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34
마커스 세이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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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익히 알고 있다. 저 유명했던 ‘본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기억상실이라는 조건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일어나보니 벌거벗은 채였고 해변이다. 그는 무척이나 추웠고, 이상스러우리만치 곁에 BMW 한 대가 있다. 차 여기저기를 뒤져 차량등록증을 보니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대니얼 헤이스란 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트렁크에는 더러운 옷가지들이 있었고 그것은 그의 몸에 꼭 맞았다. 인생은 빗방울이라고? 그것들은 제각기 모여 홍수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때가 되면 본래의 방울로 돌아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그렇게 여겨라. 나라는 인간은 어차피 과거의 것들로 이루어져 지금의 이곳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일 뿐일 테니까. 그는 미친 게 아니고 그저 정신이 약간 흐릿해졌을 뿐이다. 기억상실. 아마도 차량등록증에 적힌 대니얼 헤이스가 자신인 것만 같다. 메인 주 체리필드에서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까지 횡단해 온 보상은 무엇일까. 경찰은 물론이거니와 이름도 모르는 악랄한 자가 자신을 쫓고 있고 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는 제이슨 본이 그랬던 것처럼 단서를 하나씩 모으기 시작한다. 살해 혐의. 그는 아내를 죽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맙소사! 내가 왜 도망을 쳤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이 왜 널 뒤쫓는 걸까?
넌 누구지? 그 해변에서 정신을 차리기 이전의 넌 누구였지?
대니얼 헤이스의 지난날들은 어땠을까?



그는 차주로 여겨지는 대니얼 헤이스의 집을 찾아간다. 딩동! 경찰이다! 문 열어!(물론 경찰이 친절하게 초인종을 눌렀을 리는 없겠지) 간신히 노트북을 하나 들고 나와 열어보지만 패스워드를 풀지 않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제기랄. 그는 패스워드를 알아낼 수가 없다. 물론 나중에는 알게 되지만 당장에는 그렇다. (작가가 패스워드를 ‘NO’라고 설정했다면 진부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꽤나 심오한 개똥철학으로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훗날 드러난 패스워드는 ‘NO’가 아니었다. 제기랄) 이제 그는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둘씩 그러모아 자신의 직업을 알게 되고 고문변호사라는 여자도 만나게 된다. 이대로라면 자신을 알아가는 이 여정은 쉬이 끝맺음될 것만 같다. 그러나 어디 기억이란 것이 순순히 우리는 놓아두던가? 우리의 과거란 놈팡이가 언제나 지금의 우리와 드잡이를 하려는 것을 막을 수가 있던가? 그는 자신의 과거란 패스워드를 찾으려 전전긍긍한다. 헤겔은 정신의 힘이 역사를 만든다고 했다. 지금 땅을 밟고 서 있는 나라는 현실적인 존재는 과거의 내가 쌓은 역사가 실현된 하나의 결과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철학적 역사가 말하는 개인이란 세계정신이다. 철학이 역사를 다룰 때 대상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구체적 형태로 그리고 필연적 진화를 통해 포학되는 구체적인 대상이다.” 이것을 우리 입맛대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과거의 나보다 더 발전된 혹은 더 바람직한 모습의 나를 그리고, 나아가 이 현실의 나는 또 다른 새로운 나라는 존재로 실현될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말이다.



Q. 패스워드를 잊으셨나요?
A. BMW.
Q. 패스워드를 잊으셨나요?
A. 엿이나먹어라개자식아.
Q. 패스워드를 잊으셨나요?



끝으로 푸념 하나를 늘어놓겠다. 나는 이런 스릴러 소설을 영화로 만든답시고 본래의 텍스트에서 맛보았던 긴장감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졸작들을 셀 수 없이 목격해 왔다. 어울리지도 않는 편집으로 중무장한 채 영상에만 급급한 나머지 플롯은 온데간데없고, 끝날 때면 어김없이 흐르는 홀가분한 컨트리풍의 느린 노래와 함께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까지. 부디 이 작품만은 그렇지 않았으면 한다. 대니얼 헤이스는 제이슨 본이 아니다. 후자는 기본 설정부터가 ‘전문가’였다. 그것은 외려 영상물 쪽이 어울린다고 나는 자신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오락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의 바보 같은 대니얼 헤이스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이라서 특출한 액션이 필요 없는 것이다. 대니얼 헤이스는 나도 될 수 있으며 당신도 될 수 있다. 누구나 제이슨 본처럼 날아오는 총알을 요리조리 피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대니얼 헤이스처럼 ‘두 번’ 죽을 수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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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 라만차 돈 키호테의 길
서영은 지음 / 비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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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없이 하나의 시상식이 떠오른다. 1968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올림픽 육상 경기 시상대에 섰던 세 명의 청년들, 그리고 블랙 파워 살루트.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으나 안주한 세속에의 정복이란 측면에서는 돈 키호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라 만차 파워 살루트!). 첫 장 <높이 쳐든 오른손>이란 제목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시위’를 보자면 더욱 그러하다. “저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토지도 저당 잡혔습니다. 안락을 버리고 자신을 운명의 팔에 맡기어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갈 뿐입니다. 저는 지금 사라진 편력기사도를 다시 부흥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여기서 넘어지고 저기서 쓰러지며, 이곳에서 떨어졌다가 저곳에서 다시 일어나며, 과부를 구원하고 처녀를 보호하고, 유부녀와 고아를 도와줍니다.” 어찌 보면 산초는 그에 비해 유약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녹슨 칼과 창, 투구를 쓴 돈 키호테에게는 그가 반드시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할 터다. 성스럽고도 성스러운 로시난테도 매한가지. 돈 키호테가 처음 공격한 사람은 마부인 듯한데(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책에 나온 표현을 옮기자면 ― 그런 성스런 말을 채찍으로 때리며 겨우 짐 실어 나르는 용도로나 부리는 사람, 즉 마부들과의 싸움은 곧 세상 사람들의 상식과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면 좁힐수록 현실에서의 삶은 평안해진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자꾸만 꿈틀거리는 이상을 향한 부딪침은 쉬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눈을 비비고 보니 내가 잠이 들었던 게 아니라 기실 깨어 있었다는 걸 알았어. 하여튼 거기 있는 게 정말 나인지, 또는 가짜 허깨비인지 알아보려고 머리와 가슴을 만져 보았더니, 촉감이나 느낌이나 스스로 자문자답하여 보아도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과 똑같이 내가 거기 있는 것이 확실했어.” 예의 그 ‘동굴 탐험’이다. 이상과 현실의 폭을 좁혔다면 애초에 밧줄 따위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반드시 밧줄이 필요했다. 동굴로 내려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상으로 올라가기 위한 밧줄이. 풍차를 향한 대립에서도 역시 돈 키호테의 이상과 산초의 현실이 대립한다. 둘시네아 쪽도 다를 것은 없다. 왜소한 현실에 현현된 가공의 인물인 그녀가 진실로 현실이겠는가, 이상이겠는가? 모든 위대한 것은 광장이나 명예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또한 어디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 “이쯤에서 그만합시다.”는 안온함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날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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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걷자, 둘레 한 바퀴 - 한국산악문학상 수상 작가의 북한산 둘레길 예찬!
이종성 글.사진 / 비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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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의 옛 이름은 삼각산이라던데 백운, 인수, 만경, 이 세 봉우리가 아름답다고 하여 명성이 높단다. 사실 나는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해 반감 아닌 반감을 가지고 있다. 어차피 내려올 것을 굳이 왜 오른단 말인가 하는 알량한 사고에서는 아니고, 도처에 널린 건물들만 보아도 다 같은 모습뿐이니 산이라고 한들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실은 이쪽이 더 조야한 생각이건만). 어릴 적 내게 있어 산에 오른다는 행위는 뭐랄까, 일종의 마라톤 시청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그때는, 한 발짝 한 발짝씩 발을 떼며 여유로운 상념을 가지지 못했다. 이를테면 ‘얼른 올라갔다 와서 쉬어야지’ 하는 마음 일색이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약간은 지겹기도 한 마라톤 경주를 보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산을 오르는 내내 발등에만 눈을 두며 걸었으니. 북한산 둘레길을 예찬한 『다 함께 걷자, 둘레 한 바퀴』를 읽으면 어서 그쪽으로 이사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다. 나처럼 산에 대해 마비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 책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지금도 북한산은커녕 동네 뒷산에도 오르지 않을 사람들이 허다할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 하루에 한 구간씩 찾으면 총 스무하루 동안의 여정이 이어진다. 이 둘레길이라는 명칭은 최근 들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러나 그저 자연경관에만 눈을 두며 올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의 등산과 다를 바가 없다. 좇아야 할 것은 이런 것일 거다. 이준열사의 묘역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저 옛날 백사실계곡에는 누가 있었는지, 고국으로 돌아온 비석에는 어떠한 연유가 있었는지, 여기소(汝其沼)라는 못은 왜 지금의 여기소가 되었는지 등등. 요즈음 아웃도어가 유행을 타며 너나없이 몸에 걸쳐 대고는 있으나 실제로 그것을 입고서 산을 맞이하러 가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적절치 않은 비유이지만 내가 보기엔 체호프의 발사되지 않은 총이나 다름없다. 이참에 그 다락같은 것들은 집어치우고, 외려 마음을 다락같이 채워 올 수 있는 순례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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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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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부패의 씨앗이 들어 있어요. 사물에는 쇠퇴라는 씨앗이.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씨앗이.」(p.43) 노스페라투는 뱀파이어와 동의어다. 죽은 후 무덤에서 깨어나 사람의 피를 갈구하는 귀신. 그것은 독일 출신 무르나우 감독의 동명 영화 《노스페라투》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ㅡ 심지어 이런 요소는 나날이 인기를 얻어 영화와 소설뿐만 아니라 게임에까지 적용되었는데, 캡콤에서 만든 <마계촌>, 또 블리자드의 <워크래프트>에는 '언데드'가 등장한다. 더욱이 뱀파이어는 살아있는 자들의 피를 원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조금만 찾아보면 볼테르 역시 이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영국과 파리에는 세리, 사업가와 같이 일반인들의 피를 빨아 먹는 이들이 있다. 진짜 뱀파이어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궁정에서 살고 있다.」 블라드는 이브와 만날 때 욕실에 있었다. 여기에 피는 등장하지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에르체베트 바토리라는 여인이다. 저간의 사정은 차치하고, 어느 날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하녀를 때리다가 그 하녀의 피가 자신의 얼굴과 팔에 튀게 된다. 그것을 닦던 바토리는 하녀의 피가 닿은 쪽 피부가 하얗고 탱탱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이 마흔이었던 그녀는, 젊은 여성의 피로 목욕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긴다. 『블라드』는 루마니아의 체페슈를 모델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역시 바토리라는 여인의 냄새가 풍긴다. 그녀 역시 피 자체만이 아니라 피를 흘리며 괴롭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즐겼던 것이다 ㅡ '철의 처녀'나 '철의 새장' 같은 고문 도구들은 이 바토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자, 블라드는 루마니아에 위치한 고대 왈라키아 왕국의 왕자였고 그의 아버지 이름은 블라드 드라쿨(Vlad Dracul)이었다. 루마니아에서 '드라쿨'이란 말은 악마나 용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블라드가 사용했던 문장 역시 용이었으니 그 이름의 기원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ㅡ 역시 그가 즐겨 사용했던 처형 도구인 꼬챙이는 루마니아어로 체페슈(tepes)이다. 그런가하면 (사족이겠으나) 『드라큘라』를 탄생시킨 브램 스토커는 뱀버리 교수라는 사람을 알게 되어 동유럽의 뱀파이어 설화에 대해 듣고는 드라큘라 백작에 대한 착상을 얻게 되는데, 그의 소설 속에서 뱀파이어를 연구하는 반 헬싱의 모델이 이 뱀버리 교수라는 해석도 있다. 또한 스토커가 만들어낸 일종의 '법칙'도 실로 꽤 고정화되었다(송곳니, 신사적인 면모, 박쥐로의 변신, 마늘, 십자가 등등). 이러한 것들은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모든 매체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로 굳어지고 말았다. 아마도 뱀파이어의 요건이나 스토리는, 어느 순간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축적된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블라드』도 충실하게 기존의 설정을 가지고 오긴 하지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와 '위대한 나라 영국'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이브가 다니는 직장과 인생이라는 저주, 그 저주를 탐내는 블라드의 역사와 인간의 음험함만 있을 뿐. ㅡ 「모든 것에 부패의 씨앗이 들어 있어요. 사물에는 쇠퇴라는 씨앗이.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씨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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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깎기의 정석 -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
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 / 프로파간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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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과 윤오영의 두 노인이 제각기 독을 짓고 방망이를 깎던 때와 비교한다손 치더라도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는 시공의 차만 있을 뿐 독과 방망이의 경우에 비해 손색이 없다. '연필 깎기의 정석'이라거나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라는 문구만 들었을 때는 거의가 키치적인 사유의 산물이려니 했다. 「내 평생 이렇게 요염하고 도도한 연필은 처음 봅니다.」 맙소사. 연필을 두고 요염하다느니 도도하다느니 하는 말이야말로 처음 듣는 바이다. 너무 뾰족해서 기절할 뻔했다고? (하이데거를 들먹이며) 그의 연필 또한 '손안의 것'이라고? 펜은 칼보다 강하지만 연필은 그 펜보다도 한 수 위라고? 물론 페트로스키의 『연필』을 읽었을 적에는 정말이지 멋지다고 생각했다(절판에서 벗어나 재출간될 수 있기를!). 그렇지만 『연필 깎기의 정석』은 그야말로 '연필 깎는 법'을 알려 줄 뿐인 거다 ㅡ 다행히도 처음 몇 쪽을 읽는 순간 의심은 곧 사그라졌지만. 「나의 도구 세트에서 연필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작업용 앞치마이다. 앞치마를 두른 남자는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법이다.」 지당한 말씀. 캐주얼한 니트에 물 빠진 청바지, 개구리 똥색 스웨이드 구두를 신은 의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그에게서 느끼는 신뢰도는 백색 가운을 입었을 때보다 몇 계단은 떨어질 것이다. 뾰족하게 깎아진 연필이 고객에게 안전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닐 튜브와 눈의 피로를 최소화하면서 오랫동안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해 주는 (LED 조명이 달린) 머리띠형 확대경, 족집게로 채취한 연필밥, 주문 번호와 날짜 그리고 뾰족함의 등급이 포함된 별도의 라벨과 인증서까지 ㅡ 이 인증서는 일명 '뾰족함 인증서'로, 그와 함께 「뾰족한 연필은 위험한 물건이므로 주의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 희한한 것은 목차를 살펴보다가 발견한 것으로, '샤프펜슬에 대한 짧은 소견'이라는 제목의 장(章)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 장은 단 한 쪽으로 끝나고 만다. 더군다나 오로지 한 문장밖에는 적혀 있지 않다. 「샤프펜슬은 순 엉터리다.」 이자는 장인답게(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전동식 연필깎이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는 전동식 연필깎이를 두고, 사무용품 업계에 사람의 심리를 교묘히 조작하는 자들이 넘쳐난다는 증거라는 둥 연필을 깎는 과정에서 기계가 인간을 소외시키는 방식이라는 둥 일견 궤변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전동 연필깎이 사용법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것은 '전동 연필깎이가 있을 법한 집에 무단 칩임을 하여 문제의 기계(빌어먹을 전동 연필깎이!)를 찾아내 콘센트를 뽑아낸 다음 나무망치나 쇠망치를 이용해 그 연필깎이를 개박살 낸 후 ‘Your problem is resolved’라는 메모를 남기고서 탈출하는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엘카스코 M430-CN 제품이 갖고 싶어졌다. 그것은 이중날 회전식 연필깎이로, 예산 문제만 없다면 기꺼이 책상 위에 들여놓고 싶은 물건 중의 하나일 것임에 틀림없다. 이 제품의 매력은 바로 위에 달린 유리창일 텐데, 연필깎이 윗부분에 투명한 유리를 덧대어 절삭날이 돌아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예산이 문제된다면 데이비드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잘 깎아진 연필을 주문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연필 한 자루에 35달러만 내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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