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한다. 같은 수레에 묶여 서로 자기 쪽으로 미친 듯이 끌어당기는 두 마리 말과 같은, 기쁨과 고통, 웃음과 그늘이라는 두 줄기 피가 우리 마음에 흐르게 해야 한다. 그러니 적절한 보폭을 찾고 올바로 판단하려 애쓰는 눈밭의 기수들처럼 앞으로 나아가자. 그 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이 때론 얼굴을 때리는 낮은 나뭇가지처럼 우리를 쓰리게 하고, 목덜미로 달려드는 황홀한 늑대처럼 우리를 물어뜯는다 해도. ㅡ크리스티앙 보뱅
이중의 삶. 여성들은 이 말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또 잘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들에게는 늘 양 극단의 이미지가 요구된다. 어머니답거나(성녀,모성) 어머니답지 않을 것(숫처녀,젊음,유혹) 그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잘 해야만하고 자칫 실수를 해 떨어지기라도 하면 온전히 본인몫이다. 외줄타기를 거부하거나 중간에 내려오는 것은(기준에 벗어난 삶)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럴경우 이상하고 제정신 아닌,꼴 페미로 낙인 찍히고 조롱당하기 십상이다.
'성적대상'이 되지 않겠다는 여성 선수들의 움직임도 있었다. 도쿄 올림픽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이 몸통에서 부터 발목 끝까지 가리는 '전신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것. 그동안 여자 기계체조 선수들이 원피스 수영복에 소매만 덧대져 하반신 노출이 많았던 '레오타드'유니폼을 주로 착용해 왔던 것과 대조적이다. 역시나 이 뉴스를 전하는 댓글 창에는 "페미니즘이 올림픽에까지 왔다" "신경도 안 쓰는데 예민하다"라는 비난이 달렸다. 하지만 대표팀 소속인 사라 보스 선수는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을 뿐이다. "기계체조는 18살 미만의 어린 선수들이 대다수다. 생릴르 시작하고 사춘기가 되면 노출이 심한 레오타드를 입는 게 불편하다." 이 말에 따르면 안산 선수의 쇼트커트 이유와 마찬가지로 '편하기 때문에'유니폼을 바꿔 입은 셈이다.P.127
남자들이 예능에서 웃옷을 벗어 탈의해도 논란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남자들의 옷차림은 그게 어떤 것이든 입방아에 오르는 꺼리가 되질 않는다. 오직 여성들만이 문제가 된다. 임신중지, 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 되기 위해 얼마나 더 오래 투쟁하고 다투어야 하는걸까?
왜 골프, 체조, 테니스 유니폼의 스포츠 웨어도 죄다 여성의 피부를 좀더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본래 스포츠는 남성들만의 것이었고 그리스에서 시작된 그들만의 리그는 온전히 누드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남성의 누드가 자유와 힘의 표출이라면 여성의 짧은 치마와 다리를 다 드러낸 유니폼은 그런 남성들의 시각적 욕망을 충촉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참여할 자격도 얻지 못했던 여성들이 기회를 얻게되자 알아서 자신을 과시했다고 하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지점들이 있다. 피부를 다 드러내는 것은 시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는 이상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 몸매를 질타하는 시선에 대한 감당역시 또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한마디로 이런 복장은 불편하다. 그런데도 불편함을 개선해보려는 일부의 노력은 '유난스러움'으로, '예민한 페미니즘'으로 질타를 받는다.
여자도 군대가라, 여자도 힘든일 해봐라 같은 말들은 여성들이 그런 것들을 회피하고 하지 않기를 선택했다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고 여성들을 배제한 구조와 비합리성을 시야에서 지워버리는 동시에 여성의 탓으로 돌린다.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알지는 못하며, 우리의 욕망을 항상 분명히 표현하지도 못한다. 한편으로는 폭력, 여성혐오, 수치심 때문에 욕망을 발견하거나 표현하기 난감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이고 창발적이며, 맥락과 역사, 다른 사람의 욕망과 행동에 반응적인 상태가 욕망의 본성이기도 하다.(중략)욕망은 결코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섹스가 흥분되고, 풍부하며, 의미 있는 잠재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P.71
일반적으로 우리가 지식이라고 일컫는 모든 것들은 영구적이지 않고 완벽하지도 않다. 앎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난히 섹스, 여성의 욕망에 대해서는 그러한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측면이 무책임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이것은 과연 누구에게 무책임한 것이 되는가? 욕망에의 분명한 의견표출이 여성의 권리를 위한 당연한 조건으로 강제되면서 혼란스럽고 불분명한 감정은 더욱 목소리를 빼앗기고 설 자리를 잃게된다. 욕망에 있어서 분명함, 정확함은 여성의 권리를 위한 것으로 요구되어지지만 실상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남성에게는 '플레이보이'의 표지만 보여줘도, 모든 준비가 끝난다. 사실 씨를 뺀 아보카도만 보여줘도 준비가 끝난다. 반면에 여성은 직접적인 이미지나 말로는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P.75 이 말은 저자의 말이 아니고 여성들을 침대로 끌어들이는 '픽업아트'를 설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닐 스트라우스의 말이다. 여성들을 대상화한 자들조차 '설득'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는 의미인듯하다.
사이버 성폭력은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당연시 여기면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젠더 기반 폭력이다. (중략)사이버 성폭력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사이버 공간 내 성적 괴롭힘이다. 이를 가부장적 성문화의 시각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여성혐오가 근간이 된다. 여성혐오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면서, 젠더 이원론을 공고히 하는 핵심 기제이기 때문에 가부장제 하의 성차별과 관련된 현상들이 여성혐오 개념과 연결될 수 있다.P.307
※참고로 이 책 맨 뒷부분부터 읽고 있습니다. 거의 다 읽은 것 아님주의'
여성의 특성이라고 여겨지는 성향들이 있다. 문화 종교적, 민족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나 존재하고 공유되는 특성들.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함같은 것들이 그런 예다. 이런 특성 또한 일반적이지 않고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남성에게 적용되기보다 여성들만의 것으로 치부되곤 하는데 사실상 위에 나열했듯 여성에게 주어진 삶,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 같은 조건을 상기하면 그런 성향을 갖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하다 여겨진다. 그런 상황에 몰렸음에도 그 태도가 용납되지 않는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성 형량이 남성 범죄보다 무거운 이유, 사법부는 살인의 진화심리학을 공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