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어난다." 마사 겔혼Martha Gellhorn이 1959년 '전쟁의 얼굴The Face of War'에서 쓴 구절이다. 그러나 전쟁은 다양한 방식으로도 일어나며 어쩌면 죽음이 최악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더 많이 읽고 더 조사하고,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가 역사에 대해 배워온 모든 것에 의문을 품게 됐다.p251,크리스티나 램,관통당한 몸
분단상황이라는 특수한 여건에 놓인 관계로 한국인들은 전쟁에 대한 불안감, 이념갈등에 익숙하다. 여기서 파생된 문제들이 사회 곳곳에서 또다른 문제를 낳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통일된 독일에 대한 부러움, 이스라엘처럼 여성들도 싸울 능력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하는 염려, 우크라이나를 보며 언제든 우리도 다시 전쟁 상황에 놓일 수 있는 현실을 실감한다. 지난 대선을 통해 청년층의 남녀갈등이 주목을 받았었다. 정치는 이 점을 악용했다. 한쪽에서는 사회가 충분히 평등해졌으니 오히려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하고 다양한 성범죄가 그것을 반증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다툼들 중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는건 '여성도 군대가라'는 말이다. 남성들이 군대에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해마다 죽어가고 있으니 여성들도 군대가라. 너희도 겪어봐라. 솔직히 마음같아서는 나도 군대에 가고 싶었다. 총 쏘는 방법도 배우고 기본적으로 유도,태권도도 배우고 강인한 체력을 얼마만큼 끌어올릴 수 있는지 여성도 경험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군대 다녀온 여성들은 ㅡ당연히 그런다고 남성과 동일한 힘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ㅡ 적어도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반사신경도 기르고 체력도 좋아져서 사회에서 겪을 수 있는 각종 폭력사태에 더 잘 대응할 수 있을것이라는 희망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의 이익과 가장 무관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는 것이 전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단상황 때문에 남자들이 군대를 가야 한다면 여성들도 군대에서 어느정도 훈련을 받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나와 다른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는 것쯤은 안다. 구체적인 실행보다는 불만을 표출하는 단순한 감정이라는 것도.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머리가 복잡했다. 독일과의 전쟁에 참여한 러시아 소녀 병사들. 여성도 역시 잘 싸울 수 있구나. 남자만큼이나! 저격도 하고, 지뢰도 해체하고, 포도 쏘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두려운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동료를 구하러 전장에 뛰어들고, 심지어 적군도 살려내고, 이들은 한결같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발벗고 전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총에 맞고 피에 젖어 처참한 부상병들을 보며 신념이, 전쟁이 과연 무엇인가를 아프게 경험했다. 소녀 병사들은 목숨을 다해 싸웠지만 그 무자비한 곳에서도 삶이 있었음을, 사랑이 있었음을. 그래서 그 상황을 버텨낼 수 있었음을 증언한다.
붉은 립스틱
1945년 봄 유럽의 나치수용소들이 일제히 해방되었다.
수용소마다 오물과 시체들이 썩어 흘러넘쳤다.
연합군의 확성기가 "You are Freedom"이라고 외쳤고 전투기들이 공중에서 수용소 위로 구호품들을 투하했다.
구호품 중에는 다량의 붉은 립스틱 박스가 들어 있었다.
남자 죄수들이 지금 굶주리고 아파서 죽어가는 마당에 이런 게 무슨 소용이냐며 야유하고 비난했다.
그런데 립스틱은 식품과 의약품보다 먼저 동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마침내 수용소 철문이 활짝 열렸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팔의 죄수번호를 지운 여자들이한껏 턱을 치켜들고 세상속으로 행진했다.
그녀들의 팔과 붉은 입술이 아침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 P40
전쟁이 끝나고,살아남아 손녀,손자들을 둔 경우도, 남편을 보내고 홀로 근근히 살아가는 경우에도 그들의 공통점은 전쟁의 기억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증언을 하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사람도 많았고, 용기를 내 증언하고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듣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증언들이 어떤 위대한 전쟁 기록물보다 더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는 걸 알게되었다.
"우리의 고통도, 우리가 겪은 아픔들도. 그건 잡동사니 쓰레기도 아니고 타다 남은 재도 아니야. 그건 우리네 삶이지." p.225
대부분의 전쟁영화에 여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은 수많은 여성들 역시 집어삼키고 살아남더라도 삶을 뒤흔드는 선택으로 내몰기도 한다. 여성들은 그 와중에도 삶을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들은 엉뚱한 질문을 하고 전쟁보다는 삶에 가까운 것들을 기대하고 소망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을 더 잘 드러낸다. 하찮은 것들, 삶에 관한 것들, 안온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 사람들은 그게 전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은 '전쟁'이 '삶'과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결코 전쟁을 문제삼지 않는다. 전쟁에 관해 여성들의 서사가 더 많이 필요한 이유다.
여자들이 이야기할 때, 그들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읽거나 들어서 익숙한 내용, 그러니까 어떤 이들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승리를 거뒀는지, 아니면 어떻게 패배했는지, 어떤 기술들이 사용됐고 어떤 장군이 활약했는지 따위의 내용은 아예 없거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로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p.18
바다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다는 달에 의해서만 동요될 뿐이니까.p.175. 티끌같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