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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임재 연습 -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발견하기
앤드류 머레이 지음, 정혜숙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의 책으로서는 놀라울 정도 쉬운 책이었다. 다른 분들의 임재연습은 솔직히 내 지적 수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내용이었다면 이 책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서 그런지 아주 쏙쏙 들어왔다. 형체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존재로서는 하나님이나 예수님도 매한가지이지만 성령님이라는 분은 구약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존재이셨는데다가 예수님의 대단한 제자들조차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전까지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존재이어서 그런지 누구에게나 똑같이 모르는 것이라 더 쉽게 설명하시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성령 충만 없이는 하나님을 열망할 수도, 찾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성령 충만 받기를 기대하고 갈망해야 한다는 강한 말씀을 던져주시고 계신다. 많은 교회가 성령 충만 받기를 열망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에 대한 체념이나 과도한 경건주의를 지키고 있다고 하셨다. 과거에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쉽게 체념해버린다거나 교회 내에서 능력이 부족함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이다. 두세 사람을 만나면 조직에 대해, 체제에 대해, 나라에 대해 쉽게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것이 과도해지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위대한 진리를 그들 스스로가 내던지고 말거라면서 경고를 해주셨다. 불평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행했던, 하나님께 불순종한 가장 극명한 증거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고 스스로 패역해지는 것이다. 청년국 목사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말씀은, 진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삶 속에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십자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믿는 자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하길 기대하고 열망하며 그것을 소원하기 위한 마음으로 바꿀 수 있도록 주께 의지해야 한다.
여호수아서에서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인,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다”고 미래 시제와 완료 시제가 한 문장에 같이 나오는 것처럼 이미 약속은 선포되었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축복을 마음껏 주시길 원하신다. 하지만 이미 선포된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것을 갖기 위해 스스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선하신 것처럼 선할 수 있는지,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지를 훈련해가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없기에,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죄는 안 되기에 우리를 빚어가시고 다 빚어가실 때에 우리는 그 약속의 성취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이런 식으로 문법상으로 말이 안 되는 구절들이 많이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기도 하는데 이 책을 통해 성령을 충분히 받게 되면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까지 다 풀리게 된다고 하셨다. 성령 충만 받기를 소망해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말하므로 갈라디아서 2장 22절의 말씀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맞게 된다. 내가 속해 있는 장로교에서는 이런 신비로운 것을 많이 강조하지 않는다. 보수적인 곳이라 그렇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성령님을 모시는 것은 꼭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도행전 1장 8절에서처럼 우리가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우리의 지각 능력으로 보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영적으로 고차원적인 것으로 우리가 받았음을 느끼면서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시시때때로 내가 받은 크나큰 축복에 감사하며 열망으로 다가가지만 그것이 느껴지지 않음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흔들리지는 않는지 점검해야 한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의심하고 퇴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마음을 주신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 안의 성실함을 굳게 잡으라고 조언한다. 이렇게 묵묵히 따라감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자아에 대해서 가르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뿌리 박힌 본성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을 봐야 한다. 사소한 말이나 행동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얼마나 쉽게 방해하는지 알아야 한다. 친구 사이끼리의 불일치나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는 가고 싶지 않아 하는 과도한 민감성이나 야망에 대한 묵시적 타협, 혹은 내 것인 양 사용하는 세상의 제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로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채 순종하며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훈련을 담금질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처럼 우리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포용하며 긍휼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면에서 상당히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일부러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해도 된다고 여겼던 탓이었다. 교회 생활과 일상 생활을 완전히 분리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도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아주 순간적으로 드는 악한 생각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가만 두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 사소해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성령님의 임재를 막을 수도 있으니 결단코 조금의 악도 허용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다짐만 한다고 해서 실행할 수 있는가. 이도 하나님께 묵상으로 다가가며 내 안의 죄를 도말해달라고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일일 것이다. 어떤 책에서럼 내가 패역함을 깨달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도망가지 말고 오히려 뻔뻔하게 나가서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니 긍휼만을 구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