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코드 - 너와 나를 우리로 만나게 하는 소통의 공간
신화연 지음 / 좋은책만들기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부끄러움은 상당히 개인적인 감정이면서도 사회적인 성격을 가졌기에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에 유일하게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감정이 바로 부끄러움이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는 사회적인 ‘나’와 나다운 ‘나’가 일치되지 못해 깊은 소외감을 낳게 한다. 이런 감정의 소외를 제대로 극복했다면 충분히 사회란 곳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런 감정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것이 소멸되지 않고 켜켜히 쌓아두었다가 어느 순간엔 세상에 분노를 터트리거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을 정도로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감정이다. 그런데 이런 부끄러움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개개인의 성격이나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 학력이나 경력 등에도 연관있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의 분위기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부끄러움을 징벌로 대하는 사회에서는 건강하게 해결하지 못해 그것이 재앙의 불씨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큰 예가 아돌로 히틀러의 경우이다. 어릴 적부터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이유 없는 학대와 언어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그는 항상 분노에 차 있었다고 한다. 깊은 부끄러움이 해결되지 않아 분노로 전이된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은 한낱 개인적인 감정으로 치부해버릴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할 감정이라는 것이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나는 내 무의식에서 만들어낸 책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마음이 끌렸다. 어릴 적부터 부끄러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해 항상 도망치기에만 바빴던 나로선 어른이 된 이후에도 부끄러움에 대해 때마다 숙고해보곤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서히 내성적인 표현력을 개선해나가고 내성적인 표현력과 부끄러움이 충분히 극복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그 어릴 적에 왜 그리 부끄러움에 얽매어 있었을까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번도 속시원할 만한 해답을 얻지 못했었기에 그저 공상으로만 치부하고 말았었는데, 이 책을 만나고선 부끄러움이 충분히 숙고해보고 논의해볼 만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이후에도 부끄러움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덮치고 그것으로 인해 좌절감을 느낄 때도 그것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이 책에서 배울 수 있었다. 딱히 무언가 해결책이 제시된 것은 아닌데, 부끄러움을 느꼈을 때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자 내게 문제가 되는 행동 양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은 일반적으로 은둔형이나 위축형, 자아공격형, 회피형, 타인공격형의 반응을 보이게 하는데, 은둔형은 소외감이나 외로움이라는 부작용을 가지게 되는 단점이 있고, 소외감을 느끼기 힘들어 자아공격형으로 빠지게 되면 극단적으로 자살에 이르게 되기도 한단다. 또 명품 같은 다른 것으로 자신을 감추려는 것이 회피형이고, 부끄러움의 원인을 모조리 다른 사람 탓을 하게 되는 타인공격형의 예가 ‘묻지마 살인’이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란다.
 
그러니 범죄자들을 단지 후안무치의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공격적인 성향과 분노를 뿜어내는 것이란 이해와 포용이 필요하다. 대부분 범죄자들의 가정 환경이 썩 좋지 못하다. 아버지나 어머니 한 쪽이 안 계시거나 두 분 다 안계셔서 외부에서 받아오는 상처나 부끄러움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학대나 언어폭력으로 받은 상처와 수치심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기에 밖으로 분노를 표출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부끄러움은 바로 사회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가장 큰 예로, 10여 년 전 스코틀랜드의 작은 도시에서 토마스 해밀턴이 일으킨 초등학교 어린이 총기난사 사건을 들 수 있겠다.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안전하게 해소될 수 있는 가정이 존재했더라면, 그를 다독여주는 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가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젊은 엄마에게서 외조부모에게 입양된 해밀턴은 괴팍하면서도 지배적인 식구들 밑에서 친구 없이 자랐다. 후에 보이스카웃 관련 일을 했는데 외톨이인 그에 대해서 소아성애병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 억울하게 직업을 잃었다. 무죄임이 밝혀졌어도 그는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던 데다가 이웃사람들에게까지 내침을 당했던 것이다. 만약 사회가, 주위의 이웃이, 할머니가, 엄마가 그를 이해하고 공감해주었더라면 그는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열여섯 명의 어린이와 교사 한 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부끄러움이란 하등 쓸모없는 감정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내 생각이 다르고 남 생각이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무조건 수용할 순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행동을 했다면 마땅히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 부끄러움을 통해 사회에서 용인된 행동이 무엇인지,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사회, 그런 부끄러움을 해소시킬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사람은 느끼지 않고, 부끄러움을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위정자들부터 그런 정당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생활한다면, 그리고 그런 부끄러움에 대해서 남탓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는 충분히 희망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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