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집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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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여자들의 피난소 '여성 궁전'

열악하지만 따듯하리라 생각하며 찾은 그곳에서

솔렌은 예상치 못한 냉랭함과 마주한다

레티샤 콜롱바니 의 전작 <세 갈래 길> 을 인상깊게 읽었었다.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으로 사는 여자의 삶과 시칠리아 공방에서 가업을 잇고자 하는 딸의 삶과 캐나다 대형 로펌에서 성공한 여자 변호사의 삶이 얼마나 깊은 좌절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는지를 보여주며 세 갈래로 땋은 머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던 그 소설은 여성의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두번째 소설인 <여자들의 집>도 그 희망의 연장선에 있는 소설로 읽힌다.

마흔 살의 성공한 변호사인 솔렌은 어느날 의뢰인의 충격적인 자살을 목격하며 번아웃에 빠진다. 집밖으로 한발짝도 내딛기 힘들어하던 그녀에게 의사는 봉사활동을 권유한다. 내키지 않아하던 그녀에게 한 구인공고가 눈에 들어온다.

'글로 의사소통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 글을 대신 써 줄 작가를 구합니다. 글쓰기 자원봉사를 희망하시는 분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그 구인공고를 보는 순간 전류 같은 것이 몸을 타고 흘렀다. '작가'를 구하고 있었다. 작가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에 잠들어 있던 무엇인가가 전부 되살아났다. (p. 25)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생으로 살아온 그녀였지만 사실 변호사라는 직업은 부모님의 의지에 자신을 맞춘 것이었다. 그녀에겐 다른 꿈이 있었다.

소설은 현재의 파리와 1925년의 파리를 오가며 서술되는데 1925년의 파리에서는 블랑슈 라는 여성이 삶이 펼쳐진다.

블랑슈는 자신의 몸을 챙기느라 일을 미룬적이 없다. 블랑슈의 제복 칼라에 달린 세 개의 S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임무이자 소명, 그의 존재이유였다.

수프Soup, 비누Soap, 구원Salvation.

블랑슈가 생을 바쳐 온 과업은 이 세 단어, 즉 극빈자들에 대한 구호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것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블랑슈가 충실히 복무해 온 조직의 이념이었다. (p. 43)

블랑슈가 생애를 바친 단체는 '구세군' 이었다.

<<영국의 목사 윌리엄 부스가 '어떤 전투를 치르는 데는 군대가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군대를 모델로 하는 한 단체를 창설했다. 사관학교, 깃발, 제복, 계급체계 등 모든 것을 군대식으로 갖춘 조직이었다. 국가, 인종, 종교의 차별 없이 어디서나 가난과 고통에 맞서 싸우려는 것이 이 단체의 활동 목표였다. 구세군이라는 이 단체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바야흐로 지상의 모든 곳에서 빈곤과의 전투를 확대해 나갔다.(p. 45)>>

크리스마스때면 번화가에서 빨간냄비를 걸어놓고 종을 흔들던 제복을 입을 사람들이 구세군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체가 이런 배경으로 이런 목적으로 탄생한 줄은 몰랐었다. 블랑슈의 삶을 읽으며, 종교단체이긴 하지만 종교보다는 빈민구제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니 종교에 친숙하지 않은 나지만 존경심이 저절로 스며들었다.

영국과 스위스에서는 구세군 운동이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프랑스에서는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가톨릭 전통을 이어 온 프랑스인만큼 프로테스탄트 교회 일파인 구세군의 전도 활동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프랑스 각 지역에서 구세군 사관들은 봉변을 당하곤 했다. 몽둥이나 주먹으로 얻어맞았고 발길질로 내쫓겼다. 얻어맞지 않으면 돌팔매질을 당하거나 뜨거운 물세례를 받았다. 저녁에 로미에르 거리의 기숙사로 돌아올 때마다 블랑슈의 모자와 제복에는 썩은 달걀이나 오물이 묻어 있었다. 사람들이 죽은 쥐를 던지는 바람에 그 사체의 파편을 고스란히 덮어쓴 일도 있었다. (p. 51)

종교적 맹목성을 모르는 나로서는 구세군의 헌신또한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오로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만 보다가 구세군 활동을 하던 한 여성의 삶을 읽으니 애초에 종교가 가져야 했던 종교적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전해지는 듯 했다.

백여년 전의 구세군 활동가 블랑슈와 현재의 전직 변호사이자 우울증 환자인 솔렌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앞에서 펼쳐놓은 퍼즐들을 차근차근 단 한곳의 빈곳도 없이 꿰맞추는 방식은 <세 갈래 길>에서 보여줬던 작가의 솜씨 그대로였다.

안뜰이 있는 낡은 주택을 상상했는데 눈앞에 있는 건 사거리를 내려다보는 6층 건물이었다. 아치형 지붕이 출입구를 장식하고, 건물 전면에 머릿돌 격으로 동판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솔렌은 동판에 새겨진 내용이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20세기 초에 건립된 건물이라고 했다. 역사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팔레 드 라 팜므'라고 새겨져 있었다. 건물명이 묘했다. 여성의 궁전. 이름 자체만 보면 어쨌거나 화려한 장소였다. 왕이 사는 곳을 의미하니까. 학대받은 여성들이 피난한 장소에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었다. (p. 60)

솔렌이 대필작가로 일주일에 한번 봉사하게 된 곳은 '여성의 궁전' 이라고 이름붙여진 시설이었다. 시설을 안내해주던 원장의 말이 와 닿는다. < 요즘에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자는 의미로 사회적 공존이라는 문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데,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뒤섞어 놓는다고 공존이 가능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문화와 전통이 뒤섞이는 일은 이곳에서는 그냥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에요. 진정한 공존은 바깥의 삶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데 있어요. (p. 64~65)> 다양성만으로 공존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살면서 종종 체험할 수 있곤 한다. 공존에는 연결이 필요하다. 솔렌에게 필요했던 것도 바로 그런 연결성이었다. 고립이 아닌 공존.

과거 매춘부였다가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 범죄자로서 재사회화 과정을 거친 이들, 장애 때문에 경제 활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다양한 경로로 프랑스 땅을 밟은 이주민 혹은 난민 여성들도 있었다.

"그들 각자는 어떤 형태로든 취약성을 안고 있어요. 저마다 폭력과 무관심을 경험했죠. 사회의 주변부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p. 70)

솔렌으로서는 큰 결심이었지만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다. 자신의 상처만 보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생전 처음 봉사활동에 나서면서 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은 착각이다. 내 작은 도움을 그들이 두팔 벌려 환영하리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여성의 궁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은 저마다 다채롭게 우울했다. 솔렌의 우울은 견줄바가 아니었다. 솔렌은 처음 갔을때 그런 현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솔렌의 알껍질은 좀더 깨어져야 했다.

이해가 되는 상황임에도 솔렌을 엄습한 그 강렬한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자신이 그런 심리 상태가 된 게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솔렌 자신을 향해 화가 났으니까. 지금까지 솔렌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면의 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의 좁은 삶, 개인적 성취에 매몰되어 배고픈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굶어야 할지 배를 채워도 될지가 지갑 속 2유로의 유무로 결정되는 사람들이 바로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둔감했다. 그런 현실을 오늘에야, 여성 궁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또렷이 의식하게 된 자신에게 솔렌은 화가 났다. (p. 88, 89)

자신의 삶이 안정적일때 세상의 불안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세상이 흔들렸을때 동시에 세상의 불안이 겹쳐오기 마련이다. 처음 느끼는 불안한 세상에 대한 분노는 급작스러운 만큼 쉽게 꺼지기 마련이다. 세상의 불공정을 알았을때의 정의감은 사실 오래가기 힘들다. 꾸준하게 세상의 불안을 마주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런 삶을 산 인물로 솔렌과 블랑슈의 삶이 대비되듯이 읽혀진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엔 합쳐질 것이다. 이 소설은 희망을 품고 있으므로.

구세군에 들어가자마자 '리틀 가십걸'은 모든 면에서 단연 두드러졌다. 그의 열정, 결단력, 창의성 넘치는 활동에 모두가 감탄했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블랑슈는 그 어떤 난관이 있어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구세군 신문의 기자로서 글을 쓰면서 거리 성가대이자 설교자 역할을 했다. 광고판을 앞뒤로 붙이고 거리를 순회하며 구세군 신문을 팔았고, 얼마 후에는 이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다. 행인이 많은 대로에서 기타를 치고 탬버린을 두드렸다. 수없이 거리 사역에 나서서 극빈자 구호를 위한 현물 기부를 호소했다. 블랑슈는 모임을 찾아다니며 지원을 청했다. 군중 앞에 나서서 연설했고 거리 행인을 붙잡고 호소했다.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 실내를 한 바퀴 도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p. 91)

한마디로 블랑슈의 삶은 가난 이라는 전쟁터 에서 치루는 싸움이었고 블랑슈는 가장 선두에 나서는 군인이었다. 한때 리틀 가십걸 이라 불릴 만큼 놀기 좋아하던 소녀는 자신의 소명을 깨닫는 순간 불굴의 전사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삶이 40년 지난 때가 1925년 파리였다. 평생을 헌신하며 산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 수 있을지 실사례를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소설속 인물인 블랑슈는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성의 궁전'은 실제로 파리에 있는 곳이다. 이런 현실 예시는 종교적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종교이건 무엇에건 인간의 삶에 있어서 믿음이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솔렌은 이제껏 '대필작가'라는 일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맡은 일의 진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대필 작가는 펜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리고 언어가 필요한 사람에게 펜과 손과 언어를 빌려주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머릿속, 마음속의 글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판정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운반해주는 사람이다. 솔렌은 편지를 쓰기에 앞서 자신은 운반자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p. 173)

솔렌의 좌절과 포기와 번민과 재시도 속에서 만나는 '여성의 궁전' 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슴을 부여잡게 만드는 사연들을 안고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범죄로부터 딸을 구해내기 위해 가족을 떠나야 했던 기니 여성은 함께 데려오지 못한 아들 생각에 밤마다 숨죽여 울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이 여자를 이름으로 칭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는('누구의 아내' 이거나 '누구의 딸', 혹은 '누구의 누이'로 불리거나 가족의 이름을 모를 경우 그저 '아주머니'라고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여자는 파리에 와서야 이름이 생겼다. 버려진 아이로 자라나 거리에서 낳은 아이와 생이별한 후 세상 모두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여성도 있었다. 20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칼을 맞고서야 도망쳐 나온 여성의 남편은 재판에서 징역5년에 유예1년을 선고받았다.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으로 살고자 한 이는 여성의 궁전에서조차 쉽게 어우러지기 힘들었다. 여성노숙인으로 54번이나 강간을 당했던 여성은 방을 배정받고도 침대에 눕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연의 여성들이 있었다... 다양한 폭력에 내몰린 여성들은 차고 넘치고 있었다... 운반자로서의 봉사는 의도치 않게 솔렌을 한계로 몰아넣었다.

프랑스 구세군은 결핍 속에서 후퇴를 거듭해야 했던 시간을 이겨 내고 눈부신 도약을 이루었다. 페롱 사령관 부부의 주도하에 대역사의 시대가 열렸다. 원대한 계획들이 차례로 실현되었다. 블랑슈와 알뱅은 파리 고블랭 구역에 '시민 궁정'을 건립했다. 노숙인을 위한 쉽터였다. 한편으로 라 퐁텐오루아 거리에 여성 피난소도 만들었다. 프랑스 거의 전 지역에 피난소가 생겼다. '가난한 자의 옷장'이 설치되었다. '자정의 수프' 사업도 시작되어 파리의 밤거리를 누볐다. (p. 144)

빈민구제 사업에 헌신하던 블랑슈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같은 일을 하던 구세군 청년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둘이 되니 에너지가 배가된듯 더 활발하게 사업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좌절도 있었다. 해도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빈민들의 삶에 블량슈 본인마저 실망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할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에서 한 기사를 읽게 된다.

"주거용 대형 건물이 비어 있어요, 그것도 파리 시내에!" 블랑슈의 두 눈이 열기를 띠며 반짝였다. 벌떡 몸을 일으켜 알뱅 앞에 섰다. "그 건물을 사야 해요! 그래서 집이 없어 거리로 내몰린 파리의 모든 여자들이 와서 쉴 수 있게 해야 해요" (p. 180)

"고통을 멈추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아뇨, 세상의 고통은 계속될 거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멈출 수 없어요" 블랑슈가 꿈꾸는 것은 고통받는 여자들이 쉴 수 있는 장소였다. (p. 182)

방의 개수만 743개에 이르는 대형 주거 건물이 5년이 넘도록 거주자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한 재단 소유의 이 건물은 1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독신자 거주용으로 지어졌다. 시 당국이 이 건물을 사들이려 했지만 높은 매입 가격과 유지 관리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획을 접어야 했다. 엄청난 액수의 예산이 필요했다. 구세군은 가난한 단체였다. 하지만 블랑슈는 뜻을 세웠고 목표를 정했다. 이 건물터는 과거 도미니크파 은거 수녀 공동체인 십자가수녀회 수도원이었다. 블랑슈에게 이 건물은 운명적인 곳이었다.

솔렌은 대필 작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여성 궁전 원장님에게는 전화로 제 뜻을 알리려고 해요. 그곳에서 일하는 건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힘들어요. 그 일을 감당하 힘이 없어요. 그곳 여자들의 상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요. 그들의 망가진 삶을 보면서 제가 휘청거러요. 저 역시 영영 주저앉고 말겠어요" (p. 292)

백년전 블랑슈의 전투와 지금 솔렌의 전투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두 전투는 서로 어떻게 엮이게 될까?

솔렌이 '블랑슈 페롱' 이라는 낯선 이름을 확인하기까의 여정은 소설을 읽으며 직접 확인하기를 권한다.

다만 전투의 결과만 미리 스포하자면, 두 전투 모두 승리한다. ^^

이 책의 원제는 Les Victorieuses '승리한 여자들' 이다.

ps1. 전작보다 왠지 서툴게 구사되는 듯한 문장들이 처음엔 의아했다. 그러나 읽어가면서 솔렌의 감정에 동요하면서 그 서툼이 더 편안해졌다. 나 역시 사회의 불안을 마주하는 일에는 서툰사람이라서인지...

ps2. '사회가 보듬어 주지 못한 이들에게 쉴 곳을 제공한다' 는 그 임무를 단 한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는 '여성궁전' 이 실존하는 파리에 가보고 싶어졌다. 파리에는 에펠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찬란한 궁전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광지로서의 파리에 그닥 큰 유혹을 느끼지 않았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난 후 파리가 갑자기 정겹게 다가온다. 여하튼 파리는 그야말로 '궁전'들의 도시인 것은 맞는 모양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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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남기는 글쓰기 - 쐐기문자에서 컴퓨터 코드까지, 글쓰기의 진화
매슈 배틀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반비 / 2020년 8월
평점 :
절판


양피지에서 스마트폰의 스크린까지,

글쓰기는 어떻게 우리의 정신과 함께 진화했는가

 

이 책의 원제는 PALIMPSEST : A History of the Written Word 로 글의 역사 혹은 문자의 역사라고 번역되는데 번역기에서 자동번역되지 않는 PALIMPSEST 는 따로 사전을 찾아봐야 했다. '원래의 글 일부 또는 전체를 지우고 다시 쓴 고대문서' 라고 나온다. 원래의 글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썼기 때문에 새로 쓴 글 아래 예전의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 흔적,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핵심 단어 이다.

팰림프세스트는 고대에 이루어진 양피지의 재활용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원본 글이 삭제되거나 일부 지워진 자리 위에 새로운 글을 적어 넣은 표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의 경제를 향한 실용적인 찬사가 '팰림프세스트'가 가지는 의미의 전부는 아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확장된 용례'에 따르면 팰림프세스트는 '특히 예전 형태의 흔적을 여전히 간직한 채로 재사용되거나 변경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표면과 엇비슷한 것'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 정의를 뒷받침하는 예문으로 토머스 드퀸시의 말을 실었다. "인간의 두뇌만큼이나 자연적이며 힘센 팰림스세스트가 또 어디 있겠는가?" (p. 12~13)

팰림프세스트가 책 내용의 전반을 아우르는 핵심단어라면 '들어가며' 에 나오는 문장인 '인간의 두뇌만큼이나 자연적이며 힘센 팰림프세스트가 또 어디 있겠는가' 는 이 책의 핵심주제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점토에 남았건 양피지에 남았건 종이에 남았건 스크린에 남았건 모든 글은 나름의 흔적을 남긴다. 이 모든 흔적은 결국 인간의 두뇌 아니 인간의 정신에 흔적을 남겼다. 저자는 이 흔적들을 찾아 고대부터 현재까지 관찰해보고자 한 듯 하다.

언어와는 달리,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광범위하면서도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글 읽기와도 달리, 우리는 글쓰기 없이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수만 년 동안 글쓰기 없이 살아왔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글쓰기 없이 살고 있다. 언어와는 달리 글쓰기는 두뇌 속에 부재하면서도 외상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가 두뇌에 한번 자리를 잡고 나면 끄집어낼 수 없다. 우리가 글쓰기를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글쓰기도 우리를 필요로 한다. (p. 17)

생각해보니 그렇다. 말하지 않고는 못살지만 쓰지 않고도 살수는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하기가 글쓰기보다는 먼저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오랜세월 말하기로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사회는 별무리 없이 굴러왔을 것이다.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문자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다. 인간은 왜 글을 쓰게 되었을까...

중첩되는 형상들로 이루어진 글쓰기라는 뒤엉킨 타래에 대해 흔히 쓰이는 은유가 있다. 바로 팰림프세스트다. 기존에 쓰였던 텍스트의 잉크와 희미한 흔적은 새로운 텍스트 아래에 존재하며 지워진 것의 흔적을 보존한다. 이와 연관된 시 장르인, 시인이 앞서의 의견을 철회하면서도 완전히 말소할 수 없는 개영시처럼, 팰림프세스트는 진정한 삭제란 없음의 방증이다. 저자-지우는 자의 손아기를 빠져나가는 잔류 흔적이 언제나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페이지 위의 글은 아무리 갓 쓰였다 해도 팰림프세스트다. (p. 18) 글쓰기의 팰림프세스트는 시간을 거슬러 가면 갈수록 동시에 새로운 형태를 향해 자신을 밀어붙일 것이다. 팰림프세스트는 오래된 흔적을 아무리 지우려 한들 반드시 그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p. 19)

입 밖으로 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으니 말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의 속담이나 숙어들이 많다. 말에는 흔적이 안 남는다고나 할까. 하지만 글은 다르다. 노트에 쓰던 컴퓨터에 쓰던 글은 썼던 것을 지울 수 있다. 깨끗이 지워도 흔적이 남는다는 의미는 물적흔적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글쓰기는 수단이 어떠하든 다 흔적이 남는다. 쓰기의 흔적에 대한 은유, 그것이 팰림프세스트 였다.

글자 자체도 새긴 글에서 시작된다. 글자(character)의 어원은 자국을 남기거나 새기는 도구를 뜻하는 그리스어(카락테르), 그리고 '새기다, 조각하다, 자르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카락테인 이다. 영어 character의 첫 용례는 글자 그 자체가 아니라 새겨진 모든 흔적과 기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인쇄술이 도입되기 전까지 character는 알파벳의 글자들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20~21)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늘 흥미롭다. 어원의 역사는 문자의 발자취를 문자의 흔적을 거슬러올라가는 과정인 것 같다.

나는 인간의 경험에 글쓰기가 미치는 영향을 교권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신학적 주제에 있어 교회의 가르침이 가지는 권위를 일컫던 교권이라는 단어는 스티븐 제이 굴드가 상호 보완적인 지적 분야인 과학과 종교에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글쓰기의 교권은 그리 오래된 교권도 아니고 음악이나 신학이 가진 덕망을 따라잡지도 못한다. 그러나 글쓰기의 교권은 역사적으로는 새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읽고 쓰는 사람들의 개별 정신과 집단의식 속에 촘촘하게 엮여 있다. 글쓰기는 무척이나 심도 깊고 밀접하게 읽고 쓰기의 정신을 재구성하기에 그것이 힘을 행사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것이 가진 인지적 카르스마, 팰림프세스트적인 장식무늬와 가혹한 규율에 힘입어 인간 정신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아마 무슨 도전이건 스스로의 교권을 확장시키는 기회로 바꾸는 문자의 교권에 필적할 만한 것은 음악과 종교뿐일 것이다. 글쓰기는 그 역사 내내 고대의 방식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매체와 양식으로 확장하며 혁신했다. (p. 30~31)

'교권'이라는 용어에 한자가 표기되있지 않아서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으나 가르친다는 것과 종교적인 힘 두 가지가 다 들어있는 개념으로 저자는 쓰고 있는 듯 하다. 글쓰기의 힘이라... 역사 속에서 문자는 늘 권력의 중심에 있긴 했었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특성, 가장 고도로 발달한 인류 문명의 바탕이 되는 특징은 한편으로는 인류에게는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에 본능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이는 기억 그리고 기억을 향한 갈망, 즉 시간 속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표식을 새겨놓고자 하는 조바심이다. 이는 바로 언어와 그 언어에 의미를 불어넣고자 하는 충동으로, 이 욕망은 대체로 구술발화라는 형태를 취한다.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름을 붙이고 묘사할 뿐 아니라 약속하고 맹세하고 거짓말하고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p. 36~37)

문자의 비밀은 무엇보다도 종합의 가능성 속에 숨겨져 있다. 문자와 숫자는 결국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인식, 즉 '은유'라고 불리는 기이한 습관은 끝없는 의미의 생성과 확장을 가능케 한다. 그럼에도 이 기호가 담기는 팔레트는 자연이 우리에게 물려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제한적인 동시에 특수한 감각의 스펙트럼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다. 인간의 문자는 인간의 특수성을 체현한다. (p. 39)

인간만의 특성은 유발하라리가 말했던 것처럼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은유도 상상력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던 글이던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행위 그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이다. 하지만 말과 글은 분명 다르다.

소크라테스와 글쓰기의 관계-그의 사상을 대필하고 설파한 시인 플라톤이 주장한 바대로라면-는 양가적이고 복잡하다. 소크라테스는 문자가 인간성의 뿌리로 회귀하고자 하는 건강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파열이라고 보았다. 신화라는 구술 세계에서 발생한 문자에 대한 이 같은 회의주의는 이후로도 건재하다. (p. 56, 57)

고대 그리스의 예술적 문화는 글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힘을 가진 이는 공연자와 가수, 곧 필경사와 '저자'를 경쟁자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p. 155) 해블록은 그리스 문학의 아이러니를 언급한다. 음유시인들의 구술낭독을 대체하게 될 알파벳이 구술문화의 보존을 그 첫번째 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글쓰기의 교권은 왕의 행정적 필요성보다 음향의 미학과 대중 공연을 우위에 두는 '문자화된 구술성'이라는 역설적 형태를 띤다.(p. 156)

서양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문화에서 글의 도입과정이 독특했다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만큼 강압 없이 문자가 상륙한 곳이 없다고 말한다. 고대그리스 시대에도 문자는 이미 있었다. 그리스문명 이전의 문명인 미케네 시대부터 문자는 있었다. 하지만 고대그리스 사회에서 문자를 쓰고 읽을 줄 안다는 것은 그닥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능력이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 많았다. 글보다는 말. 고대그리스가 남긴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대부분 대화체로 쓰여있음을 알고있었음에도, 문자가 있었으되 권력에 이용되지 않는 시대였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다가온다.

글쓰기가 전설 속에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발명된 것이 아니라 진회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통상적으로 개별적인 사건들, 일어난 일과 그 원인의 기록이라고 정의되는 역사는 진화의 현상들을 단속적으로 다룬다. 진화는 광범위한 것으로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일어나고, 한순간 인지할 수 있는 변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다. 그리고 진화라는 맹목적이고 인정사정없는 창조물 속에서 문화의 모든 아우성과 변덕이 일어나는 것이다. 글쓰기의 효과는 급진적이다. (p. 64)

인간의 본래적이며 원시적인 인지적 특성의 잔존에 초점을 두는 진화심리학자들은 두뇌가 읽기와 쓰기를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런 목적에 두뇌가 적응한 것은 우발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척추가 육지에서의 이족 보행을 위해 수직으로 세워진 몸통과 허리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것 역시 그 '원래의 목적'이 아닌 우발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애초에 읽고 쓸 운명이 아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p. 67)

흔적을 남기는 이들은 실용적인 정보 전달이나 능숙한 이야기 방식 이전에 놀이라는 한층 더 기본적인 충동을 공유했다. (p. 76)

글쓰기를 인간의 진화와 연관지어 생각하니 갑자기 생소하게 다가온다. 인류의 진화가 운명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유인원들 중에 직립보행을 할 인류가 나타날지 어떻게 누가 알았겠는가. 말과 글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변화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굉장히 급진적인 변화이긴 하다. 또한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한 상상력의 원동력은 놀이에서 비롯될 수 있었음에도 일면 수긍을 한다. 글쓰기가 생존과 직접적인 연결성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글쓰기의 뿌리를 찾으려 동굴과 모래더미와 비석조각들을 탐색했다는 저자도 결국은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자꾸만 과거와 현재를 묶어주는 쉬운 내러티브를 찾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우리는 인간의 복잡성만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된다. (p. 80)

저자도 글쓰기의 뿌리를 찾는 복잡성에서 답을 찾지 못해서인지 조금은 구체적인 목표로 좁혀 보기도 한다.

문제는 어째서 문자가 생겨났는지, 또는 무수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문자가 생겨날 수 있었는지가 아니다. 문제는 어째서 그렇게 오래 걸렸나 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문자는 환상적인 가소성을 지닌 인간의 두뇌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전적으로 인간적일 필요는 없지만, 인간은 모든 면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쓰기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우리의 두뇌는 문화적 가능성을 계속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정신을 만든다. 문자를 이렇게 바라보면 글로 쓰인 표현이 증가하고 변이하는 것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기 쉽다. (p. 85~86)

문자가 왜 생겨났는지가 아니라 문자가 등장하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를 질문은 신선했다. 앞서 말했듯이 말의 역사는 길고 글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다. 하지만 글의 역사는 짧은 시간에 비해 다채로운 변화를 거듭해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를 기록하고, 실수로부터 배우며, 진보를 위한 지식을 나눈다는 공언된 목적 외에도 글은 "인간의 계몽보다는 인간의 착취를 용이하게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예술을 피워내고 동식물을 길들인 것을 비롯해 다양한 발전을 이룩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대였던 신석기혁명은 글의 도움 없이 추진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p. 133~134)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철학자다. 철학적으로 인류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구조라는 형식적 틀을 찾아내자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말과 글일 것이다. 인간만의 능력인 '상징성' 에 대한 그의 연구가 궁금하긴 하지만 철학까진 아이쿠;;; 그저 책속에 인용된 그의 문장들에 공감해보는 선에서;;;

인류의 탄생과 인류 문화의 역사에 견주어 보면 우리는 길가메시와 동시대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여전히 의외와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p. 142)

길가메시의 시대부터 가장 강력하고도 널리 퍼진 언어는 확산되어 정복자와 피정복자 모두의 의식에 뿌리내린 구술언어였다. 이 경우 글쓰기의 교권은 순수하고 단순한 권력의 응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의 권력은 언어를 탄생시킨 왕국이 몰락한 뒤에도 살아남는다. (p. 148)

읽은 적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 가 인용되니 반갑다. 5천년 전에 쓰여진 그 이야기 수준에서 지금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5천년 후의 우리가 여진히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을 수 있는 것은 문자의 힘이기도 하지만 결국 권력문제 인 것 같기도 하다. 소멸되지 않고 남아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결국 권력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중세 유럽의 문학적 실천에서 부인할 수 없는 지배적 형태였던 베끼기라는 행위에 쏟았던 관심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필사 문헌에는 오류가 아주 많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오류투성이 결과물이 근대 학문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이 오류가 종종 필사본의 계보를 측정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p. 161)

글쓰기는 언제나 팰림프세스트다. 글로 쓰이는 것 중 이미 존재하는 것의 사이에, 또는 그 위에 쓰이지 않은 것은 없다. (p. 187)

오류도 차근차근 쌓이면 기록이 된다. 오류의 흔적도 역시나 언제나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팰림프세스트다.

고대의 시인들과 신들은 무척이나 다른 존재였지만 그들이 독자이자 필자로서 하던 행위에는 같은 습관과 규범이 있다. 카툴루스에게 모든 오래된 책은 읽기뿐 아니라 쓰기의 기회였다. 베끼기, 주석달기, 논평하기, 편지쓰기 말이다. 마리트알리스에게도 바울에게도 글쓰기는 책뿐 아니라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수단이었고 시인과 철학자, 필경사로 이루어진 드넓은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사회적 접착제 역할을 했다. 그렇게 책들은 쓰기와 읽기, 호의의 주고받기, 공유하는 생각, 사상과 신앙을 함께하는 집단들의 사회적 연결망이 되었다. (p. 231)

기독교의 전파에 글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말과 말로서만 공동체가 엮였다면 사회의 성장은 더뎠을지도 모른다. 인류의 양적 증가에서 글이 발휘한 힘은 교권을 넘어 연결망이 되었다. 어쩌면 권력이 아래로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출판과 관련해서 '불법복제'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가 타인의 저작을 권한 없이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업, 행정당국이 발행한, 이 기술을 사용하고 공유할 권한을 부여하는 면허 없이 인쇄기를 사용하는 행위를 가리켰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빈틈없는 보호를 받은 것은 작품이 아니라 생산수단이었던 것이다. (p. 268)

글을 복제하는 수단을 억압하면 허위와 오류를 일삼는 자들뿐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자들 역시 악영향을 입는다는 주장이었다. (p. 271)

글의 위치를 추척해오는 과정은 결국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오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 과정을 촘촘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읽을수록 정리가 되지 않는 이 기분을 어찌해야 할꼬;;;

어쩌면 페이스북이 핵심을 찌른 건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아를 글로 쓰는 것에 대해선 책보다 담벼락이 더 적합한 은유일 테니까. 전자 텍스트를 책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맞추는 대신 우리는 벽과 로켓과 인방을 찾는다. 디지털 세계에서 이는 블로그와 피드, 모바일 디바이스,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터치스크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p. 281)

우리는 깊이 읽기가 사라질까 두려워하기보다는 읽기가 그렇게 깊은 곳까지 도달했음에 먼저 경이를 느껴야 한다. (p. 302)

글쓰기가 질서 짓고 비교하고 분류하고자 하는 우리의 충동을 만든 것은 아니다. 글쓰기는 우리의 그러한 경향 위에 만들어져서 그것들이 꽃피도록 했을 뿐이다. (p. 304) 글은 문명의 시녀이고 강자의 도구다. 그러나 글이 문학을 위해 열어준 공간 속에서 글은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며 우리의 존엄을 지켜준다. (p. 310) 단 한가지만은 믿어도 되리라. 그 편재성과 지속성 덕분에, 확산되는 생명력 덕분에, 자기 자신을 기록하고 연결하고 세계의 날실 속에 짜 넣고자 하는 충동 덕분에, 우리의 글은 우리들보다 오래 살아남으리는 것이다. (p. 321)

과거에 비해 글은 더이상 권력의 도구는 아니다. 지금은 오히려 문화의 도구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문화로 봤을때도 고정적인 형식을 지키는 것에서 자유분방한 표현의 도구로 변화해왔다. 종이에 쓰던 것을 가상의 공간에 쓴다고 해서 쓰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새로운 공간에 남긴 흔적들은 여전히 우리의 발자취로 우리보다 더 오래 우리를 쫓아다닐 것이라는 점은 알겠는데 그래서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독자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었단 말인가;;;

내가 드퀸시의 질문으로 만든 팰림프세스트는 그 용어를 뒤집는다. 정신을 페이지로 보는 은유에서, 어쩌면 내 눈에는 12포인트 조지아체로 쓰인 이 페이지가 일종의 정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말이다. (p. 330) 이 새로운 종류의 페이지는 정신, 페이지로서의 정신을 뒤집으려는 정신일까? 나는 결론이 그렇게 간단하고 생각지는 않는다. 글이 쓰이는 표면은 변화했지만 결국 우리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성격을 정하는 것은 우리 독자, 사상가, 작가 모두가 맺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과 페이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글 속에서 함께 존재하는 우리가 맺는 관계다. (p.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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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미술 365
김영숙 지음 / 비에이블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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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짧다, 찬란하다, 재미있다!"

내 손 안에서 펼쳐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교양 수업

책표지나 띠지에 써있는 출판사의 홍보문구는 늘 기대치만 올려놓고 실망감을 주기 마련인데 이 책은 홍보문구에 충실한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드물게 알찬 책이었다. 그림보기를 좋아하고 그림에 얽힌 이야기는 더 좋아한다면 이 한권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많다. 매일 1페이지씩 365점의 명화와 함께 보고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된 이 책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작품, 미술사, 화가, 장르·기법, 세계사, 스캔들, 신화·종교 총 일곱 분야의 지식을 다루고 있어서 미술관련 잡학다식용으로 이만한 것이 별로 없지 싶다.

컬러풀의 각 장마다 그림과 글자의 분배에 균형을 맞추고 한 페이지로 정리한 깔끔한 구성미도 돋보이고 주제에 충실한 보조자료들을 주석뿐만 아니라 참조 페이지와 연결 카테고리 를 번호기재하여 책 안에서 상호보완을 가능하게 하며 책 뒤편의 문헌과 색인까지 흠잡을데 없이 빼곡하게 꽉찬 교양서다.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그림관련 책도 종종 보게 되는데, 연대사로 보던 책과 달리 주제별로 읽으니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때로는 그림에 눈이 머물로 때로는 내용에 마음이 가면서 나중에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도 종종 찾아보게 될 것 같은 책이기도 하다.

책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그림과 내용이 다 인상적이고 재미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골라본다면,

여성미술사 책에서 봤던 '로사 보뇌르'의 노년의 자화상, 일본의 한 대기업 총수가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어달라는 말까지 남기며 애지중지했던 '가셰 박사의 초상', '모나리자' 와 거의 흡사한 쌍둥이 모나리자 그림 과 아일워스의 모나리자, 조금은 기묘하게 보이는 얀반 에이크의 초상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서글프게 생각하게 만들었던 다모증을 앓던 소녀의 초상화, 피에타 의 팔과 '마라의 죽음' 의 팔의 연결성, 고흐가 펜과 잉크로만 스케치하듯 그린 그의 연인그림, 클림트의 '키스' 를 멀리 보았을때의 의미, 기독교 종교화에서 흔치 않은 입맞춤 그림이었던 '안나와 요아킴의 입만춤', 기존에 익숙하던 루벤스와 화풍과 너무 달랐던 루벤스의 자화상, 이해할 수 없는 그림 '폭풍', 만화영화 '플랜더스의 개'에서 네로가 보고싶어했다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그림, 아무도 몰랐던 쇠라의 여인 그림, 고흐가 보고 반했다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램브란트의 그림, 뒤크뢰의 유쾌한 자화상, 산타클로스의 기원을 알려주던 그림,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어머니 헬레나를 그린 그림 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제우스신화에 견주었던 이야기, 도자기 싸는 종이로 사용되던 일본의 목판화가 유럽에 선풍적 인기를 끈 이야기, 라오콘 군상의 전시로 인해 시작된 바티칸 미술관 이야기, 이콘화 에서 알 수 있는 기독교 사회의 분열, 익숙하게 봤던 아우구스투스의 전신상이 맨발인 이유, 루벤스의 아내에 대한 사랑, 스쿠루지 영감의 모델이 되었던 가문의 이야기, 에곤 실레 곁에 머물던 발리 라는 여인 이야기, '쾌락의 정원'에서 볼 수 있는 기묘함이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종교단체 이야기, 드가가 카메라 시선으로 그린 이유, 아담과 이브의 누드화가 유행했던 이유, 들라크루아와 쇼팽의 인연, 터너가 유서에 남긴 말, 밀레의 '만종'에 얽힌 이야기,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이 프랑스에 머물게 된 배경, '일그러진 진주' 였던 바로크 미술, 루터와 수녀가 결혼하게 된 이유, '다다'의 뜻, 로마 초상의 변화, 미켈란젤로의 순정, 베로키오와 다빈치가 함께한 그림, 마리아 테리지아의 멋짐, 마리아 막달레나의 누드화가 인기있던 이유, 틴토레토와 딸, 교황의 사생활, 프라 필리포 리피 의 야반도주, 앵무새의 다양한 상징, 홀로코스트와 누스바움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다른 그림과 이야기들도 종종 찾아볼 것 같기는 하지만 위에 언급한 그림과 이야기들에는 따로 표시를 해두었기에 더 자주 찾아보게 될 것 같다. 나는 책을 읽고 나면 같은 책을 다시 보지 않는 편이지만 이 책은 예외적일듯하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호기심에 때로는 참고자료로 때로는 위안용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을 알게 되고 곁에 두게 되어 읽는 내내 참 좋았더랬다. 다만 이 책의 구성과 의도상 그림 크기가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이런 아쉬움을 덮을 만큼 충분히 유용하고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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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마지막 공부 - 운명을 넘어선다는 것
김승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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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자는 주역을 읽고 수명의 짦음을 한탄했는가?"

주역64괘에 대한 정밀한 풀이와 공자의 해석이 담긴 X파일을 지금 공개한다

표지 中

[논어]를 읽은 적이 있다. 동양고전에 대한 낯설음과 공자라는 명성에 대한 걱정에 비해 옛이야기처럼 편안하게 읽혀서 의외로 좋았던 책이었다. 이후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명리학에 대한 호기심과 공자에 대한 기대감이 '주역'을 다룬 이 책을 읽어보고 싶게 했다.

주역은 인류 최대의 학문으로서 먼 옛날부터 성인의 학문이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이는 주역이 위대하고 난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는 50세에 주역을 접하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이후 이를 평생 연구하고도 모자라 수명의 짧음을 한탄한 바 있었다. (p. 8)

자칭 한국 최고의 주역학자라는 저자에게 주역은 최고의 학문일 것이다. 공자가 주역이라는 학문에 대해 그렇게 경탄했다고 하니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공자의 한탄이 담긴 출처는 어디일까?

미래는 정해져 있으나 알 수는 없다. 이는 참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피해 갈 방법이 있다. 미래를 알기 위해 그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역의 방법이다. (p. 28)

간단히 결론을 얘기해 보자. 미래란 정해져 있으니 운명이 있다고 말해도 된다. 그러나 그것을 알려고 하면 심한 요동이 발생하여 다시 알 수 없게 된다. 이는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주역은 사물의 요동을 피해 먼 거리에서 미래를 측량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운명의 범주에 들어 있는 것이다. (p. 29)

정리하자면 주역은 미래를 점치는 학문이다. 이루어질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 아니고 운명의 범주안에 속한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이다. 미래의 기운을 읽어내기는 하나 미래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오묘한 학문 같다.

우리는 얼핏 공자가 50세에 세상에 주역이라는 게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공자 생전에 주역은 점을 치는 도구였고 점은 아주 일반적이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주역은 당시 오늘날처럼 생소한 것이 아니라 상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항상 점을 접했고 심지어는 생활이 거의 점치는 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빈번히 제사를 지냈고 또한 점을 치며 살았다. 관청에는 점을 치는 직책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자 또한 점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역은 오늘늘 [토정비결]보다 흔한 책이었다. 공자는 당시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여 온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었다. 이러할진대 주역은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 내용이 심오하다는 것을 어느날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이리라. 이때가 바로 공자가 50세 무렵이었던 거라고 생각된다. (p. 33)

저자가 풀어낸 주역의 배경과 공자와의 연결점은 저자의 해석이다. 저자가 어떤 문헌을 바탕으로 어떻게 연구해서 도출해낸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저자의 해석이라는 점은 이 책을 읽으며 유념해두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고대사회에서 왕은 곧 제사장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층은 제의를 진행하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다양한 방법으로 점을 쳤다. 문화의 차이일뿐 미개하다거나 비과학적이라고 여기면 안된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의 설명을 할때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자료가 필수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8개로 분류되었고 이것이 합쳐져서 64개의 현상으로 발전한다. 이로써 세상의 모든 사물을 표현할 수 있다.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은 없다. 공자는 주역의 이러한 절대적 논리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주역을 조금 공부해보면 알게 되지만 세상은 정말로 8괘로 다 분류가 된다. 또한 세상의 모든 현상이 이 8괘의 조합으로 설명된다. (p. 39)

학자들은 모두 세상의 원리를 설명해보고자 노력해 왔다. 철학도 과학도 역사도 그외 대부분의 학문들도 대부분 방식의 차이일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해내려는 시도들이었다. 주역의 8괘의 조합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낼 수 있다니, 정말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엄청나게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문왕이 최초로 기록을 남기고 깊은 연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왕 이후에는 주공이 깊이 연구했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를 공자가 이어받았다. 이렇게 주역은 문왕과 주공, 공자 등 세 명의 성인에 의해 가꾸어졌다. (p. 45)

공자도 기원전 인물인데 공자가 칭송하는 태평성대 시절은 더 먼 옛날 의 어떤 시대였다. 항상 현재는 과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가 보다. 현재가 불만스러울수록 과거는 태평성대로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소급해서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진정한 태평성대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가 갑자가 의문스러워진다.

복희씨에 관한 다른 전설도 전한다. 이는 전설이라기 보다는 역사에 가까운데 단군의 역사를 기록한 [한단고기]에 등장한다. 여기서 복희씨는 단군이었고 혼자 연구하여 8괘를 저작하였다고 하낟. 7,000년 전 얘기다. 중국 신화와 내용이 다르지만 [한단고기]의 설명이 맞는 것 같다. (p. 53)

[한단고기] 는 역사서가 아니다. 환단고기 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위서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역사적 출처와 문헌이 불분명하고 논리적 오류가 많은 이 위서에 대해 저자가 하는 표현은 이 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나아가 출판사의 편집진들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생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지구 문명의 우주 도래설은 무작정 비웃을 것이 아니다. 좀 더 진지하게 사실 여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주역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니 이것을 우주에서 외계인이 가져왔느냐가 핵심 질문이다. 이는 주역 자체를 살펴봄으로써 단서가 나올 것이다. 주역이란 무엇인가? 그것에 우주 문명이 개입한 흔적이 있는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 증거가 확실히 있다. (p. 57)

나는 수만 년 전 외계인이 지구를 다녀가면서 남긴 유산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것은 오로지 주역에 담겨 있는 내용 때문이다. 재미있으려고 막연히 추측하는 것이 아니다. 주역에는 위에 열겨한 내용 외에도 무수히 많은 문명의 흔적이 존재하는 것이다. (p. 61)

주역이라는 학문의 위대성을 말하며 너무나 위대한 이 학문에 고대 미개했던 인류가 생각했을 수 있을리가 없으므로 외계인들이 전해준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해석에는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어 보인다. 저자는 몇 페이지의 서술로 충분히 우주 도래설을 증명했다고 생각하는것 같은데 전혀 수긍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주역이라는 학문에 대한 현실성 없는 주장을 끝으로 저자는 64괘의 본격적 풀이의 본문을 시작한다. 차라리 앞 내용들이 없었더라면 저자가 저자만의 해석을 주장한 서론이 없었더라면 이 책의 본문에 대해 읽어봄직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앞서 주장한 내용들과 아무 상관 없어보이는 64괘의 풀이들은 저자의 주장들로 인해 더 모호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주역이라는 학문은 사서삼경의 하나로 동양고전의 대표저서들 중 하나라고 알고 있던 나로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앞 내용들은 차치하고 64괘의 간략한 풀이들은, 예측불허의 앞날에 대한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찾고 싶을때 나무막대기에 8괘를 그려넣고 상자에 넣어 흔들어 꺼냈을때의 해석용으로 대해 참고해볼까 싶다.가벼우면서도 가볍지만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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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성찰하다 - 중산층 붕괴, 포퓰리즘, 내셔널리즘…… 유럽중심주의 몰락 이후의 세계
다니엘 코엔 지음, 김진식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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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으로 세상을 바꿨다고 믿었던 우리는 이제 다시

세상은 변했다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를 옥죄고 있는 환상들에서 벗어나!

표지 中

저자는 오늘날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경제학 교수라고 한다. 사회를 통찰하는 지성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인지 저자는 지금의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려주고자 한다. 저자는 현대를 68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누던 구분법이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것을 주장하며, 68혁명 직후의 시대와 50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대가 얼마나 판이하게 달라졌는지를 저자 나름대로 철학적·경제학적 고찰을 펼쳐내고 있다.

68혁명의 청년들은 그들의 부모가 소비사회의 지겨운 안락함에 빠져 역사의 비극을 망각했다며 비난했고, 오늘날의 청년들은 연장자들을 향해 정반대의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부모 세대의 과소비 결과로 자신들은 물질적 안정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68혁명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지금 세상이 저주받는 원인은 바로 68혁명이라고 비난한다. 절대적 자유를 주장한 68혁명이 개인주의를 만연시킨 결과 자유주의 경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p. 19)

68혁명의 시민들은 무엇을 탐하고 나선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산업사회의 붕괴에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이 사회의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의미 소멸로 잠식된 전대미문의 시대가 열리는 중이었는데, 이런 의미 소멸 때문에 이 시대가 펼쳐지는 데 50년이 걸렸다. (p. 25)

68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찌나 낯설게 느껴지는지 본문의 글줄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지금 청년세대가 68혁명이라는 단어를 과연 알까? 저자가 속해있는 프랑스 사회에서는 청년세대에게도 익숙한 단어이려나? 하지만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기에 68혁명에 대한 이해는 독자의 몫이다.

단 하나의 진영으로 돼 있지 않던 68년 5월 혁명은 '최소한' 두 가지 감수성으로 나뉘어 있었다. 뤼크 볼탕스키와 에브 쉬아펠로가 제안한 분류를 따라서 우리는 이 혁명에서 '예술가적 비판'과 '사회학자적 비판'을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적 비판은 소비사회를 고발하고 사회학자적 비판은 생산 영역을 고발하고 있다. 예술가적 비판은 부르주아 사회의 특히 성적인 것에 대한 위선적 관습에 저항하고 있고, 사회학자적 비판은 작업 현장의 상황과 노동자 착취를 고발하고 있다. (p. 36)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산업사회로 인한 비인간화가 노동자의 빈곤화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테일러주의 같은 산업사회의 표준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적 비판과 사회학자적 비판은 일치했다. (p. 39)

유럽이 68혁명의 들불에 휩싸이던 시기에 우리나라는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산업을 일으키며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시절이었다. 68혁명의 바람은 커녕 혁명의 ㅎ 자만 말해도 빨갱이로 잡혀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이후 민주화과정도 유럽의 68혁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니 연결지어야 할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유럽이 50년간 겪어온 격변은 우리나라에서 몇년만에 스윽 지나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새로운 시대가 올것이라 꿈꾸었으나 그러한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하다.

고르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은 다른 합리적인 대안의 발전을 준비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진정한' 욕망에 대해 숙고하거나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논의하면서 더 나은 삶의 선택지를 찾아보려는 능력 자체를 단념했다. 고르스는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 시스템은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각 개인의 삶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최소화하고 자율적인 활동은 최대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동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혁명을 기다리지 않고 진정한 사회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이 느꼈던 환멸은 스스로의 꿈을 실현하려고 공장으로 들어갔던 학생들이 느꼈던 환멸보다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p. 56)

산업혁명이후 발달해오던 사회에서 공동체가 무너지고 지나치게 개인이 부품화된 것에 반기를 일으켰던 사람들은 자유를 주창했다. 공동체의 위기는 지금도 여전히 위기이고 그렇게 얻은 자유는 개인을 더 개인화시켜버렸다. 68혁명 세대가 원했던 자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획득되었던가? 지금 세대는 정말 자유를 얻은 세대라고 볼 수 있을까? 자유와 무책임은 분명 다른 의미인데 말이다.

레이건의 강점은 하나의 정책으로 월가의 엘리트와 백인 서민층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복지국가에 반대하는 레이건은, 빈곤층이 빈곤한 원인은 빈곤층에 대한 원조때문이라며 비난한다. '가난한 사람'은 '곧 '흑인'을 의미한다는 것을 미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p. 77)

정반대되는 생각들이 유행한 1960년대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대에 전혀 다른 보수 사상이 되살아난 것은 보수주의자들로서도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의 흐름이 이처럼 진동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p. 83)

높은 경제성장기에 해방의 욕구가 표현되던 1960년대의 정신적 분위기와, 불경기에 전통과 기존 질서에 대한 보호 요구가 나타나던 1980년대의 정신적 분위기를 구분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성장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에도 불구하고, 현재 작동되고 있는 주기는 아주 손상된 주기다. 좌우를 움직이던 진자가 지금은 오른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져 있다. (p. 87)

유럽과 북미는 대서양으로 갈라진 서로다른 대륙이 아니라 그냥 한 덩어리로 보는 것이 맞을 만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럽 이야기를 하려면 미국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고 따라서 미국 정치권의 변동에 유럽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레이건의 정책과 현재의 트럼프가 너무도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따지고보면 혁명은 항상 반혁명세력에 의해 안정되곤 했다. 왕정을 몰아낸 시민군은 다시 왕을 옹립했고 독재를 몰아낸 시민 세력은 투표로 다시 독재자에게 대통령자리를 선사했다. 역사는 왼쪽을 많이 기록한 것처럼 보이지만 늘상 주류는 오른쪽이었다. 혁명이 있었다고 말하기 무색할만큼 시대는 점점 더 우편향 되고 있다. 왜일까.

유럽 포퓰리즘은 그들이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두 계층, 즉 위로는 사회 엘리트와 아래로는 이민자 집단에 대한 증오를 응집시킨다. (p. 106)

2016년은 지금도 극심해지고 있는 포퓰리즘의 최고 절정기였다. 2016년은 영국의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처럼 정치계에도 포퓰리즘이 침투했음을 말해준다. 브렉시트에 대한 설문조사는 유럽을 벗어나는 데 찬성한 사람들의 감정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페미니즘, 다문화주이, 생태학'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와 '인터넷'이라는 단어도 싫어했다. (p. 109) 포퓰리즘 부상이 빚은 두 번째로 끔찍한 사건은 2016년 10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 3분의 2가 트럼프를 지지한 '작은 백인들'(미국 어휘집에 따르면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도 똑같은 원한을 드러냈다. (p. 110)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사회적인 존중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유권자들의 욕구의 발로였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무엇이 될 수 있거나 되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기를 그들은 원했던 것이다. (p. 115)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삶과 더 바람직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말해주고 알려주는 변화에 호불호를 표현하지 않던 사람들이 지금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드러내며 인정을 원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거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옳건 그르건 다 필요없다고 그냥 자신들의 모습 그대로 살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세상이 어떻건저떻건 그냥 살던대로 살고 싶다고 변화따위 싫다고.

"개인은 진정으로 그 자신이 아니다. 개인은 사회와 연결될 때에만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실현한다. 개인이 삶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의 원천인 인정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에만 강한 사회적 결속력이 형성된다" 오늘날 중요한 사회적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경제 불안은 사회 결속력 해체의 중요한 원인이다. "소득의 불안정성이 사회 통합 위기의 핵심요인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가족 간이나 친구 사이나 다른 모든 사회적 관계가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p. 126)

불평등은 늘 문제였다. 문제거리가 안될 수가 없는 문제다. 먹고살기 힘들면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악순환이 시작된다. 불평등은 점점 더 심화된다. 이때 정치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불만을 한데 모을 수 있는 대상이다. 그 불만이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렇게 불평등은 숨겨진채 더더더 심화된다.

이민자들을 공격할 때, 포퓰리스트들은 혐오의 실제 대상을 가린다.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자국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응집력이 붕괴된 사회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거울을 내민 것이 그들의 실수다. 이민자는 그저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르네 지라르가 말했듯이 위기에 처한 사회의 희생양인 이민자는 오늘날 폭력을 한 몸에 받는 동네북이 되어 있다. (p. 135)

유럽과 미국사회에서 이민자 문제는 가장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분야이다. 이민에 대해 한발짝 떨어져있는 편인 동양의 경우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볼 필요성이 아직은 없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에 서구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어느 한쪽에 쏠리기 보다는 양쪽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우리사회가 될수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여하튼 저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미래를 위해서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야 하겠는가? 일단 적응해야 할 것이 디지털 세상이다.

컴퓨터는 규모의 혜택을 받지 않는 모든 거래 유형도 온라인으로 구조 조정하도록 해준다. 여기서 소비자 부담으로 전가시키는 경향도 생겨났다. 소비자는 물건도 자신이 직접 수리해야 하고 영화관 입장권도 온라인으로 직접 예약하게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혼자서 스스로를 돌봐야 할지도 모른다. 임금노동자가 하던 일을 오늘날의 소프트웨어는 소비자가 직접 수행하게 한다! (p. 180)

일자리 양극화에 큰 관심을 기울인 미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오토에 따르면, 과거의 논쟁은 항상 인간과 기계 사이의 완벽한 대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의 보완은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규칙적인 것에 더 가까웠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p. 186)

온라인으로 이런저런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그저 편리하다고만 생각했었다. 뉴스에서 보던 사라지는 직업들과 그러한 서비스들을 직접적으로 연결짓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대는 벌써 어느새 그렇게 이미 변했다. 변해버렸다. 그리고 학자들은 인간의 직업이 기계들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고 늘상 얘기한다. 그런데 왜 체감되지 않는 것일까...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이겠지만...

아이폰 세대와 정치의 관계는 이상하다. 무관심과 극단적 참여라는 정치적 양극화를 오가는 것 같다. 소셜 네트워크는 어떤 사람의 사진을 수백만 번이나 돌아다니게 하고 또 날카로운 증오의 표현도 너무나 쉽게 전파시키고 있다. (p. 198) 소셜 네트워크 세상에서 태어난 신세대의 역설은 인간이 이만큼 스스로를 많이 드러낸 적도 없지만 이만큼 가면을 사용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p. 207) 우리는 사회적으로 디지털 사회의 명분이 되는 가치를 단념하지 않은 채, 고립된 개인에게 사회적인 공간과 풍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디지털 사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까? (p. 226)

68혁명에서 시작하여 굵직한 텀으로 정치경제사를 훑으면서 신세대들의 문화로 넘어오긴 했는데 저자또한 핵심적인 질문에 답을 구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포퓰리즘과 극우주의 등 극단적 문화 속에서 어떻게 글로벌한 합리성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팬데믹과 포스트휴먼의 혼동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휴머니즘을 찾아낼 것인가> 라는 표지의 문구에서 던지 질문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았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책임에 상응하는 통합적이고 글로벌한 합리성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하다. 기술과 기술에 들어 있는 권력 네트워크가가 아무런 중재도 없이 우리 삶의 형태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기술과 시장의 연결을 통합하는 동시에 기술 외부에 자신을 배치할 줄 아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 점점 더 필요한데, 이 균형점을 통해서 우리는 공동선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을 공들여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다음 반세기 동안 우리가 행해야 할 멋진 과업일 것이다. (p. 226)

유럽을 성찰한다기보다는 프랑스사회를 성찰한 저자의 책은 우리 사회에 어떤 지향점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한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멋진 과업으로 받아안기에는 사회적 역량도 나의 역량도 터무니없이 모자라게 느껴지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다만, 불만감이 작용하여 하는 선택과 만족감이 작용하여 하는 선택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점은 인상깊게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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