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경이 되면 대종이 울리는데 이것은 남자들에게 귀가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이며 여자들에게는 외출하며 산책을 즐기며 친지들을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자정이 되면 다시 종이 울리는데 이때면 부인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남자들은 다시 외출하는 자유를 갖게 된다.(...) 한 양반가의 귀부인은 아직 한 번도 한낮의 서울 거리를 구경하지 못했다고 나에게 말하였다. "p.232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8년 출간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책에서 조선의 거리 풍경을 위와같이 묘사했다. 물론 정희진이 말한대로 과거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과 지금 여성들이 살아가는 여건을 비교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차별을 드러내려면 현재를 같이 살고 있는 남성들과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요소 중 하나인 '공간'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들의 삶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수 있다. 예를들면 오디세우스가 20년간 온갖 모험을 하는 동안 페넬로페는 집안에서 내내 그를 기다린다. 그녀를 탐내던 구혼자들인 남성들은 거리낌없이 집에 들이닥쳐 페넬로페의 마음을 사로잡으려한다. 호메로스는 그런 그녀를 칭송했다. 엘레나 페렌테의 소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니노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그것도 무일푼으로) 혼자서 고향인 나폴리를 떠나 영국으로 간다. 레누는 그럴 수 있는 니노가 부럽다고 말한다. 릴라에게 '왜 우리는 그럴 수 없는 걸까'하고 반문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고생이 무일푼으로 타국으로 떠날 수 있을까? 




과거와는 달라졌지만 요즘도 여성들은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남편은 아무리 일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안사람'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일하는 아내는 밖에서 아무리 바빠도 '안 사람'이다. 여성이 운전하면 '김여사'란 말을 들을 수 있다. 육아에 쫒기다 겨우 시간을 내어 친구들과 브런치를 즐기는 여성들도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런것들은 집이 아닌 외부를 남성들만의 공간으로 제한한다. 외부에서도 '화장실'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인데 여성들은 몰카의 위협에 시달린다. 사이버 공간에서 여성들은 성착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터에서는 유리천장, 유리절벽의 한계가 능력있는 여성들의 공간을 한정시키기 위해 굳건히 버티고 있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저서 '순수와 위험;에서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발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남성을 위한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더러운 것이기에, 거리에 보이는 여자는 '더러운 창녀'였다. 이 같은 관념은 단어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거리의 남자man of the streets는 거리의 규칙을 따르는 남자일 뿐이지만, 거리의 여자woman on the streets는 창녀street walker를 뜻한다. p.235




피에타-미켈란젤로




공간적인 제약 뿐만이 아니다. 인생의 후반기에 마주하는 시간적 공간인 노화는 현실 뿐만 아니라 예술의 세계에서도 죄악시 되고 순수하지 못함, 징벌로 묘사되었다. 정도는 다르지만 이건 노년남성도 마찬가지다. 마녀를 표현하는 주름지고 늘어진 피부, 검버섯등은 노년의 여성을 상징한다. 미켈란 젤로의 피에타를 보라. 숨을 거둔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의 모습은 다큰 성인이었던 예수의 나이에 비해 너무 젊은 여성으로 표현되었다. 순수하고 거룩한 상징에 죄악시된 노화는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마차를 모는 여인과 소녀-메리 커샛




하지만 주어진 여건에 굴하지 않은 여성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위 그림을 그린 메리 커샛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운전하는 모습을 담았다. 소설가였던 조르주 상드는 자신을 제한하는 여성의 삶을 벗어던지고 과감하게 남장을 했다. 코르셋과 전족처럼 과거 여성의 복장은 자유로운 활동을 구속하고 제약했기 때문이다. 여러 말들이 오가지만 조지 앨리엇도 여성작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의지로 메리 앤 애반스라는 본명을 버린것으로 보인다. '기울어진 미술관'은 권력의 위계가 담긴 미술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작품들과 함께 잘 풀어낸다.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때로는 이용당하며 편견의 희생자가 되어야만 했던 마이너들의 삶을 끄집어내어 그림의 또다른 모습을 흥미롭게 설몀해준다. 마이너들의 기울어진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을 통해 감출수록 때로 더 역동적으로 드러나는 권력관계를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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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16 0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메리 커샛 말년에 불후한 이웃들에게 나누는 삶을 살다 갔습니다(헨리제임스 평론 통해서
알고 난후 메리 커샛전기 읽고 감동)
조르주 상드 조지 앨리엇도 당대 예술가 창작자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했습니다 편견의 희생자들 최고의 예술가들☺
미미님 요👆페이퍼 담달
이달상 예감이 백퍼센트 🤗

청아 2022-09-16 08:22   좋아요 3 | URL
와 이런 정보는 역시 스콧님이 잘 아시네요!
나름 찾는다고 검색했는데 자료가 많지 않아
아쉬웠어요. 다독하시는 분들이 전기를 읽는
이유가 분명하군요.(*ૂ❛ᴗ❛*ૂ)헤헤

새파랑 2022-09-16 0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간적 제약과 시간적 제약은 확실히 여성에게 과도하게 작용하는거 같아요. 그래서 이런 제약을 극복하려는 여성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이젠 미니님의 미술 영역(?)까지 위협하는 미미님은 북플 우등생입니다 ^^

청아 2022-09-16 09:39   좋아요 3 | URL
최근에 읽은 정희진 쌤 글을 통해 ‘공간‘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특정인들은 ‘공간‘을 과도하게 소유하고(부동산 투기등의 재산등) 마이너들은 작은 공간까지 침범당하며 누리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미니님의 영향력으로 미술사에 점점 관심이 갑니다*^^*

scott 2022-09-16 10:52   좋아요 3 | URL
특등생 알라딘은 미미님에게 줄 특특생 메달 달아줘야함🏆

청아 2022-09-16 11:22   좋아요 3 | URL
준다면 굳이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되도록 순금으로ㅋㅋㅋ 알라딘 보고 있니?(>.<)

책읽는나무 2022-09-16 09: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코르셋과 전족 이야기를 읽으니 어제 본 ‘모나리자 스마일‘ 이란 영화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슬라이드 영상 앞에서 ˝코르셋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라고 외친 대사가 떠오르네요^^
조선시대 여성들은 저녁 8시 이후 자정 전까지만 외출을 했었다구요??
에휴...ㅜㅜ

여러모로 다각도의 미미님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저도 글이 좋다! 그러고 읽었는데 이미 스콧님의 예언이 시작되었네요ㅋㅋㅋ

청아 2022-09-16 09:46   좋아요 3 | URL
어제 나무님 보셨다는 알림보고 저도 그 영화 보고싶어졌어요. 조선시대에 이런 시간 제약이 있는 줄 몰랐어요. 이런거보면 여성들이 우울증을 겪을 수밖에 없는듯 합니다.자정에 남성들이 외출할 수 있는 이유는 너무 뻔하죠? 지금도 스토킹 범죄등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보면 그닥 자유롭지 않음을 실감해요ㅜ.ㅜ

감사해요 나무님ㅋㅋㅋ이 책이 워낙 궁금했던 것들, 몰랐던 것들을 잔뜩 알려줬어요*^^*

scott 2022-09-16 10:51   좋아요 3 | URL
모나리자 스마일 1960년대 미대학의 실제모습 사회적억압 차별에 굴하지 않는 모습 누군가의 아내가 되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는 명대사까지 극중 현대미술사 강의 인상 깊습니다 표현주의 작품 많이 나와요🤗

청아 2022-09-16 11:21   좋아요 3 | URL
그런 영화라니 잊지말고 꼭 봐야겠어요!! 역시 알라딘의 소중한 보석 스콧님~😆

독서괭 2022-09-16 10: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넘 흥미로운 내용이예요! 공간의 제약 정말 공감이 갑니다. 저도 늘 제일 억울했던 게 여자들은 혼자 훌쩍 떠나고 어쩌고 하는 게 훨씬 어려운 선택이라는 거였어요 ㅠ 소설이나 에세이에서 떠돌고 여러가지 삶을 경험하고 그러면서 깨닫는 남자들을 보면서 남자라서 가능하지, 싶고요..
메리 커셋 첨 들어본 화가인데, 여성이 운전하는 모습을 담았다는 게 재밌네요! 마차운전도 여성에게 흔치 않은 일이었겠죠? 이 책 재밌을 것 같아 찜해둡니다~!

청아 2022-09-16 11:17   좋아요 4 | URL
괭님, 이 책 재밌었어요! 요전에 읽은 정희진의<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에서 본 내용들과도 연결되어 더 좋았어요. 이 책을 쓴 이유리님이 페미니즘과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더라구요. 저도 혼자 여행다니는 남자들 보면 늘 부럽고 그래요. 미디어를 통해서도 그런건 너무 자연스럽잖아요? 메리 커셋의 언니를 모델로 그렸다는데 화가 본인도 마차는 물론 당시 선보이기 시작하던 자동차도 운전하고 그랬대요. 그림으로도 그려서 여성도 뭐든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거라는데 멋지죠!*^^*

mini74 2022-09-16 13: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헬렌켈러의 전기를 읽고 세상이 여성에게 원하는 건 순종과 복종, 아름다움과 연약함 ㅠㅠ 그런 교육을 통해 강한 여성에 대한 혐오나 목소리 큰 여성에 대한 경멸을 심은 거 같단 생각했어요 ㅎㅎ ~ 미미님 리뷰 완전 👍💕💕

청아 2022-09-16 14:00   좋아요 3 | URL
이 책에서 헬렌 켈러의 눈에 대해 나온 대목 충격적이었어요. 아름다움이 뭐길래 그렇게까지 하게 만들었을까?
저도 미니님처럼 신화도 더 보고 전기도 읽어봐야겠어요!!💕💕 미술 이야기 너무 재밌어요.다른 장르와 비교할수 없을만큼 제 안의 뭔가가 풍요로워지는 느낌입니다.*^^*

페넬로페 2022-09-16 13: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페이퍼 내용 넘 좋아요.
연결시키신 것들이 다 흥미로워요.
여성이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에 정말 공감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고요.
피에타에 대해서도 저런 생각 해보지 않았는데 정말 그러네요
성경에서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에게 순종하기만 하거든요~~

청아 2022-09-16 14:04   좋아요 4 | URL
감사해요 페넬로페님! 피에타에 대해 저도 몰랐는데 이 책으로 저런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런 정보들이 꽤 많아서 미술사가 역사공부하기에도 좋구나 다시금 느꼈어요ㅎㅎ 게다가 책을 쓴 이유리님이 마니너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마음 따뜻한 분이라 더 감동적이었던것 같아요. 여제자였던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생각해볼꺼리가 되었어요.*^^*

그레이스 2022-09-20 2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유리작가 칼럼밑에 올려진 댓글 보며 가슴이 아팠는데... 그래도 작가가 꾸준히 쓰고 출판하고 있어 뿌듯하고 응원하게 됩니다.
이유리 작가 넘 좋아해요

청아 2022-09-20 21:58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좋아하신다니 다른 책도 더 읽어봐야겠어요*^^*

악플이 달렸었나보죠? 요즘은 연예인도, 작가들도,기타직업군도 페미니즘 색깔을 드러내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