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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133
파장이 큰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렇듯이 이번에도 책을 읽고 한동안 얼떨떨한 시간을 보냈다. 감상을 꼭 남기고 싶은 책이었지만 선뜻 써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안나'라는 제목으로 이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를 봤다. 원작을 많이 훼손한 느낌이었지만 주인공의 연기도 좋았고 나름대로 괜찮았다. 드라마는 6개의 에피소드로 나뉘어 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원작의 영화 '리플리'가 떠올랐다. 주된 소재가 닮았을 뿐 색깔이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라마까지 보고 나니 먼저 읽은 소설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간략히 옮겨본다.
선천적인 청각장애를 가진 어머니와 양복 기술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이유미는 아버지의 애정 어린 지원을 받으며 여유롭게 자란다. 수입이 줄어 살림이 빠듯해진 뒤에도 아버지는 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런 탓이었을까? 실제 자신의 현실보다 허영심에 먼저 눈뜬 이유미는 대학 입시에 떨어지지만 아버지를 실망시키기 싫어 거짓말을 하게 된다. 명문대에 합격을 했다고. 그리고 생활비와 학비로 재수학원에 등록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진짜 재학생과 연이 닿아 막상 학원에는 소홀해지고 대학생인 척 살게 된다.
이유미는 점점 대담해진다. 돈을 주고 신분을 위조하고 결혼하려 했다가 파혼 당하는 등 돌이킬 수 없는 거짓된 삶으로 점점 더 빠져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치매가 시작된 어머니의 치료비며 사는 것이 여의치 않자 잠시 정신 차리고 살기 위해 애쓰지만 운명도 이제 위장의 삶으로 그녀를 끌어들인다. 나중에는 한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남성 소설가로 변신하는데 직접 쓰지 않은 소설을 자기 것인 양 속여 문인 협회에도 등록한다. 너무나 능수능란해서 읽던 도중에 여러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한아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유미가 속인 사람들과의 인터뷰 설정 등-이 꽤 재밌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나 상황에 걸맞은 가면을 바꿔 쓰며 살아간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얼마나 충실한지에 따라 사회적 성공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잘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실패한다. 나는 후자에 가깝고 종종 가식적인 삶에 회의를 느끼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 살아갈수록 각자의 취향이 확고해지는 것 같다. 뭔가를 알아갈수록 이전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지는 거겠지. 이유미는 남의 신분으로 쉽게 성공적인 삶을 거머쥘 수 있음을 알아버렸고 실제 비참한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기 버거웠을 것이다. 내가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을 한 이유미의 삶을 보며 공감이 되고 위로를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진실의 시퍼런 날이 정수리를 찍어내리더니, 제 몸을 발끝까지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어요. 저는 눈을 감고, 그것이 저의 숨을 끊어놓기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다음 순간 오히려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나간 것처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더군요. 그가 왜 과거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왔는지, 왜 내가 가까이 갈 때마다 깜짝 놀란 듯이 피하고 멀리했는지, 왜 그렇게 홀연히 우리를 떠났는지, 흩어졌던 조각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어요. 20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반듯함이 나의 난잡함을 드러내고, 그의 여일함이 나의 광기를 불러내고, 그의 밝음이 나의 어둠을 일깨운 것은. 나는 그에게 포섭되는 대신 더 낮은 곳으로 추락했다. 외도는 그 과정의 일부였을 뿐이다. 135
안나 : 취향이나 안목이라는 게 한 번에 생기지도 않지만 또 한 번 올라간 안목은 쉽게 내려오지는 못하는 거죠.
힘은 자신에게 종속된 사람을 사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끝까지 행사되는 힘은 사람을 문자 그대로 사물로 만듭니다.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엔 아무도 없습니다.-시몬 베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