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나타난 계급의 첫번째 대립은 일부일처제 안에 있던 남자와 여자 사이의 대립의 발전과 일치하고,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과 일치한다." -엥겔스'가족 사유 재산제,그리고 국가의 기원' p.105
인종차별은 오래된 문제다. 하지만 보다 오래된 차별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이 사실은 더 명확해진다. 전쟁시(위기상황) 연합군에 타인종이 섞일 수는 있지만 여성은 결코 쉽지 않다. 지금도 분쟁국가에서는 여성에 대한 성범죄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즉 안보를 위협하는 적이 나타났을 때 다른 인종과는 연대할 수 있어도 여성과는 연대하기 힘들 뿐더러 오히려 여성의 성은 더욱 위협받는상황이 된다.(위안부는 그 중의 한 가지 사례이지. 전부가 아니다) 뤼스 이리가레는 이 세계의 역사와 규칙은 오직 남성들에 의해 쓰여졌으며 성(性)에 있어서도 오직 한 가지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어머니 · 처녀 창녀, 이것들이 여자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들이다. (이른바) 여성 성욕의 특징들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즉 번식활동과 영양 공급에 대한 가치 부여, 정절, 정숙함, 무지, 게다가 쾌락에 대한 무관심, 남성들의 활동‘ 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소비자들의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유혹, 그러나 자신은 누리지 않으면서 이 욕망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으로 자신을 바친다. 어머니도 처녀도 창녀도 아닌 여성에게는 자기 쾌락에 대한 권리가 없다. - P242
이 세계에 중심된 성이 하나이기 때문에 철학과 언어,역사에 그런 남근중심적 규칙과 사고방식이 담겨있고 계승되어지고 있다. 남근중심주의는 여성의 쾌락에 대해서도 남성적 사고방식의 분석과 담론을 이어왔다. 정신분석학에서 대표적으로 이리가레는 프로이트를 예로 든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여성은 어린시절 남성과 동일했지만 발육을 거치며 자신에게 남근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상실감을 느낀다. 여성의 쾌락에 대한 설명이나 여성끼리의 동성애에 관한 시각에서도 마찬가지로 남근중심적이다. 그리고 그의 정신분석은 남성세계의 규칙과 일치한다.
프로이트는 사실 어떤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그는 여성의 성욕도, 게다가 남성의 성욕도 완성하지 않는다. 그는 과학도로서 이해할 뿐이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다루는 산물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결정되었는가에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자기에게 드러나는 여성의 성욕을 규범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병적 상태가 사회적·문화적 상태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는 묻지 않은 채, 개인사에 따라 여자들의 질병과 증상 · 불만족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요구 사항을말하지 못하게 하면서 가장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아버지의 지배적인 담화에, 아버지의 법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P91
이리가레에 따르면 주체인 남성들은 본질적으로 여성의 쾌락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들의 쾌락을 위한 쾌락으로만 측정된다. 그래서 여성은 그들과 함께하고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고 그들 사이에 교환되는 상품으로 존재한다. 착취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성 착취가 아직까지 많은 국가에서(전시상황이 아닌경우도 마찬가지로) 성산업으로 만연한 것도 그 단적인 증거다. ㅡ온라인으로 유통되는 성범죄도 여성이 그 대상이다. ㅡ성매매를 합법화하자는 일부의 주장도 그런 배경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성범죄자를 법적으로 처벌하고 있는데도 성판매 여성들을 위해 성매매를 합법화하자고 말한다. 마치 이 여성들을 위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남성들의 성욕해소를 필수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유독 이 매매의 수요와 공급에서 공급자는 늘 여성이란 점이다.
'성노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신매매는 나쁘지만 '자발적인 성매매'는 괜찮다고 한다. 성착취 현장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은 나쁘지만 '성매매' 자체는 괜찮다고 한다.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성매매'는 나쁘지만 성인의'성매매'는 용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성착취를 용인할 수 있는 성매매와 그렇지 않은 성매매로 나누는 것은 상업화된 성착취 자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 위함이다. -성노동,성매매가 아니라 성착취. 박혜정. p.113
여성의 성폭력 피해나 남성의 '꽃뱀 피해'모두, 성의 주체는 남성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즉, 여성의 성은 여성의 몸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여성의 것이 아니라 남성과의 관계에서 폭력 ,매매,협상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남성의 성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ㅡ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p.175
사실상 성노동을 인정하자는 주장은 이렇듯 물화된 여성의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고 계속해서 그것을 유지하자는 의미다. 이리가레는 쾌락을 중심으로 여성을 상품화하고 억압하는 지배적 담화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 남성편향적인 이 세계에서 여성들은 자신들만의 언어, 역사, 담론, 거울, 심지어 쾌락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남성들이 고체라면 여성들은 액체로서 형태도 없이 흐른다. 실제로 이 책의 저자 이리가레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비판한 뒤 학회와 대학에서 축출당했다. (여기서 비롯된 분노가 책의 후반부에 조금 담겨 있다.) 이런 지식인의 의견조차 묵살당하고 배척당하는 이 상황이 더욱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읽는 동안 해체적 접근법이 어렵고 난해해 힘들었지만 주디스 버틀러를 읽었던 경험 덕분인지 그래도 비교적 짧은 시일내에 읽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소 강한 어조가 담겼지만 여러가지 생각들을 끌어내주었던 글이어서 좋았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 라캉과 데리다, 프로이트에 관해서도 공부할 필요를 느낀다.
어떠한 쾌락인가? 누구의 쾌락인가? 누구와 누구 사이의 쾌락인가?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이다. 쾌락은 결코 관계 속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같은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스스로 유일하다고 믿기 때문에 주인은 자기 중심적 쾌락을 절대자의 쾌락과 혼동한다.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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