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키나와 코코로 - 후지타 사유리의 도쿄, 오카나와 감성 방랑기
후지타 사유리 지음, 김지영 외 옮김 / (주)하서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미수다에 나온다는 후지타 사유리라는 사람을 알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TV에서 본 적은 없었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다느니 하고 들었었는데 그런 그녀가 일본을 소개하는 책을 냈다고 해서 호기심에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히 일본을 여행할 수 있는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해선 안되는 게, 여행 정보를 제공한다기 보단 사유리의 독특한 내면을 보여주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제도 독특하지 않는가. <후지타 사유리의 도쿄 & 오키나와 감성 방랑기>라니... 이 책을 열어보면 알겠지만 정말 독특하다. 그녀를 처음 보는 나는, 처음 책을 펼쳤을 땐 우와~ 어쩜 이렇게나 아름다운 여성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멍하니 빠져들었다. 동양인이긴 하지만 시원스레 뻗어나온 콧망울과 큼직한 눈매에 티 하나 없이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에다 기럭지까지도 길죽하다니... 정말 하나에서 열까지 부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좀더 책장을 넘겨다 보면 에게~ 이게 모야~~하는 엽기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 그녀의 돌출행동에 처음엔 적응이 안 되었었다. 뭐, 물론 촬영하기 위한 의도가 들어가있겠지만 왠지 그게 그녀에게 일상 모습일 거란 느낌이 드니... 역시 사람은 외모만 보고 판단해선 안돼~~~!! ㅋㅋㅋ 엉뚱하지만 명랑한 그녀의 오키나와 이야기를 들으러 가볼까...
 
바닥에서 뒹굴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다.
눈을 감고 양손을 올리면
자, 하늘을 만질 수 있어.
 
부드러운 하늘은
지금 내 양손 안에 있다.
이 하늘을 누구에게 주지?
 
  
 
 
오키나와는 원래는 '류큐왕국'이라는 나라였었는데 일본 정부에게 진압되어 지금은 일본 땅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일본인이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니 책을 읽으면서 의아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도저히 일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하얀 백사장에 에메랄드빛 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열대과일까지 있어서 완전히 열대지방의 어느 해안 같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봤을 때는 일본을 구성하는 네 개의 큰 섬 옆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섬이겠거니 했었는데 지도를 찾아보니 일본하고는 완전히 동떨어진 적도 부근에 있는 섬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역도 일본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중이던 1944년에는 오키나와의 중심 도시인 나하의 90퍼센트가 파괴되었는데 일본 군부가 본토까지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오키나와를 방패막이로 사용했던 것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오키나와를 '버려진 돌'이라고 표현한다는데 안타깝다.
 
고인 물에 비친 구름이 부끄러운 듯이 흔들리고 있다.
조금 전까지 계속 비가 내렸다는 게 거짓말 같다.
그래도 내 샌들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젖은 발끝은 아직 마르지 않았어.
신선한 풀냄새가 피어오른다.
비의 습기가 섞인 풀냄새가 좋아.
오키나와의 날씨는 재미있다.
하늘은 맑은데,
비는 그런 건 내가 알 바가 아니라는 듯이 지면에 떨어진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웃으며 눈물을 쓰-윽하고 훔쳐내는 사람을 상상하곤 한다.
 



 

오키나와에서는 <별모래>라고 불리는 하얀 모래가 있다. 정말 하나하나가 다 별 모양으로 생겼다는데 실은 유공충의 껍질이다. 유공충은 바다에서 떠다니면서 살아가는데 죽으면 하안 색의 별처럼 생긴 유공충의 껍질만이 해안가로 밀려온다고... 허나 멀리 떨어진 섬에서야 볼 수 있기 때문에 무지 귀하단다.... 정말 갖고 싶당~~ㅎㅎ 그런데 열대에 가까운 기후 덕에 정말 신기한 먹거리가 많다. 특히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꼭 오키나와에 가보고 싶어졌다. 과일 먹으러~~ㅋㅋㅋ 실제로 가볼 수나 있을까 싶지만.. 복숭아 향기가 나는 피치파인도 있고 손으로 뜯어먹을 수 있는 스나크파인도 신기하다. 더더군다나 아이스크림 맛이 나는 아테모야라는 과일도 있다니...쓰읍... 군침이 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물건은 잃어버리지 않게
이름을 써 놓으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 말을 잘 들어서 가방과 크레용,
그림책과 시게, 물건이란 물건엔
모두 이름을 써 넣었다.
하지만 어제 흘려버린 눈물과
겨울의 하얀 입김,
그 사람을 생각하는 애처로운 마음에는 어떻게 써 넣으면 좋은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 그 때보다 조금 어른이 되어 깨달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름을 써 놓는 것이 아니라
두 팔로 살포시 안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사유리의 감성 방랑기라 그런지 이 책엔 이쁜 말들이 참 많다. 그거 하나만을 가지고도 계속 생각해보고 음미해볼 말들이 있어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부담없이, 아니 냉큼 가져오려고 할 것이다. 여기에 조금 소개해 볼까.
 
하늘에 별이 피어있습니다.
별은 어떤 향기가 날까요.
분명 내가 아직 모르는 향기가 날겁니다.
 
내 손으로 별을 따고 싶어. 더러워진 이 두 손으로.
달콤한 향기가 나는 별을...
희망의 향기가 나는 별을...
지상에 있는 별은 이미 시들어 버렸어.
전쟁으로 모두 타버렸어.
 
하늘에는 이렇게 별이 피어있는데
내 손에는 닿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진과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갑자기 내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만든 사진이 있었다. 바로 사유리가 꽃밭 옆의 아스팔트 길 위에 벌렁 드러누운 포즈의 사진!!! 표정은 아련하고 상큼하기에 이를 데 없지만 그 꼬락서니가 뭐란 말이냐~~!! 이런 사진들이 종종 등장한다. 아리따운 치마에 높은 구두를 신고 사다리를 타거나 담을 기어올라가는 모습이거나 이차선 도로에서 중앙선을 기점으로 반듯하게 엎드려 눕는 모습이거나 토끼옷을 입고 도쿄 지하도를 누비고 있는 모습은 정말 기상천외하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아무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 일본 사람들은 이상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저 그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니 정말 신기하다. 사유리도 말하길, 거기가 한국이었다면 핸드폰 사진으로라도 마구 찍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래서 느꼈다. 사유리는 한국을 많이 이해하고 있구나~~~~
 
오늘 밥은 안경을 끼고 잔다.
꿈이 잘 보이도록.
오늘밤이야말로 꿈에 그가 나왔으면 하고,
창문 밖의 별똥별에게도 빌어 놨고.
 
빗으로 머리도 곱게 빗었고, 사과 향의 립 밤도 발랐다.
준비 오케이.
 
그런데... 당신이 내게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
잠옷을 입은 채여도 괜찮을까요? 
  
 
 
도쿄에서는 그냥 논다. 빠징코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아까 말했듯이 토끼 옷을 입고 활보하기도 하고 세탁기가 집 인 양 들어가보기도 하고 오타쿠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기도 하는 등 엽기적인 그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보다도 내게 강한 인상을 줬던 것은 짤막한 이야기 몇 편이었다. 후기를 보니까 모두 사유리가 썼던 것 같던데 충격적인 소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예를 들어, 철없이 학창 시절을 낭비하는 여고생이야기나 부모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는 아들이야기나 이유없이 불특정 다수를 죽이려드는 한 삐뚤어진 남자이야기,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희생한 창녀이야기.... 사유리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하던데 내가 읽기엔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내용은 별로 없었다. 너무 망가져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다시금 본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 나는 아마도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 눈 앞에만 안 보이면 다른 나라에서나 다른 지역에서나 뭔 사건이 일어나든, 어떤 재해가 발생하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 이 이야기 속에서 나는 다시금 눈을 돌릴까 어쩔까.
 
사유리가 했던 이야기 중에 이 말이 제일 가슴에 와 닿는다.
 
세상에 욕을 하는 사람과 욕을 먹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다면, 나는 욕을 먹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왜냐하면 욕을 하는 사람들은 과격한 표현의 말이나 글로 다른 사람을 더럽히고, 그 사람의 가치를 깎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깎기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더럽혀지는 것 또한 본인이다.
결국, 누워서 뱉은 침이 얼굴에 떨어지는 격이다.
 
한국에서 반일시위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본의 국기를 불태우고, 일본을 규탄한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진정 일본에게 타격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런 행위는 한국 사회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한국을 더럽힌다.
왜냐하면 일본의 양심을 일깨우고 일본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과거에 행한 과오에 대한 자발적인 인식뿐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서 이미 더럽혀져 있다.
....(중략)....
외부의 힘에 의해서 더럽혀진 것은 진정 더럽혀진 것이 아니다.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내면의 소리를 외면했을 때, 그 사람은 더러워진다.
 
자신의 나약함으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진정한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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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불교와 만나다
유응오 지음 / 아름다운인연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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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나에게 무속신앙과 동급으로 생각되는 종교다. 그만큼 나는 불교에 무지하다. 그러나 우리네 삶 속 어딘가엔 불교의 진리가 살아 숨쉬기에, 그리고 불교의 교리를 백퍼센트 찬성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는 수긍하기에 만만하지만 절대로 만만하지 않은 영화로 보고 싶어졌다. 빳빳한 광택 종이를 사용해서 그 내용만큼이나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 책은 처음 봤을 때 정말 쉽게 넘겨볼 수가 없었다. 뭔가 아주 심오할 거란 예상을 하게 했기에.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말 내 예상대로 아~~주 어려웠다. 아마도 이 책의 반은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진흙 속에서 연꽃은 피어나고, 관세음보살은 바세계- 사바세계가 도대체 뭐야?음..고통의 세계라네..내가 살고 있는 현 세상을 말하는 건가? - 머문다. 평상심시도. 울울창창한 숲에서 대자연의 모음- 도대체 모음은 무슨 뜻? - 배운다. 인간의 시간, 혹은 일념즉시무량겁 - 오호, 요건 찾아봤다.. 단 한 번 망상을 일으켜도 헤아릴 수 없이 오랜 동안 걸쳐서 그 응보를 받는 일이라고 하네? -

 

요런 말을 들어는 보셨는지.. 이게 제목으로 나와있는데 정말 무슨 뜻인지...도통 모르겠다. 고교시절에 윤리과목을 배우면서 불교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도 깜짝 놀랐었다. 평소 많이 접하던 것이었기에 만만하게 여겼는데 이게 왠걸~ 오히려 서양철학보다 더 어렵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궁금한 질문 한 가지! 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그냥 알아들을 수 있나? 진짜 궁금하다. 이걸 다 이해하면 웬만한 윤리교사는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어쨌던간에 나는 영화에 중점을 두기로 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 몇 편만 말하고 말아야겠다. 아무래도 내 무식만 통통 튈 것 같기 때문에..ㅋㅋㅋ

다른 것은 다 필요없고 내가 여기에 나온 많은 영화에서 가장 열광했던 것은 애니메이션이다. 바로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 애니메이션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팬이다 보니까 요 영화 두편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두말하지 않고 이 책을 고르게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책을 읽다보니 내가 이 두 영화를 끝까지 다 못봤단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다 못봤던 건지 아님 기억을 못하는 건지...<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집에 소장하고 있는데 이 두 개의 애니메이션은 미처 소장하지 못했으니 이런 불충이.. 어쨌거나 두 영화 모두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인데 미야자키 감독이 말하길 자신은 '자연친화적'인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선악 너머에 있는 자연의 생명력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니 이 영화의 결말이 이해가 된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서 공주인 나우시카가 희생을 해서 멸망을 막고 자연은 희생은 나우시카를 되살려주는 내용인데 이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환경 파괴에 대한 내용이라기 보다는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아들어가지 않나. 또 박규태 교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생각하는 숲의 모습을 physis (피시스, 그리스 철학에서 자연 자체나 자연의 힘, 사물의 본성을 이르는 말)라고 정의한다니 그것도 어째 맞아들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미야자키 영화에 드러난 여성상을 보자면 인도 여신인 '칼리'나 한국 불교의 '지장보살'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것은 칼리 여신이 죽음과 재생을 관장하고, 지장보살의 사전적 의미가 어머니 대지의 자궁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이쯤되면 자연에서의 생태계의 상호 의존성과 불교에서의 연기사상의 합일을 연관지어 볼 수가 있다. 연기사상은 세상의 모든 것이 무수한 조건이 서로 화합해 발생한다는 것을 가리키기에 그 속에 이미 상호 의존성을 간직하고 있고, 상호 의존성으로 성립된 생명체를 볼 때 서로 그물망으로 얽혀있기에 우주를 연화장세계(불교에서 그리는 세계의 모습. 연꽃에서 태어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세계라는 뜻)로 표현한다니 불교를 숲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숲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사실 자연은 선과 악을 넘어선 생명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기에 오히려 선은 악의 선이고, 악은 선의 악이다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소에 숲에 대해 그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역시 불교는 울창한 산 속에 절이 있어서 그런지 중요하지만 가까이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되는 존재에게도 따스한 관심을 주는 것 같다. 내가 평소에 불교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자연을 소중히 하고, 타인을 타인으로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내가 개종을 하겠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장 잘 실천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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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가 그린 생각의 연금술 - 천재와 만나는 CED 상상.생각.창조의 신세계
신동운 지음 / 스타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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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동경했던 나는 다빈치라는 말만 듣고 냉큼 집어올린 책이 바로 요책이다. 읽기 전까지 어떤 분야에 속한 책인지조차 몰랐다는 게 문제다. 중간 중간 다빈치의 그림이나 삽화, 메모가 보여서 내 눈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지만 그 메모나 그림이 그 부분에 나오는 내용과 관련이 없는 터라 중간쯤 읽어내려갔을 땐 그래서 도대체 뭘 말하는 거야~라는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뭐라 그럴까, 어제 새벽부터 보기 시작해서 오늘 조금 시간을 들여서 다 읽었었는데 어젠 우와~ 그렇지, 얼쑤, 지화자~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오늘은 그다지 감흥을 받지 못했다. 그 소리가 그 소리인 것처럼 들린 게 사실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아마도 뻔한 얘기를 계속 나열하다보니 뒤로 갈수록 식상해져서 그런게 아닐까. 내가 그림도 좋아하고 다빈치도 좋아하는 게 사실이지만 의미없는 문자의 나열이나 그림의 나열은 죽어도 못 봐주는 편이다. 의미없는 것은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는 게 내 신조이기에...

 

이 책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상상][생각][창조] 물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천재라는 것쯤은 지나가는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상상, 생각, 창조라는 단어를 가지고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하지만 좋은 말도 계속 들으면 짜증나듯이, 저자는 다빈치의 이력을 쉴새없이 뿜어내느라 바쁘다. 화가, 음악가, 작가, 건축가, 발명가, 과학자, 군사기술전문가 등등... 마치 그렇게만 하면 정말 이 책도 그런 천재적인 반열에라도 올라갈 수 있다는 듯이. 이미 다빈치에 관한 저작들이 많이 나왔듯이 정말 새로운 것이 아니라면 독자에게 외면받는다는 것도 모르는 걸까.

 

그렇다고 이 책이 완전 꽝이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제 읽었을 때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앞부분에 배치된 흥미로운 내용 때문이었다. [상상]편에는 나를 홀리는 내용이 있다. 바로 암호이야기.. <최후의 만찬>이란 그림 속에 암호로 다빈치가 악보를 숨겨놓았단 사실을 제시하며 흥미진진하게 그것을 전달해준다. 2003년에 다빈치가 악곡을 그림 속에 숨겨놨을 거란 뉴스를 들은 조반니 마리아 팔라라는 음악가이자 컴퓨터 전문가가 밝혀냈다고 한다. <최후의 만찬> 전체에 평행선 다섯 줄을 그려서 머리와 빵에 음표를 대입해놓고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연주해보았다. 그랬더니 찬송가가 흘러나왔다는데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런데 요런 뉘앙스를 마구 풍겨놓고 뒤로 빼는데 좀 짜증났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나온 로슬린 성당의 조각 암호를 드디어 풀어냈다고 해서 호기심에 보는데 도대체가 '클라드니 패턴'이 무언지 어떤 과정으로 그 암호를 밝혀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텔레비전을 보다가 지나가는 한 줄 뉴스같이 궁금증을 해소시켜주기는커녕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버리니 내가 열을 안 받겠냐고~~~~~~~~

 

그래도 [상상]편까지는 좋았다.  '상상력을 키우기 위한 닥치는 대로 PROJECT7'에서 제시하는 방법도 솔깃했고 근거있는 이야기로 여겨졌으니깐 여기까지는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가서 내가 다빈치의 암호를 알 수가 있겠냐 말이다.

 

1 닥치는 대로 즐겨라               - 즐기고 있어, 뭐!! 책 보는 것도 즐기는 것이야~~~

2 닥치는 대로 관심을 가져라     - 관심은 많지..실속이 없어서 그렇지..ㅋㅋ

3 닥치는 대로 읽어라               - 음.. 요건 마음에 쏙 든다!!

4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라        - 고렇지!! 고렇구말구!! 

5 닥치는 대로 여행을 가라        - 으..음 여행이 좋다는 건 아는데 움직이는 게 귀찮아서....^^;

6 닥치는 대로 글을 쓰라           - 어젠 글을 쓰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읽을 책이 산적해있어서 잠시 미루어두었지만

7 닥치는 대로 꿈꾸어라            - 이젠 나도 자기 암시를 걸어볼 참이다...나는 천재다..나는 천재다..

 

그런데 아쉽게도 다른 부분은 조금 식상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 유명한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첫 장에도 나오는 굴뚝 청소하는 아이이야기가 또~ 나오는가 하면, 어찌보면 탈무드의 이야기를 해서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여지를 만든 점에서 솔직히 지겨웠다. 기도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 신에게 하는 기도가 아니여도 - 그냥 베스트셀러 <시크릿>을 인용하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나는 그 책을 안 읽었기에 신선할 수 있었을 뻔했는데 말이다. 또한 중간에 하나씩 보이는 그림들은 작가 소개나 제목 소개도 하지 않고 덩그러니 그림만 있는 경우가 많아 좀 어이없었고 말이다. 당연히 그림을 실었으면 이것은 무엇이고 왜 실었는지의 힌트라도 주는 게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한다. 내 좁은 지식에도 많은 그림들이 익히 보아오던 것이긴 한데 그것을 실은 의도는 도대체 오리무중이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내용에 대해 글이 너무 짧은 것도 문제다. 심도있게 집어주기 보다는 단순히 이거 좋으니 이거 해~식으로 건드리기만 하니까 양장본으로 나온 종이가 아까울 지경이다. 차라리 그 종이에 그림에 대한 설명과 작가 소개와 그 그림이 나온 시대적 배경으로 꽉 채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마나 한 내용이었다. 이러니 내가 열 안 받게 생겼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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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와 리리의 철학 모험
혼다 아리아케 지음, 박선영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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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의 힘을 키우는 유쾌한 철학 소설'이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는 이 책은 말 그대로 철학 소설이다. 그런데 내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그다지 아름다운 내용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였다는 사실!! 표지를 먼저 봤을 때는 다른 것과 비슷하게 철학에 관한 가르침이 나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 배경이 서양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던 나로서는 정말 뜻밖이었다. 일본인 저자가 쓴 소설답게 이 소설에는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는 비행들이 자주 목격된다. 예를 들어, 미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의 자살, 고등학생들의 원조교제, 사이비 종교의 확산, 고등학생들의 살인과 친족살해 등 말세야~ 말세~란 말을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보통 소설하면 좀더 아름답거나 성장하게끔 그려지지 않나. 어쨌거나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향으로든 성장하기는 한다. 그 상황이 내겐 너무 생소해보였지만 말이다. 물론 철학이란 학문이 현실에서 어떤 것을 판단하고 가치를 부여하고 가야할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기에 아직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해서 혼란스런 상황을 겪게 하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다만 그 현실이, 여기에서 배경이 되는 일본의 현실이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하다는 것이 나를 경악하게 했다.

 

주인공 미즈사와 미키(애칭 미미)와 린나이 료카(애칭 리리), 이치하시 모모에(애칭 모모)는 고등학교 같은 반 학생이다. 그 아이들은 데즈카 고사쿠(애칭 뎃코) 윤리 선생님의 출현으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배운다. 요것이 이 소설의 주요 골자인데 이 아이들의 주변에 일어난 사건들이 참 대~단하다. 미미의 아버지는 뺑소니를 당해서 식물인간이 되어 계시고, 리리의 오빠는 갑자기 옛날 시를 남기고 자살해버리고, 미미와 리리의 어머니들은 현실에 닥쳐온 시련에 사이비 종교에 빠져버리고, 모모는 재미삼아 한번 했던 원조교제 때문에 심각한 폭행을 당하고... 이 중 한 가지만 가지고도 이야기할 것이 많이 있을 텐데 여기에는 그런 일이 짬뽕으로 나온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주인공들이 금방 털고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 부터가 나랑은 정서에 전혀 맞지 않았다. 철학이라는 게 꼭 그렇게 심각한 일에 대해서만 생각을 해야하는 거야...? 물론 본인의 일이었을 때 더 가깝게 여기고 진지하게 사고하게 되기에 그런 상황을 설정했겠지만 나로선 너무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까 밝은 노랑색 표지나 캐릭터, '철학 모험'이라는 제목이 정말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꼭 표지만 보면 서양 학생들이 연상이 되니... 차라리 일본 교복을 입은 주인공들과 뎃코가 소설 속에 나왔던 장면처럼 케이크를 먹으면서 담소하는 모양을 표현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진지한 학생들 사이에 코믹한 표정의 뎃코 선생을 끼워넣고 좀 더 아름답게 표현하면 안되었을까. 리리의 아리따운 몸매와 이지적인 얼굴, 미미의 귀엽고 온화한 표정, 모모의 밝고 명랑한 모습을 그려넣었다면, 그리고 밝은 배경보다는 약간 어둡게 아니면 그냥 교실 분위기가 나게끔 색채를 바꾸었다면, 아니면 학교 상담실이나 교무실로 하면 더 내용과 긴밀해지지 않을까 싶다. 또한 제목도 바꿔야 한다. '모험'은 무슨 개뿔~ 읽으면서 전혀 '모험'같지 않았다. '악몽'이라면 또 모를까. 자기 아빠는 식물인간에,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빠지고, 동생은 자퇴를 하고, 친구의 오빠는 자살에, 동급생은 원조교제에 휘말리는 현상을 '모험'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완전 사이코 같다. 나보고 작명을 하라면 '미미와 리리의'라는 말은 빼버릴거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주인공을 두 사람으로 한정시키는 것이 무리가 있다. 실제 주인공은 미미뿐이기도 하고. 그럼, 제목은 뭐가 좋을까? 고등학생이 삶을 바라보는 방법? 선생님과 함께 나누는 일상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윤리 선생 뎃코와 함께하는 일상 바라보기? 내가 보기엔 마지막 것이 가장 그럴싸하다. 은행나무 출판사 그렇게 안 봤는데...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만들었겠지만 정말 표지와 내용의 괴리감이 커서 당혹스러울 뿐이다. 평소 철학을 좋아하는 내가 책 내용은 하나도 하지도 않고 이렇게 표지이야기로만 한없이 주절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은 결론이 나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다 한번에 죽어버리지 않는다면 사실 결론이란 건 없지 않을까. 인생이란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주어진 상황은 절대 변하지 않았으니. 그저 자살에 대해, 사이비 종교에 대해, 살인에 대해, 사형에 대해, 원조교제에 대해,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봤을 뿐이다. 그로써 혼란했던 머릿속을 정리해보고 앞으로 자신이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의 결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대신 그 상황을 정리해주거나 대신 결정해주지 않는다는 것. 바로 내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철학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 같다. 미미의 애인인 톰이 말했듯, 철학은 찻잔의 내용에 관심을 두지 않고 찻잔에만 관심을 두는 미련한 짓일지는 몰라도 찻잔이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찻잔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로써 바꿀 수 있다면 아마도 찻잔에 담긴 내용물도 바뀌지 않을까.

 

참고로 자살에 대해 말하자면, 미미와 리리는 자살이 윤리적인가, 비윤리적인가에 대해 뎃코 선생에게 물었다. 실제로 요즘 유명 연예인들이 잇달아 자살하는 소동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자살은 중요한 화두이다. 보통 자살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예상하는데 실제로 리리의 오빠는 자살할 이유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법대를 다니는 촉망받는 기대주였고 사려깊은 오빠였으며 철학에도 관심이 많을 정도로 속이 깊었으며 아버지가 유명 배우이기에 돈 걱정도 별로 없고 아버지와 모델인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외모도 상당히 근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살을 한 것은 바로 무엇때문이었을까. 그가 유서로 남긴 것은 메이지 시대 즉 140년 전 고등학생인 후지무라 미사오의 시였다. 후지무라 미사오는 열일곱의 나이에 이 시를 적어놓고 게곤 폭포에 몸을 날려 자살했기에 그 유언은 철학적 고뇌의 상징으로 여겨질 정도로 라고. <암두지감>이라고 불리는 이 시는 지금 내가 봐도 철학적인 고뇌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아득한 하늘과 땅

머나먼 과거와 현재

나 5척의 작은 몸으로 이 큰 신비를 풀려 하노니

호레이쇼의 철학에서는 아무런 권위도 찾을 수 없도다

만유의 진상은 오직 한 마디로 말하노니 불가해라

나 이 괴로움을 품고 번민한 끝에 드디어 죽음을 결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미 바위 위에 서 있으며 가슴속 일말의 불안도 없도다

처음으로 깨닫는다

크나큰 비관은 크나큰 낙관과 일치하는 것임을

 

허나 뎃코 선생은 자살에 대해 참으로 명쾌하게 해석해 주신다. '만유의 진상'을 찾아내려는 사람이 단지 16년~17년 밖에는 살아보지 못했으면서 얼마나 많이 번민하고 고뇌했냐는 것이다. 좀더 오랫동안 고민하고 고뇌해야하지 않을까.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완성한 것이 마흔이 넘어서라는데 그 정도만큼은 살아보고서야 인생에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뎃코 선생은 자유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인이고 자기 자살로 남들이 피해를 보지 않는다면 자살은 윤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래도 만년 정도는 살아보라는 것이다. 뎃코 선생이 2학기 때 집안 사정상 학교 휴직하게 되었을 때 한 말이 인상에 깊다.

 

"너희들 중 누군가가 말이다,

혹시라도 자살하고 싶어진다거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졌을 때, 삶과 죽음이 걸린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을 때 말이다.

그때는 부디 이 데즈카 선생의 얼굴을 떠올려 주기 바란다. 전화 한 통이라도 좋으니 내게 연락을 해다오.

너희들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 전에, 최후의 단 5분이라도 좋으니 나와 이야기할 시간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 죽이고 싶다면 날 죽여도 좋다.

그 정도는 20년 전 윤리 선생을 시작한 그날부터 충분히 각오하고 있으니까. 알겠나?

그럼, 마무리로 오늘의 명언 한 마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살아 보자. 그것이 인생이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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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공진솔이란 방송작가와 이건 피디의 사랑은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인간적인 끌림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남자와 여자로 만나긴 했지만 어쩌면 이성간으로 만나지 않았어도 평생을 함께 하는 지기가 되었을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바라보는 사랑을 10년째 하고 있던 이건 피디의 겉에 운명적으로 공진솔 작가가 소리없이 스며든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이제부터 사랑, 시작이야~ 하며 시작되는 사랑은 없겠지만 그래도 본인이 자각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치부나 아픔까지도 남김없이 보여주는 일기장에서 사랑으로 발전해버린 그 시작으로 인해 이건은 지루한 일상사에서 다시금 새 활력을 얻는다. 이건이 펴낸 시집을 통해 그의 불 같은 사랑을 했었음을 안 진솔은 자신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에게 일기장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가 목하열애를 했었던 것을 자신에게만 고백한 게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말한 적 없었어요. 그래서도 안 되는 거고. 누구한테도. 당신이 처음이고, 아마 마지막일 거야."

 

이건이 10년 동안 짝사랑해왔던 10년 지기 친구 애리에겐 선우라는 바람 같은 남자가 있다. 어려서부터 글도 잘 쓰고 소리도 잘 하는 그녀에게 선우와의 만남은 한 눈에 반하는 사랑이었다. 바람 같이 다가온 사랑처럼~ 그러나 처음부터 반했던 애리에게도, 그의 절친한 친구 선우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지 못했던 이건은 진솔을 만나서야 조금 숨통이 트일 수 있었다. 그녀에게 동화되어 간다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그런 그에겐 애리의 사촌동생이자 동료 작가인 희연이 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비밀인 줄만 알았던 이건의 짝사랑을 그녀가 안다는 사실에 진솔은 부풀어오르던, 장미빛 꿈에 빠질 뻔했던 자신을 추스린다. 그러고는 그와 거리를 두고, 친구로서 만족하기로 했던 그녀의 마음을 이건은 알까. 세기의 연애를 했던 것도 아니고, 사랑을 고백해준 것도 아니고, 입맞춤을 해준 것도 아니지만 진솔은 그가 거짓말을 했던 사실을 알게 되자 쓸쓸히 스키터 데이비스의 노래를 듣는다. <He says the samething to me.>

 

어젯밤 그가 당신에게 입맞춤하며 뭐라고 말했는지 제가 얘기해 볼까요?

그는 내게도 똑같은 말을 한답니다.

그의 사랑이 진실이 아니란 걸 당신이 깨닫는 게 고통이 되겠지만,

당신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면 나 또한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세요.

그는 나한테도 똑같이 말했답니다....

 

아직 사랑을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이 노래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는 자신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그래서 쉽게 거짓말을 했음을, 아니 그 순간만큼은 그가 진심으로 말했을 거라 대신 그를 변호해주기까지하는 진솔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까. 허나 그 사정을 모르는 이건은 자신에게 더없이 소중해서 항상 봐야만 하는 - 아직 본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지만 - 진솔이 갑자기 자신에게 쌩~하니 대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냉랭하게 내친다. 그러고 어설프게 화해를 하지만 아직도 그들에겐 갈 길이 멀다. 친구로서만 만나자고, 더 이상 가까이 하지 말자는 진솔의 다짐은 이건의 부드러움에 취해 갈길을 잃어버렸다. 스크랩된 자료를 가져간다는 명목으로 간 이건의 부모님 댁에서 환영을 받은 진솔은 충만하게 느껴진 그 순간, 그만 금기를 깨버린다.

 

"나요... 할 말이 있어요"

"나... 당신 사랑해요."

 

내가 보기에는 진솔보다 이건이 더 먼저 사랑했다는 걸 알기에 그가 먼저 고백을 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사람 관계를 잘 유지하지 못하는 진솔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사랑은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 진다고 했던가. 내가 보기에는 두려움을 이기고 먼저 손을 내미는 진솔이 더 멋져 보인다. 그러나 소심했던 그녀를 이렇게 강하게 만든 건 바로 이건의 사랑이겠지만.

 

이건을 기다려주겠다고 하고 사귀기 시작한 새내기 연인들의 사랑놀음은 수줍고 가슴 설레지만 금방 시련이 들이닥친다. 짝사랑하는 애리가 죽도록 힘들어하게 만든 선우 자식 때문에... 바람 같은 그의 성격 상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이해받길 기대하지 않기에 수염도 길게 기르면서 멋대로 행동하는 그가 애리의 부모님께는 믿음직하게 느껴지지 못했던 탓.. 선우는 애리를 놓아버릴 자신도 없으면서 애리에게 다 끝내자고 선전포고를 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불안에 떨던 진솔의 예상대로...

 

"너, 차라리 나한테 와라."

 

우는 애리의 모습이 견딜 수 없었던지 진솔의 사랑에 행복했던 건이 드디어 큰 일을 냈다. 그 발언이 자신에게 어떤 폭풍을, 어떤 아픔을, 어떤 처절함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 채... 10년 동안 가슴에만 간직했던 짝사랑보다도 마음을 공유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속내를 드러내었던 지난 4개월 남짓한 시간의 위력을 그는 몰랐던 것이겠지. 처음 손을 내밀었던 진솔은 그를 무섭게 내리쳤다.

 

"사랑하겠다고 말했으니 남아일언 지키라고 하는 거...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거... 그것도 몰아붙이는 거에요. 마음이 시키는 일을, 어쩌라는 거야."

 

"그래요. 그랬던 거죠... 날 좋아하지만 그건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더 컸어요.

공진솔이란 사람을... 많이 이뻐하는 거야. 당신은.

하지만 사랑을 나눌 확신이 들 만큼 당신 감정을 알 수는 없는 거죠."

 

"그 사람이 아프니까 당신은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였어. 나도 안 보이고 친구도 안 보였어.

그렇게 말했죠? 차라리 나한테 와! 그게 당신 진심인 거야. 마음이 시키는 일.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일."

 

진솔이 이렇게 몰아쳤을 때 이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어붙었다고 묘사되어 있는 이건은 아마도 뭔가가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이제껏 건이 보고싶을 때 보고, 말하고 싶을 말하는 가장 친한...영혼의 반쪽을 잃어버릴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여자는 강하다는 말 새삼 맞다는 생각이 든다. 실연했을 때 모습은 사람마다 아주 다양하겠지만 진솔은 차디찰 정도로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처음엔 건과 같이 하던 프로그램도 그만 두고, 회사도 그만 두고, 급기야는 한번도 친근함을 느끼지 못했던 서울을 떠나기로 한다. 그나마 이건 때문에 행복했었던 서울이란 장소를 이제 버리는 진솔... 강한 건가, 약한 건가.

 

"사랑한다면서, 기껏 여기까지예요? 내가 한 번 흔들렸다고 그렇게 쉽게 도망치나?

고백을 하면 그저 사랑이란 게 무난히 찾아올 줄 알았어요? 파도 하나 없이 평탄할 줄 알았냐고."

 

"내가 잘못했단는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최소한 기회는 줘야할 거 아냐. 이대로, 이런 식으로 당신하고 끝내고 싶진 않다고!"

 

"난 정말 당신이 날 사랑하는 줄 알았죠. 이 정도 선에서 상처받기 싫어 물러나겠다고 한다면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도 엉터리야.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감정이 아니에요, 당신 그 마음은"

 

프로그램을 그만 둔다고 했을 때 이건은 진솔이 용서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아예 프로그램까지 하지 않는다는 말에 화가 나서, 진솔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그런데 회사를 그만두다고 하니까 전혀 달라지는 그의 마음은..

 

"나 때문에요? 내가 보기 싫어서?"

"내가... 당신, 아는 척하지 말까요? 모른 척하고 당신 건드리지 않으면... 그러면 괜찮을까?"

 

회사를 그만두고 이건을 다시 보게 된 때는 이건의 할아버지 장례식... 그녀에게도 참 잘 대해주셨던 그 할아버지의 죽음에 힘들어하고 있을 이건에게도 한 달음에 달려가는 진솔... 이것을 보면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하지...? 그들이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

 

"그날 빈소에서, 나 나쁜 놈이었어요. 내내 당신만 생각났어. 할아버지 앞에서 공진솔 보고 싶단 생각만 했어요.

뛰쳐나와서 당신 보러 가고 싶었는데... 정신 차려라, 꾹 참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남양주로 내려온 진솔의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감격적인 재회를 한 이건의 말... 오히려 멀어지고 안 보이고 매섭게 끊었더니 이건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게 된 것일까. 진솔이 사랑한다고 했을 때는 마음의 정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솔을 안아버리면 그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손도 대지 않았던 그가 이제는 마음껏 제 욕심을 취한다. 사랑에 흠뻑 빠진 사람 답게...

 

넌, 늘 춘향 같은 마음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내 사랑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내 庭園으로 들어왔네. 허락하지 않아도.

 

매화꽃 아래서 입 맞추겠네.

당신이 수줍어도. 내가 부끄러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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