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소시지 - 27일 간의 달콤한 거짓말 풀빛 청소년 문학 6
우베 팀 지음, 김지선 옮김 / 풀빛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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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독일 소설이다. 『다른 남자』 이후로 독일 소설이랑은 뭔가 안 맞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선 이젠 읽지 말아야지 했었던 지가 언제인데, 도로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소설, 『카레소시지』이다. 무미건조하고 앞뒤가 안 맞고(물론 내 생각에만)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지도 않는 등의 특이점을 가진 요즘의 독일 소설이 정말 안 맞았다. 실제로 이 소설도 앞의 3분의 1 정도까지 읽을 때만 하더라도, "나랑 정말 안 맞아~"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가. 버스에서 본 탓인지는 몰라도 속이 울렁거리고, 지지부진한 내용 전개 때문에 표지조차 딱 보기 싫었으니까. 그렇게 한 번 보기 싫다고 생각된 소설에는 손이 안 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래서 이 소설은 대부분의 소설과는 달리 유난스레 몇 번의 찝쩍거림 후에야 겨우 끝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무미건조하고, 이야기하라는 '카레소시지'의 발명 과정은 이야기하지 않고 제 연애담이나 느긋하니 풀어놓는 레나 때문에 속이 터질 지경이 되었어도, 몇 번의 봤다 말았다 하는 과정이 지나니까 이 소설의 진가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닌가. 오호~ 정말 놀라웠다. 처음에는 말해달라는 것은 안하고 있는 뜸 없는 뜸을 들일 대로 들이는 레나 할머니가 뭣하는 사람인가 싶더니만,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숨쉬는 43살이 된 레나의 생각과 설레임과 사랑이 고스란히 내 마음을 적시는 것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삶이,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녀가 품었던 생각이... 흥미진진했다. 그 때부터였다. 내가 뒷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지면서 이 소설을 못 놓은 건. 그러고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여운만 남기면서 끝나버렸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아서, 풍족한 세상에 태어나 아쉬울 것이 없이 살아봐서, 내가 놓친 것이 있었다. 세계2차대전 당시 독일에 패운이 짙게 깔릴 즈음에도 24살과 43살의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레나 할머니가 늑장을 부리며 말하는 이유가 그저 다른 사람들이 안달복달을 하게 할 심산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애가 타는 것을 즐기는 심산이었는지 하고 단순하게만 치부해버렸는데, 실은 자신의 짧고도 강렬했던 사랑을 추억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라는, 그래서 그렇게나 세세하게 기억을 끄집어냈던 것이라는 걸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에 읽었던 3분의 1 까지에서 레나에게 사랑이 찾아왔다고는 정말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겨우 레나의 사랑에 가슴이 찡했다. 그것도 사랑이었는데. 정말 사랑해서 그랬던 것이었는데... 전하지 못한 마음이, 사랑이 얼마나 안타까울지 난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름 뿐, 주소도 연고지도 알지 못하는 그에게 오해는 풀었어야 할 터인데... 사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바로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사랑은 정말 이상야릇하고도 묘한 것이다. 그래서 레나에게 찾아온 사랑을 늦게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27일간의 달콤한 거짓말 속에 피어난 사랑이 막을 내린 것도, 그들이 다시 만난 것도 뜻하지 않은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아마도 그런 만남과 이별이 그들에겐 더 어울렸지 않았을까 싶다. 재회에서 벌어진 일이 그 두 사람의 만남이 절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만 같아서 날 흐뭇하게 했고 말이다. 레나가 생각했듯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일탈이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전쟁이라는 악몽이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니까. 물론 그들의 만남을 근본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 말하자면 불륜이니까 -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서로에게 살아갈 의지를 북돋아준 일은 어찌 선한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독일 내의 상황을 훔쳐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쏠쏠하다. 그 당시에는 게슈타포가 있었고, 밀고자가 있었으며, 고문이 있고, 독일 내에서도 히틀러 총통에 대해 불신하는 사람도 많았고, 따로 격리되는 유대인들을 보고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독일인들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죽음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는 걸 사진으로 알게 되고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사람들이. 독일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학살을 알지 못했다는 것 같던데, 그걸 알고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자신의 민족이 인간으로서 할지 못할 일을 했다는 것을 알면, 자신의 뿌리부터 흔들리지 않을지...

 

어쨌든 그러한 모든 혼돈을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 레나 할머니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상황이니까 - 진행해가는데 그래서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나중엔 재미있었다. 이런 형식을 독일에서는 '노벨레'라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지만 신선하긴 했다. 그래도 처음엔 집중이 안 되었다구~ 이 소설이 독일에선 학생들이 교과과정으로 배우는 책이며, 2008년도에 영화화까지 되었다고 하니까 한 번쯤 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은 나도 이 말에 혹해서 보게 된 건데 참 잘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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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글리 - 못생긴 나에게 안녕을 어글리 시리즈 1
스콧 웨스터펠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문학수첩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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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열여섯만 되면 전신성형이 의무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면...?

열여섯까지는 자신의 못난 별명으로 불리면서 스스로를 못난이로 생각하도록 세뇌되어 있다면...?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예쁜이'를 사랑하도록 프로그램화되거나 진화되고, 전신 성형이 사용되어 왔다면...?

 

도대체 몇 년도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만큼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못난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기숙사에 모여서 살고, 온갖 물건은 벽에다가 말을 하면 무한 공급되고, 못난이일 때는 매일 속임수를 쓰면서 바깥으로 빠져나가 일탈을 꿈꾸는 것만이 최고의 유희로 취급되고, 열여섯 살이 되어 '예쁜이' 수술을 받고 나면 '예쁜이'들만 사는 곳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매일같이 파티만 벌이면서 살아가는 세상... 어찌보면 놀기만 좋아하는 청소년들이 꿈꾸는 세상이 이런 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통제되고 관리되어 행복만을 남겨놓은 세상이 소설의 배경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녹슬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데, 그 종족은 석유에 풀어놓은 바이러스가 불에 타버려서 멸종했고 현 인류는 그 이후에 완벽히 진화된 종족이다. 아니, 진화되었다고 믿는 종족이랄까? 신체적으로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이지만, 생각하는 방식은 너무 단순하고, 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한 발전된 우리랑은 또 다른 인류의 모습이다.

 

며칠 사이에 피부는 박박 밀고, 홍채에는 반찍이를 넣기 위해 반으로 가르고, 골격이 아름답게 되도록 플라스틱 뼈를 집어넣고, 턱은 깍고, 머리카락도 다시 심고, 눈도 키우고, 코도 높이고, 치아는 썩지 않고 강철 같이 강한 세라믹으로 대체되고, 근육량도 알아서 적당히 넣어주는데도 절대 아프지 않는다면 사실 누구나 혹할 만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을 읽은 지 며칠이 지난 지금에도 전신 성형하는 모습이 눈 앞에 맴돌고 있으니 말이다. 전혀 아프지 않다면, 또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 나쁠까 싶기도 한데,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나 뿐인가. 요즘에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연예인들을 보면 몰개성적이란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너무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식상한데, 전체 인구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모조리 성형을 한다면 아마도 그렇게 단조롭고 식상해질까 우려가 되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는 각자의 열등함을 인식시켜주는 방법으로 '예쁜이'가 되기 전까지는 이름 대신 서로 상처가 될 만한 별명을 아주 자연스럽게 부른다. 예뻐지는 것은 좋은데 그렇게 못생겼을 때의 존엄성은 인정하지 않고 예뻐져야지만 그 존엄성이 인정되는 사회란 정말 끔찍하다. 그런데 더 문제인 것은 그것이 끔찍하다는 것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관습으로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뭔가 냄새가 난다. 이런 전신성형을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전신성형을 해주는 대가로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리게 한다면, 친구를 밀고하게 만든다면... 사회는 모르더라도 충분히 사람은 통제하는 것이 아닐까. 요즘에야말로 아름다움을 위해 친구와의 의리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소설 속 가상의 세계가 도래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테지. 아름다움을 맹목적으로 쫓아가다보면 결국 그곳에 도착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총 3부작이다. 아직 1부작밖에 보지 못했지만, 꽤 재미있다. 내용을 주저리 주저리 다 이야기할 순 없겠고, 마치 기계와 인간의 대결을 그린 영화 「매트릭스」의 냄새가 짙게 난다고 힌트를 줄 수 있겠다. 영화에서의 시온이 여기는 연기가 가득한 스모크라는 점만 다르다. 아름다움을 마냥 찬양하던 과거에서 의식이 바뀐 - 그러니까 영화에서의 '레오'의 역할을 하는, 여기서는 열여섯의 여자아이 - 주인공 탤리의 활약이 기다려지는 2부가 궁금해질 따름이다. 어찌됐건 여자라면 아름다워지는 것은 꿈에서도 그리는 일일 테니까~ 그것은 텔리도 아름다워진다는 이야기?! 힌트는 어끼까지만.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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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인권운동 이야기 2
매리 C.터크 지음, 김태항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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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라는 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가 되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인종 차별은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고, 나와 다른 모습을 지닌 사람들에게 약간의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일 게다. 특히 한민족이란 착각을 안고 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시선이 상당히 싸늘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겉모습이 다르다고 무시하고 대놓고 불이익을 준다. 단지 불법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인간으로서 하면 안되는 짓, 같은 인간인 것이 부끄러울 정도의 짓을 저지른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 중국인들이 많이 모이는데, 진짜 먼 곳에 사는 사람들도 아침 일찍 준비해서 우리 교회에 온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사람들은 미워죽겠는데, 이 교회에서는 많은 동포들도 만날 수도 있고,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아직 중국인들이 소규모로 모였을 때, 같이 놀고 그랬는데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다른 나라에 살면서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면 얼마나 든든하고 안심이 될까. 잠깐이라도 외국에서 살다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드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은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이다. 인간이 인간을 돕지 않는다면 누가 도울 수 있단 말인가.

 

평소 그렇게 피해를 당하는 불법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 터에 미국의 인권 운동이 걸어온 길을 알려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추천해 주면서 알게 된 책인데, 이 책에는 내가 평소 존경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도 실려있어서 정말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인종 차별을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 아이들에겐 먼 나라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이렇게 세계화의 시대에 외국에 안 나가고는 살아가지 못할 때에 불시에 유색인에 대한 미묘한 차별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안 그러는 세계인들도 많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세계인으로서 인권 운동의 역사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이렇게 다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보다보니 미국에서 벌어진 조용하고도 강한 비폭력 저항운동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이 떼지지 않았다.

 

미국에서 대표적인 인권 운동은 바로 흑인 인권 운동일 것이다. 위대한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외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남부에서는 인종 분리법이 있었고 북부에서는 성문화된 법은 없었지만 관습적으로 분리 정책이 유지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것이 1950년대까지의 일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도 없어 좋은 전문직의 직업을 얻기가 힘들었다. 그랬기에 흑인들에게는 가난이 대물림 될 수밖에 없었고, 백인들에겐 인종 간의 지능차이가 난다는 - 즉, 흑인이 백인보다 아이큐가 15~20정도 낮다는 - 어이없는 연구 결과까지 안겨주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흑인 인권 운동이었다. 처음에는 백인들이 배우는 학교에 매일같이 출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학생들이 시작했다. 학교 내에서 아이들을 모아서 백인 학교와 다르게 학교 비품이나 교재를 제대로 구비해주지 않는 것을 두고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NAACP(전미 유색인종 지위 향상 협회) 소속의 변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른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이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한 버스에서 흑백 분리 버스 정책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체포되는 사건을 계기로 소송으로 그 법의 합법성을 묻고, 더 나아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도로 이루어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실시하게 되었다. 버스를 타는 손님들의 대다수가 흑인인데도 흑인 지정석에만 앉아야 하고 중립석에서도 백인이 타면 비켜줘야 하는 굴욕적인 사태를 버스 운전사는 보고만 있다거나 오히려 일어나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폭력 정신으로 381일 동안 걸어다닌다거나 차가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타는 등으로 버스를 타지 않는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했고, 결국 버스 분리 정책이 폐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흑인을 증오하는 백인들이 임산부나 소녀들에게 구타하는 등의 보복이 뒤따랐다. 이런 끔찍한 경험을 극복하고서 인권을 획득한 흑인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가장 뜨거웠던 인권 운동은 1960년대에 일어났다. 분리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식당에서 연좌농성을 한다든지, 어디든지 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자유 여행단을 조직한다든지, 시청까지 거리 행진을 한다든지 여러 방식대로 흑인들이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저항 운동이 비폭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식당 연좌농성을 할 때 침을 뱉거나 케첩을 머리에 뿌리거나 하는 상황에서도 가만히 앉아있기란 어렵지 않았을까. 시가 행진을 했을 때 소방호스를 가지고 와서 물을 뿌리고, 잡히면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의연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자유 여행을 했을 때는 버스에 불을 지르고 구타하는 등의 생명 위협이 진행되고, 그런 가해자들이 전혀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내겐 그 모든 일이 인간으로서 하기 어려운 위대한 일들이라고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라는 끔찍한 시련을 겪었지만 그것은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린 상태였는데, 흑인들은 평생을 갈취만 당하고 살아왔던 시기였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흑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14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들이 흑인 교회 테러로 희생당할지라도 그들이 가진 꿈은 너무 위대했기에 절대 멈출 수가 없었다. 많은 지도자가 죽었고, 많은 목사가 순교당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과 기독교인과 이슬람인들은 선을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었고, 드디어 흑인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인권 운동을 하는 중에도 여성 지도자들은 상대적으로 남성 지도자들에 비해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등의 차별을 받았기도 하지만 흑인 인권 운동은 인간이 한 일 중에서 가장 숭고한 행위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어린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위대한 행동이다. 하지만 21세기인 아직까지도 가야할 길이 멀다. 아직도 흑인들은 백인에 비해 소득이 낮고, 여성은 남성에 비해 소득이 낮으니까. 아직까지도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에 비해 불리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앞서 지나가신 순교자들의 성공을 발판삼아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배려와 관용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크고 작은 분쟁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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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서거 60주년 기념, 새롭게 탄생한 문화인류학의 고전
루스 베네딕트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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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문화의 패턴』을 읽게 된 것은 일본 문화를 설명한 『국화와 칼』 때문이었다. 내게 그녀가 대단해 보인 것은 옆 동네에 있으면서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던 일본인들의 민족성이 그녀의 책으로 아주 쉽게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일본에 가보지도 않고서도 그렇게 일본 문화를 아주 훌륭하게 집대성해 놓은 것을 보면 그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사실은 그 책이 무척이나 어려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는데도 어떤 부분은, 무사들의 정신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 내용만 봐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개념들이 확실한 제 모습을 드러내주는 같은 환상을 느꼈다. 같은 동양문화권이라서 그래도 서구인들보다는 일본에 대해 꽤 아는 게 많다고 자부하면서 읽었었는데 완전히 그녀에게 KO패 당해버렸다. 물론 학자인 그녀에게 내가 댈 바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렇게 소유욕이 드니, 원~

 

이전까지는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은 부정확한 방법 때문에 과학적인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환상까지 끼어든 학문이었다는데 그녀의 스승인 프란츠 보아스가 현지탐사를 강조했고 그렇게 얻어진 자료들을 철저히 비판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과학적인 학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때는 모든 인류학자들이 모든 인종 집단이 독자적으로 문화적 형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때였는데 보아스의 객관적 자료와 연구 때문에 그것이 사실은 인종 차별주의였음도 밝혀지게 되었다. 오만한 서양인들 같으니라구~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루스 베네딕트도 여러 해에 걸쳐 주니 족의 현지 답사를 나가 얻은 자료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목적은 다수의 부족을 서로 비교 연구하여 모든 문화는 상대적이고 그 문화 안에서 개인의 선택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연구하고 또 책으로도 낸 주니 족의 자료와, 자신의 스승인 보아스의 북서 해안의 자료와, 레오 포춘 박사가 연구한 도부 족의 자료를 가지고 비교 연구했단다. 그 당시만 해도 인류학자들이 직접 답사를 통해 얻은 자료가 아니라 선교사들의 노트나 여러 민족지학자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연관성 없는 세 부족의 문화를 비교하려는 것만 봐도 베네딕트가 얼마나 객관적인 과학자인지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살펴본 주니 족과 도부 족, 그리고 아메리카의 북서 해안의 문화는 한 올만큼의 공통점이 없이 전혀 상반된 모습을 띤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에서 절제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주니 족과 모든 사람, 심지어 부부 간에서도 시기와 배신을 해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도부 족과,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붓더라도 상대편에게 열등감을 주어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려는 아메리카의 북서 해안의 문화까지 어느 것 하나라도 비슷한 구석이 없다. 모든 문화는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발전된다는 논리 하에서 본다면 전혀 맞지 않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장례식이란 죽은 사람에 대해 슬퍼하는 행위이고 그것을 의식으로 만든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개인의 감정을 극도로 절제하는 주니 족에서 이루어지는 장례식처럼 극도로 간소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혹은 배우자가 죽었을 경우, 망자의 배우자가 죽은 원인을 제공했다고 치부하고 망자의 배우자에게 해꼬지를 하는 도부 족과 친족의 죽음이 그 가문에게 치욕을 가져다준다며 다른 가문의 동일한 계급을 가진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말이다. 이렇게 되면 여러 부족의 장례식 모습으로는 모든 문화에서 장례식이란 의식이 죽은 자를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가진다. 여기서 문화의 상대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문화에서 어울리지 않는 성향을 가진 개인들이 비정상인의 취급을 받는 것도 다른 설명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문화에서 황홀경을 경험하는 것은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규정되지만 사막지대의 인디언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아주 바람직한 행동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문화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그 개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 문화의 폐쇄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취적이고 자신의 성질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주니 족 사회에서는 살아가기가 어렵다. 그 문화권에서는 반사회인으로서 엄지손가락만으로 매달리는 형벌을 받아야 하지만, 아파치 족에서는 환영할 만한 행동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반사회적인 사람들 중에서는 다른 문화에서는 환영받을 수도 있는 것이니, 아량과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까지는 다 동의할만한데 이 주장이 왠지 석연치 않은 것은 그녀가 동성애자인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말했듯이 한 개인이 속해있는 문화의 패턴을 거슬리기란 정말 어렵기 때문에 나도 동성연애를 그다지 좋게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명백히 인간의 종족 보전의 관점에서 봐도 인륜을 거스르는 습성이 아닌가. 하지만 그녀가 세 부족들의 경우를 들어 문화의 상대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만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종 우월론자들이 쉽게 내뱉는 말들이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점에서는 그녀의 업적은 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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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바보생각 - 우리가 잃어버린 따뜻함과 지혜에 대하여
유승달 지음 / 문예춘추(네모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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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말하는 스승들이 한데 모여 제 깨달음을 한가득 풀어낸 책이 바로 요 책이다. 아담한 사이즈에 예쁜 표지 한가득 묶어놓은 책이라 어디 멀리 갈 필요없이 잔잔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이 책 한 권만 가지면 오케이다. 다만 머리가 지끈거리고 복잡다단했을 때, 혹은 뭔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혹해서 책을 연다면 실망할 것을 각오하시라~ 바로 내가 그런 마음으로 책을 열어서 실망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래 배우려는 욕심만 한가득인 사람이라서 그다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버스 안에서 책을 봤어도 머리 한번 아프지 않았던 내가 이 책으로는 두통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이 책을 펼치지 못했다. 내가 책을 이책 저책 집적거리는 형식으로 읽기 때문에 솔직히 한번 놓으면 다시 읽기가 쉽진 않다.

 

그러다가 이 책을 잊을만했을 때, 마음 속의 근심이 다 씻겨져 내려갔을 때 즈음에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우연히 집어든 책에 그저 디자인이나 보려고 했던 아무런 기대 없이 책을 보게 되었다. 자고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 기대 없이 본다면 실망도 그리 크지 않다. 실망할 필요 없이 그저 그 책 본연의 모습을 인지하면 될 것이니까. 그래서 길면 두 페이지, 짧으면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하나의 일화 형식의 이 이야기가 그리 두통을 유발하지 않았다. 내용은 꼭 초등학생이 볼만한 수준이지만, 원래 진리는 단순한 거 아니겠는가. 난 수학적 증명 공식도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 이런 간단한 이야기 속에도 진리가 숨어있지 않을까.

 

이 이야기에는 「바보생각 하나」, 「바보생각 둘」, 「바보생각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에서도 말했듯이, 힌두교의 구루, 선의 노사, 도교의 현자, 유대교의 랍비, 기독교의 수도자, 수피교 신비가, 노자, 소크라테스, 부처, 짜라투스트라 등의 여러 스승들이 한 말들이 등장한다. 이 정도면 우리가 흔히 들어봤던 이야기도 있을 것이고, 아예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도 들어있다. 어차피 많은 분량도 아닌데다가 이야기가 아주 짧기 때문에 한번에 모조리 다 읽기 보다는 매일 조금씩 읽어나가는 것이 휠씬 감명을 깊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난 성질이 급해서 그렇게 못했지만 말이다. 다만 내가 아쉬웠던 것은 어떤 이야기가 어떤 스승의 이야기인지 나와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엮은 사람이 심오한 뜻을 가지고 그렇게 편집했을 거란 추측은 가능하지만, 나같이 그럴듯한 것을 좋아하는 허영덩어리는 조금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이 더 쏙쏙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나처럼 누구의 말인지 알고 싶어했던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에잉~ 난 그것 때문에 이 책을 골랐는데 아쉬운 일이다. 어쨌든 이야기만큼은 잔잔하니 동화적인 느낌을 물씬 풍겨온다. 엮은이의 의도처럼 누구의 말인지 모른 채로 그렇게 깨달음 자체에 대한 감동을 받기에는 이 편이 더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게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겨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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