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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소시지 - 27일 간의 달콤한 거짓말 ㅣ 풀빛 청소년 문학 6
우베 팀 지음, 김지선 옮김 / 풀빛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또 독일 소설이다. 『다른 남자』 이후로 독일 소설이랑은 뭔가 안 맞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선 이젠 읽지 말아야지 했었던 지가 언제인데, 도로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소설, 『카레소시지』이다. 무미건조하고 앞뒤가 안 맞고(물론 내 생각에만)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지도 않는 등의 특이점을 가진 요즘의 독일 소설이 정말 안 맞았다. 실제로 이 소설도 앞의 3분의 1 정도까지 읽을 때만 하더라도, "나랑 정말 안 맞아~"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가. 버스에서 본 탓인지는 몰라도 속이 울렁거리고, 지지부진한 내용 전개 때문에 표지조차 딱 보기 싫었으니까. 그렇게 한 번 보기 싫다고 생각된 소설에는 손이 안 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래서 이 소설은 대부분의 소설과는 달리 유난스레 몇 번의 찝쩍거림 후에야 겨우 끝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무미건조하고, 이야기하라는 '카레소시지'의 발명 과정은 이야기하지 않고 제 연애담이나 느긋하니 풀어놓는 레나 때문에 속이 터질 지경이 되었어도, 몇 번의 봤다 말았다 하는 과정이 지나니까 이 소설의 진가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닌가. 오호~ 정말 놀라웠다. 처음에는 말해달라는 것은 안하고 있는 뜸 없는 뜸을 들일 대로 들이는 레나 할머니가 뭣하는 사람인가 싶더니만,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숨쉬는 43살이 된 레나의 생각과 설레임과 사랑이 고스란히 내 마음을 적시는 것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삶이,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녀가 품었던 생각이... 흥미진진했다. 그 때부터였다. 내가 뒷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지면서 이 소설을 못 놓은 건. 그러고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여운만 남기면서 끝나버렸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아서, 풍족한 세상에 태어나 아쉬울 것이 없이 살아봐서, 내가 놓친 것이 있었다. 세계2차대전 당시 독일에 패운이 짙게 깔릴 즈음에도 24살과 43살의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레나 할머니가 늑장을 부리며 말하는 이유가 그저 다른 사람들이 안달복달을 하게 할 심산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애가 타는 것을 즐기는 심산이었는지 하고 단순하게만 치부해버렸는데, 실은 자신의 짧고도 강렬했던 사랑을 추억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라는, 그래서 그렇게나 세세하게 기억을 끄집어냈던 것이라는 걸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에 읽었던 3분의 1 까지에서 레나에게 사랑이 찾아왔다고는 정말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겨우 레나의 사랑에 가슴이 찡했다. 그것도 사랑이었는데. 정말 사랑해서 그랬던 것이었는데... 전하지 못한 마음이, 사랑이 얼마나 안타까울지 난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름 뿐, 주소도 연고지도 알지 못하는 그에게 오해는 풀었어야 할 터인데... 사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바로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사랑은 정말 이상야릇하고도 묘한 것이다. 그래서 레나에게 찾아온 사랑을 늦게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27일간의 달콤한 거짓말 속에 피어난 사랑이 막을 내린 것도, 그들이 다시 만난 것도 뜻하지 않은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아마도 그런 만남과 이별이 그들에겐 더 어울렸지 않았을까 싶다. 재회에서 벌어진 일이 그 두 사람의 만남이 절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만 같아서 날 흐뭇하게 했고 말이다. 레나가 생각했듯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일탈이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전쟁이라는 악몽이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니까. 물론 그들의 만남을 근본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 말하자면 불륜이니까 -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서로에게 살아갈 의지를 북돋아준 일은 어찌 선한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독일 내의 상황을 훔쳐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쏠쏠하다. 그 당시에는 게슈타포가 있었고, 밀고자가 있었으며, 고문이 있고, 독일 내에서도 히틀러 총통에 대해 불신하는 사람도 많았고, 따로 격리되는 유대인들을 보고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독일인들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죽음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는 걸 사진으로 알게 되고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사람들이. 독일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학살을 알지 못했다는 것 같던데, 그걸 알고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자신의 민족이 인간으로서 할지 못할 일을 했다는 것을 알면, 자신의 뿌리부터 흔들리지 않을지...
어쨌든 그러한 모든 혼돈을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 레나 할머니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상황이니까 - 진행해가는데 그래서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나중엔 재미있었다. 이런 형식을 독일에서는 '노벨레'라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지만 신선하긴 했다. 그래도 처음엔 집중이 안 되었다구~ 이 소설이 독일에선 학생들이 교과과정으로 배우는 책이며, 2008년도에 영화화까지 되었다고 하니까 한 번쯤 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은 나도 이 말에 혹해서 보게 된 건데 참 잘했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