이 없는 소식은 뉴스라고 불리기도 어렵게 되었다(심지어 그것들은 지나치게 파편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투쟁과 갈등, 모순의 구조가 존재해야만 그것은 소위 뉴스거리로의 변용이 가능한 셈이다. 이러한 반목과 다툼이 없다면 텔레비전이건 신문이건 그들은 뉴스로 다루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습, 그러니까 어촌의 조용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누구도 그것을 뉴스라고 여기지는 않을 ㅡ 사건의 중요도를 '낮음'이라고 판단하거나 아예 주시하지 않는다 ㅡ 것이다(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이것의 문제점은, 만약 우리가 특정 지역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통하는 게 뭔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한다면 비일상적 상태를 측정하거나 그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이다.(p.98) 다시 말해 우리가 안정적인 상태를 알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나중에 발생한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ㅡ 비교대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일상이라고 느껴지는 어떤 상태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하며 뉴스를 전달하는 제공자 역시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ㅡ 나는 지금 대차대조표를 보고 있는데 부채와 자본 혹은 흑자와 적자 가운데 오로지 적자만을 주시하며 직원들을 닦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뉴스의 선별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디를 가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우려와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시에 충격적인 사건을 더는 충격적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면역성을 키운다.



리프먼은 『여론』에서 뉴스의 본성에 관해 이렇게 썼다. 「뉴스는 어떻게 씨앗이 땅속에서 싹트는지를 말해주지는 않지만, 언제 처음으로 싹이 지표면에 나왔는지를 말해줄 수는 있다. 심지어 뉴스는 누군가가 말한 일이 실제로 땅속의 씨앗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줄 수 있다. 뉴스는 싹이 예정된 시간에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줄 수도 있다.」 그는 뉴스가 사회조건의 반영이 아니라 스스로 헤집고 나오는 어떤 측면에 관한 보도라 말한 바 있다. 어떤 명시적인 것, 확실히 정의할 수 있는 사건의 진행 모습, 그리고 그것이 기정사실이 될 때까지 뉴스는 있을 법한 진리의 바다와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만약 뉴스를 제공하는 언론이 하나같이 같은 사실만을 전달하고 똑같은 결론만을 말한다면 그들 중의 몇은 파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과 그에 따른 관점 차이의 역치를 벗어나 대표성 없이 흐물흐물하고, 객관적 기준의 부재에 따른 '떡밥'에 불과해서도 안 될 일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자극적 타이틀과 내실 없는 정보에 피로를 느끼며 기사를 분석해내는 능력 또한 점차 마비된다. 정보량의 증가가 일종의 생산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이다(일정 수준을 넘는 정보는 정보가 아니라 축적된 기록에 불과해진다). 태양의 위치가 아닌 시계의 알람으로 방향 상실을 예방하는 오늘날의 뉴스는 과거보다 양도 많아졌고 질적으로도 발전했다. 그러나 거대기업에 대항할 소비자의 간섭이 필요한 것처럼, 뉴스와 정보의 맥락에서도 단순히 제공자와 수용자로 이분되는 논리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 우리 스스로가 뉴스를 거부하고 평화로운 상태, 즉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모습'을 알아챌 수는 없을까? 이어폰을 빼고서 거리와 행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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