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하면 인종차별, 성 차별을 하게되는 걸까?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성차별을 하기 쉬운 소인을 가진 태아도 없다. 타자화는 강의나 교육을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배우게 된다. - P30,토니 모리슨, 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이 세상을 떠나기 2년전 내놓은 에세이다. 그녀의 말대로 사람이 차별과 혐오를 타고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별과 혐오,그리고 전쟁에 대한 일반적 시각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 차별과 혐오를 배우고 습득한다. 페미니즘이 성차별에 있어서 생물학적 구분보다 사회,문화적 습득을 강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런면에서 과학과 의학, 사상까지도 예외없이 왜곡된 것들은 부단히 찾아내고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인간이 만든 것들 중에 필연적인 것은 없다. 수없는 선택의 결과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노예제를 ‘낭만화‘ 하려는 문학적 시도는 좀 다른 경우이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런시도는 노예제를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고, 심지어 소중하게 여김으로써 소화하기 쉽게, 심지어 선호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 무해한 통제도, 탐욕스러운 통제도 궁극적으로는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 P35,토니 모리슨, 타인의 기원
이 책을 읽으며 '노예제'의 자리에 '남성주의'나 '가부장제'를 대입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위의 발췌문에 적용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차별에 페미니즘이 공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니 모리슨은 권력을 가지려는 욕구 때문에 타자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타자의 마음을 빼앗아 내 자신의 거울 속으로 도로 데리고 들어오고 싶어 한다. 어떤 경우에든ㅡ 경계심을 갖든, 헛된 존경심을 느끼든 ㅡ인간은 타자에게 개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자신은 꼭 지녀야 한다고 고집하는 그 개인적 특성을 남에게는 허락지 않는 것이다. - P75
그런면에서 문학을 가까이 하는 것,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개성의 어리석고 용납할 수 없는 캐릭터를 자주 접하는 건 '타자화'를 무너뜨리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등장 인물들의 어떤 행동이나 삶의 방식에 불편해진다면 그 캐릭터보다는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그게 왜 불편한 것인지, 왜 용납할 수 없는지를 말이다.
그들이 한 일은 관객들 앞에 거울을 내민 것이다. 추하게 생긴 사람이 그 거울 앞을 지나간 것이 과연 그들의 잘못이겠는가? 거울에 무슨 당파가 있는가?p.10 스탕달 '아르망스'의 서문에서.
미국에서 노예제가 만연했을 때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에게 행한 가혹행위, 타자화하며 용납하지 않던 것들은 흑인들에게 고통을 야기했지만 그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흑인 노예들이 아닌 백인들의 야만성과 잔인성이다. 즉 상대를 타자화하고 고유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고집은 대상화된 이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 대상화하는 주체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처받는 것은 타자화,대상화된 이들 뿐만이 아니다.
남자는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야만했다. 유일신을 통해 남자는 스스로를 상징적 자아로 만들고 생애사를 가진 창조물이 되어 여자와 자연으러부터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이름을 주고 대상화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남성)는 자신에게는 상징을 만드는 권력을 부과하고, 여성에게는 생명-죽음-자연(life-death-nature)의 유한성을 부과함으로써 이 존재적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다.
- P350, 거다 러너, 가부장제의 창조
페미니즘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페미니즘이 과거 역사를 토대로 남성에 대한 증오를 키운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과거 남성중심적인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인류의 화합에 피해를 준다.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인류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는 이미 지난 것이니 당시 고통당한 사람들, 또 그 무게가 얼만큼 현재 우리에게 영향을 주건 잊어야 하고 앞으로의 평화를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일까? 과거의 실제한 고통은 괜찮고 앞으로의 예견된 (불명확한)고통은 안괜찮다? 이들도 그런 과거가 옳지 못했다는 것은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역사연구와 그 문제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시도는 현재도 남아 있는 가부장제,남성중심적 구조,가치관등의 근원을 영영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이해불가한, 필연적인것으로 오인하게 하고 작금의 불합리한 상황을 가볍게 여겨지도록 조장할 수 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힘을 얻고자 하는 (어쩌면) 본능적인 하나의 수단이다. 다만 그 방법에 차이가 드러난다. 어떤 이들은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아 힘을 얻고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혐오해 자신이 힘있는자라는 인식으로 간다. 하지만 후자는 부실하다. 왜냐하면 혐오 대상의 유무로만 자신의 힘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임기응변에 가깝다. 그러므로 내면에 항상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휘두르는 힘이 진짜가 아니란 것을 본인 스스로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스스로의 무지와 공포를 숨기기 위해 진실을 회피하려고 하고 사실을 왜곡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Two Minds 뇌는 보통 두 가지 방식으로 사고를 한다고 한다. 깊은 사고와 얕은 사고로 나뉘는데 공포로 자극되는 얕은 사고는 생존 본능에 가까운 것이고 즉각적인 반응이다. 즉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반응은 아니다. 인간의 생활환경이 포식자에게 둘러싸인 원시사회가 아닌 현대로 들어서면서 이런 얕은 사고는 더이상 생존에 유리한 반응이 아닌것이다. 하지만 언론과 자본주의. 그리고 정치는 이러한 대중의 공포를 이용한다. 여기에 필수요건은 몰이해다. 이해하려하는 노력은 깊은사고에 속하고 보다 고차원적인 생존반응이며 앞으로의 환경에 더욱 적합하다. 깊이있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해하려는 방법을 훈련하다보면 단순사고로 인한 오류를 충분히 줄일 수 있다. 차별과 혐오가 그런 것들이다. 우리는 더이상 원시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만 한다.
가부장제 체계는 역사적인 구성물인 만큼, 그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도 있을 것이다. 가부장제의 시간은 그 경로를 따라 거의 끝나가고 있는것 같다 ㅡ가부장제는 더 이상 남성들 혹은 여성들의 욕구에 봉사하지 못하며, 군사주의 위계 그리고 인종주의와의 뗄 수 없는 연관성 속에서 지구상에 있는 생명의 존재자체를 위협한다. - P397, 거다 러너, 가부장제의 창조
참고 영상 *공포 장사하는 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