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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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적으로 '우연'에 집착한 「우연 여행자」를 시작으로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노골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개인적으로 내 취향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인데, 그에 반해 「하나레이 해변」이나 「시나가와 원숭이」는 꽤 괜찮았다. 하나레이 해변에서 상어에게 오른쪽 다리를 물어뜯겨 죽은 아들의 어머니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하나레이 해변」은 유독 그 색감 때문인지 시종일관 우울한 기운이 틈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ㅡ 막바지에 다다라 '외다리 서퍼'의 목격담이 등장해도. 주인공 사치(어머니)는 하나레이에 집착하고, 서핑을 하려는 젊은이 두 명과 조우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지만 외려 어드바이스를 받아야 할 것은 그녀 자신이며, 아무것도 결말지어지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이 나고 만다. 「시나가와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자꾸만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여자가 있다. 우여곡절 끝에 드러난 진실은 원숭이가 그녀의 집에서 이름표를 훔쳐갔기 때문이라는 것. 「하나레이 해변」과는 달리 일정 부분 매듭이 해소된 감은 있지만 이쪽 역시 다른 단편들과 같이 기이하게만 보인다. 하루키의 소설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식이다. 불가해한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 벌어져도 당하는 쪽은 여간해서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에 천착해 제 삶을 팽개치기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어떻게 해서든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겪어 온 삶에 있어 방관자인 동시에,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해서도 (무지막지할 정도로) 철저하게 일상의 공기에 그 흐름을 맡긴다. 소위 하루키 문학(이라고까지 부를 건 없지만)은 메타포를 숨겨 놓든 그렇지 않든 겉으로는 무미건조한 것이며 그 속에는 심리적 결핍, 무심함(과 책무) 그리고 서브컬처에서 오는(혹은 그쪽을 향하는) 특질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극한 상황에 도달하면 다시 돌아온다는(혹은 이 세계의 메커니즘이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극즉반(極則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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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영국식 살인의 쇠퇴 위대한 생각 시리즈 6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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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레옹(『동물 농장』)과 빅 브라더(『1984』)에만 급급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오웰이 썼던 소설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글들도 속속 번역되어 왔다. 이 『영국식 살인의 쇠퇴』도 그런 맥락 위에 서 있는데 과거 이런저런 에세이를 묶은 책에 포함되었던 글이 중복되기도 한다(어쩔 수 없는 일일까)ㅡ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글을 이미 여러 번 읽은 셈이며, 심지어 이 책에 수록된 각각의 글들은 그 성격이 일관성 있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켜 중구난방의 편집을 자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살인의 쇠퇴』를 읽는 자들의 공통된 이유는 (장담하건대) 저자가 오웰이라는 점일 터다. 그렇다면 왜 오웰인가? 그 연유는 특히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의 영향이 지배적임에 틀림없다. 오웰은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인간들을 그림으로써 독자들에게 투쟁의 대상을 심어주었다. 그는 이 세계를 둘러싼 현상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짚어내는 것에 자질이 있었으며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까지 터득했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세상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누가' 알려줄 수 있는지를, 소위 문학성이 담보된 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환멸에의 각성을 꾀하도록 도왔다(그중에서도 《트리뷴》지에 썼던 고정 칼럼 <As I Please(나 좋을 대로)>는 ㅡ 말 그대로 '오웰 마음대로' ㅡ 짧은 호흡으로 보다 큰 울림을 선사한다). 또한 식민지 경찰과 부랑자, 접시닦이 등을 거친 그의 손은 '예술이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나는 이 책에 대해서(적어도 오웰의 글 자체에 관해서만큼은) 이러쿵저러쿵하며 평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오웰'이라는 단어 자체를 읽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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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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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리개 적 '통닭'이었던 것이 '치킨'으로 불리고 기름기 좔좔 흐르던 포장지는 피자 박스처럼 변했지만(물론 어디선가는 '옛날 통닭'이런 것을 지금도 튀겨주기는 한다), 닭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1인 1닭'을 외치는 이들도 있는 만큼 조류 독감과 같은 재앙이 닥쳐올지언정 이런 닭에 관한 탐구 역시 존재하질 않나ㅡ 실제로 나는 군 시절 조류 독감이 한국을 휩쓸었을 때 점심 식단으로 '1인 1닭'을 몸소 실천한 바 있다(광우병 파동 때도 마찬가지). 담배 한 개비 피우고자 아파트 동(棟) 밖으로 나와 치킨 배달 오토바이와 마주쳤을 때의 부러움과 돌아나오는 그의 등짝 뒤로 엘리베이터에 그득한 기름 냄새의 황망함. 나도 치킨 한 마리 시켜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 찰나, 집에 모셔둔 쿠폰이 몇 장 남았는지를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헤아리고 있는 쓸쓸함(치킨게임 ㅡ chicken에는 '겁쟁이'란 뜻이 있다 ㅡ 으로 닭을 모독하는 자, 그대에게 화 있을진저!). 책은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하기도 하고 치킨의 역사와 종류, 현주소를 탐방하기도 하며 치킨 산업의 뒤통수를 보여주기도 한다ㅡ '아버지가 월급날 사오셨던 통닭'이란 개념이 환상일지도 모른다면서(그러나 그것은 소위 '양념통닭'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양념통닭이란 것을 먹으면서 이런 소스는 대체 누가 만들어낸 걸까, 하며 발을 동동 굴렀던 적이 있다. 위에는 땅콩 가루도 담뿍 흩뿌려진 따끈따끈한 악마의 메뉴 말이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나 역시도 양념을 손에 묻히기가 싫어져 후라이드치킨(언제고 '프라이드'라 부르는 우를 범할 수는 없겠다)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이제는 양념소스를 따로 갖춘 메뉴들이 자리를 잡았다. 파를 올리는가하면 기존의 달착지근한 양념이 아니라 새로 개발된 요상한 소스도 있고, '강정'이나 '순살'로 변신하기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요즘 후라이드라 부르는 어지간한 치킨은 '크리스피 치킨'이란다ㅡ 바삭함을 뜻한다고. 그러면서 90년대 초반 KFC에서 출시한 것을 시작으로 BBQ, BHC, 치킨시장의 새로운 강자 네네치킨(튀김옷이 과하지 않은 것이 포인트)으로 이어지는 애통의 역사 ㅡ '치맥' 개념의 등장까지 ㅡ 를 설파한다. 이른바 '통큰치킨'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나는 거기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물론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기다란 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뻣뻣하게 기다려 손에 넣었을 때 이것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며 자위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값싼 것이라도 우리가 거실의 다 헤진 가죽 소파에 앉아 전화번호 두드려가며 시켜 먹던 그 맛도 아닌데다가 ㅡ 통큰치킨은 그 자체가 일종의 '보급형'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ㅡ 그간 익숙해져 있던 '배달 치킨'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소상공인과 소비자, 소위 상도덕, 극에 달한 치킨업계의 경쟁에 있어 이례적인 대동단결의 결과 통큰치킨은 곧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당시 인터넷상에서는 '통큰치킨 장례식'이라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인 김수영의 양계(養鷄) 경험까지 들쑤신 이 책은 어쨌거나 치킨의 역사를ㅡ 양계농민, 프랜차이즈 치킨점, 예비 창업자에 이르기까지를, 현재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벌어질 애환을 섞어 다채롭고도 씁쓸하게 다룬다. 치킨은 지금, 야구장에서 맥주 캔으로 탑을 쌓아가며 소비된다. 혹은 각 가정에서ㅡ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기분이 나쁘니까 전화통을 붙들고 치킨을 주문한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치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치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치킨을 먹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누가 만들고 누가 키우는가 하는 문제, 우리가 야식이라는 이름 아래 곧잘 접하게 되는 치킨이 누군가에게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바로 그 문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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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광기 -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제임스 캐럴 지음, 박경선 옮김 / 동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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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살렘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 열병(熱病)의 땅에 히친스(『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읽어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광기 충만한 언덕 위의 도시― 아랍인의 함락,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 밸푸어 선언에 이은 첨예한 마찰,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양분과 재점령, 2차 대전 이후 다시 세워진 이스라엘과 갈 곳 잃은 유대인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분쟁,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의 슬픔이 집약된 통곡의 벽……. 예루살렘의 대표적 유적지 중 하나는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라고 한다. 예수가 안장되었던 묘지에 세워진 것으로 ‘십자가의 길’의 제10지점부터 제14지점까지가 이 교회 안에 위치한다고(1~9지점은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곳). 다시 말해 성묘 교회는 골고다 언덕 위에 있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한 뒤 안장된 묘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너나없이 묘지에 입을 맞추고 언덕에 오른다. 그런데 심지어 이 교회를 여러 종파가 나누어 관리하고 있단다. 옛 골고다 언덕과 중앙 예배당은 로마 가톨릭교에서,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또 다른 기념 묘지는 콥트 교파에서, 또 다른 주요 장소들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교회의 열쇠는 이슬람 측이 가지고 있다. 교회 하나마저도 이렇듯 나뉘어 있으니 솔로몬이라고 어찌 판결을 내릴 것이며 나머지 것들은 어떻게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이 공중으로 붕 떠버린 도시에 닿기 위해 사람들은 이 땅뙈기(라 지칭해 미안하지만)를 서로 제 것이라 하고 있다.




이스라엘인-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무슬림이라는 두 경우 모두 각기 상대의 파멸을 종말의 전제로 삼음으로써, 깊이 가라앉아 있던 묵시종말론적 기류가 표면으로 떠올랐다 (...) 영토 때문에 시작된 전쟁은 우주를 놓고 벌이는,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자기최면적 전쟁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 그러므로 우리의 주제는 종교 이상이기도 하고 이하이기도 하다.


ㅡp.498~499




어디 종교적 상징성의 측면이 이것뿐일까. 이스라엘의 종교에 있어 어머니의 도시이자, 유대교의 ‘통곡의 벽’ 이후 약속의 땅으로, 또 그리스교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땅이다. 고대부터 중세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기를 머금은 자들이 숱하게도 혀를 날름거렸던 바로 그곳이다. 『예루살렘 광기』는 이 ‘종교적 폭력의 본거지’를 철저하게 궤를 같이한 (종교적)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고(이 많은 것들을 어찌 다 말할까) 또 이러한 색채를 띤 이야기를 거치지 않으면 예루살렘에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한다. 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다윗이 정복해 수도로 삼았지만 이후 나라 자체가 두 개로 갈라졌다. 그러나 훗날 그리스인들이 예루살렘 일대를 재정복하고 유대교에 그리스 문화를 접목시켰지만 유대인들에 저항에 의해 재차 그들의 도시가 되었고, 거듭 로마의 헤롯이 왕의 자리에 오른다. 성전에 발을 들인 예수는 예루살렘을 두고 ‘선지자들을 돌로 죽인 도시’라 한탄하고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다. 그리고 예수 사후 반란을 진압한 로마의 성전 파괴, 3세기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세운 교회(여기에 ‘십자가의 길’이 속해 있다)까지― 지상에 존재하는 예루살렘과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천상의 예루살렘 중 어떤 것이 그 실체일까? 저 옛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으로 그려 넣었던 지도는 존중의 의미일까 아니면 정복의 야심일까? 나아가 오늘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는 돌아온 탕아들의 다툼으로만 봐야 할까?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으며 「마이크 타이슨이 아기를 두들겨 팬 뒤 ‘이 아이가 나에게 침을 뱉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일컬어지는 가자지구 폭격은 어떤 종교적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까? 캐럴의 집요한 추적은 『예루살렘 광기』로 만들어져 종교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종교가 아닌, 광기 어린 폭력의 역사를 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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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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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열린 브라질 월드컵을 필두로 각각 2018년과 2022년 월드컵 개최국에 선정된 러시아와 카타르, 또 얼마 전 불거진 가나축구협회의 승부조작 모의까지. 못된 습벽은 끝이 나질 않는다. 월드컵은 가죽 공 하나를 두고 펼쳐지는 지상 최대의 비즈니스임에 틀림없으며 동시에 헤아리기도 힘든 거래와 뒷돈이 오가는 복마전이다. 책에서 키스트너는 국제축구연맹 FIFA의 회장 제프 블라터(Sepp Blatter)를 ‘작은 덩치의 축구 카이사르’로 깎아내리는데, 그에 의하면 FIFA 수뇌부는 늘 개최국이 마지막 4강에 들도록 일을 꾸며왔다. 대회 분위기는 물론이거니와 돈벌이에도 좋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개최국이 조별 예선에서 탈락한 예는 극미하다(수십조 원의 세금으로 지은 경기장들에서 외국 팀들만 경기를 벌인다는 게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FIFA가 이와 같은 일을 꾸미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그러고도 남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에 어떤 나라가 올라갔는지를 보라. 나는 당시 한국 팀이 꽤 잘했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꺾고 준결승에 안착했다는 것에는 다소 수상쩍은 기운을 느끼고 있다. 특히 당시에 한국과 이탈리아가 16강전에서 맞붙었고, 심판은 페널티박스 안에서 넘어진 이탈리아 선수 토티(Francesco Totti)의 할리우드 액션을 문제 삼아 그를 퇴장시켰다. 이 에콰도르 심판 비론 모레노(Byron Moreno)는 뒷돈을 챙기는가하면 조직범죄로부터 매수를 당하고 또 헤로인 밀반입으로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부터다. 당시 한국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정몽준은 블라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대통령 출마까지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블라터는 이후 한국과 독일의 준결승전을 맡기로 했던 심판을 스위스 사람(중립과 공정성을 위해?) 우르스 마이어(Urs Meier)로 교체해버렸다. 자, 그 심판은 스위스 국적이었지만 좀 더 파고 들어가면 독일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블라터의 국적은 스위스다.




월드컵만 열렸다 하면 수십억의 인구가 경기에 넋을 잃는다. 아무리 경영을 엉망으로 해놓고 돈을 빼돌려도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뭐 하러 신경을 쓸까? 새 돈다발이 끊임없이 금고에 착착 쌓이는 마당에. 그리고 거기서 블라터가 얼마를 주물러대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생겨나면 유명한 스타 변호사들이 버팀목 노릇을 해준다. 돈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사회는 축구공이 구르는 한, 이 모든 일에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정계와 재계의 엘리트는 이미 돈 냄새를 맡고 불나방처럼 날아든다.


― p.257




본격적인 이야기는 스포츠 스폰서업계로 시작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아디다스(Adidas)다― 다슬러 가문의 아돌프(Adolf Dassler)와 루돌프(Rudolf) 형제는 서로 아디다스와 푸마(Puma)를 창업해 죽을 때까지 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게임(전설)의 시작은 아돌프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Horst)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 지사를 지어 훗날 그 자신이 진정한 주인이 된 호르스트의 스포츠제국은 세계 최대의 수영용품 제조업체 아레나(Arena)를 세웠고 미국의 포니(Pony), 프랑스의 르꼬끄 스포르티브(Le Coq Sportif) 등의 지분을 사들이며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각종 협회의 입원과 걸출한 선수들의 정보를 모아 ― 체중, 신체 사이즈, 좋아하는 여성 타입 등 시시콜콜한 것 모두 다! ― 관리했는데(키스트너는 이를 두고 ‘운동화 CIA’라 부르기도), 때로는 그의 경쟁사 푸마와도 종종 우스꽝스러운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1966년 월드컵 결승전에 나서게 된 두 명의 잉글랜드 선수는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고 몸을 풀다가 곧 화장실로 가서 푸마 제품으로 갈아 신고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1만 마르크를 챙겼다). 승승장구하던 다슬러는 이제 스포츠 자체를 거래품목으로 만들어버렸고 각종 스포츠연맹은 하나둘씩 면세특권을 누릴 수 있는 스위스로 자리를 옮겼으며 ― 스위스는 스포츠(돈) 천국이며 세금 오아시스이자 에덴동산이다. 또한 언젠가 블라터가 교통사고를 내자 경찰들은 그의 자동차 번호판을 떼어내는 VIP 서비스를 실시하기도 했다 ― 임원들은 방송 중계권과 광고권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앙 아벨란제(João Havelange)와 뒤를 이은 블라터를 비롯한 미래의 FIFA의 회장과 임원들은 각종 비리를 저질러왔고 앞으로도 끊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블라터는 자신들을 패밀리라 부르지만 우리는 그들을 ‘패거리’란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추악한 뒷거래의 신호탄이라 보아도 무방한 일은 1981년에 벌어졌다. 다슬러는 강직한 FIFA 사무총장 헬무트 케저(Helmut Käser) 대신 블라터를 키우고자 했고, 결국 당시 회장이었던 아벨란제는 사무총장을 내치고는 블라터를 앉혔다― ‘지옥의 트리오’ 완성이다. 이것으로 끝난 것인가? 아니다. 블라터는 자신의 재혼 상대로 케저의 딸을 골랐다(훗날 그는 그의 유일한 딸의 친구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가 금세 헤어지기도 했다).




모든 월드컵 개최 후보 국가는 이른바 ‘지원서’라는 두툼한 책자를 제출한다. 여기에는 대회를 개최할 경우 어떤 특정한 법적 권리의 행사를 포기한다는 보증 목록이 들어간다 (...) 예를 들어 보증 목록에 등장하는 다섯 번째 항목은 개최국이 FIFA 패밀리에게 특별한 환율 규정을 보장해주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해 개최국 정부는 <모든 외국 통화를 들여오거나 갖고 나가는 데 그 어떤 제한도 받지 않으며, 이 통화를 달러나 유로 혹은 프랑으로 무한정 교환할 수 있게> 보장해주어야만 한다.


― p.362 (이건 돈세탁이 아닌가!)




①참가국 숫자가 16에서 24로, 다시 32로 늘어나면서 더 많은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다. ②신용카드회사 마스터카드와 비자(물론 둘의 한가운데에는 FIFA가 있다) 사이에서의 이중계약은 FIFA 로고에서 두 개의 축구공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③축구를 둘러싼 여러 사업, 각 위원의 조국에 돈을 제공하는 각종 프로젝트, 마케팅 라이선스, 여행사와의 월드컵 티켓 거래, 그리고 개최국 선정이 FIFA의 든든한 돈줄이다. ④블라터는 2006년 월드컵이 자신이 원했던 남아공이 아닌 독일로 돌아가자 소위 로테이션 시스템이란 것을 만들어 대륙을 돌아가며 개최하자고 했지만 그만큼 경쟁이 떨어지니 수익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2018년과 2022년 월드컵 개최국을 동시에 선정하기로 했다. 열 개가 넘는 나라가 두 번의 월드컵을 놓고 다투는 것은 FIFA의 돈주머니를 채워줄 것이 아닌가(하지만 축구공은 언제나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야 했으므로, 블라터는 곧 불안정한 로테이션 시스템을 폐기해버렸다). ⑤2002 월드컵 개최국 선정 당시 아벨란제는 일본의 단독 개최를 지지했지만 정몽준은 아벨란제의 사위 히카르두 테이셰이라(Ricardo Teixeira)를 공략했다. 브라질축구협회 회장, 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 FIFA위원으로도 활동한 테이셰이라는 결국 자신의 친구와 함께 현대 자동차의 브라질 영업권을 따냈다. ⑥월드컵 개최국 선정 투표가 있기 여드레 전인 2000년 어느 날 독일은 사우디아라비아에 판처파우스트(Panzerfaust,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 공급하기로 결정했고 나중에 사우디 왕족의 일원인 FIFA위원 압둘라 알다발(Abdullah Al-Dabal)은 독일에 표를 던졌다. 또 한국의 정몽준도 독일을 지지했는데, 독일의 자동차 제조업체 다임러 크라이슬러(Daimler Chrysler)는 한국의 현대 자동차에 약 8억 마르크의 자본투자를 약속했다.





……정말 FIFA가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는 돈인 걸까? 『피파 마피아』를 읽어 보면 위에 적힌 것들은 육안으로 식별하기 힘든 아주 미세한 먼지처럼 보일 것이다(앞에서 2018년과 2022년의 개최국 선정에 대해 단순히 로테이션 시스템이라고만 언급했으나 러시아와 카타르 그리고 FIFA의 더러운 뒷거래는 추악하기 그지없다). FIFA는 공익단체로 구성되었지만 그 조직원들의 급여는 일반 기업처럼 지급된다. (키스트너의 표현대로) 그들이 저지르는 비열한 반칙은 거칠기로 유명한 축구선수라 할지라도 새파랗게 질릴 정도이고, 감시와 감독을 해야 할 당국은 외려 그들과 이해관계로 얽혀있다. 이래도 월드컵이 공 하나로 빚어내는 세계인의 축제와 감동인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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