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의 수명 - 진실한 글을 향한 예술과 원칙의 대결
존 다가타.짐 핑걸 지음, 서정아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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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콩트인가, 만담인가. 에세이 하나를 두고 인턴 편집자가 받은 상사의 지시는 해당 글에 대해 '뭐든' 팩트체크를 하라는 것. 그래서 그는 한다. 문단 한 개, 문장 한 개, 단어 한 개까지, 사사건건. 그리고 작가는 반발한다, 미주알고주알.

"아니 상식적으로…… 아이고." 편집자의 지적에 저항하고 낙담하는 작가처럼, 독자도 책을 두세 쪽만 읽으면 정확히 이런 상태가 되며, 진이 빠져 기진맥진해져서는 헛웃음이 나오고 만다. 신랄하던 편집자도 물론 칭찬을 하기는 한다. 다만 너무 사무적이어서 그저 우스갯말처럼 들릴 뿐.

"존 선생은 언론인이 아니다. 또한 논픽션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픽션이라곤 할 수 없는 기사 비슷한 텍스트를 쓰는 작가다." 담당 편집자 짐이 작성한 메모다. "제발 부탁인데요, 작작 좀 하시죠." 그리고 작가 존의 볼멘소리. 어쩌면 이 둘은 멋진 아삼륙이 아닐까?

책을 내리 읽다 보면,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의 새로고침 작업에서 이 팩트체크가 픽션과 논픽션의 규정, 예술로서의 글쓰기 영역과 사실 관계의 충돌 등으로 뻗어나가 확장하는 걸 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글 쓰다'가 온전한 자동사로서 동작할 수 있을는지는 다른 문제다.

다행스러운 점은 여기서 (롤랑 바르트가 '스크립투리레scripturire'라 불렀던)'글쓰기-의지'는 포기되지 않는다는 거다. 생산성이야 독자가 읽는 바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니 걱정 없을 테고, 글의 임무와 자유, 다듬기와 날조의 측면에서 봐도 일단 존은 썩 괜찮은 글을 완성했으니까.

물론 창조의 권리만큼 비평의 권리 또한 중요하지만 비평을 하려면 우선 창조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걸 문학의 발전과 도태의 관념에서 볼 게 아니라 '예술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밀어야 하는 상황이니 어지러운 것일 뿐. 그렇다면 논픽션의 본질은 뭘까? 이 책에 그 해답 비슷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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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베토벤인가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 / 에포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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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베토벤?'이라고 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베토벤'이며, '여전히 베토벤'이다. 사실 그에 대한 책이 색다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왜 베토벤인지는 한 입씩 먹어보면 알 수 있겠지.

일단 구성이 좋다. 적게는 한두 페이지, 길어도 네다섯 페이지로 끊어서 100개의 챕터를 만들어놓았다. 클래식에 전혀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다소 힘에 부칠 수도 있을 거라 염려가 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머릿속으로 가닥을 잡을 수 있다고 본다.

베토벤이 작곡한 작품들 중 일종의 분수령이 되는 건 역시 교향곡 3번 '영웅(eroica)'이 아닐까 싶다. 과거 어디선가 베토벤의 교향곡 3번과 브루크너 교향곡 8번 중 어느 쪽이 더 위대한가 라는 논쟁이 있었다는 농담 같은 일화가 떠오르는데, 깜찍하고 귀여운 이야기다.

'영웅'은 꽝, 꽝 하며 타격 같은 연주로 시작한다. 이에 대해 지휘자별 특성을 써놓은 레브레히트의 묘사가 재미있다. 누군가는 곤봉으로 사람을 패 죽이고, 누군가는 장거리 대포를 발사하고, 누군가는 갱스터처럼 칼로 찌른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나는 카를 뵘의 지휘가 마음에 든다)

나폴레옹과 연관이 있는 까닭에 이 교향곡은 한층 이야깃거리로서도 흔히 회자된다. 물론 레브레히트는 이뿐 아니라 '엘리제(혹은 테레제)를 위하여', 도입의 4마디만으로도 한국인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그대를 사랑해(이히리베디히, Ich liebe Dich)' 등도 빼놓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베토벤은 바위고 나머지는 먼지다. 그를 지우면 집이 무너진다.' ……따라서 왜 베토벤일까, 하는 물음에는 영속성이라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자 말마따나 베토벤은 몽블랑산처럼 늘 그 자리에,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으면서 언제라도 닿을 수 있는 존재로 있는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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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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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살인_범죄·미스터리 소설에선 흔하다. 토막 난 시신이 담긴 유리병 속 보존액_끔찍한 영화 속에 종종 등장한다. 관건은 이다음이라는 걸 독자도 알고 있고 작가 본인은 더욱 더 자각하고 있을 터다. 그리고 찬호께이는 멋지게 연착륙했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남은 것은 이야기를 어떻게 직조하느냐에 달려 있던 작품.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했다가 한 번 속았고, 뒤이어 또 한 번 속았다. 그리고 훌륭한 마무리와 함께 오는 것은 영 좋지 않은 뒷맛. '용의자' 앞에 어째서 '고독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놓았는지 납득이 간다.

은둔형 외톨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의 옷장에서 사람의 팔다리와 장기가 담긴 유리병이 스무 개 넘게 발견된다. 이웃인 남자는 사망자의 학창 시절 친구이자 추리소설 작가. 그는 경찰에 자신의 추리를 설파하는데, 경찰이 듣기에 또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에도 꽤 납득이 가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당초에는 경찰과 민간인 콤비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물의 탄생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자살한 남자는 왜 '고독'을 선택한 것일까. 훼손된 시신 일부로 판명된 피해자들은 왜 작디작은 병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이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뭘까.

타인의 얼굴을 궁금해하지 않는 풍조. 뭐든 이루어질 것만 같은 온라인 세계. 20년 동안이나 외출하지 않아 밀실과 같은 고독한 용의자의 방. 바깥출입이 전무한 자가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는가, 이 핵심을 잡으려하는 경찰과 소설가.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한 홍콩의 건물들과 끈적이는 습한 기후, 언제 어느 곳에서건 범죄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것처럼 굳어버린 매체에서의 이미지와 더불어, 제목에서와 같이 고독하고 단절된 '자기만의 방'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쉽고, 허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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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체면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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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도진기 <법의 체면>(황금가지, 2025)

표지의 황금빛 사과는 무얼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던 금단의 열매인가? 그러나 저 사과의 겉엔 씹은 흔적이 없다. 따라서 선악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도 될 수 없는 거다.

당연히, 여기 여섯 개의 단편들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자들로 그득하다. 교묘한 발상으로 재판정의 법대(法臺)를 농락하거나('법의 체면'), 란포가 쓴 '인간 의자'를 흉내 내듯 멋대로 뇌까리며 살인을 저지르는 자('당신의 천국').

그리고 증거가 없어 범죄를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범죄 자체를 알아챌 수 없는 살인('완전범죄')에, SF('애니', '컨트롤 엑스')와 호러 냄새마저 풍기는 수록작('행복한 남자')까지. 강퍅하리만치 인간의 복수, 회한, 괴상한 신념 등에 몰두하는 이야기들이다.

어떻든 법조인이라는 작가의 이력 때문인지 탁월하다 느꼈던 건 역시 법정물인데, 특히 '완전범죄'의 결말에 가서는 탁 하고 무릎을 치며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이런 발상도 가능하구나, 이런 이야기도 있을 수 있구나 하며 내처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인지 책 말미 작가의 말에는, 법정과 인간에게서 느꼈던 실망, 안타까움으로 촉발된 글쓰기였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낙심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인간을 재단하려는 법의 그 불완전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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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라이
프리다 맥파든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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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사람이 죽어 사라지는 것뿐이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의 작법을 충실히 따르고 미친 듯한 몰입도가 압권인 작품. 과거와 현재의 시점이 교차되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어느 하나 허투루 된 것이 없다.

과거와 현재의 마주침, 인물 A와 인물 B의 시점 엇갈림…… 이런 타입의 구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폭설로 고립된 아름답고 순수한 성당 같은 저택이 악의 소굴로 변하고, 새출발의 결심이 생존 게임으로 옮아가면서 이 익숙한 이야기의 얼개가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매물로 나온 실종된 정신과 의사의 집에 방문한 부부와, 의사가 남겨놓은 환자와의 상담 녹음 테이프. 그 테이프 필름이 조금씩 풀어져 비밀을 아는 자, 비밀을 캐내려는 자, 그리고 비밀을 숨기려는 자들을 옥죄는, 서바이벌 게임과도 같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매력적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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