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마음이 단단한 사람 - 융처럼 살아보기 : 아홉 가지 인생 문제를 분석하다 매일 읽는 철학 4
류쑤핑 지음, 원녕경 옮김 / 오렌지연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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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처럼 살아보기:아홉가지 인생 문제를 분석하다

얼마전 프로이트의 책을 읽고 나서 융에 대한 관심이 커졌었다. 하지만 융의 저서를 바로 읽기엔 어려울 것 같아서 간접적으로 융에 대해 알수 있는 책을 찾고 싶었다. '매일 읽는 철학 04'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철학시리즈 중 한권인가 싶었고 '융처럼 살아보기' 라고 해서 융에 대한 간접체험용으로 괜찮으려나 싶어 고른 책이었다. 책날개에 쓰여진 저자의 이력을 보니 중국인 '작가'였다. 작가의 글이니만큼 학문적으로 어렵진 않겠구나 싶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융은 자신이 이중인격을 지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략) 융의 일생은 제1인격과 제2인격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p. 79) 하지만 이는 의학에서 정신질환이라고 말하는 '인격분열'이나 '정신분열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어쨌든 융의 인생을 통틀어 제2의 인격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p. 80)

융은 <파우스트>를 읽으며 이러한 두가지 인격에 대한 생각을 더욱 심화시켰다고 한다. 하루에는 낮과 밤이 있고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으며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천당과 지옥 또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방식은 오랜 세월 인간에게 익숙한 생각법이었으니 융이 자신의 인격에 대해 이중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발견이 그러하듯이 너무나 당연한 것을 미처 알아차라지 못하는 사람과 통찰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융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이 책은 융의 학문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내용이 소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쉽게 읽히는 것은 좋은데 읽고나면 딱히 남는게 없다. 그래서 어쩌다 나오는 융의 이론 관련 내용은 무척 반가웠다.

크라프트에빙의 책 서문에 눈길을 사로잡혔다. <정신의학>의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정신의학 분야의 교과서가 어느 정도 주관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아마도 이 과목의 특수성과 학문으로서의 불완전성 때문일 것이다'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긴 융은 서둘러 책을 읽었고 그 속에서 '인격의 병'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저자는 정신병을 '인격의 병'이라 일컬었다. '아, 인격의 병!' 순간 융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p. 114)

크라프트에빙의 책은 융을 당시 전도유망한 외과나 내과가 아닌 생소하고도 무시당하는 정신분석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했다. '인격의 병' 융에게 정신분석은 이 한단어로 축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위인전처럼 융의 인생을 읽고있노라니 융은 어렸을때부터 스스로에게 '인격의 병'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던 것 같다. 융이 정신의학적 환자라기 보다는 뭐랄까.. 여하튼 평범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정신분석학에 끌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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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프로이트를 융과 적대적으로 표현하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둘이 함께 연구하다가 갈라섰다고 해서 꼭 그렇게 볼 건 없지 않나 싶다. 프로이트를 전적으로 지지할 순 없었지만 융은 프로이트를 통해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이 두 사람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왠지 비슷하게 느껴졌다. 플라톤이 하나의 이론을 세우고 현실에서 떠나 이상적인 것을 추구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백과전서적으로 광범위하게 연구했다. 프로이트도 자신의 이론을 하나의 체계로 정립하고자 하면서 현실에서 멀어져갔다면 융은 하나의 방법이 아닌 사람마다 다 다른 개별적인 방법을 추구하면서 현실속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나 프로이트와 그의 후배격인 융의 관계는 결국 모든 발전사와 맥을 같이 한다. 앞선 것을 뛰어넘고자 하고 앞서 밝혀낸 것 이외의 것을 밝히고자 하느 것은 뒤따르는 사람들의 운명이자 목표가되곤 한다. 늘.

'맙소사! 설마 어제 꿈에서 봤던 그 아가씨가 이 아가씨인가?' (p. 194)

책을 읽을수록 참 신기했던 것이 융은 꿈을 참 자주 많이 정확하게 꾼다는 것이다. 때로는 '영매'인가 싶을 정도로 영적인 예시를 꿈으로 전달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연구방향이 뒤로 갈수록 '영'적인 심령적인 무언가로 향했던 것일까... 융의 영적 스승도 그의 꿈에 나타난다. 융은 자신의 꿈을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립해 나갔다. 그의 꿈은 거의 예언자가 받을 법한 계시에 가까웠다. 다만 예언자가 세상에 대한 계시를 받는다면 융은 정신분석학적 계시를 받는 달까... 하지만 관심분야가 집단무의식과 원시적 종교로 나아간 것을 보면 종교적 계시와 뭐가 다를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프로이트를 교조주의라 비판했던 것과 융의 종교성이 무엇이 다를까 싶기도 하고...

융은 환자에게 분석치료를 할 때 그 어떤 시스템도 따르지 않았다. 모든 환자에게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번에는 아들러의 언어를, 다음에는 프로이트의 언어를 사용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단 한 가지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심리요법의 본질이 아니라면 정신의학적인 분석만으로는부족하다. 정신과의사는 환자를 이해해야 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p. 276)

모든 환자에게 다 다른 방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맞는 것도 같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어떤 환자에게 어떤 방법을 적용할지 의사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시스템이나 매뉴얼의 필요성은 결국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 융의 진단방식은 아무나 할 수 없어 보인다. 그리고 결국 융의 학설도 어떤 시스템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융의 학설이 더 궁금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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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일대기처럼 쓰여졌으나 전체 일생을 다룬 것도 아니고 융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교훈을 주는 것처렴 쓰여졌으나 그 교훈이 와 닿지는 않고 융의 학문을 설명하는 것도 같았지만 결국 에세이로 마무리된 이 책을 왜 '매일 마음이 단단해지는 법'을 알려주는 책으로 홍보문구를 선택했는지 이유는 알수 없다. 하지만 융을 개인적으로 접근하면서 융이론의 화두를 엿볼 수 있도록 쉽게 서술한 점은 이 책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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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즐겁게 - 우리말의 어원과 유래를 찾아서
박호순 지음 / 비엠케이(BMK)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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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사로 학교에서 오래 재직하신 교장 선생님의 옛이야기를 곁들인 훈화말씀 모음집 혹은 우리말의 민속적 유래를 (저자 본인이) 개인적으로 유추해보는 책으로 에세이로 여기고 읽으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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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즐겁게 - 우리말의 어원과 유래를 찾아서
박호순 지음 / 비엠케이(BMK)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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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어원과 유래를 찾아서

민속연구가 박호순 지음

'우리말의 어원과 유래'에 대한 책인 줄 알고 너무너무 기대했더랬다. 근래에 책을 펴내고 편집하는 일에 대한 책을 읽고 나니 '국어'에 대한 관심도 평소보다 더 높아진 상태여서 더 그랬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국어에 대한 책은 아니고... 더더군다나 우리말의 어원에 대한 책도 아니다;;;

저자의 이력을 보니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교사를 두루 거쳐 교감/교장을 지나 장학사/장학관으로 오랜 교직생활을 하신 분이었다. 본문 속에 나오는 70년대 교직생활 에피소드를 읽으려니 나이가 얼추 짐작이 가긴 하는데, 여하튼 오랜 교직생활을 하신 경험때문인지 책은 전반적으로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모음집 같았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는 우리말을 모아 그 어원과 유래를 찾으므로써 우리 학생들이 우리말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끼며 나아가 책을 가까이 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글(p. 6 - 머리말 中-)'인 이 책은 자칭 민속연구가인 본인의 개인적 추론을 담고 있어서 '~되지 않았나 유추해 본 것'이라는 표현이 많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학문적 근거는 미약하다는 말이다. 물론 일선 학교현장에서 국어교육을 오래 하신 분이니 아주 얼토당토한 추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원학적으로 민속학적으로 학문적 결과를 모은 책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 하듯이 혹은 자신의 추억담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듯이 그냥 그렇게 친근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차례에서는 '언어' '민속' '역사' '식물과 지명' '교훈' 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연대기적 역사도 아니고 학문적 갈래도 아닌 저자가 그동안 관심가지고 찾아보았던 이런저런 '유래'들을 '~이지 않을까' 라고 풀어내는 내용들이다. 그 다양한 이야기들을 묶어주는 것이 한가지 있다면 '머리말'에서 나왔듯이 청소년들은 바른 언어를 써야한다는 '교훈'이다.

이 책을 읽고서 국어를 즐겁게 느낄 만한 단 한가지 이야깃거리라도 찾게 된다면 이 책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다. 잡다한 이야기 속에서 역사도 맥락도 뿌리도 찾지 못하여 느끼는 아쉬움은 내 개인적 성향 탓일 것이다. 우리말에 대한 민속적 유래를 가볍게 읽어보고 싶은 이라면, 우리 민속에 관심이 많은 퇴직한 국어쌤의 에세이다 라고 여기며 읽을만한 책이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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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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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의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태운 문학에의 열정, 종이와 붓이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명주실을 뽑아내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써내려갔던 그의 시는 영혼의 부르짖음이었다. - 작가의 말 中 -

허초희 라는 이름도 난설헌 이라는 호도 마음에 드는 단어들이었다. 단어에서 느껴지는 인물의 이미지가 이렇게 선명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시'라는 작품을 직접 읽기 전에 '시어'의 느낌이 온전히 전해지는 그런 이름같았달까... 조선시대의 '여류00'라는 수식어를 달만한 인물은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말고는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하지만 두 인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큰 대조를 이룬다. 왜일까?

허난설헌에 대한 삶을 소설로 읽은것이 이 책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읽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커버 에디션'이라는 홍보문구를 흘려 읽고 순정만화 같은 표지에 홀려 집어든 소설을 읽다보니 드는 기시감... 뭐지? 싶어 그제야 검색해보니 아차차 '난설헌' 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는 한 명뿐이었다. 읽었던 책을 제목이라도 메모에 남겨놓는 편이라 찾아보니 2013년에 읽었던 작품이었다. 작가이름을 기억해두지 않은 것이 실수였으려나;;; 같은 작품을 두번 읽게 되다니;;; 왠만해선 같은 책을 두번 읽지 않는 편인데 어쩌다보니 두번 읽게 된 소설... 이것도 인연이려나~

언뜻언뜻 줄거리와 분위기만 떠오를뿐 9년만에 다시 읽는 작품의 문체는 새롭게 다가왔다. 전에도 이랬던가 싶고 ^^;;;

다시 읽는 것을 알고 읽어서 그런지 이번엔 작품의 주요 서사 보다는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 스토리에 포옥 빠졌었던것 같은데 이번엔 그렇게 몰입이 되지 않는 것이 내가 변해서일까 기억의 문제일까 세월의 간극때문일까...

같은 또래들보다 몇 배나 트였고 조숙하다고 해도 시집가는 새색시의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운 건 당연한 일일터다. 초희가 초조해하는 심정을 우실은 십분 이해했다. 안동 김씨 집안은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문가다. 그러나 시댁의 높은 지체나 문벌보다 결혼의 당사자인 신랑 김성립에 대한 이런저런 헛소문에 신경을 안 끄려야 한 쓸 수가 없다. 게다가 초희의 시어머니 될 송씨가 워낙에 앙칼져 종년들 벌주기로 간장독에 구겨 박는다는 소문까지 들었다. 우실은 공연한 입질이겠거니 애써 밀쳐냈다. (p. 72)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너만 조심하고 또 조신하면 되지 않겠니" (p. 73)

난설헌의 허씨 집안은 당대의 문장가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딸에게도 책을 읽히고 시를 짓게 하는 것을 즐기는 가풍이었다. 그렇게 고이 기른 딸을 열다섯에 시집보낸 집안은 당대의 명문가 안동김씨 일족이라는 것 말고는 볼게 없는 집이었다. 가세도 허씨집안 보다 못했고 남편감은 몇년째 과거에 떨어지면서도 기방출입 소문이 끊이지 않는 인물인데다가 시어머니될 사람에 대한 평가는 더욱 박했다. 그런 집안과 남편감이 딸에게 정녕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딸의 지적 능력을 제대로 인정했다면 (당시 조선사회가 여성으로서의 활동이 어려운 시대였다 했을지라도) 사람대 사람으로 딸의 인생을 엮어주었어야 옳았다. 집안대 집안으로 딸을 옭아맬 것이 아니라. 하지만 결국 난설헌의 아버지는 딸을 집안의 여자로서만 소유물로서만 여겼던 셈이다. 소설에서는 내내 시어머니 송씨와 남편 김성립에 대해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만 애초에 그런집에 시집을 보낸 아비 허엽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지 않은지. 딸의 숨통을 트이게 키워놓고는 갑자기 목줄을 걸어 그 목줄을 사나운 주인에게 건네준 것이니 그 목줄이 어찌 숨통을 조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천재란 필연적으로 자신이 속한 시대와 불화하기 십상이라, 이걸 명심함이 좋을 듯 하이 (p. 226)

허난설헌에게 한 대사는 아니지만 허초희에게도 해당하는 대사였다. 허엽의 첫째부인 자손 말고 둘째부인의 자손인 허봉, 허초희, 허균 삼남매는 셋다 그 시대의 천재라 여겨질만한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셋다 비운의 명으로 스러졌다. 특히나 억압받던 여성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없었던 허초희의의 삶은 더욱 극적인 비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난설헌은 허초희 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신사임당의 이름이 '인선'이라는 설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없다고 한다. 이름도 없이 호 라도 전해진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여성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렸을때 호적등본인가 하는 서류에서 할머니 성명란에 '한氏'라고만 기재되어 있어 성씨말고 이름은 무엇인지 물어봤었는데 집안 어른 중 누구도 대답하지 못해서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 결혼전에 불리던 호칭이 명칭이 이름이 있었을텐데 왜 아무도 모르는 건가;;; 족보에도 그저 '한씨' 였다...

작품 뒤에는 '혼불문학상 심사평'이 있다. 이 소설은 혼불문학상 1회 수상작이다. 그런데 그 수상년도는 2011년 이고 그래서인지 '작가의 말'도 2011년 버전이다. 리커버 판에 굳이 예전의 혼불문학상에서 떨어진 작품들과 비교한 심사평을 그대로 실었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수상에 대한 작가의 소회가 아닌 리커버판에 대한 새로운 '작가의 말'을 실을 수는 없었는지 아쉽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소설이라 그런지 중간중간 끊어지는 맥이 도드라져 보이고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린 서술이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설헌'은 소설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분명 픽션이지만 마치 역사처럼 읽히는 이 소설이 주는 처연하고 처연하고 또 처연한 난설헌의 삶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슴저려하며 읽어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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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무엇인가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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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담론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 권에 꿰뚫는다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 문화비평의 결정판

책날개에 쓰여있는 저자의 약력 첫줄이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이자 문학평론가'라고 되어 있다. 저자에 대한 이 소개는 이 책을 규정하는 가장 명확한 특징이기도 하다. 외국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적'이라는 수식어가 불경이라던가 불법이라던가 하는 것으로 연결되진 않을텐데 우리나라의 경우 본인을 마르크스주의학자 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가 단 한사람이라도 있을까? 학문적으로 연구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문화비평을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적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국내 학문토양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도 할수 있을텐데 하지만 우리는 할수 없겠지 싶어서... 여하튼, 문화란 무엇인지 사전적 답을 요구하는듯한 한국어판 제목과 달리 이 책의 원제는 그냥 Culture 이고, 질문이 없기에 답도 없었다. 어쩌면 비평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려나.

문화는 일종의 사회적 무의식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그런 생각을 주창한 두 주요 인물의 작업을 살펴볼 것이다. 한 사람은 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로, 그의 글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문화 개념과 연관지어 논의되는 일은 흔치 않다. 다른 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로, 문화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사유는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지만 그에 어울리는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 또한 T.S엘리엇과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글에 나오는 사회적 무의식으로서의 문화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덧붙일 것이다. 이 두 사상가에게 문화는 극히 중요한 개념이지만, 이들이 문화를 보는 정치적 입장은 극명히 대립한다. 이들에 이어 아주 대담하면서도 쾌활한 문화비평가 오스카 와일드를 다룬다. (중략)이 책의 결론은 문화가 일부 옹호자들이 상상하듯 현대사회에서 결코 핵심적이지 않다는 것으로,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를 다수 제시한다. 명민한 독자들은 스위프트, 버크, 와일드에서 아일랜드의 반식민주의 저치에 이르기까지 아일랜드의 모티프가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p. 8~9) - 머리말 中 -

두 페이지에 요약된 이 책의 '머리말'은 이 책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동시에 간단하다는듯 정리하고 있지만, 이백 여 페이지의 이 짧은 책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전방위적이서 '명민한' 독자가 아닌 나로서는 읽는 내내 헤매고 또 헤맬수 밖에 없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이자 문화비평가이자 문학비평가로서 영국의 다양한 작가들과 작품들을 언급하는데 그 작품들에 대한 지식이 얕으니 이해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화' 와 '문명'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주었기에 나름 의미있는 책이었다.

'문화'는 유난히 복합적인 단어로, 누군가는 이보다 복합적인 단어는 한두 개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네 개의 주요한 의미가 두드러진다. 문화는 (1)예술적이고 지적인 작업들 전체 (2) 정신적이고 지적인 발전 과정 (3) 사람들이 살아가며 따르는 가치, 관습, 신념, 상징적 실천들 (4) 총체적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p. 13)

'문화'라는 단어는 굉장히 자주 쓰이는 단어이지만 꼼꼼이 따져보면 이 단어의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예술이기도 하고 때로는 삶의 방식이기도 한 이 '문화'라는 것은 좁혀졌다 늘려졌다 하면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우리가 문화라고 알고 있던 것이 때로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했으며 우리가 문화라고 알고 있던 것이 때로는 산업이기도 했다. 가장 헤깔리게 사용될때의 문화는 '문명'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문화'와 '문명'은 원래 거의 동일한 의미였으나, 근대에 들어서는 이 둘이 구별될 뿐 아니라 실제로는 반대말로 여겨진다. (중략) 대략 말하자면, 우편함은 문명의 일부고, 우편함을 무슨 색으로 칠하느냐는 문화의 문제다. (p. 17) 산업화 이전 시대의 노동 형태는 전반적으로 훨씬 더 극악했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더불어 그러한 문명에 대한 열띤 저항이 나타났고, 이 문명은 이제 전체가 정신적으로 파산한 것으로 보인다. (중략) 이제 문명은 사실의 문제가 된 반면, 문화는 가치의 문제가 된 것이다. (중력) 그러므로 문화 개념을 탄생시킨 조력자 역할을 한 것은 산업 문명이다. (p. 23)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문화'라는 단어는 광범위하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p. 24)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소설책이 필요하고, 소설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제지 공장과 인쇄소가 필요하다. 문명은 문화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p. 25)

얼마전 '천하대혼돈'이라는 책으로 내머리를 대혼돈에 빠뜨렸던 슬라보이 지제크에게 '문제는 자연이 불변하는 게 아니라 지나치게 변덕스럽다는 것'(p. 29) 이었다하고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으로 유명하다는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모든 문화가 궁극적으로는 문명으로 굳어지는 쪽으로 향한다고 주장'(p. 29)했다고 하는데 여하튼 저자의 표현처럼 '현대의 문화기술들이 도래하기 전까지 문명은 문화보다 더 지구적인 현상(p. 29)'이었음은 맞는 것 같다. 과거에 '문화는 지역적'(p. 29) 이었다. 역사적으로 문명은 늘 문화보다는 큰 범주였다. 문명은 발달이나 진보로 표현되고 문화는 문명의 표현방식의 하나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문명'이라는 단어는 별로 쓰지 않는다. 온갖 '문화'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현대'라는 단일한 문명속에서 '다양성'이 난무하는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고나 할까. 저자는 문화와 문명을 구분하기 위해 옛시간을 잠시 소급하지만 그 구분이 명확해지기도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버린다.

다양성은 위계와 완벽하게 공존한다. (p. 49)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연대 개념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고 더불어 통합의 모든 형태를 '본질주의적'이라고 여기는 미숙한 추정이 있는데, 이는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에 탈혁명적 성격이 있다는 분명한 표지다. 종족이라는 면에서 말한다면 다양성은 긍정적인 가치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비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다양성이 하는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모던의 다원성 사도들은 다원성의 개념에 대해 더욱 더 다원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p. 50) 모든 획일성이 다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단일성이나 의견 일치가 '본질주의'로 악마화될 일도 아니다. 반대로 단일성이나 의견 일치가 훨씬 더 많을수록 전적으로 환영받을 수도 있다. (p. 52)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신의 정치적 역사가 혹은 오히려 정치적 역사 부재가 정치적 관점을 얼마나 깊이 형성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다원성, 차이, 다양성, 주변성에 대한 관심은 귀중한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더 물질적인 다양한 이슈에서 관심을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어떤 영역에서 문화는 자본주의를 말하지 않는 방식이 되었다. (p. 55)

문명과 문화를 역사적으로 잠시 고찰한 다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온 이유가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다. 그러나 이 산만한 다양성은 핵심을 가리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문화연구 담론은 그 자체가 놀랄 만큼 배타적으로, 대체로 섹슈얼리티는 다루지만 사회주의는 다루지 않고, 위반은 다루지만 혁명은 다루지 않는다. 차이는 다루지만 정의는 다루지 않고, 정체성은 다루지만 빈곤의 문화는 다루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학생들은 인종주의자와 동성애 혐오자가 대학에서 발언하는 것을 금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만, 저임금노동 착취자들이나 노조 폐기론을 주창하는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별달리 힘을 쏟지 않는다.(p. 54)' 근대까지만 해도 문화에는 사회담론의 중심을 이루는 문화에는 분명 정치적인 이념적인 철학적인 사상적인 문화들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다양한 담론들에는 그러한 이슈들은 빠져있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은 문화적인 이슈에서 밀려나거나 가볍게 치부하거나 무시하고 넘기는 '문화'가 생성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문화에서 빠져있던 핵심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보다 더욱 심층적인 것이 있으니, 곧 문화를 가능하게 하게 필연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물질적 조건이 그것이다. (p. 63) 이데올로기는 문화와 동일하지 않다. (p. 77) 문화가 항상 권력의 매개체는 아니다. (p. 79) '문화비평'은 정치에서 문화를 분리시키는데, 사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문화정치는 하나(정치)가 다른 하나(문화)로 축소될 위험에 놓여 있다. (p. 101) 사회주의의 목표는 개인주의다. (중략) 요컨대 사회주의는 노동이 아니라 여가에 관한 것이다. (p. 140) 산업사회는 인간의 힘이 가진 조화로운 총체성으로 이해된 '문화'의 이름으로 판단된다. (p. 149) 문화는 소중히 여겨지는 어떤 가치들이라는 의미에서 이제 공유된 생활 방식이라는 의미로 널리 퍼지게 될 것이었다. (p. 151) 물질적 구체화가 없는 문화의 관념은 추상적이고 학술적인 것으로 남겨지게 된다. (p. 158) 문화는 시민사회를 변환하는 수단이기보다는 시민사회에서의 도피처가 된다. (중략) 문화와 정치의 연결 고리는 점차 침식되어 간다. (p. 159)

다양한 작가들 특히 아일랜드 출신 작가들과 세계대전을 전후한 식민지배에서의 '문화'만 해도 혼란스러울지언정 여전히 사회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이후 '문화산업'이 탄생하면서 문화는 '문화 생산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변화(p. 179)'를 거치게 되고 대중문화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문화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기반시설에 속(p. 179)'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과거보다 더욱 그 관계는 깨닫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 저자는 이 '물질적 조건'을 환기시킨다.

문화는 위험할 정도로 열광적인 민족주의 브랜드에서 속했다가, 인종주의 인류학에 사로잡혔따가, 전반적 상품생산에 흡수되었다가, 정치적 갈등에 휩쓸렸다. 문화는 권력에 대한 해독제를 제공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 깊숙이 공모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문화는 우리를 구원해줄 수도 있는 위치에 놓이기보다 다시 제자리에 확실히 되돌려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p. 185)

'문화'라는 미명 하에 다양한 '주의'들이 깊숙히 침투하곤 했다. 좁은 의미의 문화가 광범위해질수록 문화가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워져갔다. 하지만 '문화'는 여전히 파워가 있는 무엇이다. 그러니 그 이면의 핵심동기를 파악한다면 문화에 휩쓸리기 전에 중심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념으로서의 문화는 완숙함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어떤 영역에서는 최고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문화의 중요성을 실제보다 과장하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예컨대 '문화산업'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을 보자. 만약 '산업'이라는 단어가 문화 생산이 근대 문명을 관통하며 얼마나 멀리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기준이라면, 이 단어는 또한 이런 일을 하기 위한 핵심 동기가 결코 문화적인 것이 아님을 환기하기도 한다. 제너럴 모터스 자동차 회사와 마찬가지로, 할리우드와 미디어가 으뜸으로 삼는 것은 회사 주주들의 이익이다. 바로 이윤 동기가 문화가 전 세계에 걸쳐 장악력을 펼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문화산업의 존재는 문화의 중심성보다는 한때 케냐와 필리핀을 식민화했던 것만큼이나 철저하게 판타지와 쾌락을 식민화하는 오늘늘 후기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주의적 야망을 증명해준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기이한 아이러니는 대중문화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를 문화 자체의 힘이 만든 현상으로 여기는 일도 더 늘어나지만 실제로 문화의 자율적인 영역은 더욱더 줄어든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의 영향력은 더 늘어날수록 문화는 그것이 가진 규범적 의미에서 대개는 문화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목표를 가진 글로벌 체제를 더 강화하게 된다. (p. 191)

저자는 이러한 문화의 위기를 확인할수 있는 것으로 '전 세계적인 현상인 대학의 쇠퇴야말로 자본주의가 한때 자신의 반대말('문화')로 여겨졌던 것을 자신에게 동화시키는데 전념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p. 192)' 라고 말한다. 또한 '인문적 비판의 핵심부로서 수세기에 걸친 전통을 가진 대학은 현재 야만적일 만큼 속물적인 관리 이데올로기의 지배 아래 놓인 사이비 자본주의 기업으로 전환되면서 사라지는 중이다(p. 192)' 라고 하지만 저자는 당당히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 라고 내세우며 자신의 학문을 연구하고 이렇게 책도 써내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조차도 안되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여하튼 저자는 이 책의 결론에서 '문화의 자만심'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운영자들은 차이, 다양성, 정체성, 주변부 담론에 열광한 나머지, '착취'나 '혁명'은 말할 필요도 없고 수십 년 전부터 아예 '자본주의'라는 단어도 안 쓰기 시작한 일부 문화 좌파들까지 슬며시 따라잡는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계급투쟁의 언어들뿐 아니라 '다양성' 이나 '포용성' 같은 용어를 쓰는 것이다. (p. 194) 이 체재(자본주의)는 (중략) 가장 단호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상상했던 대로 국가라는 것이 속속들이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도구일 뿐이었음을 폭로해주었다. 결국 핵심은 이미지와 아이콘이 아니라 거대한 사기외 체계적인 약탈이었다. (p. 195) 진짜 깡패들과 아나키스트들은 세로줄무늬 정장을 입었고, 진짜 강도들은 은행을 터는 게 아니라 은행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p. 196) 초국가적 자본주의는 세계시민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수많은 세계시민 주체들 사이에 편협성과 불안정을 야기하며 그들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두는 경향이 있다. 이 불안정으로 인해 세계인들은 세계주의 카페가 아니라 인종주의와 국수주의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p. 200)

자본주의는 세계화 되었지만 인류는 세계시민이 되지 못했다. 문화산업은 인류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을 것처럼 양산되지만 결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저 소비하고 소비하고 소비하게 할 따름이었다. 그 과정에서 비교와 갈등과 분열은 과거보다 더 불안정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 이와중에 문화비평이라니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라고 저자가 묻는 것 같다. 그 질문을 하기도 전에 저자는 대답부터 먼저 한다.

사실 새로운 천 년으로 진입해가고 있는 인류가 대면한 핵심 질문은 결코 문화적인 것이 아니다. 그 질문들은 문화적인 것보다 훨씬 더 현세적이며 물질적이다. 전쟁, 기아, 마약, 무기, 종족 학살, 질병, 생태적 재난-이런 주제들에 관한 모든 질문은 문화적 측면을 가지고는 있으되 문화가 핵심은 아니다. 문화를 말하는 이들이 문화 개념을 과정되게 부풀리지 않으면서도 핵심으로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면 입을 닫고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 (p. 203)

책의 제목은 질문이었으나 책의 마지막 문장은 입을 닫으라 한다. 저자의 문화비평에서 핵심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물질적인것, 자본주의적인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의 이면에 문화가 아닌 것이 있을 수 있고 문화적 측면을 가지고 있으되 문화의 핵심이 될 수 없는 주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함부로 문화를 말하고 핵심을 벗어난 문화비평을 하는 이들의 허풍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차리고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문화비평은 솔직히 너무 어려웠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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