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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프로젝트 -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 ㅣ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5
토마 마티외 지음, 맹슬기 옮김, 권김현영 외 / 푸른지식 / 2016년 6월
평점 :
여럿이 모이다보면 캐릭터가 강한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이 만일 상대를 깎아 내림으로써 자신을 빛내려하는 성향이라면 보통은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웃어 넘긴다. 타깃이 된 사람은 '유별난'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특별히 대꾸를 하거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역시 넘어간다. 하지만 때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오랜기간 곱씹으며 화살을 쏜 상대를 원망하기도 한다. 친구들 고민을 들어주다가 인간관계에서 이런 문제가 드물지 않다는걸 알게됐다. 보수적인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양에서는 불쾌한 상황을 문제삼지 않는것,논쟁을 피하고 튀지 않고 무던한 사람으로 비춰지는것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 대표적 서구인 미국의 경우, 영화에서 보면 이와 대조적인 대응을 더러 목격한다. 상대의 모욕이나 조롱 또는 비하에 적절하게 되받아치기가 마치 중요한 미션인듯 느껴져 보는이로 하여금 통쾌함을 맛보게 한다. 예를들면 이런것이다.
내가 본 '성범죄수사대'라는 미드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투투올라 형사가 범죄자를 찾기 위해 탐문수사에 나선다. 한 목격자가 대화중 이민자 출신인 범죄피해자를 느닷없이 모욕한다. 자기네 조국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식으로. 그러자 투투올라 형사는 "그래 당신 조상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왔지 아마?"하고 응수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제는 이런 대응법을 강좌로 수강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성범죄에 대한 대응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상당수의 여성들이 살면서 작고 큰 성범죄를 경험한다. 지하철에서 추행당하기도 하고 하교길에 신체 특정부위를 노출한 바바리맨을 발견하기도 하고 대학에서 동료 학생들이나 교수에게, 또는 직장에서 상사의 성희롱이나 추근거림에 난처해지기도 하는 등 그 방식과 상대도 천차만별이다. 이렇듯 거리,대중교통,아는 사람,가족에게 여성들은 성적 괴롭힘을 당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침묵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말로 상대를 모욕하고 조롱,비하하는 사람들처럼 습관적으로 성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역시 침묵을 먹이삼아 그런 행동을 반복,강화한다.
여성이 발언권을 얻기는 어렵다. 사회는 남성에게만 발언권을 주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화든 허구든 간에) 어떤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흔히 남성이다. 특별히 여자가 주인공이 되어야 할 이야기가 아니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여자 친구, 누군가의 엄마등으로서의 여성일 뿐이다.) 마치 모든 문화가 남성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한편 우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한다. 이야기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그 속에 깊이 들어가야 하므로 감정이입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이야기에 직접 들어가서 자기도 그곳에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여성은 곧잘 남성 등장인물에 자신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젤다‘라는 게임이 유행이었다. 여자들은 링크라는 인물을 자기라고 여겼다. 링크가 구해줘야 하는 공주님이 아니라. 왜냐하면, 게임 속 주인공은 링크였고, 공주님이 되는 건 별 볼 일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주인공이영웅이고, 그 영웅은 링크라는 ‘소년‘이었으니까.- P158
이 책은 남성작가가 그려낸 작품이다. 남성들을 악어로 그림으로써 남성들의 입장이 아닌 여성들의 입장으로 상황들을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만일 남성들을 사람으로 그렸다면 남성들이 이 책을 볼때 여성들의 입장에 몰입하기는 힘들었을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회,대중문화에서도 보통은 남성들 위주이기 때문에 여성들조차 무의식적으로 남성들 기준에서 감정이입하고 사고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작가가 쓰고 그린 이 그래픽북을 보면서 프랑스 역시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인식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되었다. 침묵하지 않고 대응한다고 해도 때로 폭력적인 반격을 당할수도 있다. 목격자들이 주변에 많아도 누군가 나서 도와주는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공격적이고 비하하는 언행처럼 이런 문제는 끝도 없이 반복된다. 여성들이 경험하는 세상을 더는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은 분명 의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누구보다 남성들이 더 많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여성의 입장에서 느끼고 관찰해본뒤 그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면 분명 비슷한 상황을 목격했을 때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남성도 성폭력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여성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범죄자는 사회와 문화적 현상에 의해 만들어지고 방치되어진다. 뒷부분에 나온 여러 운동가와 학자들의 코멘트도 인상적이고 간단한 대응방법도 담겨있어 도움이 된다. 이런 실험을 통해 남녀가 보다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성의 관점에서는 남성이 좋은 남자와 공격자, 이렇게 두 가지 범주로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이 두 범주는 종종 서로 만나고, 섞이고,혼동된다. 모든 남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범주에서 저 범주로 순식간에 옮겨갈 수 있다. 거리에서 마주친 남성, 남자 친구, 남편, 친오빠………. 얼마나 많은 여성이 주변인에게 강간당해왔는가?
『악어 프로젝트에서 한 여성의 끔찍한 경험담을 보자. 흔히 일어나는 애인의 강간은 악어의 다음과같은 속삭임으로 끝난다. "고마워. 아까 정말 끝내줬어." 그러나 이 남자가 그저 비열한 놈, 강간범이기만 했다면 여성이 그와 사귀었을까? 모든 악어가 어느 순간에는 좋은 남자로 바뀔 수 있으므로 반대로 모든 좋은 남자는 악어가 될 수 있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으로 독재자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범주의 남성을 상대하는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남성은 모두 약탈자로 보일 수 있다. 또한,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기 바라는 게 인간이기때문이다.- P1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