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여성들에게 동등한 존중 대신 미스아메리카대회를 제안했다. 이 대회가 개최된 1920년은 여성들이 투표권을 쟁취한 해이기도 했다. 입법가, 노동계와 재계 지도자, 그리고 결국 일부 여성 집단들은 동등한 권래 대신 '보호를 위한'노동 정책, 대체로 남성들의 일자리를 보호하고 여성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데 기여한 이 조치를 승인했다. 10년간 늘어났던 여성 전문직의 수도 1920년대에는 줄어들었다. 1930년에 이르자 여성 의사는 1910년보다 더 줄었다. 대공황이 닥치면서 새로 만들어진 연방과 주의 법은 수천 명의 여성들을 강제로 일자리에서 몰아냈고, 새로운 연방 임금 규정은 여성에 대한 낮은 임금률을 제도화시켰다. -114. 백래시
여자들이 권력 체계에 조금이라도 도전하려고 하면 악마의 음모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에서 거듭 반복된 현상이다. 공산주의를 겨냥한 매카시의 '마녀사냥',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은 모두 이런 동역학을 바탕으로 했다. '범죄'를 과장해 끔찍한 처벌을 정당화하면, 사회 전체를 효과적으로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다. 희생자들이 고립되고, 저항의 열의가 꺾이는 것이 다음 수순이다. 그러면 대중은 이전까지는 정상으로 여겨졌던 행동들에 참여하기를 저어하게 된다. -72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얻기 위해 여러 여성 단체가 힘을 모으고 드디어 미국에서 여성들이 투표권을 쟁취한 때에 미스아메리카대회라니 의식 있는 여성 운동가들에게는 굴욕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멋모르던 어린 시절 '도전 슈퍼모델'같은 프로를 본방사수하던 일이 떠오른다. 긴 다리에 날씬한 몸매의 자신감 가득한 여성들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냈다. 서로 우승자가 되기 위해 경쟁하다 보니 여러 다툼이 벌어지고 우여곡절 끝에 응원하던 모델이 우승하면 내 일인 것처럼 기뻤다. 단계를 올라갈수록 달콤한 사치가 보상으로 주어졌다. 해외의 고급 호텔에 숙박하고 유명한 에이전시와 계약하는 특권을 얻는 일은 그 어떤 트로피 못지않게 값진 것으로 그려졌다.
모델이란 직업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당시 방송에서 거식증 의심을 받고 이기적이라고 비난받으며 사생활이 노출되는 상황 즈음에서는 가슴 한편이 서늘했던 것 같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여성들에게 사회가 들이미는 당근과 채찍은 보다 성별화된 특성을 갖는다. 여성이 무엇을 추구해야 보상 받는지, 어떤 걸 하면 욕을 먹는 지. 구분지어 세뇌시키듯 반복적으로 교육시킨다. 모델이라는 직업은 그런 면에서 상징적이다. 보상으로 권력이나 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굶주림(미를 위한 끝없는 노력)과 화려한 사치(대중의 관심과 스포트라이트)를 얻으며 자정이면 호박으로 변하는 신데렐라의 마차처럼 그 기회마저 일시적이고 찰나적이라는 점에서.
세계 잼버리가 파행을 맞고 시끄럽게 마무리되고 나자 여성가족부장관이 집중적으로 질타 받았다. 그의 말실수도 계속해서 악영향을 줬고 '이래서 역시 여성가족부는 해체되어 마땅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후자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부처 해체를 위해 임명된 것이나 다름없던 현 정부의 장관이 그 자리에서 얼마나 열정을 쏟을 수 있었을까? 누구보다 자신의 자리가 어떤 목적으로 본인에게 주어진 것인지 잘 알고 있었을 그가 뭔가 일을 제대로 할 의욕이나 있었을까?
물론 버젓이 드러난 업무 태만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권한도 줄어든 채 해체를 목전에 둔 여성가족부가 잼버리 주무부처였다고 해서 다른 책임자들을 모두 지우고 부처 해체를 위한 또 하나의 명분을 얻는 것으로 이 일이 흘러가는 게 답답할 뿐이다. 여성들의 요구가 커지고 변화가 모색될 때마다 백래시는 저항하듯 더 큰 힘으로 억눌렀다. 지금 대한민국에 암울한 현실을 드리우고 있는 지난 20대 대통령 선거는 백래시로 재미를 본 젊은 보수들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다. 백래시는 권리를 찾고 사람답게 존중받고 싶어 한 여성들의 힘에 대한 반작용이지만 그 결과는 모두에게 미친다는 걸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다.
어둠,공포라는 주제에 빠질 수 없는 상처 받은 여성의 육체는 그 상흔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듯하다. 폴란드 화가 알렉산드라 발리셰프스카의 그림.『채찍 달리기』
우리가 영원히 빛 속에 산다면, 모든 것이 밝고 행복한 곳에서, 걱정도 불편함도 없이 그렇게 산다면 우리는 어둠도 미묘함도 결여된 채 재미없고 밋밋한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오로지 긍정적인 느낌만을 추구한다면 세상을 대단히 단편적으로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지도, 살면서 닥쳐올 고통과 괴로움에 적절히 대비하지도 못할 것이다. 내면의 어둠을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비극과 재난은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고, 삶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어떤 마음을 먹든 간에 어둠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꼭 좋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도, 나쁜 일이 꼭 나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생각을 했다고 해서 그런 일들이 진짜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살다 보면 온갖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고통은 고통이고 감정은 감정이다. 정서적 건강을 위해서 감정의 모든 스펙트럼을 온전히 경험하고 체화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어둠의 미술 중 '그림자를 찬양하며' S. 엘리자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