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Love Chocolate and Cafe - 달콤한 쇼콜라티에C 초콜릿을 부탁해
조미애 지음 / 동아일보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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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애

 

대학에서 칠 공예를 전공하고 졸업 후 공방에서 잠시 일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쇼콜라티에의 세계에 매료되어 초콜릿 공방 빠드두에 등록했다. 이곳에서 전문가 과정을 수료하고 만3년 간 강사로 근무했다. 이후 나만의 독창적인 레시피와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공방을 그만두고 유럽으로 초콜릿 여행을 떠났다.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등의 유명 초콜릿 숍을 탐방하고 돌아와 오랫동안 머리 속으로 꿈꾸던 공방을 삼청동에 차리고 블로그도 만들었다. 가르치는 일과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는 일을 병행하다 마침내 2009년 신사동에 ‘에이미 초코’라는 이름의 초콜릿 공방 겸 카페를 열었다.
카페를 오픈한 지 1년 조금 넘었지만 그녀가 만든 초콜릿이 잡지 등에 소개되면서 이제는 일반인 뿐 아니라 연예인들도 즐겨 찾는 카페가 되었다. 손님들이 카페를 찾는 건 점심 이후지만 그녀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초콜릿을 만든다. 그녀가 만든 초콜릿 한 조각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즐겁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초콜릿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매력을 가진 책이다. 우리가 생각해왔던 단순한 기호품으로서의 초콜릿이 아닌 여러 체계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음식과 예술품으로서의 초콜릿을 말하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초콜릿을 스스로의 손으로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 매혹적일 수 밖에. 일단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초콜릿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 초콜릿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초코파이나 초코바 같은 제품의 포장지 뒷면에 보면 아주 작은 글씨로 ‘준초콜릿’, ‘초콜릿 타입’, ‘초콜릿 가공품’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초콜릿 색깔만 들어가면 모두 초콜릿이라고 여겼지만, 사실 이 모두를 초콜릿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미국 FDA(식품의약국)이나 EU(유럽 연합)에서는 초콜릿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모든 제품에는 반드시 카카오버터만 사용하도록 규정해 놓아서 ‘준초콜릿’, ‘초콜릿 타입’, ‘초콜릿 가공품’은 절대 초콜릿이란 이름으로 판매되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카카오 고형분이 20% 이상만 들어가면 초콜릿류로 인정하고 있어서 모두 다 초콜릿이 되는 것이다. 카카오 고형분이란 카카오매스, 카카오버터, 카카오파우더를 가리키는 말인데, 저가의 초콜릿의 경우 비싼 카카오버터 대신에 팜유나 해바라기유, 대두유 같은 식물성 유지를 써서 맛이나 그 풍미가 확실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외국의 경우 식물성 유지는 절대 함유할 수 없다고 되어 있던데 참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초콜릿 중에는 리얼 초콜릿이 아닌 것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확실하게 구별해서 초콜릿 가면을 쓴 싸구려를 먹지 않는다면 되지 않을까 싶다.

 

커피가 커피빈을 볶아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초콜릿도 카카오빈을 로스팅하다가 분쇄해서 나온 원액에 여러 가지를 적절히 배합해서 만든다. 카카오빈은 카카오나무에서 딴 열매인 카카오포드에서 카보스라는 딱딱한 껍질을 갈라 나온 하얀 과육 안에 들어있는 것을 말하는데, 실제 그림이나 사진으로 보고 설명해준 것이 아니라서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카카오빈은 초콜릿의 원재료이고 코코아는 카카오빈에서 지방을 추출해내 물에서도 쉽게 녹을 수 있도록 만든 가루에 붙은 하나의 상표라고 한다. 투명 테이프를 ‘스카치테이프’라고 부르고, 일회용 밴드를 ‘대일밴드’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나의 상표가 그 물건을 대표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외에도 초콜릿에 얽힌 역사와 다크 초콜릿의 효과, 세계적인 DIY 초콜릿의 종류 등 볼거리가 많이 제공되어 있는데 아주 재미나다. 요즘 외국 초콜릿에도 눈이 돌려지고 있는 터라 이 부분에서 외국의 유명 상표를 알 수 있었는데 꼭 먹어보고 싶은 이름들을 새겨두었다. 그 외에는 모두 초콜릿을 실제로 만들어 볼 수 있는 레시피가 가득 들어차있다. 보고만 있어도 먹고만 싶은 초콜릿을 눈 앞에 두고 사진으로만 봐야 하는 이 아쉬움은 만들어 볼 수 밖에 없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은 생초콜릿인데, 먹을 때마다 살살 녹는 게 일품이다. 그런데 먹을 때마다 궁금했던 생초콜릿의 레시피는 생크림과 다크 초콜릿을 섞어 가나슈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굳힌 후에 카카오파우더만 뿌려주면 된다고 하니까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또한 여러 방법 중에 가장 예뻤던 것은 ‘하얀 산’이란 뜻의 몽블랑이었다. 미국산 키세스 초콜릿을 생각하면 아주 간단한데, 그것을 실제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신기했고 멋졌다. 조금 말랑한 것을 짤개로 짜넣어서 그 위에 초코릿을 덧씌우는 방법인데, 솔직히 내가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은 방법이라 눈으로만 보기만 했지만 진짜 예쁜 초콜릿이다. 

 
또 하나는 가장 간단하고도 귀여운 방법인데, 빨대 안에 초콜릿을 넣어서 굳으면 빨대를 잘라내는 방법을 사용하는 거라 빼빼로 데이 때 사용하면 좋을 것 같은 방법이다. 모양도 그렇고 방법도 쉽고 일석이조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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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 세트 - 전2권
이윤기 지음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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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기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번역작가이자 인문학적 글쓰기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문인. 난해하기로 이름난 세계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장본인으로, 지난 20여년 간 내놓은 번역서가 1백 50여권에 이른다. 그의 글들은 질적으로 아주 양호한 최상등품일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엄청난 속필다작이다. 1년에 열대여섯 권의 번역서와 소설, 산문집을 낼 정도니 알 만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에게 번역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 소설인데, 열 번쯤 되풀이해 읽은 후 번역에 들어가 1주일 만에 끝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작가의 학력을 굳이 따져보자면 ‘중졸’이다.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서른이 넘어 신학교도 다녔으니 ‘중졸’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여하튼 고등학교는 진학 후 두세 달 만에 작파했고, 그 후로는 모든 것을 독학으로 배우고 익혀 왔다.
그가 인문학의 바다에 처음 뛰어든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학비를 면제 받는 대신 교내 도서실 사서를 맡으면서, 물을 만난 고기마냥 도서관을 가득 메운 지식의 세계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었다. 이렇게 중학 시절에 이미 인문학의 단맛을 보아버린 이윤기에게 개발시대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육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도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직장생활을 한 것도 일생을 통틀어 딱 4년이다. 생활도 남들과 반대로, 조간신문을 읽고 취침해서 대낮에 일어난다.

1969년 국군 나팔수로 근무하던 그가 베트남전에 자원하여 참전했던 것도 별난 일이었고, 귀국 시 남들은 전자제품이다 뭐다 해서 한 밑천 장만해 오는데, 700여 권의 서양책들을 질머지고 돌아온 것도 별난 일이었다. 이 책들은 이윤기의 재산목록 1호가 되었으며, 그 중 여러 권이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내 학창시절부터 유난히 익숙하게 들려온 이름이 있다면, 바로 이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유명하면 유명할수록 보고 싶지 않다는 무식한 놈의 똥고집은 더욱 세어져 한 번도 그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유고작품이 되어버린 이 책이 내겐 첫 인연인 셈이다. 읽고 난 뒤에 느끼는 것은 역시 명불허전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값은 톡톡히 하는 이 작품으로 이제껏 이상하게 조각조각 알고 있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를 하나의 실타래로 이어냈다. 미궁 이야기는 알고 있으나 그 영웅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던 테세우스 이야기나 그의 업적은 익히 들어왔으나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알지 못했던 알렉산드로스 이야기나 진정 공명정대했지만 한 노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 도편에다가 자신의 이름을 적어주었던 아리스테이데스 이야기도 새삼 정리가 되었고, 스파르타의 기틀을 만들어 500년 동안 안정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준 멋진 영웅 뤼쿠르고스 이야기나 현자의 대명사로 회자되는 솔론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까지 한 번에 꿰뚫을 수 있었다. 이만 하면 그의 의도는 충분히 잘 전달된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한자의 육탄공격에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서양 문화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여러 관용어구들이 사실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다 등장하는 표현법과 수사법이라 확실한 그 유래를 알고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자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책과는 달리,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어휘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실제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말 중에서 우리가 관용어구로 쓰지 않는 말이 어디 있겠나. 지금 막 생각나는 것만 해도, ‘아킬레스 건’이니  ‘피그말리온 효과’이니 하는 여러 종류의 용어들인데 말이다. 그러니 이윤기 교수가 의도해왔던 바는 충분히 전달해주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특히, 그리스어나 로마어를 영어로 변역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어휘들의 규칙들은 확실히 정립되었다. 그리스어 이름의 ‘~오스(os)’, 라틴어 이름의 ‘~우스(us)’는 영어로 번역될 때 ‘어(er)’로 바뀌는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영어로 ‘알렉산더’로 변역될 때 이미 알았던 사실이지만, 이렇게 쉽게 설명해주니 다시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던 부분이었다.

 

예전부터 그리스 시대를 찬미해왔던 나로서는 이런 책이 정말 반가울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가장 꽃피웠던 시대도 고대 그리스였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학문의 분류도 또한 그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해놓은 것이었고,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명명되는 소크라테스 또한 그 시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니 우리의 학문 체계는 그 시대보다 더 앞서 있다고 말할 수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시대의 이야기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까 알게 된 것은,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도  ‘스파르타 식’이란 어휘가 가지고 있는 인식이 정말로 호되고 매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 마디의 말에 모든 함의를 품어놓을 수 있도록 ‘촌철살인’의 기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대단하게만 여기고 있던 아테나이의 민주주의가 사실은 말발이 좋은 선동가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중우정치에 더 가까웠고, 오히려 플라톤과 같이 대단한 철학자들이 찬양해마지 않았던 정치 형태는 스파르타 식의 왕정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람은 바로 ‘스파르타의 아버지’라 불리는 뤼쿠르고스이다.

 

뤼쿠르고스는 스파르타 왕의 동생으로, 자식이 없던 형이 죽고 난 뒤에 충분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사람인데 형수의 제의도 거절한 채 그저 섭정만 하려고 물러나 있었던 사람이었다. 결단코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 하나 남겨둘 생각이 전혀 없었던 사람으로, 스파르타가 잘 살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음식을 먹게 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지금 우리가 좋아하는 달콤한 후식은 기대할 수 없는 나라일지는 모르지만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스파르타는 조용히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나라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음식만 먹을 수 있다고 법을 만든다면, 지금의 과소비나 사치, 도박 및 온갖 범죄가 과연 생길까 의문이 든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먹는 것은 똑같이 할당된 것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많은 돈이 무슨 소용일까. 입에서 사르르 녹는 케익이나 회, 한우 고기를 먹을 수 없다면 돈이 많은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쾌락을 느낄 뿐일 텐데. 과연 뤼쿠르고스는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런 법령을 제정할 수는 없으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공명정대한 아리스테이데스뿐일지 모르겠다.

 

자신의 정적조차도, 자신을 추방시켜버리는데 앞장 섰던 사람일지라도 조국에 도움만 된다면 기용해서 쓰는 사람인 그는 정말로 현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사로운 원한은 저멀리 치우고 나라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차치할지라도, 뇌물을 받지 않으며 공명정대하게 그 어떤 물질적인 즐거움을 누리지 않으려고 했던 공직자는 요즘 시대에는 정말 귀한 존재이니까 말이다. 얼마 전에 성남 시장이 5년 된 차를 6000여 만원의 체어맨으로 바꿨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더한 것도 다 해먹는 정치인들이 판을 치는 이 때에 진짜 별거 아닐 수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랏돈을 다 까먹고 모라토리엄을 제일 먼저 신청하는 잔머리 쓰는 성남시장을 보노라니, 공직에 앉아서 정말 청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옛말에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안 그랬을지라도 그 자리가 주는 유혹이, 주변에서 하던 관행이 공직자를 그렇게 만든 걸까. 그러니까 부정부패는 인간의 태생적 한계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자신의 장례 치를 돈조차 없어서 나라에서 대신 해주어야 했던 아리스테이데스 같은 이름난 공직자가 너무나 불쌍하다. 아무나 못하는 일을 그만 해낼 수 있어서 책에 그의 이름을 올라가는 일도 그가 원했던 일은 아니였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 그는 누구나 다 그처럼 행동해서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였길 바라지 않았을까. 모두다 그렇게 청렴하게 행동해서 그런 일이 기사화되는 일이 없는 그런 깨끗한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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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는 대로 노자의 도덕경 Easy 고전 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김갑수 지음, 최남진 그림 / 삼성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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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노자

 

중국 고대 철학자로 도가의 창시자.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불리며 신성화되기도 하였다.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당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 받았다. 사마천에 의하면 노자가 늙었을 때 젊은 공자를 만나 토론하고 공자의 오만함을 질책하였으며, 공자는 노자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글/김갑수

 

1961년에 태어나 성균관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경기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중국 산동사범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2006년부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전임연구원 및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중국고대철학(특히 도가)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장자와 문명』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천인관계론』, 『주역-유가의 사상인가 도가의 사상인가』(공역), 『현대중국의 모색』(공역) 등이 있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읽을 수 있게 정리된 EASY 고전 시리즈가 삼성출판사에서 나왔다. 2006년에 나왔으니까 출간된 지는 꽤 되었다. 동서양의 주옥 같은 고전뿐만 아니라 한국의 명서, 그리고 여러 과학 고전까지 정리해준 시리즈라서 고전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충분히 읽을 수 있게 했다. 판형도 작고 아담한 데다가 기껏 많아봐야 150페이지를 넘지 않는 분량이라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다. 표지도 어찌나 알록달록한지 한 자리에 다 모아두고 보면 색감도 아주 예쁘다. 이번에 본 『노자의 도덕경』은 연한 보랏빛 표지로 된 아담한 책이 분량도 121페이지밖에 되지 않아 아주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어른인 내가 읽어서 어려운 중고등학생 책이라면 실제 중고등학생들에겐 무척이나 어렵겠지만, 이 책만큼은 그 이면의 의미까지는 다 못 파악하더라도 충분히 한 권을 다 읽고 그 감상을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될 정도의 난이도라 누구나 권해줘도 무리가 없을 게다. 예전에 두리미디어에서 나온 철학 책을 하나 읽기 시작했다가 상당히 어려워서 진도를 다 나가지 못한 채 포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책의 컨셉이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할’뭐, 이런 종류의 것이라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청소년 용으로 나온 책이라도 내가 읽을 수준으로 쉽게 나와있지 않으면 쉽사리 도전하지 않는데,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이 시리즈는 처음 도전한 이 책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 다른 책도 계속 봐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겠다 여겨진다.

 

사실 이 책말고도 노자의 『도덕경』과 같은 고전책을 몇 권 정도 봤기 때문에 이 책이 쉽게 느껴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긴 했지만,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봤던 다양한 내용들이 지금 이 순간에 기억나는 것은 아니기에 그런 배경지식 덕분에 이 책이 쉽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이 책이 쉽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청소년들이 쉽사리 이런 책을 접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읽어서 충분히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은 하나도 없건만, 아니 그런 책은 권해주지도 않건만 머리가 컸다고 권해주는 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 조금은 안타깝다. 고기도 많이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고, 책도 많이 봐본 사람만이 그 재미를 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책을 좀 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다. 현란한 영상의 시대에 고루하게 활자를 들여다보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취급을 받는 것이 맞는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은 책을 읽는 사람에게 그 노력을 헛되이 여기지 않아서 책을 읽는 만큼 즐거움과 참된 깨달음을 준다는 것만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 어떤 제테크보다도 그 남는 이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문학의 위기라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인문학이 많이 강조되는 이때에 이런 책쯤 읽어두면 좀 좋은가? 하여튼 걱정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에게 추천해주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어른용으로 된 책을 읽기 전에 먼저 배경지식을 깔아두기 위해서라도 청소년 책을 읽어보자 마음 먹었다.

 

먼저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책 밖에서 노자가 어떤 인물인지, 그가 살았던 시대는 어떤 때인지를 간략하게 알려준다. 사실 그의 존재가 처음 기록된 문헌은 사마천의 『사기』인데, 이 책에서는 신빙성이 없는 내용은 그렇다고 자세하게 밝혀놓아서 노자라는 인물의 실존이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책에 없는 그가 한 벼슬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학계에선 그 기록을 사실로 추정한다. 당나라의 이연은 그와 같은 성을 가진 노자를 조상으로 추존했고, 평민들에게는 신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았고, 공자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과 같은 인물이라고 평까지 받은 존재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게다가 이 책의 주인공인 ‘도덕경’이란 책도 본인이 쓴 것이 아니라 윤희라는 사람이 은거하러 들어가는 노자에게 한 수 청해서 받은 글이라는 설만 있을 뿐, 정확히 누가 썼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하니, 노자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신비스러운 내용 뿐이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데다가, 노자 연구서만 1700 여 종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서양에서도 10대 고대 작가 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았다고 하니까 그의 인기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대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세계인들이 반색하며 받아들이는 노자의 사상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2부 책 속으로 들어가기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제37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도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못하는 것이 없다.

왕이나 제후가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저절로 살아갈 것이다.

살아가다가 욕망의 싹이 트려고 하면 나는 그것을 이름 없는 통나무로 막을 것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로 막아 놓으면 욕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욕망이 일지 않고 잠잠해지면 천하는 저절로 제 모습을 찾을 것이다.(제37장, p. 49-50)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첫 번째 문장, 도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못하는 것이 없다 는 것이다. 마치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는 자연의 질서처럼, 도는 규칙성은 있되 그 안의 어떤 의도나 목적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휴일에 가만히 집에 있으면서 컴퓨터도 했다가 책도 봤다가 뒹굴었다가도 친구에게 전화를 받으면, “아무것도 안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의 의식 안에 이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없기에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안하는 것과 같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제1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짜 도가 아니다.

부를 수 있는 진짜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는 것은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제1장, p. 41)

 

일견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나열해 놓은 것 같지만, 이 말은 도의 무궁무진성, 전지전능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도는 사람들이 이러저러하다고 말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것이라서 인간의 말로 표현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 것에서 그리 심각하게 숙고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번 어김없이 찾아오는 자연 현상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 현상의 원인을 파고들어가면 우리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마치 그런 이유처럼, 도도 인간의 설명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의 원인이 되고, 모든 변화의 이유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 도이다.

 

그렇기에 하늘과 땅은, 모든 만물은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공자는 하늘이 선하기에 인간이 선하지 않으면 그에 맞는 벌을 하늘에서 내린다며, ‘인’을 강조했지만 노자는 도에게는 어떤 목적 의식도 개인적인 감정도 없기에 자연은 인간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인이든 현자이든 아무것도 우리는 존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통치자가 그런 것을 강조했던 것은 백성들을 좀 더 편하게 지배하기 위해, 그러니까 좀 더 쉽게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기 위해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며 도덕이니 법이니 하는 것은 오히려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까지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공자는 도덕규범이 사라졌기에 사회가 혼란해졌다고 보았다면, 노자는 도덕규범이 세상에 들어왔기에 사회가 혼란해졌다고 본 것이다. 처음에 들으면 황당하지만 계속 듣다 보면 묘하게 수긍하고 싶은 구석이 있는 노자의 주장이었다. 그가 바라는 이상사회가 작은 촌락 같은 자그마한 국가로 본다면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있다. 백성들이 많고 국토가 넓은 나라라면 여러 제도나 통치 법규가 필요할 테지만, 노자가 바라는 사회에서는 법조차도 무용지물일 테니까 말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법 체계나 도덕 체계를 다 쓸모없는 것으로 본 노자이기에 그가 공자에게 범접할 수 없는 도인과도 같은 인물로 여겨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역설적인 그의 사상이 오히려 인간의 내면적인 심리를 정확하게 포착해냈기에 아주 훌륭하다. 57장에서는 요즘 우리에게 특히나 문제가 되는 ‘상대적 빈곤’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세상에 금지하는 것이 많을수록 백성은 더욱 가난해진다.

사람들이 편리한 도구를 많이 사용할수록 나라는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사람들이 기술과 재능을 많이 발휘할수록 신기한 물건이 더욱 많이 나타난다.

법령이 많을수록 도적도 많아진다. (제57장, p. 79)

 

그 당시에도 상대적인 빈곤으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웠나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진리처럼, 적어도 전국 시대 이전의 사람에게서 현대의 문제점까지 지적을 받다니, 그의 사상이 왜 지금까지 왕성하게 연구되는지를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결국 노자는 세상의 모든 인위적인 것을 벗어버리고 자연의 원리로 돌아가서 마음을 비운 채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가진 것이 많아서 과거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근심을 싸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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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옛 벗 공자의 논어 Easy 고전 1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황희경 글, 정훈이 그림 / 삼성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원전/공자(孔子, BC 552~ BC 479)

 

중국 춘추시대의 교육자이자 철학자, 정치 사상가이며 유교의 시조. 노나라의 창시자이며 주왕조의 건국 공신이었던 주공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하였다. 최고의 덕은 인이며,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쳐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와 더불어 세계 4대 성인으로 꼽힌다. 『시경』, 『서경』, 『주역』, 『예기』 등을 정리하였고, 242년간의 역사를 옳고 그름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기록한 역사책 『춘추』를 지었다. 그의 언행은 제자들이 편찬한 『논어』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글/황희경

 

1959년 강화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하여 <풍우란의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산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국문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현대중국의 모색』(공저), 『삶에 집착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논어』, 『우리들의 동양철학』(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철학문답』(공역), 『동양의학은 서양과학을 뒤엎을 것인가』(공역) 등이 있다.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 공자는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고, 중고등학교 때도 도덕 시간과 윤리 시간에 꼬박꼬박 빠짐없이 수업을 들었지만, 솔직히 그의 사상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고 하면 지금도 딱히 설명할 말이 없다. 그만큼 공자라고 하면 시대와 동떨어진 느낌이 먼저 들곤 했으니까. 오죽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란 책의 이름만 보고도 반가워했겠는가 말이다. 물론 그 책도 앞의 몇 장만 읽고 내용이 쉽게 추리할 수 있을 만큼 뻔해서 읽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이미 알고 있던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란 설명을 또 읽으니까 공자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던 노자는 왜 4대 성인에 들어가지 않았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바로 전에 『노자의 도덕경』이란 책을 읽어서 확실히 아는데 노자의 사상은 범인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고귀하고 고차원적인 생각이던데 말이다. 그래도 노자의 책보다는 이 책이 훨씬 재미가 있고 알기가 쉽다. 물론 노자의 범상치 않은 사상 때문이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한편으론 필자의 역량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연유가 어쨌든 공자의 사상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주 기쁘다. 재미있게 읽어야 그 내용이 머리에 깊게 남을 것이 아닌가. 또한 명색이 어른인데, 중고등용 책은 충분히 이해하고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논어』가 어떤 책인지를 살펴본다면, 『논어』는 공자의 어록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로 대표되는 세계 4대 성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손으로 글을 남기지 않았는데, 역시 이 책도 공자의 사후에 공자의 제자들의 제자들이 전국 시대 쯤에 편찬한 글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한동안 사라졌다가 제나라에서 전해진 『제논어』, 노나라에서 전해진 『노논어』, 공자의 옛집 벽에 감추어 두었던 『고논어』, 이렇게 세 가지 판본이 나타났는데, 그 중 『노논어』를 중심으로 한나라 때 장우라는 사람이 만든 최초의 교정본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논어』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사서(四書)’는 『논어』, 『대학』, 『중용』, 『맹자』를 말하는데, 이것은 송나라 때의 주희라는 학자가 『예기』의 한 편이었던 『대학』, 『중용』, 『맹자』를 『논어』와 함께 묶어서 ‘사서’라 부르고 이 네 책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주석을 달았던 것에서부터 유래했다. 이후 원, 명, 청 시대에 주희의 주석본이 과거 시험의 모범 교재로 채택되어 다른 학파의 책과 구별되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동양인으로서 ‘사서’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만큼 선비라면 꼭 배워야 했을 교양의 근본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서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극도로 적어질 이 때, 이런 식으로 알게 되어 기쁘다.

 

하여튼 『논어』는 총 2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에서는 중요한 부분만 짤막하게 인용만 되었을 뿐 전체를 다 수록하지는 않는다. 각 편마다 학이(學而), 위정(爲政) 같은 이름이 붙어있는데, 각 이름은 각 편의 처음 두 글자나 세글자를 딴 것일 뿐 별다른 뜻이 없어 내용상 뒤죽박죽 섞여있을 때도 많이 있다. 주제별로 분류해보면 대략 ‘개인의 인격 수양에 관한 교훈’, ‘사회 윤리에 관한 교훈’, ‘정치론’, ‘철학론’,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준 가르침’, ‘사람에 대한 비평’, ‘공자 자신의 술회’, ‘공자의 일상 생활과 제다들이 보낸 찬사’로 구분되는데 앞의 두 가지가 전체 분량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니 공자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말 안해도 알 수 있다. 공자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대표적으로 인(仁)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 ‘인’이라는 사상은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애매모호한 구석이 많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란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실천을 강조하는 높은 수준의 지식과 수양이 요구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의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의 뚜렷한 형상은 알 수 없지만, ‘인’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은 찾을 수 있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 책에서는 효에 대해서, 우정에 대해서만 몇 가지 공자의 말을 발췌해서 정리해주었는데, 독특한 것은 누가 물어봤느냐에 따라 공자의 대답이 달랐다는 것이다. 이는 각 제자의 성품과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해설이 없어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는 단점도 있기는 하다.

 

가장 처음 공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공자가 제 뜻을 이루어내지 못한 실패자였다는 사실이다. 공자가, 그의 사상을 인정해주고 제 뜻을 펼 수 있게 지지해준 권력자들을 만나지 못했다는 원초적인 슬픔을 가진 사람이란 사실은 그의 말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논어』‘학이 편’의 첫머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학이-1】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p. 69)

 

이 말은 아주 유명하고도 익숙한 말인데, 배움에 대해서, 벗과의 관계에 대해서, 인정받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적으로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그 슬픔을 억누르고 (지금 공자의 현실처럼)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화내지 않는 것이 바로 군자임을 몸소 표현해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공자는 제 뜻을 펼치지 못한 실패한 사상가였지만, 자기 스스로 군자란 어떤 것임을 보여준 행동하는 사상가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는 아주 실제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공자 스스로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라 비유했던 노자는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따라가기에 벅찬 비범한 도인에 가까운 인물이었기에 그를 본받기도, 배우기도, 따라하기에도 어려웠던 문제가 있었다. 노자의 『도덕경』은 읽기에는 재미나지만 실천하기엔 문제가 있는 사상이었던 것으로 볼 때, 공자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실제적인 모델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공자 그 자신이 정치판에 끼여들지 않고 그 더러운판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히 자연을 벗삼아 명상만 하면서 우리에게만 치열한 삶 속에서 배우기를 강권하고, 인하기를 종용하고, 군자가 되라고 했다면 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이 정치판에 끼기를 소망했고 그 소망이 좌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자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고 항상 배우고 익히기를 힘써 인(仁)하기를 원했던 역사적 사실은 우리네 범인(凡人)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인생 한 자락 한 자락이,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 같은 인생이자 명언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4대 성인에 노자가 아니라 공자가 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초월한 도인의 뜬 구름 잡는 소리보다는 치열하게 살다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의 경험담이 더 도움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공자는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의 전형이다. 자기 스스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계씨-9】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최고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고, 곤란을 겪은 다음에 배우는 사람은 또 그 다음이고, 곤란을 겪고도 배우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최하이다.”(p. 88-89)

 

【술이-19】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 배운 사람이다.”(p. 75)

 

공자 자신이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서 부단히 노력해왔고 배우기를 힘썼기에 누구나 배우면 자기만큼 성장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스승이라니, 이런 스승만 있다면 누구나 다 배우기를 힘쓰지 않을까. 원래 수학을 무척 못했던 사람이 수학선생님이 되면 훨씬 더 잘 가르치고 동기 유발을 더 잘하는 것처럼 동양의 거대한 스승인 공자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부족해서 배웠고, 배워서 변화했고, 변화해서 조금은 남을 가르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런 스타 강사~~ 

 

양화-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로지 가장 총명한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이 변화할 수 없다.”(p. 89)

 

【위정-11】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p. 72)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그래서 이 책의 저자(황희경 교수)는 공자가 본래 매우 총명한 사람인데, 부단히 공부해서 ‘어질어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인자(仁者)는 인을 편안히 여기고, 지자(知者)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이인 편)거나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옹야 편)는 식으로 지자(知者)의 심리를 잘 알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말에 나도 동의한다. 한문책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는 말의 의미를 전혀 몰랐다가 이 책 덕분에 알게 되었는데 그 심오한 의미가 정말로 잘 들어맞기 때문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 전까지는 지자가 왜 물을 좋아하는지, 인자가 왜 산을 좋아하는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인-2】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하지 않은 사람은 곤궁함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안락함을 오래 누리지도 못한다.

  인한 사람은 인이 편안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p. 94)

- 지혜로운 사람은 장기적으로 볼 때 인한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인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과 하나가 되어 편안한 경지와는 분명 차이가 있지요. 스스로 편안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옹야-18】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p. 74-75)

 

【옹야-21】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늘 즐겁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p. 102)

- 생각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물처럼 막힘 없이 흐르는 사람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는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어 즐거운 것이지만, 끊임없이 동요하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인의 경지는 나름의 신앙이나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산처럼 고요하고 안정될 수 있는 것이지요.

 

공자는 스스로를 낮추면서 지자와 인자에 대해서 설파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仁)임을 천명했다. 자신도 인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실은 그렇게 말하는 것에서부터 그가 인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스승이기에 아마도 그렇게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실생활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얻어낸 주옥 같은 가르침을 제시하는 스승, 그런 스승을 닮기 원하며 스승의 가르침에 목숨까지도 다 받드는 제자, 그런 사제 관계가 있었기에 이런 명징한 삶의 가르침들이 이 때까지 전승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참고로, 『논어』에는 일상적으로 들어왔던 명언들이 많다. 그런 것만 읊어도 충분히 배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짧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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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좋아하세요? - 인생을 사랑하는 당신을 위한 33편의 음악 편지
김순배 지음 / 갤리온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김순배(피아니스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독주회를 시작으로 20세기 현대 음악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레퍼토리를 소개하는 연주그룹 ‘오퍼스 원(OPUS 1)’을 결성하는 등 활발한 연주활동을 벌었다. 오퍼스 원이 국내 최초로 시도한 ‘해설이 있는 음악회’는 청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음악과 관련된 ‘글쓰기’에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는 그녀는 클래식 칼럼니스트 및 음악 평론가로도 친숙하다. 음악 관련 아티클 및 음반 리뷰, 연주회평을 기고하는 한편 KBS FM <실황음악회> 해설을 비롯하여 여러 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클래식을 알리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현재 한세대 피아노 페다고지 대학원 석·박사 과정 담당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경희대 대학원, 영남대 대학원 등에서 음악미학, 서양음악사, 피아노 교수학 등 전(全) 방위적인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클래식의 ‘클’자도 모르는 사람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계간지 《성서와 문화》에서 ‘음악편지’라는 꼭지로 나왔던 33개의 조각글들을 묶어 내놓은 책인데, 유려하게 뿜어나오는 깊은 내공이 담겨있는 클래식들의 이야기라 처음엔 황당할 정도로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이러저러한 사람이 있구나, 혹은 이러저러한 음악은 이렇구나 하는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로 여긴다면 못 읽을 정도까지는 아니겠다. 하지만 처음엔 정말 황당할 정도로 내가 놀 무리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프롤로그로 시작되는 그 짧은 글에도 나는 모르는 음악가나 곡을 13개나 찾을 수가 있었으니~! 그러니 내가 얼마나 클래식, 아니 음악에 문외한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또한 그럼에도 충분히 이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머릿속에 남은 음악가 하나가 없다. 읽고 싶은 것은 무한대로 생성되지만, 듣고 싶은 것은 드문드문 가뭄에 콩 나듯이 만들어지는 내 경우에는 그것이 타당할지도. 음, 아마 그러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그런 이유로 듣기에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흘러나오는 황송할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을 찾아 듣지도 못하고, 들어놓고서도 글로서든, 말로서든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조금 속상할 뿐이다. 뭔가 알아야 표현을 하지, 듣는 귀가 없는데 어떻게 표현을 하겠나. 책은 읽으면 바로 글이든 말이든 다른 이에게 전달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참으로 편리한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음악은 절대 편리한 매체는 아닌 듯 싶다. 하늘의 선택을 받은 몇몇 사람만이 재능을 부여 받아 연주할 수 있는 그런 도구로서는 어줍잖은 실력으로 표현하긴 좀 아쉽지 않나 말이다.

 

하지만 머릿속에 남는 음악가를 굳이 생각해내보라고 하면, 그녀가 그렇게나 심취했다던 메시앙 정도일까. 진짜 고전적인 인물들이 아니라서 더 생소했던 이름이라 더 머릿속에 박혔나보다. 그의 피아노곡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눈길〉은 처음 들었음에도 그녀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유를 했을 때부터, 그러니까 프롤로그에서부터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음악을 들어보진 못했어도 그녀가 표현하는 미사여구를 조금이라도 훔쳐볼라치면, 딱 머릿속에 박힐 수 밖에 없을만큼 형형색색인 이미지가 떠올랐기 때문에. 또한 기독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성탄의 의미를 항상 퇴색시켜 하루를 보내버리는 내게, 종교음악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20세기에서 유일하게 황홀한 영성의 음향을 만들어낸 메시앙은 상당히 의미있는 음악가로 기억되었다.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을 찾아낸 저자이자 피아니스트인 김순배 교수가 ‘영성’에 대해 관심이 생겨서 그녀의 눈에 작품이 들 수 있었던 덕분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가톨릭에 귀의해 20세기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일생을 파리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던 메시앙 그 작곡가 덕분이기도 하다. 그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모조리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바친, 실천적 사랑을 보여준 작곡가이기에 그의 음악이 한 세기를 넘어 김순배 교수에게 감동을 주고, 또한 음악을 들어보지도 못한 나에게도 반향을 일으킨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연주 시간만 장장 2시간에 이른다는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스무 개의 눈길〉은 역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예수님의 탄생을 지켜보는 각기 다른 스무 가지의 시선들을 무수히 다양한 음향으로 형상화했는데, 그것은 성부이신 아버지의 시선으로부터 어머니인 처녀 마리아의 시선, 그리고 탄생의 밤을 지켰던 하늘의 뭇 별들, 목자들, 동방박사들과 같이 쉽사리 인지할 수 있는 시선들로부터 추상적인 시간 그리고 어떤 침묵의 시선에 이르기까지 표현되었다고 한다. 설명을 들으니까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게 했다.

 

그 외에도 괴테를 존경해 그의 작품에 곡을 붙였던 슈베르트의 이야기라든지, 불운의 성악가였던 아내 니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조국 노르웨이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으로부터 음악을 뽑아낸 그리그의 이야기, 니체와 바그너의 불온한 만남과 결별에 대한 이야기, 전통 탱고에 클래식과 재즈의 빛깔을 덧입혀 새로운 개념의 음악, 즉 누에보 탱고를 만들어낸 피아졸라의 이야기, 우리나라의 대단한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의 이야기,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사랑하고도 내면으로 끊임없이 침잠해 들어가기만 했던 브람스의 이야기 등 여러 다채로운 이야기가 살아숨쉬고 있다. 우리에게 대단하게만 보였던 위대한 음악가들도 상처받고 실망하고 사랑을 하는 보통의 사람이라는 것을 가감없이 보여준 이 ‘음악편지’는 그런 이유로 음악에 문외한에게 더 필요하고 소통되는 글일 수밖에 없다. 나랑 다를 것 하나 없는 인간사 이야기를 음악이란 옷을 살짝 걸친 것뿐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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