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열차를 타고 다음 여행지로 이동할 때였다. 그 객차에는 우리와 어떤 소년만이 객차의 이쪽과 저쪽 양끝에서 마주보는 방향으로 앉아 있었는데 소년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짝꿍과 수다를 떨던 나는 어느 순간 그 아이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음을 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게 그 칼은 과도보다 길었고 10대 후반쯤의 앳된 얼굴에 금발머리였던 그 소년이 광기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보며 보란듯이 흔들어대고 있어서 더 섬뜩했다. "저 남자애 칼을 들고 있어!" 짝꿍에게 속삭였고 우린 함께 공포에 휩싸인 공기를 들이켰다. 소년이 일어서서 우리쪽으로 걸어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길로 앞쪽을 주시하면서 손으로는 다급히 휴대폰을 눌러 대사관 번호를 찾아냈다. '신고해야 하나? 괜히 일이 더 커지면 어쩌지?' 짝꿍과 나는 낯선 타지의 열차 안에서 우리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린 살기로 번뜩이는 눈빛의 그 애를 바라보며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복화술로 서로에게 충고를 주고 받았는데 "겁먹은 티를 내선 안돼" "둘이서 하나 쯤은 괜찮을꺼야"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 애의 칼 앞에서 그런 이야기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어갔다.
간절한 기도와 선행하고 살겠다는 맹세를 반복하면서 긴장속에 몇 정거장이 지나갔다. 천만다행으로 그 애는 얼마후 내렸는데 열차가 출발해 그 무서운 아이와 간격이 더 벌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평온과 함께 온전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저 애는 왜 칼을 들고 열차를 탔을까? 동양인을 혐오해서 칼을 보여준 걸까? 아님 두려워서 그런걸까?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누굴 죽이러 가는 걸까? 등등 살았다는 안도감에 한껏 들떠 오만가지 추측을 주고받았다. 한동안 그 애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길래 칼을 지니고 다니지? 혹시 우리가 신고하지 않아서 누군가 저 애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P.138 그는 자신의 영광의 구름을 직접 끌며 나아가고 있었다. 미성년인 그의 주위에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브라이턴 록>에도 불안해 보이는 한 소년이 등장한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눈빛만은 이미 늙어버린 부조화를 지닌 존재로 그려진 핑키. 이름도 어쩐지 그의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손톱을 물어뜯고 우유로 한번씩 끼니를 때우며 아직 다 자라지 않아 마르고 좁은 어깨와 가슴을 지닌 그는 연애경험도 전무하면서 이성관계에 대해 이미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얼마전 죽은 두목 카이트를 대신해 어설프게 조직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영역들을 점차 잠식하고 있는 상대 조직 때문에 하루하루가 소년에게는 고달프고 아슬아슬하다. 몇몇 스틸컷 뿐 분명히 제시되진 않지만 어릴때의 나쁜 기억들과 그가 쌓아가는 지금의 현실이 중첩되며 점차 그는 궁지로 몰리게 된다. 한때 사제를 꿈꿨던 소년은 이제 어두운 내면의 번민과 공허를 안면의 실룩거림과 예측불가능한 행동으로 드러낸다.
P.420 그의 가슴속에서 광기 어린 자만심이 스멀스멀피어올랐다. 그는 영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공허해진 마음에 삶에 대한 사랑이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빈집과 전보다더 흉악한 일곱 악령.
(마태오의 복음서 12장 45절의 내용, 사람에게 붙어 있던 악령이 나갔을 때 성령으로 자신(집)을 채우지 않는다면 먼저 있던 악령이 더 악한 악령을 여럿 데려와 전보다 더 나쁜 상태에 처하게 된다고 말한다.)
살인을 저지른뒤 그걸 덮기 위해 한 여자아이와 억지스럽게 만나지만 이야기는 오히려 그의 마음처럼 종잡을 수 없는 불안과 갈등으로 이어진다. 우연히 이 사건의 키를 쥐게 된 호기심 많고 집요한 여인'아이다'는 이 소설에서 강 건너에 있는 '셜록'의 느낌으로 주요 무대에서 드물게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이 스릴러는 선의 입장에서 악을 다루는 주류의 시선이 아니다. 악의 입장에서 결말로 가는 독특한 방향은 마치 목적지도 모르는 상태로 나사가 빠진 화물차에 올라타 레일을 따라 어두운 동굴을 뚫고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그로테스크한 로멘스. 마지막 문장을 읽고 "어떡해"를 연발했다. 남자의 목을 들고 있는 클림트의 유디트나 가시돋힌 장미처럼 아름다움과 섬뜩함은 기이한 조화를 이룬다.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독자는 불안한 상태를 한동안 놓지 못할 것이다. 그때 열차에서 그 애가 내리고 난 뒤 얼마간 내가 그랬던것처럼.
Corruptio optimi est pessima.'가장 좋은 것이 타락하면(부패하면)가장 나쁜 것이 된다'는 뜻의 라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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