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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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냉전이 지나고 나서 결별을 한 프랑스의 지성 카뮈와 사르트르는 사실 한 번도 작품으로 만난 적이 없는 대가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나름 프랑스의 지성이라고 하는 대가들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나 <구토>는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라 이 글을 읽고도 그들의 작품을 찾아볼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게는 아직 부조리나 실존주의라는 단어가 낯설기에 아마도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긴 어렵다는 작품을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우리 삶에서는 얼마나 많은 부조리가 있는지 주위만 둘러보면 쉽사리 알 수 있기에 작품 속에서는 왠지 유쾌하고 재미있을 것 같은 내용만 접하고 싶을 때가 많다. 언젠가 내가 썼던 서평 속의 한 구절처럼 ‘비루하고 처참한 현실을 잊고자’ 책을 읽을 때가 많지 않은가. 그 때는 삶의 불편한 진실들을 애써 보지 않으려 발버둥쳤던 때가 아닌가 한다. 삶이란 불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고 그것을 메스로 도려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임에도 나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처럼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이방인’처럼 살고자 했던 것이다.

 

내 삶이 거의 부조리와 실존을 부르짖고 있으니, 굳이 이 책들은 보지 않아도 되겠다. 하지만 두 거장의 만남과 헤어짐은 왠지 내 흥미를 끌었다. 작품 속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작가들을 실생활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기쁨과 그들이 만나고 서로에서 영향을 주고 끝내 결별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행보들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 중에는 어느 누구 하나 완벽할 수는 없다는 만고 불변의 진리를 다시금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이렇게 다시 소화된 글을 남기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일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글을 잘 써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이때까지 한 번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이나 소망을 가진 적 없이 살아온 터여서 그런 욕망이 참 낯설게도 느껴지지만 글을 읽으면서 ‘세상에는 글 잘 쓰는 사람이 참 많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 많은 사람들 무리 중에 나도 끼어보고 싶단 욕망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습작을 하는 등의 노력은 전혀 하고 있지 않으니, 이것은 완전 공짜로 얻으려는 놀부 심보이렷다. 어쨌든 이렇게 글을 잘 쓰는 능력을 가진, 특별하게만 보이는 작가들의 내면이나 생김새, 고민과 욕구 등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만은 솔깃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소설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쓴 그 작가에게 더 많은 관심이 있다. 소설이라는 허구적인 공간 안에서 하나의 생명체를 창조하고 그것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사람들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는 능력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하고.

 

게다가 이 두 거장, 카뮈와 사르트르는 단지 소설 나부랭이만 쓰는 사람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몇 년간 하이데거와 후설의 현상학을 연구하여 철학교수 자격까지 갖춘 사람이고, 카뮈도 철학을 전공한 아마추어 철학가였기에 그들이 말하고 싶은 ‘실존주의’에 대해서 얼마든지 소설적 언어로 요리할 수 있는 천재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들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행보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지도 모르겠다. 카뮈가 1960년에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현재 사르트르의 주장에 비중이 더 많이 실린 것에 대해 확실한 방어를 할 수 있었겠지만 역시 죽은 자는 말이 없는 터라 현재로서는 사르트르에게 쏠린 비중을 어찌할 수 없다. 카뮈 본인도 인정하다시피, 사르트르는 비평적 명료함으로 여럿 사람들을 울린 전적이 있다. 특히 카뮈 자신이 그가 자신보다 논리적인 명석함이야 물론 인정하지만 자신의 작품이 그에 의해 평가받을 때는 그의 신랄한 비평에 좋지 않은 감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은 상대방의 작품, 즉 <이방인>과 <구토> 등을 통해 서로를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미 유명한 대가의 반열에 올랐던 사르트르가 열한 살이나 어린 열정적인 소설가인 카뮈의 사상에 반색을 하며 그를 대가의 반열로 이끌어주기도 했다.

 

서로에게 공통된 화제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실존주의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작품 속에 등장했던 실존주의를 드러내기 위한 여러 장치에 대해 서로 칭찬하고 호의를 보여주었던 그들의 동행은 냉전시대를 맞이하여 끝날 수 밖에 없게 된다. 혹자들은 그들이 처음부터 가진 배경으로 인해 모순을 안고 끝날 수 밖에 없는 관계를 지속시켰다고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둘의 사상은 비슷했다. 정치적인 성향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던 카뮈는 2차 세계대전 중에도 나치군에게 반발하는 신문의 편집을 맡으며 자신의 비폭력주의적인 정치 노선을 드러냈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훨씬 명성이 컸던 사르트르는 전쟁 중에는 그다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성적이고 이론적이기만 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그의 행동은 굼떴는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파리떼>라는 희곡 작품을 통해 정당한 이유가 전제된 폭력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던 것이 아마도 카뮈와의 결별이 된 이유였을 것이다. 카뮈는 전쟁이 끝난 후 큰 반향을 일으켰던 <한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프랑스인들이 폭력을 싫어하며 전쟁에서 독일에게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지런히 소개하고 있다. 목적이 있다면 폭력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사르트르와는 달리, 카뮈는 폭력이 야기할 수 있는 금전적이고 정신적인 부정적 영향에 대해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 드러난 관점의 차이는 냉전이 지속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서로의 관점을 인정하면서 서로에게 배울 수도 있었던 동맹이었지만 그들의 결별은 자기 기만적인 주장에 대해서 포기할 여지를 두지 않았던 것이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존주의계의 거장들의 만남이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되었을까. 그것은 모르겠지만 그들의 투쟁도 그들 자신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카뮈가 불의의 사고로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의 나중에는 서로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는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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