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인공존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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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배명훈 씨의 글은 어딘가 모르게 웃음을 짓게 한다. 단순히 시니컬한 웃음이라고 말하기엔 뭔지 모르게 따스하고, 완전히 다정다감이라고 말하기엔 어쩐지 현실적인 그런 웃음을 말이다. 그래서 난 내 상황이 복잡하고 정신없을 때 그의 글을 보면 행복해진다. 처음 그의 소설 『타워』를 봤을 땐, 뭔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뚜렷했고 그것을 은유적인 혹은 풍자적인 방식으로 잘 전달해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권력의 이동 같은 내용은 우리가 뻔히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하는 것들을 까발려주기에 너무 속 시원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안녕, 인공존재!』는 ‘타워’ 와 같은 어떤 공간에서 일어나는 연작소설은 아니여서 그런지 어떤 주제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물론 각각의 단편이 실린 시기도 달랐을 테고, 실린 곳도 다르고, 가장 결정적으로 집필한 시기가 다르니 일관된 주제를 기대하는 것이 더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처음에 내가 받은 점은 그랬다.

 

하지만 각각의 단편들이 나름대로의 의미와 상징을 함의하는 것 같아 곰곰히 읽어보게 한다. 인간이든 무엇이든 존재의 의미를 깊게 사유하기도 하고, 아니면 우리의 바쁜 상황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기도 하고, 얼핏 딱딱해보이는 외양 속에 따스한 내면을 담고 사물을 바라보기도 하는 게 꽤 읽을만 하다. 어쨌든 그의 책이라면 나는 이미 중독이 되어버려서 계속 찾아 읽어볼 작정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각 단편이 어떤 책에 발표되었는지 소개도 되어 있는데 과거에 내가 그의 단편을 봤던 적이 있었는지 다시금 확인해보게 된다. 단편집을 읽을 때는 재미있어도 “와~ 재미있다.”하고 말지, 작가 이름까지 기억하진 않았기에 아마 그의 이름을 놓친 적이 몇 번 될 듯도 싶다. 너무 심각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주책맞지도 않게 사소한 내용을 아주 진지하게 비틀어버리는 그의 능력이 있기에 아마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지 않을까 싶다.

 

다른 것은 몰라도 소설 뒷면에 있는 그의 「출간사유서」만 봐도 그가 여느 작가들과는 다른 종족임이 드러난다. 그가 책을 내고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을 만행이라 부르면서 다른 사람들의 탓을 하며 그 공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만 봐도 너무 유쾌한 것이 마음에 든다. 이 세상은 심각해야 할 것에 심각하지 않고, 심각하지 말아야 할 것에 열을 올리며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그럴 때 그의 소설을 읽으면 그 막힌 마음을 다소나마 뚫어준다고나 할까. 혹 이렇게 말하면 팬들의 원성을 살지도 모르겠지만, 생활에 유머와 위트를 간직한 것이 마치 『면장선거』를 쓴 오쿠다 히데오 같았다.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은 딱 그것 하나 『면장선거』만 봤는데 그의 작품이 너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러 권을 사긴 했지만 아직까진 더 읽은 것이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딱 『면장선거』만 생각한다면 깔깔깔 거리면서 웃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오쿠다 만큼이나 시원하게 해준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의 평론이 뒷부분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의 설명서를 보면 배명훈 작가를 좀 더 잘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공감되었던 것이 사건의 나열은 유쾌하지만 인물의 표현은 겸손해진다는 그의 말이었는데, 역시 인물의 심리 표현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것 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뭔지 모르게 깔끔하고 명쾌하단 느낌이 들었던 것이 바로 그 이유였던 것이다. 인물들의 생김생김이 질질 끌지 않는다는 것. 솔직히 그런 경향을 여성작가들에게 많이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역시 내겐 질질 끄는 것보단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 더 끌린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에 시원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소설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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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믿는다 - 전직 대기업 CFO가 들려주는 이 시대의 진정한 제자도
이민우 지음 / 가이드포스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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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다른 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믿어주는 사람만 하나 있다면 말이다.

 

그의 신앙보다도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장애인을 위한 일을 섬기는 것으로 이목을 끌었던 이민우 목사님의 간증문이 책으로 나왔다. 우리 교회에도 밀알부가 있어서 이런 단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새롭지는 않았는데, 장애인들과 고동고락을 함께 하며 마음 깊이 소통했던 목사님의 반성문을 읽고 나니 나는 한 번도 장애인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해본 적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대학생 때만 해도 매주 목요일마다 있는 밀알부 여름 캠프 봉사를 많이 했는데 내가 밀알부란 곳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던 때라서 목요일 같은 평일의 봉사는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장애인들을 가까이에서 만나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 내가 생각하는 나는 소외받는 사람들을 꽤나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실은 그저 안 보이면 관심도 안 가지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요즘은 초등학교에서도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각 반에 한, 두 명씩 넣어 비장애아동들에게 교육적인 효과를 주고 장애아동에게도 다른 환경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던데 내가 학교 나왔을 때는 그런 파격적인 생각은 전혀 없던 때니까 장애인들이 익숙지 않는 것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장애아동을 비장애아동과 함께 둔다고 해서 그것이 고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효과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 둘이 진정한 공감을 이룰 수나 있을까 싶어서.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장애인들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때 그들을 생각하면 내가 그렇게 태어나지 않은 것에만 감사하는 마음이 들 뿐. 그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장애인들 중 평생 한 번도 밖을 나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아주 최근에서야 알았다. 우리나라는 장애인들이 자유로이 외출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으니까 못 다니게 되고, 그러니 우리나랑엔 장애인이 많이 없다는 착각까지 비장애인들은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진짜 까놓고 말하면 우리들도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지금 내가 받은 것에 대해 어떤 것도 권리를 주장해선 안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따진다면 장애인들은 우리의 선배로서 우리가 많이 섬기고 배워야 할 존재들인데, 겉보기에 바르지 않다는 것 때문에 경계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이민우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멸시와 천대 받은 적이 무척 많은 장애인들은 겉모습만 경건한 체 하면서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의 감정을 정말 예리하게 느낀다고 한다. 그 부분을 읽는데 어찌나 뜨금한지... 내가 뭐 대단한 성자라고 매일 봉사나 하고 많은 기부금을 내는 사람은 ㅇ니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의 수치심과 보통 사람의 미안함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혹여라도 장애들을 만났을 때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다시금 경계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이민우 목사님께서 목사님이 되시기까지의 외로운 투쟁과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뛰어넘는 어떤 일에도 불안함 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항상 준비해주시는 하나님을 그저 믿고 따라갔기에 그가 그렇게 주의 종으로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을 보면서 도대체 나는 얼마만큼이나 하나님의 개입을 허용하고 있었을까라고 자문해봤다. 두렵고 자신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못 믿었던 경우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하나님 외에는 모조리 던져놓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한 발자국씩 내딛는 그런 순종의 길을 나는 갈 수 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도 생각해보지만 그렇게 결단하며 하나님을 따라갔던 이민우 목사님의 인생과 발자취가 너무나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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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그 원색의 땅에 입맞추다
임명자 지음 / 다밋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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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정열의 나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이 원래는 없었다. 평소에도 여행에 대한 로망이 없던 인간인지라 그런 책을 가까이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가 생각하는 라틴 아메리카는 그저 덥고 비가 많이 오는 열대우림의 나라일 뿐이었다. 아, 올해 남아공월드컵을 개최했으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있어 축구 열강의 나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외에는 내게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었으니, 지금 와 생각해봐도 너무 무심했다. 그런데 연결시켜보자면 정말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가득한 나라들이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먼저 대학교 때 유물 전시회도 가서 레포트를 쓴 그 경험이 잊혀지지 않는 잉카 유적이 거기에 있고, 2012년에 행성들이 일렬로 나열되면서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예언한 마야 문명의 자생지도 그곳이었고, 월트 디즈니의 영화 「쿠스코? 쿠스코!」도, 신비의 제단 마추피추도 라틴 아메리카이니 솔직히 내 관심을 끌 만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저 귀찮아서 안 보려 했을 뿐. 더구나 외계인 설을 더욱 부채질했던 나스카 라인도 이곳이니 정말 흥미로운 요소가 가득 들어차있는 곳이었다. 그 귀중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숨쉬는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것을 이 책으로 시작하려 한다.

 

이제껏 본 여행에세이는 별로 없긴 하지만, 이 책만큼 저자가 독특한 책은 없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쓴 책이나 몇 권 읽고 말았는데, 이 책은 손녀딸까지 둔 할머님께서 동료 다섯 분이랑 같이 세기의 여행을 계획하셨단다. 여행 당시에 틈틈히 경로나 생각을 써두었던 것을 정리하고 보니 사장시키기가 아까워서 출판하게 되었다는데, 워낙에 시를 쓰시던 양반이라 그저 끄적인 정도의 일기는 아니다. 맛깔스런 어휘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사색의 세계를 덩달아 구경할 수 있을게다. 모든 종교에 대해 개방적이어서 佛家의 수행을 하시면서도 가톨릭 일색이고 화려하고 멋진 성당이 유명한 지역에 와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감상하시는 것도 꽤나 신기했다. 타종교에 대한 편협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불가의 가르침을 받으시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도 아시는 것이 조금 신기했달까. 처음엔 인연이니, 전생이니, 온갖 법어가 등장해서 비불교도인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곤란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싫어하기보다 존중하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솔직히 신을 믿지 않는 ‘불교’를 종교라곤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는가. 그래서 저자도 ‘불교도’라고 하지 않고 ‘불가의 수행’이라고 하셨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불가의 용어가 종종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두시길.

 

한국에서 미처 내려놓지 못했던 욕심과 집착을 이 머나먼 땅, 라틴에 와서 그런 집착을 내려놓게 되었다고 다시금 자신을 반성하는 저자의 모습은 마치 구도자, 그것과도 같았다. 멀리 있어야 가까운 것이 잘 보이는 것인지.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정리해내셨다. 여행은 이래서 좋다고..... 그런데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낯선 곳의 달빛 아래서 내 안의 허상인 그림자를 바라보는 허허로움,

낯선 사람들이 걷는 길가에 낮게 핀 이름 모를 들꽃을 눈여겨보는 경이로움,

낯선 사람들의 일상에 섞여 미소로 주고받는 따듯한 눈인사. 낯선 사람과 악수를 건넬 때 전해 오는 온기,

낯선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그 맑은 눈동자.

어느 곳에서든지 이 모든 것이 하나씩 내게 와 그림자 없는 그림이 되었다가 다시 여백을 만들곤 한다.

- p. 181


 

여행을 조금 귀찮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나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굳이 여행이 아니라도 허허로움과 경이로움과 따듯한 눈인사, 온기, 순진한 재잘거림과 맑은 눈동자를 만나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얼굴색도 같고, 머리칼 색도 같고,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것을 먹지만 나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낯설다. 지나가면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 이기에 나는 여행을 안 가도 이름 모를 풀꽃에 감동을 느낄 수 있고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고 감사한 눈인사를 받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여행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경이를 만나고 싶어서 낯설음 속에 나를 던져두고 싶은 것이라면 충분히 생각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일상이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물론 여행은 단지 그것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다니긴 다녀야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녀의 저 글귀를 보고 나니까 일상을 내가 얼마나 무심하게 지나치곤 했는지가 떠올랐다. 괜히 기분 나쁜 것도 없는데 누군가 말을 걸거나 물으면 퉁명스러운 말로 대답해주었던 그 옛날, 나는 너무 방어적이었다. 위험으로부터 경계해서 방어하는 것도 좋지만 좀더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와 소통한다면 충분히 일상의 경이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소득은 많다. 마야와 아즈텍의 나라 멕시코에서 시가 무는 모습이 멋진 그의 나라 쿠바,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있는 아르헨티나, 이과수폭포가 유명하고 3대 미항 중 하나인 리오 데 자네이루가 있는 브라질, 세계 최대의 수력발전소 이따이쁘가 있는 파라과이, 세계적인 시인 네루다가  있는 칠레, 나스카 라인과 마추피추의 나라 페루까지 한 번에 볼 수 있어 유익했다. 그 멋진 여행을 시간과 돈과 노력을 그리 많이 들이지 않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다. 아직은 직접 가기엔 너무 먼 당신이지만 후에, 할머니가 되어서라도 가보면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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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코드 - 너와 나를 우리로 만나게 하는 소통의 공간
신화연 지음 / 좋은책만들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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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은 상당히 개인적인 감정이면서도 사회적인 성격을 가졌기에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에 유일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감정이 바로 부끄러움이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는 사회적인 ‘나’와 나다운 ‘나’가 일치되지 못해 깊은 소외감을 낳게 한다. 이런 감정의 소외를 제대로 극복했다면 충분히 사회란 곳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런 감정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것이 소멸되지 않고 켜켜히 쌓아두었다가 어느 순간엔 세상에 분노를 터트리거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을 정도로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감정이다. 그런데 이런 부끄러움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개개인의 성격이나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 학력이나 경력 등에도 연관있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의 분위기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부끄러움을 징벌로 대하는 사회에서는 건강하게 해결하지 못해 그것이 재앙의 불씨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큰 예가 아돌로 히틀러의 경우이다. 어릴 적부터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이유 없는 학대와 언어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그는 항상 분노에 차 있었다고 한다. 깊은 부끄러움이 해결되지 않아 분노로 전이된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은 한낱 개인적인 감정으로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할 감정이라는 것이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나는 내 무의식에서 만들어낸 책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마음이 끌렸다. 어릴 적부터 부끄러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해 항상 도망치기에만 바빴던 나로선 어른이 된 이후에도 부끄러움에 대해 때마다 숙고해보곤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서히 내성적인 표현력을 개선해나가고 내성적인 표현력과 부끄러움이 충분히 극복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그 어릴 적에 왜 그리 부끄러움에 얽매어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번도 속시원할 만한 해답을 얻지 못했었기에 그저 공상으로만 치부하고 말았었는데, 이 책을 만나고선 부끄러움이 충분히 숙고해보고 논의해볼 만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이후에도 부끄러움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덮치고 그것으로 인해 좌절감을 느낄 때도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이 책에서 배울 수 있었다. 딱히 무언가 해결책이 제시된 것은 아닌데, 부끄러움을 느꼈을 때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자 내게 문제가 되는 행동 양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은 일반적으로 은둔형이나 위축형, 자아공격형, 회피형, 타인공격형의 반응을 보이게 하는데, 은둔형은 소외감이나 외로움이라는 부작용을 가지게 되는 단점이 있고, 소외감을 느끼기 힘들어 자아공격형으로 빠지게 되면 극단적으로 자살에 이르게 되기도 한단다. 또 명품 같은 다른 것으로 자신을 감추려는 것이 회피형이고, 부끄러움의 원인을 모조리 다른 사람 탓을 하게 되는 타인공격형의 예가 ‘묻지마 살인’이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란다.
 
그러니 범죄자들을 단지 후안무치의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공격적인 성향과 분노를 뿜어내는 것이란 이해와 포용이 필요하다. 대부분 범죄자들의 가정 환경이 썩 좋지 못하다. 아버지나 어머니 한 쪽이 안 계시거나 두 분 다 안계셔서 외부에서 받아오는 상처나 부끄러움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학대나 언어폭력으로 받은 상처와 수치심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기에 밖으로 분노를 표출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부끄러움은 바로 사회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가장 큰 예로, 10여 년 전 스코틀랜드의 작은 도시에서 토마스 해밀턴이 일으킨 초등학교 어린이 총기난사 사건을 들 수 있겠다.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안전하게 해소될 수 있는 가정이 존재했더라면, 그를 다독여주는 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가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젊은 엄마에게서 외조부모에게 입양된 해밀턴은 괴팍하면서도 지배적인 식구들 밑에서 친구 없이 자랐다. 후에 보이스카웃 관련 일을 했는데 외톨이인 그에 대해서 소아성애병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 억울하게 직업을 잃었다. 무죄임이 밝혀졌어도 그는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던 데다가 이웃사람들에게까지 내침을 당했던 것이다. 만약 사회가, 주위의 이웃이, 할머니가, 엄마가 그를 이해하고 공감해주었더라면 그는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열여섯 명의 어린이와 교사 한 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부끄러움이란 하등 쓸모없는 감정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내 생각이 다르고 남 생각이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무조건 수용할 순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행동을 했다면 마땅히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 부끄러움을 통해 사회에서 용인된 행동이 무엇인지,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사회, 그런 부끄러움을 해소시킬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사람은 느끼지 않고, 부끄러움을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위정자들부터 그런 정당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생활한다면, 그리고 그런 부끄러움에 대해서 남탓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는 충분히 희망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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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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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었던 한 남자 이야기!

 

이 소설은 400여 쪽이나 되는 분량을 가졌지만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읽고 말게 하는 흡입력을 지녔다. 여담이지만, 재미있고 빨리 읽히는 소설이 요즘의 대세로 보일 정도로 요즘은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이 많이 나오는 듯 하다. 이 작품을 영화로도 만나볼 수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아무것도 각색하지 않고 이 소설 그대로 영화로도 옮길 수 있을 정도, 아니 머릿속으로 그 영상을 돌려볼 수 있을 정도로 이미지화하기가 쉬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영상 세대인 요즘에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이 잘 읽히는 것이 아닐까. 내겐 그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충분히 그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야기의 구성도, 등장인물도, 상황도, 그리고 결말까지도 조금 미진한 듯 하면서도 깔끔했다. 결말에 가서는 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세상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으니까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벤을 응원하게 되어버린 상황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다. 마치 액션 영화나 도둑 영화를 보면 도둑이거나 사기꾼인 주인공이 잡히지 않기를 응원하게 되는 것처럼...

 

변호사인 벤은 아기를 낳고도 그 매력이 사라지지 않은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두 아들과 남부러울 것이 없는 집과 자동차, 비싼 취미생활을 누리고 있다. 정말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었다. 단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 사진에 대한 열정을 접고 변호사로서 드러나지 않게 돈을 버는 그는, 재능이 넘친 소설가 지망생 아내를 집안에 들여다 앉혔다는 이유만으로 아내에게 냉대를 당하고 있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난 일 년동안이나. 보통 그런 부유한 재력을 가진 남편들은 트로피 아내를 데리고 살면서 적당히 정부도 두고 아내를 마음껏 무시하는 편인데, 자유로운 예술혼을 가진 커플이다 보니까 오히려 아내가 휘두르는 권력에 남편이 지쳐나가떨어진 듯 싶었다. 결혼하고도 아내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남자를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 년동안이나 냉대를 받아오면서도 불륜은 생각지도 않았던 지고지순한 남자주인공이었기에 우리는 그의 말없는 공범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내가 이전에는 지독히도 싫어했던 사람과 바람이 난 것은 어쩌면 이 남자에겐 죽음과도 같은 형벌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단지 그가 잘못했던 점은 자신의 직업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아내의 실패를 조장했던 것에 있다. 사진을 좋아했으면 굶어죽더라도 그 길로 갔어야 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했더라면 비싼 취미생활에 오롯이 만족했어야 한다. 아니라면 어느 정도 부유해졌다면 그 이후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던가. 그런데 비겁했던 벤은 그런 모든 좌절감은 아내를 방해하는데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행동했다. 그랬기에 자신의 창조력과 창의적인 예술혼을 막혔다는 이유만으로 아내 베스는 그렇게 냉랭한 눈으로 그를 쳐다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벤의 잘못일까. 벤이 무의식적으로 아이가 생기면 사랑하는 베스가 결혼해주리란 점에서 피임을 안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혹은 둘째를 가지면 완전히 내것이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뭐 애는 혼자 만드나? 본인이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행동한 결과에 대해서 왜 오로지 벤에게만 감수하라고 하는지 그녀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틀에 박힌 사람들을 가식적이라고 말할 순 있겠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 쓰는 가구, 귀중품 모두 벤이 번 돈으로 산 것이 아닌가 말이다.

 

전적으로 그녀 본인이 정신적으로 강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그렇게 스러져갔으면서도, 남 탓하기만 바빴으니 벤도 고역이긴 했을 거다. 사랑하니 헤어지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고, 당연히 아내의 불륜을 참아낼 수도 없었다. 그것도 가장 경멸해 마지 않는 그런 녀석에게!! 예술적인 영혼이라곤 하나도 없으면서 비굴하게 애원만 하는 실력에, 작위적인 냄새만 가득 풍기는 그런 사진만 찍는 녀석에게 자유로운 영혼인 베스가 빠진 것은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욱하는 심정으로 베스의 내연남 게리를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분노를 눌러 참고 있는 사람에게 대놓고 비웃는 짓은, 그것도 아내를 빼앗은 것을 가지고 말이다. 이것은 남자의 자존심과 남편으로서 가지는 애정을 두 번 죽이는 짓이었다. 어쨌든 살인은 일어났고 자수도 생각해봤지만 적어도 18년 이상은 감옥에다 썩을 수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자신을 죽이고 게리로서 살아가는 것. 하지만 수많은 걱정과 불안과 초조 덕분에 겨우 소도시에 정착하기로 했을 때, 한 가지 실수를 하고 만다. 그것이 그에게 파국을 가져다주는데...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하면 살 것이라는 말이... 젊을 적에 사진으로 성공하고 싶었을 때는 죽도록 찾아오지 않더니 이젠 성공하면 안될 상황에서는 성공이 아주 손쉽게 찾아오는 것이 말이다.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 그가 휘말린 상황이 어떤지 잘 봐야한다. 이 결말은 교만한 인간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아주 크니까 말이다. 자신의 삶이라는 것이 지겹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미 그것을 잃어버리면 다시 그 삶을 되찾고 싶어진다는 것, 그런 진리를 깨닫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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