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과학을 탐하다 - 우리가 궁금해 하는 그림 속 놀라운 과학 이야기
박우찬 지음 / 소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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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예술의 전당 큐레이터를 지낸 박우찬 씨가 이번에는 ‘과학’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미술에 대해서 들고 나왔다. 이제껏 그의 책을 읽은 적은 없지만 과거에 출간한 책들을 보니까 번번이 좋은 화제성을 골라 책들을 출간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책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미술을 처음 접하는 청소년들이 과학과 밀접하게 접목된 미술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게 꾸며져 있어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의 눈높이에서 어려운 미술 사조들을 알기 쉽게 풀어준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쉽고 재미있고 좋은 책이라는 누군가의 추천평을 봤는데 정말 명불허전이었다. 나는 미술과 과학을 각각 따로 좋아했기에 골랐던 책이었지만 이렇게 미술이 과학적인 지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과학적인 방법은 오로지 원근법 하나만을 생각해왔던 나로서는 이 책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지식을 알려 주었다. 전체적으로 정리된 것도 쉽게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각 시대마다 유행했던 사조에 대해서 알기 쉽게 전달해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따라 읽어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바로크나 인상파 사조, 심지어 초현실주의가 왜 그런 이름이 붙었고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사조는 이해하기에 무척 어렵다고만 생각했던 터라 그 과정이 정말 쉬워서 놀라웠다.

그래서 특별하게도 이 책은 순서대로 읽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고지식했던 나는 모든 책을 처음부터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다양한 구성과 시도를 하는 책이 많아 ‘순서’를 꼭 살피게 되는데 이 책은 순서가 중요한 책이다. 읽다보면 순서대로 따라갈 수 있어서 따로 암기할 필요도 없이 그냥 머릿속으로 그냥 이해되어지는 책이다. 알고 있는 지식을 어렵게 쓰는 것은 쉬워도 알기 쉽게 쓰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이 저자는 대단한 내공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이전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많이 민망하다. 내가 청소년일 때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요즘 청소년들 중에는 교양도서를 많이 챙기면서 보는 것도 같다. 그들이 미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어도 과학이나 다른 상식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참 좋은 책이 될 것이다. 그 당시에 어떤 그림을 그렸고 어떤 기술을 사용했고 어떤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했는지를 알면 그 당시의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에서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다. 구교와 신교의 전쟁에서 이겨 신교들의 나라가 된 네덜란드가 왕과 귀족계급까지 없고, 성화를 중시하지 않는 신교 덕택에 많은 화가들이 굶어죽었던 반면, 똑같은 17세기의 다른 지역 즉 가톨릭권의 화가들은 유명하고 돈 잘 벌고, 높은 지위를 누렸다는 사실을 알면 종교나 정치 체계가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예술’이란 단어는 과거엔 없었고 그저 ‘기술’이란 단어에 통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미술이라는 영역이 복잡미묘한 성격을 가진 분야임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창의성이 중시되었다기 보단 처음에는 세밀하게 현실을 베껴그리는 기술적인 능력이 더 중시되었음을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후르륵 국수를 먹는 것처럼 휙휙 지나간다. 15세기 이전의 화가들이 생생하게 현실을 옮기려는 목적 하에 그림을 그려 생생하긴 했지만 원근법이 없어 실제와 같지는 못했는데 마사초가 처음 원근법을 사용해 16세기 르네상스를 열어, 길이와 폭이라는 이차원으로밖에 화면 공간을 인식하지 못했던 그때까지의 미술이 길이와 폭, 깊이라는 삼차원의 영역으로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17세기에는 물체의 질감까지도 재현하려는 바로크 미술이 등장하여 카이로스큐로라는 명암법으로 카라바조라는 천재 화가의 작품이 나타났고 카메라 옵스큐라의 등장으로 베르메르의 놀랍도록 사실적인 그림의 비밀도 풀어낼 수 있었다. 바르비종파로 대표되는 19세기의 객관적인 사실주의는 화가의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도록 사진처럼 묘사하길 원했다는 것, 사진의 발달이 인간에게 순간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주어 순간이나 빛의 인상을 파악하는 인상주의까지 일사천리로 전달된다. 그러나 미술 영역 중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꼽으라고 하면 피카소가 창시한 큐비즘부터 달리의 초현실주의, 미디어를 이용한 비디어아트 같은 현대미술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부분도 그게 그거 같아 보이는 내 눈에도 하나씩 구별해서 알려주어 쏙쏙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미술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과학도도 이제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다만 중요한 것은 예술적인 감성을 드러낼 수 있는 교육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아무래도 예술적인 소양을 깔아뭉개는 우리나라 교육 정책 하에서는 과학도나 선생님이 예술가가 되긴 어렵지 않나. 그래서 이것은 우리 각자 한 사람이 개선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자신의 예술적인 감성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것. 어릴 때 생각해보면 벽에 낙서하고 그림 그리는 것이 하루 일과였던 우리가 예술적인 감성이 없진 않을 거라는 반증이 아닐는지.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가능성이 무한대다. 이 책과 더불어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해나가는 것도 좋은 시간 보내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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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은 사랑 - 톤즈의 돈 보스코 이태석 신부의 강론 모음집
이태석 지음, 한국천주교살레시오회 정리 / 다른우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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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 톤즈>란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 이후에 MBC에서 스페셜로 나온 영상물을 편집한 것을 다른 경로를 통해 보게 된 이후에야 이태석 신부님을 알게 되었고, 그때서야 <울지마 톤즈>를 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홀홀단신으로 수단의 톤즈에서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이 신부님의 사랑을 보면서 예수님을 떠올린 것은 아마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용감히 그런 일에 뛰어들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기도 하고 말이다. 우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는 톤즈 사람들이 울면서 이 신부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에서는 마음이 짠해져서 정말 안타까웠다. 그가 없어진 병원이 텅 빈 것을 봤을 때도 안타까웠고, 지휘자 없는 브라스 밴드를 볼 땐 아쉬웠다. 그렇게 황망스럽게 암으로 이 신부님이 떠나신 이유는 분명 있겠지만, 인간이기에 그의 죽음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알의 밀알처럼 심어진 이태석 신부님 덕분에 세계 많은 곳에서 수단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신부님을 취재하러 간 MBC 팀이 이태석 신부님이 내주신 덕에 학교를 다니던 한 학생의 일 년치 학비를 대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분이었으니까. 어느 누가 취재하러 갔다가 후원까지 하고 온단 말인가. MBC의 예산도 부족하단 소리를 들었는데 말이다. 마음에 감동이 오는 것은 미리 와서 모든 것을 다 쏟으신 이태석 신부님 덕이 아닌가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도 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되고 그 사랑으로 움직여지는 것처럼 이제는 몇몇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님이 걸어가신 길을 보고 따라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이태석 신부님의 강론을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영상을 보았을 때 책도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이렇게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태석 신부님에 대한 책이 몇 권이 나온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태석 신부님을 소개하는 다른 책은 못 보고 그의 강론집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신부님의 말씀도 당연히 좋겠지만 그보다 더 이태석 신부님에 대해서 먼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말씀이 곧 하나님인 것처럼 이태석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에 대한 다른 사람의 기록보다 훨씬 생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묵직한 320페이지의 책 중 여러 페이지에 걸쳐 수단의 여러 사진이 수록되어 책이 예뻤던 것도 무시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생생한 사진과 더불어 그의 강론이 참 간단명료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주신 기도인 주기도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어느 순간부터 이 기도 말씀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죄를 사해 받은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를 드러내는 방법은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이란 것!! 어릴 때부터 입에 붙은 것처럼 외워서 그것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얼마나 묵직한지,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때가 있었다. 내가 사소한 것조차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죄인임에도 다른 사람의 실수를 곱게 보아 넘기지 못했다니...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이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도 마태복음 18장 21절~35절 말씀에 나온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의 비유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강론하셨다. 일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이고, 일 데나리온은 하루 품값이라면 현재 시세로 계산했을 때 일 달란트는 25억 쯤 된다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평생을 벌어도 일 달란트를 벌 수나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즉 일만 곱하기 25억이나 탕감해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용서를 못하면 그건 아니지~ 그 중 한 말씀이 내 시선을 끌었다. 용서는 잘못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를 회개로 이끈다는 말... 정말 많은 사람을 용서 못하고 살았다. 생각해보면 보잘 것 없는 내용이었는데... 가장 큰 것은 직장 상사였다. 내게 제대로 못했고 모든 실수를 했던 그 사람을 미워했던 것이 가장 미안하다. 예수님은 내가 회개해서 용서해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를 먼저 해주신 것이란 말씀은 정말 감사하다. 그래서 내가 오늘도 살고, 웃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이기에. 끔찍한 죄인인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 덕분이 아닌가. 절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처럼은 되지 말아야 한다.

 

각각 일자가 적혀있고 그에 대한 말씀이 짧게 두 장 정도의 분량밖에 안 되어서 아름다운 톤즈 사람들의 사진을 곁들이면서 하나씩 읽으면 좋다. 순서대로 볼 필요도 없어서 부담도 없고 성경 구절까지 옆에 제시되어 있어서 읽기에 편하다. 읽으면서 실제로 예수님처럼 살았던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본다면 우리의 삶도 점차적으로 나눔과 베품에 가깝게 가지 않을까 싶다. 내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위해 사는 삶,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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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의 엄마에게 - 아주 특별한 입양 이야기
이정애 지음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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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처음 제목을 들으면 사랑에 가득한 남편이, 딸을 낳아준 제 아내에게 사랑을 바치는 헌사쯤으로 여기기 쉽다. 솔직히 나도 편안하고 푸근한 여유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표지에 이끌려 따스한 이야기 좀 엿보고 싶어서 골랐던 책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도, 흔해빠진 사랑이야기도 아니다. 이 책에 붙어있는 부제처럼 아주 특별한 입양 이야기일 뿐이다. 입양한 엄마가 입양 보낸 엄마에게 보내는 공식적인 사랑 고백쯤으로 봐도 될까, 아니면 제 딸이 잘 지내고 있으니,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이만 마음을 놓고 제 딸을 데려가지 말라고 제 속내를 비치고 있을까.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건 입양에 대해서 쉬쉬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공개 입양을 하고도 전국적으로 입양한 것을 드러내는 그녀의 행보가 용기 있고 멋진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말한다. 입양된 제 딸이 불쌍한 것도, 입양한 제 가족이 특별한 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민효가 불쌍하거나 민효의 가족이 특별하지 않을 순 있겠지만 입양을 했고 입양의 어두운 그늘에 대해 과감하게 말하는 민효의 엄마, 이정애 씨가 용기 있다는 말에는 그녀 자신도 부인하지 못할 것 같다. 분명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행동한 그녀의 한 발자국은 우리나라의 어두운 입양 실태를 드러낸 하나의 행보임에는 사실일 테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하나의 주제를 가진 짧은 글들이 모여 구성된다. 각각의 짧은 글들이 따스한 아이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야기도 있고, 묵직해서 가슴을 치면서 읽어야 할 이야기도 있어 입양에 대해서 어두운 추억만을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 충분히 큰 울림을 줄 수 있겠다 판단된다. 일단 그녀는 두 사내아이의 엄마에, 한 남자의 아내에, 여러 학생들의 영어 선생님이자 영어 원장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생에, 사이버 대학의 조교에 다섯 가지 역할을 하느라 그녀의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간다. 아침에 아이들 깨워서 학교를 보내고 10시까지 청소하고 빨래하고 식사를 준비한 다음 12시에 출근해서 교재를 만들거나 학부모 상담하고 사이버대학 사이트에 들어가 첨삭하거나 일을 도와주고 6시부터 하루 6시간씩 영어를 직접 가르치고 나서 자정 쯤 집에 들어온다. 새벽 2시까지 공부 좀 하다가 자면 또 하루가 지나간 것이다. 24시간 중 한 시간조차 생필품 살 시간도 없어 모든 것을 다 인터넷 주문으로 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이다. 자신의 일을 사명처럼 여기고 세상에서 영어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일념으로 무엇이든 도전하는 그녀가 그 어렵고 힘들다는 입양을 결정한 것이었다.

 

입양은 누군가가 특별해서, 아이가 없어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몸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폐쇄적이고 혈연 중심인 민족은 없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입양이란 제도가 일상적이지 않게 된 것은 아닌지도. G7에 들어간 나라인 대한민국이 아직도 해외 입양 3위에 오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덩치만 컸지, 속 알맹이는 아직 애기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 성장해서 잘 먹고 잘 살자, 그것이 혹 나만이라도 빨리 잘 살자하며 경쟁적으로 경제 발전만 이뤄냈지, 그 밖의 정치, 문화나 도덕, 준법, 공동체 의식은 많이 희박하다. 이렇게 수준은 높아졌지만 기부 문화도 발달되어 있지 않고, 정치권부터가 청렴하지 못하지 않는가. 어린 아이들조차 정치인들을 싫어하고 아무도 어릴 때 정치인이 장래희망이라고 적어내는 사람부터가 없는 나라인데, 다른 것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잘못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나라에서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에 대한 자부심이라도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도 눈을 떠야 할 때이다. 입양은 아무도 모르게 해왔기에 입양한 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정책을 바꿔달라고 요구하지도 못했던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 어떤 이유로라도 비밀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이사를 가고 학교를 바꿔도 어느 순간 입양 사실이 밝혀질 위험을 내포하지 말고 처음부터 떳떳하게 입양 사실을 밝히고 입양한 부모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정책을 만들어가는 것도 필요하겠다.

 

나는 가끔 드라마에서 숨겨진 출생의 비밀이 나올 때마다 궁금했던 사실이 있다. 누군가가 남자 몰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아이들이 많다면 나중에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막장 드라마처럼 자신의 혈육에게 사랑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외국에는 이혼한 사람들도 많고 미혼모도 많다는데 그렇게 미혼모로 낳거나 이혼한 부모의 자녀들이 다른 이복 형제를 배우자로 만날 가능성이 많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근친상관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런 혈육 간에 태어난 아이는 유전적 질환을 안고 태어날 가능성이 많은데 이것을 어떻게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정애 씨도 그런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입양 절차가 무척이나 쉽고 사후 관리도 전혀 안하면서 끔찍하게도 보호하는 대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입양아의 생모의 정보이다. 입양된 아이가 병력이 있을 수도 있고 특수한 혈액형을 가질 수도 있는데 절대로 생모를 알려주지 않는다. 혹시라도 아이가 큰 다음에 드라마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어 생부의 성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했는데도 기관에서는 알려주지 않더란다. 외국에는 아예 입양아의 병력 때문에 생모와 연락까지 하면서 지내기도 한다던데 우리나라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쓸데없는데 힘을 많이 쓴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삼십 대 한 여성이 입양아 두 명과 친딸을 장염으로 죽이고 보상금을 타먹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원래는 입양을 하기 위해서는 2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나라에서 입양이 활성화시키기 위해 이것을 보조해주기 때문에 이런 범죄가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아무도 입양을 시켜놓고 사후 관리를 하지 않으니 아이가 죽어나가는지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아이를 안전하게 키우기 위해서 최소한의 정보조차도 공개하지 않는 기관과 정부는 죽어간 세 아이의 생명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이정애 씨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

 

처음엔 단순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야기 같았던 작고 예뻤던 책이, 훨씬 더 큰 울림을 주는 사회적인 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입양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미혼이라 시도는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입양했을 경우 사람들에게 입양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놓는 순간 싸해지는 분위기 있다는 그녀의 말로 미루어 보아,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수많은 문제가 있음을 암시해주는 것 같아서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쉽게 생각하고 내 일이 아니기에 무심히 넘기는 그곳에서 사회적 약자는 아파하고 있다는 진리를 가슴에 새기고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혹시 누군가 내 주변의 사람이 입양을 했다면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지지해주는 역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결혼하면 입양도 고려해보고 싶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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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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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지나고 나서 결별을 한 프랑스의 지성 카뮈와 사르트르는 사실 한 번도 작품으로 만난 적이 없는 대가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나름 프랑스의 지성이라고 하는 대가들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나 <구토>는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라 이 글을 읽고도 그들의 작품을 찾아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게는 아직 부조리나 실존주의라는 단어가 낯설기에 아마도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긴 어렵다는 작품을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우리 삶에서는 얼마나 많은 부조리가 있는지 주위만 둘러보면 쉽사리 알 수 있기에 작품 속에서는 왠지 유쾌하고 재미있을 것 같은 내용만 접하고 싶을 때가 많다. 언젠가 내가 썼던 서평 속의 한 구절처럼 ‘비루하고 처참한 현실을 잊고자’ 책을 읽을 때가 많지 않은가. 그 때는 삶의 불편한 진실들을 애써 보지 않으려 발버둥쳤던 때가 아닌가 한다. 삶이란 불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고 그것을 메스로 도려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임에도 나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처럼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이방인’처럼 살고자 했던 것이다.

 

내 삶이 거의 부조리와 실존을 부르짖고 있으니, 굳이 이 책들은 보지 않아도 되겠다. 하지만 두 거장의 만남과 헤어짐은 왠지 내 흥미를 끌었다. 작품 속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작가들을 실생활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기쁨과 그들이 만나고 서로에서 영향을 주고 끝내 결별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행보들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 중에는 어느 누구 하나 완벽할 수는 없다는 만고 불변의 진리를 다시금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이렇게 다시 소화된 글을 남기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일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글을 잘 써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이때까지 한 번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이나 소망을 가진 적 없이 살아온 터여서 그런 욕망이 참 낯설게도 느껴지지만 글을 읽으면서 ‘세상에는 글 잘 쓰는 사람이 참 많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 많은 사람들 무리 중에 나도 끼어보고 싶단 욕망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습작을 하는 등의 노력은 전혀 하고 있지 않으니, 이것은 완전 공짜로 얻으려는 놀부 심보이렷다. 어쨌든 이렇게 글을 잘 쓰는 능력을 가진, 특별하게만 보이는 작가들의 내면이나 생김새, 고민과 욕구 등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만은 솔깃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소설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쓴 그 작가에게 더 많은 관심이 있다. 소설이라는 허구적인 공간 안에서 하나의 생명체를 창조하고 그것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사람들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능력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하고.

 

게다가 이 두 거장, 카뮈와 사르트르는 단지 소설 나부랭이만 쓰는 사람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몇 년간 하이데거와 후설의 현상학을 연구하여 철학교수 자격까지 갖춘 사람이고, 카뮈도 철학을 전공한 아마추어 철학가였기에 그들이 말하고 싶은 ‘실존주의’에 대해서 얼마든지 소설적 언어로 요리할 수 있는 천재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들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행보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지도 모르겠다. 카뮈가 1960년에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현재 사르트르의 주장에 비중이 더 많이 실린 것에 대해 확실한 방어를 할 수 있었겠지만 역시 죽은 자는 말이 없는 터라 현재로서는 사르트르에게 쏠린 비중을 어찌할 수 없다. 카뮈 본인도 인정하다시피, 사르트르는 비평적 명료함으로 여럿 사람들을 울린 전적이 있다. 특히 카뮈 자신이 그가 자신보다 논리적인 명석함이야 물론 인정하지만 자신의 작품이 그에 의해 평가받을 때는 그의 신랄한 비평에 좋지 않은 감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은 상대방의 작품, 즉 <이방인>과 <구토> 등을 통해 서로를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미 유명한 대가의 반열에 올랐던 사르트르가 열한 살이나 어린 열정적인 소설가인 카뮈의 사상에 반색을 하며 그를 대가의 반열로 이끌어주기도 했다.

 

서로에게 공통된 화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실존주의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작품 속에 등장했던 실존주의를 드러내기 위한 여러 장치에 대해 서로 칭찬하고 호의를 보여주었던 그들의 동행은 냉전시대를 맞이하여 끝날 수 밖에 없게 된다. 혹자들은 그들이 처음부터 가진 배경으로 인해 모순을 안고 끝날 수 밖에 없는 관계를 지속시켰다고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둘의 사상은 비슷했다. 정치적인 성향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던 카뮈는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나치군에게 반발하는 신문의 편집을 맡으며 자신의 비폭력주의적인 정치 노선을 드러냈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훨씬 명성이 컸던 사르트르는 전쟁 중에는 그다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성적이고 이론적이기만 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그의 행동은 굼떴는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파리떼>라는 희곡 작품을 통해 정당한 이유가 전제된 폭력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 아마도 카뮈와의 결별이 된 이유였을 것이다. 카뮈는 전쟁이 끝난 후 큰 반향을 일으켰던 <한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프랑스인들이 폭력을 싫어하며 전쟁에서 독일에게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지런히 소개하고 있다. 목적이 있다면 폭력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사르트르와는 달리, 카뮈는 폭력이 야기할 수 있는 금전적이고 정신적인 부정적 영향에 대해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 드러난 관점의 차이는 냉전이 지속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서로의 관점을 인정하면서 서로에게 배울 수도 있었던 동맹이었지만 그들의 결별은 자기 기만적인 주장에 대해서 포기할 여지를 두지 않았던 것이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존주의계의 거장들의 만남이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되었을까. 그것은 모르겠지만 그들의 투쟁도 그들 자신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카뮈가 불의의 사고로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의 나중에는 서로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는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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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임재 연습 -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발견하기
앤드류 머레이 지음, 정혜숙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의 책으로서는 놀라울 정도 쉬운 책이었다. 다른 분들의 임재연습은 솔직히 내 지적 수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내용이었다면 이 책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아주 쏙쏙 들어왔다. 형체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존재로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님도 매한가지이지만 성령님이라는 분은 구약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존재이셨는데다가 예수님의 대단한 제자들조차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전까지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존재이어서 그런지 누구에게나 똑같이 모르는 것이라 더 쉽게 설명하시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성령 충만 없이는 하나님을 열망할 수도, 찾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성령 충만 받기를 기대하고 갈망해야 한다는 강한 말씀을 던져주시고 계신다. 많은 교회가 성령 충만 받기를 열망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에 대한 체념이나 과도한 경건주의를 지키고 있다고 하셨다. 과거에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쉽게 체념해버린다거나 교회 내에서 능력이 부족함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이다. 두세 사람을 만나면 조직에 대해, 체제에 대해, 나라에 대해 쉽게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것이 과도해지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위대한 진리를 그들 스스로가 내던지고 말거라면서 경고를 해주셨다. 불평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행했던, 하나님께 불순종한 가장 극명한 증거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고 스스로 패역해지는 것이다. 청년국 목사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말씀은, 진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삶 속에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십자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믿는 자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하길 기대하고 열망하며 그것을 소원하기 위한 마음으로 바꿀 수 있도록 주께 의지해야 한다.
 
여호수아서에서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인,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다”고 미래 시제와 완료 시제가 한 문장에 같이 나오는 것처럼 이미 약속은 선포되었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축복을 마음껏 주시길 원하신다. 하지만 이미 선포된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것을 갖기 위해 스스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선하신 것처럼 선할 수 있는지,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지를 훈련해가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없기에,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죄는 안 되기에 우리를 빚어가시고 다 빚어가실 때에 우리는 그 약속의 성취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런 식으로 문법상으로 말이 안 되는 구절들이 많이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기도 하는데 이 책을 통해 성령을 충분히 받게 되면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까지 다 풀리게 된다고 하셨다. 성령 충만 받기를 소망해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말하므로 갈라디아서 2장 22절의 말씀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맞게 된다. 내가 속해 있는 장로교에서는 이런 신비로운 것을 많이 강조하지 않는다. 보수적인 곳이라 그렇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성령님을 모시는 것은 꼭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도행전 1장 8절에서처럼 우리가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우리의 지각 능력으로 보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영적으로 고차원적인 것으로 우리가 받았음을 느끼면서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시시때때로 내가 받은 크나큰 축복에 감사하며 열망으로 다가가지만 그것이 느껴지지 않음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흔들리지는 않는지 점검해야 한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의심하고 퇴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마음을 주신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 안의 성실함을 굳게 잡으라고 조언한다. 이렇게 묵묵히 따라감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자아에 대해서 가르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뿌리 박힌 본성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을 봐야 한다. 사소한 말이나 행동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얼마나 쉽게 방해하는지 알아야 한다. 친구 사이끼리의 불일치나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는 가고 싶지 않아 하는 과도한 민감성이나 야망에 대한 묵시적 타협, 혹은 내 것인 양 사용하는 세상의 제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로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채 순종하며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훈련을 담금질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처럼 우리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포용하며 긍휼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상당히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일부러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해도 된다고 여겼던 탓이었다. 교회 생활과 일상 생활을 완전히 분리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도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아주 순간적으로 드는 악한 생각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가만 두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 사소해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성령님의 임재를 막을 수도 있으니 결단코 조금의 악도 허용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다짐만 한다고 해서 실행할 수 있는가. 이도 하나님께 묵상으로 다가가며 내 안의 죄를 도말해달라고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어떤 책에서럼 내가 패역함을 깨달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도망가지 말고 오히려 뻔뻔하게 나가서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니 긍휼만을 구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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