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 세트 - 전2권
이윤기 지음 / 민음사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이윤기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번역작가이자 인문학적 글쓰기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문인. 난해하기로 이름난 세계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장본인으로, 지난 20여년 간 내놓은 번역서가 1백 50여권에 이른다. 그의 글들은 질적으로 아주 양호한 최상등품일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엄청난 속필다작이다. 1년에 열대여섯 권의 번역서와 소설, 산문집을 낼 정도니 알 만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에게 번역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 소설인데, 열 번쯤 되풀이해 읽은 후 번역에 들어가 1주일 만에 끝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작가의 학력을 굳이 따져보자면 ‘중졸’이다.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서른이 넘어 신학교도 다녔으니 ‘중졸’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여하튼 고등학교는 진학 후 두세 달 만에 작파했고, 그 후로는 모든 것을 독학으로 배우고 익혀 왔다.
그가 인문학의 바다에 처음 뛰어든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학비를 면제 받는 대신 교내 도서실 사서를 맡으면서, 물을 만난 고기마냥 도서관을 가득 메운 지식의 세계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었다. 이렇게 중학 시절에 이미 인문학의 단맛을 보아버린 이윤기에게 개발시대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육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도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직장생활을 한 것도 일생을 통틀어 딱 4년이다. 생활도 남들과 반대로, 조간신문을 읽고 취침해서 대낮에 일어난다.

1969년 국군 나팔수로 근무하던 그가 베트남전에 자원하여 참전했던 것도 별난 일이었고, 귀국 시 남들은 전자제품이다 뭐다 해서 한 밑천 장만해 오는데, 700여 권의 서양책들을 질머지고 돌아온 것도 별난 일이었다. 이 책들은 이윤기의 재산목록 1호가 되었으며, 그 중 여러 권이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내 학창시절부터 유난히 익숙하게 들려온 이름이 있다면, 바로 이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유명하면 유명할수록 보고 싶지 않다는 무식한 놈의 똥고집은 더욱 세어져 한 번도 그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유고작품이 되어버린 이 책이 내겐 첫 인연인 셈이다. 읽고 난 뒤에 느끼는 것은 역시 명불허전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값은 톡톡히 하는 이 작품으로 이제껏 이상하게 조각조각 알고 있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를 하나의 실타래로 이어냈다. 미궁 이야기는 알고 있으나 그 영웅의 이름은 모르고 있었던 테세우스 이야기나 그의 업적은 익히 들어왔으나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알지 못했던 알렉산드로스 이야기나 진정 공명정대했지만 한 노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 도편에다가 자신의 이름을 적어주었던 아리스테이데스 이야기도 새삼 정리가 되었고, 스파르타의 기틀을 만들어 500년 동안 안정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준 멋진 영웅 뤼쿠르고스 이야기나 현자의 대명사로 회자되는 솔론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까지 한 번에 꿰뚫을 수 있었다. 이만 하면 그의 의도는 충분히 잘 전달된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한자의 육탄공격에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서양 문화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여러 관용어구들이 사실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다 등장하는 표현법과 수사법이라 확실한 그 유래를 알고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자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책과는 달리,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어휘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실제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말 중에서 우리가 관용어구로 쓰지 않는 말이 어디 있겠나. 지금 막 생각나는 것만 해도, ‘아킬레스 건’이니  ‘피그말리온 효과’이니 하는 여러 종류의 용어들인데 말이다. 그러니 이윤기 교수가 의도해왔던 바는 충분히 전달해주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특히, 그리스어나 로마어를 영어로 변역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어휘들의 규칙들은 확실히 정립되었다. 그리스어 이름의 ‘~오스(os)’, 라틴어 이름의 ‘~우스(us)’는 영어로 번역될 때 ‘어(er)’로 바뀌는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영어로 ‘알렉산더’로 변역될 때 이미 알았던 사실이지만, 이렇게 쉽게 설명해주니 다시금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던 부분이었다.

 

예전부터 그리스 시대를 찬미해왔던 나로서는 이런 책이 정말 반가울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가장 꽃피웠던 시대도 고대 그리스였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학문의 분류도 또한 그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해놓은 것이었고,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명명되는 소크라테스 또한 그 시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니 우리의 학문 체계는 그 시대보다 더 앞서 있다고 말할 수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시대의 이야기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까 알게 된 것은,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도  ‘스파르타 식’이란 어휘가 가지고 있는 인식이 정말로 호되고 매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 마디의 말에 모든 함의를 품어놓을 수 있도록 ‘촌철살인’의 기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대단하게만 여기고 있던 아테나이의 민주주의가 사실은 말발이 좋은 선동가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중우정치에 더 가까웠고, 오히려 플라톤과 같이 대단한 철학자들이 찬양해마지 않았던 정치 형태는 스파르타 식의 왕정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람은 바로 ‘스파르타의 아버지’라 불리는 뤼쿠르고스이다.

 

뤼쿠르고스는 스파르타 왕의 동생으로, 자식이 없던 형이 죽고 난 뒤에 충분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사람인데 형수의 제의도 거절한 채 그저 섭정만 하려고 물러나 있었던 사람이었다. 결단코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 하나 남겨둘 생각이 전혀 없었던 사람으로, 스파르타가 잘 살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음식을 먹게 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지금 우리가 좋아하는 달콤한 후식은 기대할 수 없는 나라일지는 모르지만 그의 선견지명 덕분에 스파르타는 조용히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나라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음식만 먹을 수 있다고 법을 만든다면, 지금의 과소비나 사치, 도박 및 온갖 범죄가 과연 생길까 의문이 든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먹는 것은 똑같이 할당된 것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많은 돈이 무슨 소용일까. 입에서 사르르 녹는 케익이나 회, 한우 고기를 먹을 수 없다면 돈이 많은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쾌락을 느낄 뿐일 텐데. 과연 뤼쿠르고스는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런 법령을 제정할 수는 없으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공명정대한 아리스테이데스뿐일지 모르겠다.

 

자신의 정적조차도, 자신을 추방시켜버리는데 앞장 섰던 사람일지라도 조국에 도움만 된다면 기용해서 쓰는 사람인 그는 정말로 현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사로운 원한은 저멀리 치우고 나라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차치할지라도, 뇌물을 받지 않으며 공명정대하게 그 어떤 물질적인 즐거움을 누리지 않으려고 했던 공직자는 요즘 시대에는 정말 귀한 존재이니까 말이다. 얼마 전에 성남 시장이 5년 된 차를 6000여 만원의 체어맨으로 바꿨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더한 것도 다 해먹는 정치인들이 판을 치는 이 때에 진짜 별거 아닐 수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랏돈을 다 까먹고 모라토리엄을 제일 먼저 신청하는 잔머리 쓰는 성남시장을 보노라니, 공직에 앉아서 정말 청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옛말에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안 그랬을지라도 그 자리가 주는 유혹이, 주변에서 하던 관행이 공직자를 그렇게 만든 걸까. 그러니까 부정부패는 인간의 태생적 한계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자신의 장례 치를 돈조차 없어서 나라에서 대신 해주어야 했던 아리스테이데스 같은 이름난 공직자가 너무나 불쌍하다. 아무나 못하는 일을 그만 해낼 수 있어서 책에 그의 이름을 올라가는 일도 그가 원했던 일은 아니였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 그는 누구나 다 그처럼 행동해서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였길 바라지 않았을까. 모두다 그렇게 청렴하게 행동해서 그런 일이 기사화되는 일이 없는 그런 깨끗한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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