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집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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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여자들의 피난소 '여성 궁전'

열악하지만 따듯하리라 생각하며 찾은 그곳에서

솔렌은 예상치 못한 냉랭함과 마주한다

레티샤 콜롱바니 의 전작 <세 갈래 길> 을 인상깊게 읽었었다.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으로 사는 여자의 삶과 시칠리아 공방에서 가업을 잇고자 하는 딸의 삶과 캐나다 대형 로펌에서 성공한 여자 변호사의 삶이 얼마나 깊은 좌절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는지를 보여주며 세 갈래로 땋은 머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던 그 소설은 여성의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두번째 소설인 <여자들의 집>도 그 희망의 연장선에 있는 소설로 읽힌다.

마흔 살의 성공한 변호사인 솔렌은 어느날 의뢰인의 충격적인 자살을 목격하며 번아웃에 빠진다. 집밖으로 한발짝도 내딛기 힘들어하던 그녀에게 의사는 봉사활동을 권유한다. 내키지 않아하던 그녀에게 한 구인공고가 눈에 들어온다.

'글로 의사소통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 글을 대신 써 줄 작가를 구합니다. 글쓰기 자원봉사를 희망하시는 분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그 구인공고를 보는 순간 전류 같은 것이 몸을 타고 흘렀다. '작가'를 구하고 있었다. 작가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에 잠들어 있던 무엇인가가 전부 되살아났다. (p. 25)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생으로 살아온 그녀였지만 사실 변호사라는 직업은 부모님의 의지에 자신을 맞춘 것이었다. 그녀에겐 다른 꿈이 있었다.

소설은 현재의 파리와 1925년의 파리를 오가며 서술되는데 1925년의 파리에서는 블랑슈 라는 여성이 삶이 펼쳐진다.

블랑슈는 자신의 몸을 챙기느라 일을 미룬적이 없다. 블랑슈의 제복 칼라에 달린 세 개의 S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임무이자 소명, 그의 존재이유였다.

수프Soup, 비누Soap, 구원Salvation.

블랑슈가 생을 바쳐 온 과업은 이 세 단어, 즉 극빈자들에 대한 구호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것이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블랑슈가 충실히 복무해 온 조직의 이념이었다. (p. 43)

블랑슈가 생애를 바친 단체는 '구세군' 이었다.

<<영국의 목사 윌리엄 부스가 '어떤 전투를 치르는 데는 군대가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군대를 모델로 하는 한 단체를 창설했다. 사관학교, 깃발, 제복, 계급체계 등 모든 것을 군대식으로 갖춘 조직이었다. 국가, 인종, 종교의 차별 없이 어디서나 가난과 고통에 맞서 싸우려는 것이 이 단체의 활동 목표였다. 구세군이라는 이 단체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바야흐로 지상의 모든 곳에서 빈곤과의 전투를 확대해 나갔다.(p. 45)>>

크리스마스때면 번화가에서 빨간냄비를 걸어놓고 종을 흔들던 제복을 입을 사람들이 구세군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체가 이런 배경으로 이런 목적으로 탄생한 줄은 몰랐었다. 블랑슈의 삶을 읽으며, 종교단체이긴 하지만 종교보다는 빈민구제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니 종교에 친숙하지 않은 나지만 존경심이 저절로 스며들었다.

영국과 스위스에서는 구세군 운동이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프랑스에서는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가톨릭 전통을 이어 온 프랑스인만큼 프로테스탄트 교회 일파인 구세군의 전도 활동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프랑스 각 지역에서 구세군 사관들은 봉변을 당하곤 했다. 몽둥이나 주먹으로 얻어맞았고 발길질로 내쫓겼다. 얻어맞지 않으면 돌팔매질을 당하거나 뜨거운 물세례를 받았다. 저녁에 로미에르 거리의 기숙사로 돌아올 때마다 블랑슈의 모자와 제복에는 썩은 달걀이나 오물이 묻어 있었다. 사람들이 죽은 쥐를 던지는 바람에 그 사체의 파편을 고스란히 덮어쓴 일도 있었다. (p. 51)

종교적 맹목성을 모르는 나로서는 구세군의 헌신또한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오로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만 보다가 구세군 활동을 하던 한 여성의 삶을 읽으니 애초에 종교가 가져야 했던 종교적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전해지는 듯 했다.

백여년 전의 구세군 활동가 블랑슈와 현재의 전직 변호사이자 우울증 환자인 솔렌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앞에서 펼쳐놓은 퍼즐들을 차근차근 단 한곳의 빈곳도 없이 꿰맞추는 방식은 <세 갈래 길>에서 보여줬던 작가의 솜씨 그대로였다.

안뜰이 있는 낡은 주택을 상상했는데 눈앞에 있는 건 사거리를 내려다보는 6층 건물이었다. 아치형 지붕이 출입구를 장식하고, 건물 전면에 머릿돌 격으로 동판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솔렌은 동판에 새겨진 내용이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20세기 초에 건립된 건물이라고 했다. 역사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팔레 드 라 팜므'라고 새겨져 있었다. 건물명이 묘했다. 여성의 궁전. 이름 자체만 보면 어쨌거나 화려한 장소였다. 왕이 사는 곳을 의미하니까. 학대받은 여성들이 피난한 장소에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었다. (p. 60)

솔렌이 대필작가로 일주일에 한번 봉사하게 된 곳은 '여성의 궁전' 이라고 이름붙여진 시설이었다. 시설을 안내해주던 원장의 말이 와 닿는다. < 요즘에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자는 의미로 사회적 공존이라는 문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데,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뒤섞어 놓는다고 공존이 가능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문화와 전통이 뒤섞이는 일은 이곳에서는 그냥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에요. 진정한 공존은 바깥의 삶을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데 있어요. (p. 64~65)> 다양성만으로 공존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살면서 종종 체험할 수 있곤 한다. 공존에는 연결이 필요하다. 솔렌에게 필요했던 것도 바로 그런 연결성이었다. 고립이 아닌 공존.

과거 매춘부였다가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 범죄자로서 재사회화 과정을 거친 이들, 장애 때문에 경제 활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다양한 경로로 프랑스 땅을 밟은 이주민 혹은 난민 여성들도 있었다.

"그들 각자는 어떤 형태로든 취약성을 안고 있어요. 저마다 폭력과 무관심을 경험했죠. 사회의 주변부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p. 70)

솔렌으로서는 큰 결심이었지만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다. 자신의 상처만 보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생전 처음 봉사활동에 나서면서 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은 착각이다. 내 작은 도움을 그들이 두팔 벌려 환영하리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여성의 궁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은 저마다 다채롭게 우울했다. 솔렌의 우울은 견줄바가 아니었다. 솔렌은 처음 갔을때 그런 현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솔렌의 알껍질은 좀더 깨어져야 했다.

이해가 되는 상황임에도 솔렌을 엄습한 그 강렬한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자신이 그런 심리 상태가 된 게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솔렌 자신을 향해 화가 났으니까. 지금까지 솔렌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면의 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의 좁은 삶, 개인적 성취에 매몰되어 배고픈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굶어야 할지 배를 채워도 될지가 지갑 속 2유로의 유무로 결정되는 사람들이 바로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둔감했다. 그런 현실을 오늘에야, 여성 궁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또렷이 의식하게 된 자신에게 솔렌은 화가 났다. (p. 88, 89)

자신의 삶이 안정적일때 세상의 불안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세상이 흔들렸을때 동시에 세상의 불안이 겹쳐오기 마련이다. 처음 느끼는 불안한 세상에 대한 분노는 급작스러운 만큼 쉽게 꺼지기 마련이다. 세상의 불공정을 알았을때의 정의감은 사실 오래가기 힘들다. 꾸준하게 세상의 불안을 마주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런 삶을 산 인물로 솔렌과 블랑슈의 삶이 대비되듯이 읽혀진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엔 합쳐질 것이다. 이 소설은 희망을 품고 있으므로.

구세군에 들어가자마자 '리틀 가십걸'은 모든 면에서 단연 두드러졌다. 그의 열정, 결단력, 창의성 넘치는 활동에 모두가 감탄했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블랑슈는 그 어떤 난관이 있어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구세군 신문의 기자로서 글을 쓰면서 거리 성가대이자 설교자 역할을 했다. 광고판을 앞뒤로 붙이고 거리를 순회하며 구세군 신문을 팔았고, 얼마 후에는 이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다. 행인이 많은 대로에서 기타를 치고 탬버린을 두드렸다. 수없이 거리 사역에 나서서 극빈자 구호를 위한 현물 기부를 호소했다. 블랑슈는 모임을 찾아다니며 지원을 청했다. 군중 앞에 나서서 연설했고 거리 행인을 붙잡고 호소했다.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 실내를 한 바퀴 도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p. 91)

한마디로 블랑슈의 삶은 가난 이라는 전쟁터 에서 치루는 싸움이었고 블랑슈는 가장 선두에 나서는 군인이었다. 한때 리틀 가십걸 이라 불릴 만큼 놀기 좋아하던 소녀는 자신의 소명을 깨닫는 순간 불굴의 전사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삶이 40년 지난 때가 1925년 파리였다. 평생을 헌신하며 산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 수 있을지 실사례를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소설속 인물인 블랑슈는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성의 궁전'은 실제로 파리에 있는 곳이다. 이런 현실 예시는 종교적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종교이건 무엇에건 인간의 삶에 있어서 믿음이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솔렌은 이제껏 '대필작가'라는 일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맡은 일의 진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대필 작가는 펜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리고 언어가 필요한 사람에게 펜과 손과 언어를 빌려주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머릿속, 마음속의 글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판정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운반해주는 사람이다. 솔렌은 편지를 쓰기에 앞서 자신은 운반자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p. 173)

솔렌의 좌절과 포기와 번민과 재시도 속에서 만나는 '여성의 궁전' 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슴을 부여잡게 만드는 사연들을 안고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범죄로부터 딸을 구해내기 위해 가족을 떠나야 했던 기니 여성은 함께 데려오지 못한 아들 생각에 밤마다 숨죽여 울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이 여자를 이름으로 칭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는('누구의 아내' 이거나 '누구의 딸', 혹은 '누구의 누이'로 불리거나 가족의 이름을 모를 경우 그저 '아주머니'라고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여자는 파리에 와서야 이름이 생겼다. 버려진 아이로 자라나 거리에서 낳은 아이와 생이별한 후 세상 모두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여성도 있었다. 20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칼을 맞고서야 도망쳐 나온 여성의 남편은 재판에서 징역5년에 유예1년을 선고받았다.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으로 살고자 한 이는 여성의 궁전에서조차 쉽게 어우러지기 힘들었다. 여성노숙인으로 54번이나 강간을 당했던 여성은 방을 배정받고도 침대에 눕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연의 여성들이 있었다... 다양한 폭력에 내몰린 여성들은 차고 넘치고 있었다... 운반자로서의 봉사는 의도치 않게 솔렌을 한계로 몰아넣었다.

프랑스 구세군은 결핍 속에서 후퇴를 거듭해야 했던 시간을 이겨 내고 눈부신 도약을 이루었다. 페롱 사령관 부부의 주도하에 대역사의 시대가 열렸다. 원대한 계획들이 차례로 실현되었다. 블랑슈와 알뱅은 파리 고블랭 구역에 '시민 궁정'을 건립했다. 노숙인을 위한 쉽터였다. 한편으로 라 퐁텐오루아 거리에 여성 피난소도 만들었다. 프랑스 거의 전 지역에 피난소가 생겼다. '가난한 자의 옷장'이 설치되었다. '자정의 수프' 사업도 시작되어 파리의 밤거리를 누볐다. (p. 144)

빈민구제 사업에 헌신하던 블랑슈에게도 사랑은 찾아왔다. 같은 일을 하던 구세군 청년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둘이 되니 에너지가 배가된듯 더 활발하게 사업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좌절도 있었다. 해도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빈민들의 삶에 블량슈 본인마저 실망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할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에서 한 기사를 읽게 된다.

"주거용 대형 건물이 비어 있어요, 그것도 파리 시내에!" 블랑슈의 두 눈이 열기를 띠며 반짝였다. 벌떡 몸을 일으켜 알뱅 앞에 섰다. "그 건물을 사야 해요! 그래서 집이 없어 거리로 내몰린 파리의 모든 여자들이 와서 쉴 수 있게 해야 해요" (p. 180)

"고통을 멈추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아뇨, 세상의 고통은 계속될 거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멈출 수 없어요" 블랑슈가 꿈꾸는 것은 고통받는 여자들이 쉴 수 있는 장소였다. (p. 182)

방의 개수만 743개에 이르는 대형 주거 건물이 5년이 넘도록 거주자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한 재단 소유의 이 건물은 1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독신자 거주용으로 지어졌다. 시 당국이 이 건물을 사들이려 했지만 높은 매입 가격과 유지 관리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획을 접어야 했다. 엄청난 액수의 예산이 필요했다. 구세군은 가난한 단체였다. 하지만 블랑슈는 뜻을 세웠고 목표를 정했다. 이 건물터는 과거 도미니크파 은거 수녀 공동체인 십자가수녀회 수도원이었다. 블랑슈에게 이 건물은 운명적인 곳이었다.

솔렌은 대필 작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여성 궁전 원장님에게는 전화로 제 뜻을 알리려고 해요. 그곳에서 일하는 건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힘들어요. 그 일을 감당하 힘이 없어요. 그곳 여자들의 상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요. 그들의 망가진 삶을 보면서 제가 휘청거러요. 저 역시 영영 주저앉고 말겠어요" (p. 292)

백년전 블랑슈의 전투와 지금 솔렌의 전투는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두 전투는 서로 어떻게 엮이게 될까?

솔렌이 '블랑슈 페롱' 이라는 낯선 이름을 확인하기까의 여정은 소설을 읽으며 직접 확인하기를 권한다.

다만 전투의 결과만 미리 스포하자면, 두 전투 모두 승리한다. ^^

이 책의 원제는 Les Victorieuses '승리한 여자들' 이다.

ps1. 전작보다 왠지 서툴게 구사되는 듯한 문장들이 처음엔 의아했다. 그러나 읽어가면서 솔렌의 감정에 동요하면서 그 서툼이 더 편안해졌다. 나 역시 사회의 불안을 마주하는 일에는 서툰사람이라서인지...

ps2. '사회가 보듬어 주지 못한 이들에게 쉴 곳을 제공한다' 는 그 임무를 단 한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는 '여성궁전' 이 실존하는 파리에 가보고 싶어졌다. 파리에는 에펠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찬란한 궁전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광지로서의 파리에 그닥 큰 유혹을 느끼지 않았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난 후 파리가 갑자기 정겹게 다가온다. 여하튼 파리는 그야말로 '궁전'들의 도시인 것은 맞는 모양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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