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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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최초 완역본>, 태생은 그 해 <가장 아름다운 체코슬로바키아 책>이 된 1965년판.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간기면에는 <초판 1쇄>라고 적혀 있다. 여기 『도롱뇽과의 전쟁』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는 누구냐는 질문에 키플링 ㅡ 아마도 『정글북the jungle book』을 쓴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ㅡ 을 꼽는 도롱뇽(놈들은 언어구사가 가능하다), 그리고 동물원에서 방문객으로부터 초콜릿과 단 것을 너무 많이 얻어먹어 위장염에 걸리는 도롱뇽(들)이 등장한다. 게슈타포가 공공의 적 no.3로 지목할 정도로 악명높은(?) 차페크의 『도롱뇽과의 전쟁』. 우리는 곧잘 체코the czech republic, 또는 프라하prague라는 단어 자체에 매료되곤 한다 ㅡ 파리paris나 도쿄tokyo의 다리 위 야경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그리고는 약간의 안개와 어쿠스틱 기타를 상상하기도 한다(적어도 나는 이런 몽상을 즐긴다). 하지만 무대가 된 체코는 책의 마지막에서 (우리의 주인공) 포본드라의 <내가 전 세계를 망쳐 버린 거야……>란 말을 끝으로 도롱뇽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도롱뇽들은 도롱뇽들이니까」
그는 목소리를 깔며 얼버무렸다.
「2백 년 전에는 깜둥이들은 다 깜둥이들이라고 했죠」
「결국 그 말이 다 맞잖소. 체크!」

나는 결국 그 게임에서 졌다.
갑자기 체스 판 위의 수들이 하나같이 케케묵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로 벌써 결판이 나 있고,
우리는 그저 우리 말들을 똑같은 네모 칸으로 옮기면서
과거와 똑같은 패배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까만 말이 졌구먼」

ㅡ 본문 p.215


파시즘의 풍자와 즉각적인 현실의 반영은 차치하고라도(그럴 수 없겠지만 미루자) 『도롱뇽과의 전쟁』은 환상문학이며 거기에 고급 저널리즘을 융화시켰다. 그리고 작가는 시종일관 영민한 위트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그는 수도원 꼭대기 탑루에서, 히죽거리며 금서를 읽는 노망난 수도승을 어떻게 골려줄까 하고 고심한 끝에 소설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의 호르헤를 흉내내 <이 책에는 독이 발라져 있다>라는 쪽지를 몰래 책 속에 넣어 수도승을 놀래킨다(물론, 당연하지만, 비약을 인정하며, 에코의 작품이 훨씬 나중에 태어났다). 그러나 적어도 작가(탑루 위의 수도자)는 사람들(수도승들)을 (아직은)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한다. 『도롱뇽과의 전쟁』은 어두운 결말로 맺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의사소통과 직립보행이 가능한 도롱뇽들에게, 인간은 각종 노동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ㅡ <우리는 진주의 모험 소설 대신 환희에 찬 노동의 찬가를 부를 겁니다. 우리는 구멍가게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창조자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p.169).> 그리하여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도롱뇽들이, 그들의 거주지(!) 확보를 위해 인간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하고 싸우는 걸 더 잘했던 것 같구나」(...)
「인간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어 놓으면,
너무 잘해서 네 녀석도 깜짝 놀랄걸?」

ㅡ 본문 p.361


하! <우두머리 도롱뇽은 이 순간, 아직은 세계를 무력으로 접수하기보다는 인류로부터 구매할 의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p.352).>라니. 게다가 <아직은>이라니 ㅡ 우두머리 도롱뇽의 진짜 정체를 밝히지는 않겠다. 책의 마지막 <작가, 혼잣말을 하다>를 읽어보시라. 작품에선 도롱뇽이 인간을 상대로 거래를 하는 세상이 온다. 물론 사람들은 이전에 수많은 도롱뇽들을 죽이거나 못살게 굴었다. 그런데 이 <마카로니(작가는 특별히 억센 놈들이라 표현한다) 같은 도롱뇽들만> 살아남아 계속 번식을 유지했나? 운명이 질긴 놈들이다(물론 작가의 저항의 몸짓이겠지). 말을 할 줄 알고 지식을 쌓아 교수가 된 도롱뇽(!)의 논문을 인용해 파문당한 과학자의 (이유 있는) 할복이나, 도롱뇽들이 사는 강에 독극물을 부어 그들을 독살하는 영국 사령부에 관한 에피소드는, 독자(혹은...)에게 전하는 놀라운 위트로 무장한 잘 다듬어진 촌철이다.

명랑 개그 만화처럼 ㅡ 단발적인 개그가 아니라 촘촘히 짜여진 코미디에 가깝지만 ㅡ 내내 히죽거리게 만드는 『도롱뇽과의 전쟁』은 칼레이도치클루스를 떠오르게도 하는데, (물론 모두 작가가 의도해 적었고 동시에 허구인) <도롱뇽들의 성생활>을 고찰한 부록, 도롱뇽들에 관한 각종 신문 기사들, 과학 총회를 목격하고 쓴 기록들, 저명한 명사들의 소견들, 학교 교육을 받은 도롱뇽의 회상, 국제 공산당 선언문, 전시에 보내진 전보들...이 색색의 면지로 구성되어 있다(일본어로 된 부분도 있는데 일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부끄럽게도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엉터리 일본어가 아닐까 한다) ㅡ (세심한 옮긴이주와 별도의 색인으로 엮어진 지명 색인, 그리고 이 모든 것의 편집) 출판사에 감사와 영광을! 정말 아름다운 책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동물에게 주는 메시지건, 그가 풍자하려는 파시즘이건, 뭐가 어쨌건 아쉽다. 그래서 나는 작가 내면의 목소리를 빌린다. 「이렇게 끝낼 거야?(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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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질문 - 의문문으로 읽는 서양 철학사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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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질문』을 펴낸 열린책들의 편집자 노트(웹 카페를 통해 확인)를 보면 이 책 자체를 놓고 <위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이 책에 악행을 저지르는가?>, <이 책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를 만들려 하는가?>, <최선의 편집 형태는 무엇인가?>가 그것들이다. 그럼 나도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을 읽는 나는 지금 여기에 실재하는가?>, <나는 이 책을 읽는 행위로써 행복한 것인가?>, <나는 이 책의 텍스트를 믿어야만 하는가?>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닮아있다. <하늘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라>, 또는 <운명의 긍정>이란 하나의 구절로서 표현되는 그것이다. 그래, 이건 쉬이 생각할 수 있는 명제다. 그럼 고르기아스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고 헤라클레이토스(그는 코스모스cosmos를 말한다)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어쨌든 많다. 저자는 『위대한 질문』에서 30가지의 질문을 한다. 아니 30명의 철학자들이 (초빙돼) 질문한다. 하지만 나는 단 하나의 질문에도 답할 수 없다. 아예 답이란 건 집어치우고, 내가 보기에 나는 답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아니면 내가 그 흔해빠진,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수식[~(~a)=a]에서 허우적대는 걸까? 사실 이게 기막힌 논리일지도. 이를테면 <허구의 허구를 통해 실재에>, <없음의 없음을 통해 있음에 도달한다>거나 말이다 ㅡ 그나마 최근 사람인 사르트르의 눈으로는 한심하기 짝이 없겠지만(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욕을 해도 대꾸할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위대한 질문』에 대해서, 그리고 위에 나열한 철학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오랫동안 설명할 수 없고 그럴 자신도 없다. 내가 왜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하는가(이것도 멋진 <위대한 질문>이다)? 『위대한 질문』은 총 30명의 철학자들의 입을 빌려 하나씩 질문을 해댄다. 그런데 등장인물(이라 표현하자)의 연대 순으로 19세기, 20세기까지 오다가 갑자기 마지막엔 플로티노스(204~269 혹은 205~270)가 나타난다. 대체 왜? 사실 이 양반도 일자一者를 이야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학파, 고대 그리스철학과 총체적 체계로서 엮여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갑작스럽다. 사실 이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이것은 <허섭스레기 질문>이란 걸 깨달았다.
 

▼ 『위대한 질문』의 저자인 폴란드의 소크라테스,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그는 작년 유有에서 무無로 되었다.
아니 원래의 무에서 변하지 않고 무 자체로 남아 있는 건가,
아니면 이제야 진정한 유가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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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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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등장하는 현재시제의 문체는 날것 그대로의 표현이며, 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불안한 영혼들의 불완전한 이야기. 옆구리를 툭 치면 활자화된 단어들이 눈에 보이게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은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집 『전화』. 그런데 아뿔싸, 나는 절대 함정에 걸려들면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그에게 빈틈을 보이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그의 언어는 포물선을 그리며 도망갈 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머리 위를 향해 내리꽂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글에서 영화감독 김기덕이 <나 역시 누구나 쾌락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 쾌락의 진원지가 상대방의 고통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라고 쓴 부분을 기억해내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전화』에 등장하고 사라지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듯 자기만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거나, 정말 바닷물에 심하게 절어 손쓸 방법이 없는 양말 한 짝처럼 인생을 사는 사람들, 아니면 내가 보기엔 분명 고통스러운 순간임에도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사는 의식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순간 이 책을 찢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누군가의 지시에 사로잡히고 만다. 차라리 그들이, 영화 《섬》에서 전기로 물고기를 지지듯 ㅡ 자신의 입이나 성기가 아닌 물고기라는 타자他者 ㅡ 스스로가 아닌 타인이나 다른 어떤 것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근원적인 고통을 피했으면 하고 바랐다(물론 『전화』와 《섬》을 같은 선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단순한 고통을 넘어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악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씨발>이든 <씨팔>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예술kunst>이란 단어 하나로 맺어졌으니까(「또 다른 러시아 이야기」). 자동 응답기의 안내 멘트를 듣고 <왜 연극하는 것처럼 말할까?>하고 느끼는 B(「문학적 모험」), <이제는 전화가 지긋지긋해. 네 얼굴을 직접 보며 말하고 싶어>라는 말에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야>라고 응대하는 X(「전화」), <내가 거울을 볼 테니까 너도 거울 속의 나를 봐. 그러면 거울 속의 내가 같은 사람임을 확인할 거야. 아무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거야>란 묘안을 내는 형사(「형사들」), <당신의 얼굴이며 말하는 방식과 눈길에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을 자아내는 무언가가 있어요>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는 여성 작가(「앙리 시몽 르프랭스」)의 경우도 그렇다. 그들은 전화를 이용하거나(때로는 편지로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아니면 직접) 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모두 타인과의 맺음에 있어 실패하고 고통 받는다는 거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전화』라는 타이틀로 묶어지며, 수록된 대부분의(거의 다) 단편들은 어, 하다가 끝나고 만다. 왜일까.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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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67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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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의 배경이 된 세계대전이나, 세상의 모든 전쟁, 총싸움, 전쟁을 그린 영화나 책, 정치적 입장 등은 뒤로 놓고, 오직, 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만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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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 같은 청춘. 청춘이라! 우리는 모두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리다고? 청춘이라고? 그건 다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 본문

정말 그들은 노인이 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더 살고 싶다. 그들은 참호 안에서 느낀다. 시체의 영혼을 빨아들인 밤안개가 내일은 적의 포탄을 몰고 올거라는 것을. 그리고 바람을 타고 오는,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아군 병사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왜 전쟁이 일어난 거지? 어째서 내가 여기서 총을 들고 있어야 하지? 대체 왜 땀으로 가득찬 군화를 벗지 못한 채 꼼짝않고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쥐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기 전에 그들은 악마가 된다. 그들은 어린아이가 되고 피상적으로 변한다. 알싸한 연기를 맡으며 그들은 웅크린 맹수가 되고 교착 상태에 빠진 인형이 된다. 그들은 사자死者가 되어서 움씰움씰 춤을 추는 기관총이 되고 또 수류탄이 된다. 부상병의 신음 소리를 싣고 오던 바람은 이제 피냄새를 데리고 오며 천진난만한(했던) 소년들에게 메스꺼움을 준다.

그들은 때로는,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히멜슈토스 하사에게 침대 시트를 뒤집어씌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패기도 하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사나운 개와 상대하면서도 거위 한 마리와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시간이란 이미 사라졌다. 두개골이 없어도 살아 있는 사람과, 두 다리를 잃은 채 달리는 병사와, 흘러내리는 창자를 움켜잡은 채 치료소까지 오는 병사를 본다. 그들은 <숟가락으로 먹을 것을 입 안에 떠 넣고는, 달리고, 던지고, 쏘고, 죽이고, 널브러져 누워 있다>(p.110). 그리고 그들은 어느 판자벽 광고물에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있는 한 소녀를 보고, 평화를 본다. 그리고는 곧 눈을 내려 자신들의 더럽고 꿰맨 자국이 있는 군복을 본다. 그리고 다시금 가슴에 총알 하나가 알을 슨다.

-- 그냥 엎드리고 있으면 공포는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곰곰 생각하다가는 공포에 질려 죽고 만다 -- 본문

파울 보이머는 휴가를 나와서야 비로소 전쟁이란 것을 안다. 그가 전선에 있을 때는 활기를 띠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했다. 그가 휴가를 나와 어색해하고 혼자 있고 싶어할 때는 나 또한 그러했다. 병영에 있는 미텔슈테트가, 그에게 낙제를 줬던 칸토레크 선생에게 ㅡ 그는 이제 향토 방위대에 편입되어 미텔슈테트의 아래에 있다 ㅡ 잔소리를 해대는 것을 보고 히죽히죽 웃을 때는 나도 따라 히죽거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의 전쟁이란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논쟁거리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가십거리일 뿐이란 거다. 우리의 파울 보이머(를 비롯한 모든 군인)는 참호 속에서 죽어가는 프랑스 병사로 인해 얼마나 고뇌했으며, 그의 지갑에서 발견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사진으로 얼마나 맹목적이게 되었는가. 결국 전우애는 허망함 그 자체로 돌변하고 그 속의 수많은 사연들은 총탄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날아간 것은 전쟁의 허망함과 어린 소년의 낡은 단추만이 아니다. 고약한 히멜슈토스 하사에게 대들던 차덴을, 몰래 잡은 거위를 요리하던 카친스키를, 포화 속에서 교과서를 끼고 다니던 뮐러를, 머리가 비상해 가장 먼저 일등병이 된 크로프를, 막상 전방에서는 겁에 질린 원숭이가 되어버린 히멜슈토스 하사를, 약혼자에게 보내겠다며 구리로 된 포탄 띠와 프랑스제 조명탄의 비단 낙하산 천을 줍던 하이에를, 휴가를 얻어 만난 부모님과 누나를, 그리고 참호 속에서 죽어간 제라드 뒤발이란 이름을 가진 프랑스 군인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에, 작가의, 파울 보이머의, 그의 전우들의, 누군가의 나지막하고 담담한 외침을 듣는다.

--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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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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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가 춤을 춘다. 불어치는 바람에 맞춰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허수아비는 누가 옷을 입혀주지 않고 말뚝을 박아주지 않으면 아무짝에 필요가 없다. 옆의 누군가가 절망을 섞어 부르는 노래에도 신경쓰지 않는다. 허수아비니까. 오늘 아침, 신문에서 <탐욕에 눈먼 권력에 국민은 절망합니다>란 헤드라인을 달고 이 『허수아비춤』의 출간 소식이 기사화된 것을 보았다. 내가 보기에 기득권은 불법과 탈법을 일삼고 바깥 소리에는 외면하고 있지만, 국민도 그들을 외면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허수아비다.

책을 읽다가 <백성은 바다요, 권세는 그 위에 뜬 일엽편주一葉片舟다>라는 문장을 발견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구절인 것 같아 생각을 거슬러보니, 그래 이거였다. 저 옛날 맹자의 <백성이 귀중하고 군주는 가볍다>, 순자의 <군주는 배요, 뭇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실을 수도 있고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란 말이었다. 바로 중민重民사상이다. 이건 백성의 의지와 원망을 반영한 것이다. 다시 『허수아비춤』으로 돌아가면, 불법 비자금을 조성하여 로비를 하고 그룹 후계자의 경영권 및 재산권 상속을 추진하는 과정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펼쳐진다. 정말 <세금 내라는 것 다 내고는 사업 못해 먹는다>란 말이 맞는 걸까. 소시민인 내 눈으로 보건대, 글쎄.

어릴 적 <훌륭한> 사람 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여기서 조금 눈目이 트인 사람이라면,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하겠지. 그런데 한발짝 더 나가면,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게 나을 거다. 사는 평생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는 사람은 없기에. 이건 거꾸로 봐도(당하는) 마찬가지다. 그 <폐弊>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지. 『허수아비춤』에서는 어마어마한 로비 자금을 뿌리는 기업, 그 기업을 까는(!) 기사를 실어 광고 압박을 당하는 신문, 상명하복과 검사동일체 원칙으로 표현되는 검사들, 돈을 받고 거짓 증언을 하는 노조 간부, 공모에 가담했지만 회장이 내린 스톡옵션이 적어 다른 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간부 등이 등장한다. 매일 저녁 아홉시 땡 하면 으레 들리는 소리. 그런데 그 뉴스보다는, 상류 사회의 치마 속을 한층 더 불편하게 까발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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