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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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가 남자라는 종족에 얼마나 구애되었으면 일곱 편(후기를 대신해 쓴 작품마저)의 단편 제목 끄트머리에 죄다 '남자'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인가, 하는 애교 섞인 볼멘소리를 늘어놓으며 독서를 마친다.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유일한 단편집. 멱살잡이를 하고 싶을 정도로 좀처럼 작품을 내놓지 않는 하라 씨의 색다른 글쓰기. 소년, 소녀들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 일본의 어느 독자는 이 단편집 제목의 '천사'를 어른이 되지 못한 위태로운 인간들일는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책 뒷날개에 적힌 카피('그들은 어쩌면 모두 도시의 그늘을 닮은 천사는 아니었을까')를 다시금 읽고 나니 그럴싸한 풀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금털털한 블루버드와 피스. 판에 박힌 듯한, 특정 인물을 설명하고 상기시키는 데에 좋을 만한 물건들, 그것들도 이제는 새롭게 보일 만큼 정말 오랜만에 만나보는 사와자키다. (뭐, 후기를 대신한답시고 수록한 <탐정을 지망하는 남자>는 대화 일색이긴 하지만 사와자키가 탐정이 된 과정을 담고 있으므로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무턱대고 거액의 현금을 녹슨 우편함에 넣고 사라진 어린 의뢰인, 자식을 잃었고 동시에 자식을 찾는 남자, 딸의 뒷조사를 의뢰받고 미행하는 도중 그 딸이 재차 아버지를 미행하는 현장을 따라가는 사와자키, 그리고 잘못 걸려온 전화로 자살 예고를 들은 뒤 이튿날 석간신문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는 사와자키. 하나같이 현실 속에서라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뿐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이 천사들에겐 탐정이 필요하다. 사와자키가 필요하다.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의 와타나베가 자신이 아님을 끊임없이 설명하는 바로 그 사와자키, 서늘한 잿빛 속에서 천사들을 보듬어 줄 사와자키가(종이비행기로 안부를 전하는 와타나베가 등장한다면 그쪽도 얼마든지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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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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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하다. 리베카 솔닛이 누군지 모른다. 그간 어떤 책을 펴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수필이 여성의 언어를 이해하기에 유익하다는 어떤 네티즌의 말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얼어있는 호수에다가 구멍을 뚫은 다음 아무것도 낚지 못할 낚시꾼이 되어 가만히 앉아있는 기분이 들 뿐이다. 내 삶과 당신의 삶엔 경계선이란 건 없고 서로 평행을 달리지도 않는다. 내 생활과 당신의 생활이 동작하는 방식은 대동소이하며 그것들을 비교하고 대조한다는 것 또한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단지 이것을 저렇게 생각하고 저것을 이렇게 생각해보며, 내 주변에서 이동하고 변화하는 모든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사색과 그 첨삭의 정도 차이만 있다. 제목인 ‘멀고도 가까운’은 과연 그런 뜻일는지도 모른다. 나와 당신의 사이, 나와 이 세계의 사이, 내 살의 죽어있는 신경이라도 일절 신경 쓰지 않고는 지낼 수 없는, 반드시 거기에 존재할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해 조금만 더 가깝게 한 발자국 더 들어가 생각해보는 작업. 솔닛의 작업은 바로 그것일 터다. 따라서, 미안합니다, 내 삶이 너무나도 치열해서 당신의 사유에는 눈을 돌릴 여유가 없어요, 라고 볼멘소리를 해도 상관없다. 이 글 자체가 멀고도 가까운 곳에 있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일 수 있을 것이므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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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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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이 함께, 동시에 필요할까. 경제학은 음식을 입수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만 인간은 자신과 더불어 가족의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구하려 한다는 말로 책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가족이 성립될 수 있는 여러 방편 중의 하나가 바로 결혼이다. 물론 러셀이 소개하고 있는 성 바울의 결혼관은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렵고도 따르기 힘든 것이긴 하지만. 왜냐하면 성 바울이 제시한 입장은, 결혼이 자손 생산이 아니라 간음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쪽에 서 있기 때문이다(이로써 현대 생활에서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 세 가지 주요한 활동으로 러셀이 언급한 것 중의 하나가 어느 정도는 명확해진다. 그는 그 세 가지로 전쟁, 사랑과 함께 종교를 말한다). 얼핏 종교와 결혼, 성(윤리)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또한 혼외에서 이루어지는 섹스가 비도덕적이라는 관점은 종교와 더불어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러셀은 이렇게 적고 있다. 「금욕주의가 지배적인 곳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는 추잡하고 거칠어지기 십상이다. 금주법이 시행될 때 음주 행위가 추잡하고 거칠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기교는 망각 속에 묻히고 결혼은 추잡한 것이 되고 말았다.」 특히 성과 그에 따른 윤리적 문제를 다룰 때 흔히 여성은 핍박과 구속받는 입장이 되곤 한다. 이것은 훗날 피임법의 발명과(과거 종교적 압력이 지금보다 더 거셌을 때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무언의 인식과 임신이 두려움의 요소로 작용했을 게 빤하다) 여성해방이라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현상이다. 여권운동과 여성의 해방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러셀은 민주주의 이론이 미친 영향과 가정 밖에서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이 늘어난 것을 요인으로 본다(결혼과 도덕에 관련해 중요한 것은 여성의 사회적 해방이라고도 덧붙인다). 때로는 헉슬리 등의 소설을 통해 인생과 사랑의 끔찍한 면모를 보기도 했지만(내 기억으로 그의 소설에서는 섹스조차 당국의 명령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결혼, 도덕, 사랑, 섹스와 그에 따른 인식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변해왔다. 그러나 결혼이 도덕과 함께 언급되어야 하고 남녀 혹은 인간의 관계에 있어 필요한 것이라면 이혼 또한 매한가지일 터다. 결혼이 반드시 자유 의지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적 구속력이 있는 행위인 까닭이다. 이혼이 결혼을 전제로 하는 제도인 동시에 결혼 제도 내부에서 안전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러셀의 말은 그래서 인정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결혼 생활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완화라는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 행복한 결혼이란 것이 가능한가. 행복한 결혼이란 것은 뭘까.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깊이 있는 친밀감을 유지하는 것일는지 모른다(맺음말). 두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정말로 내 아이라는 것을 여성은 오롯이 알 수 있지만(본인의 육체를 통해 낳았으므로) 남성 쪽은 오직 본능이나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그 사실을 확인할 도리가 없다는 식의 농담이 언제까지 유효함의 뉘앙스를 가져야만 하는가.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섹스와 출산과 가족의 탄생이라는 관계 위에서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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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사업장의 근로자와 사용자를 위한 단 한 권의 노동법>
노동. (사실 '근로'나 '근로자'라는 말은 '노동'과 '노동자'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를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좋지 않은 사례라 생각한다) 이 노동을 하는 노동자, 노동의 시간과 조건, 임금 등, 노동과 노동자에 관련한 법을 다룬 책. (사람은 누구나 노동자가 아니던가?)


<사법부>
현 한국의 사법제도의 신뢰도는 바닥이다. <사법부>는 그 법에 관한 이야기를 시대 순으로 훑으며 한국 현대사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다.


<술의 세계사>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자주 마시지도 않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탐구하는 것은 언제고 흥미로운 일이다.


<교양의 효용>
서지정보에 따르면 20세기 초중반의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를 다룬단다. 지금 상황과 얼마나 호응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호가트가 노동자계급 문화에 관심을 가지며 조사했던 것은 오늘날에도 필시 유의미한 결과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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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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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을 좋아한다. 덕후다? 그러면서 여성이 쓴 소설은 시시하다며 읽지 않는다. 반(反) 페미니스트이다? 걸 그룹을 좋아하지만 여성이 쓴 소설은 읽지 않는다. 덕후에다가 롤리타 콤플렉스, 게다가 현실세계에서 여성과 결별할 만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치적 성향이 모호한 위험인물로 봐야 한다? 이러한 특정 문화의 상징, 어떠한 것도 정치적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오웰식 사고방식과 결합된 하나의 결과는, 상호대립과 대항이라는 관계 속에 있다. 이따금씩 괴상한 프레임에 빠져 뒤늦게 반성조차 하기 민망할 정도의 밑바닥 대중으로 전락하는 스스로들을 돌아보며 자신이 애매모호한 정치관을 가지고 있다거나 확실히 정리하지 못한 입장에 대해 고민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며 잘못된 것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건 이데올로기를 들먹이며 자세를 취하는 것을 우리는 바라지 않는다. 모든 사건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시시껄렁한 확인 절차에 들어가면, 오웰의 말이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바로 정치와 무의식이라는 단어가 합쳐지면서 말이다. 그것은 우습게도, 효과적으로 성향을 구분 짓게 해 주는 동시에 줄긋기를 통해 여러 사람의 구획을 정리할 수 있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는 소망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거울 속에 있는 것은 순전히 허구에 불과한 것이고? 대중문화에도 정치적 요소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담겨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종종 하나의 사건에 대해 덜 정치적이거나 더 정치적인 입장을 희미하게 혹은 뚜렷이 표현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옛 시절의 향수를 느꼈을 만한 영화에서 누군가는 꼰대스러운 권위주의를 발견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혀 한번 차고 지났을지도 모를 연예인의 일탈에서 다른 누군가는 무형의 청문회를 열어 도덕적 잣대를 설파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책 말미에선 <개그콘서트>의 한 꼭지였던 ‘민상토론’에 관한 내용을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건 정치 풍자라기보다 정치를 풍자하기 힘든 사회에 대한 풍자라고 봐야 할 듯싶다. 정치 풍자를 하기가 어려운데 희한하게도 어떤 사안에서든 정치적인 발언과 행위가 튀어나오는 우리의 실생활과 비교해보면 실로 재미있는 현상이다. 과연 대중의 소망이 제대로 거울에 비춰지고는 있는 것일까? 하기야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말만 갖다 붙이면 다 해결될지도 모를, 때로는 불편부당하고 불안한 사회 그리고 그 사회가 쏟아내는 대중문화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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