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 - 신화가 아닌 보통 사람의 삶으로 본 그리스 로마 시대
개릿 라이언 지음, 최현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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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아닌 보통 사람의 삶으로 본 그리스 로마 시대

역사를 좋아하고 서양역사 책을 이것저것 읽다보니 그리스·로마사에 대한 애정이 좀 생겼다. 그래서인지 해당 분야의 새 책이 나왔다고 하면 자연스레 눈길이 가곤 한다. 그렇게 읽게 된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뒷표지의 추천사들에 훅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한국 고고학계의 미래 강인욱 교수, 그리스·로마사 관련 대중서로 인기가 높은 김헌 교수 그리고 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이라는 곽민수 님이 '신화 중심의 그리스 로마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책' 이라며 강추하다니 대체 어떤 책인것일까~

이 책은 36가지 질문에 답을 제공할 것이다. (중략)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내용 중 핵심 지식들을 간결하게 정리했고, 현장감 넘치는 도판을 풍부히 실었다. 흥미진진한 세부 일화들은 각주에 충분히 담으려 노력했고, 스스로 고전을 해독하는 경험을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출처를 미주에 게시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고대 세계의 역사를 부록으로 아주 간결하게 수록했다. 전체상을 먼저 파악하고 싶다면 부록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바로 질문 속으로 뛰어들어도 좋다. (p. 7)

저자는 그리스·로마사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여러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교육 현장에서 정말 학생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역사 책 속의 사건들이 아니라 어쩌면 사소한 호기심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책을 구상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라고 하면 신화나 제국에 대한 것들을 배우지만 그런 내용들 속에 당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제대로 담겨지지 않기 마련이다. 그들은 정말 속옷을 입지 않았는지, 신화를 정말 믿었는지,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조각상들은 왜 하나같이 나체인지 등등 세속적이지만 유쾌하고 날카로운 질문들을 36가지로 추려 답하고 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당대의 삶이 좀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적나라한 조각상 뚱뚱한 검투사 전쟁 코끼리> 라는 다소 엉뚱한 원제는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가 되었다.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권력층을 중심으로 한 소위 윗세계를 다뤘다면 그 아래 피지배층의 삶을 다룬 이 책은 아랫세계로부터 역사를 들여다보는 책이라는 의미이리라.

그리스·로마인들은 왜 바지를 입지 않았을까? 게다가 어떤 의복에도 호주머니가 없었다고 한다. 너무 불편하지 않았을까? 첫질문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은 답변또한 아주 신선하다고는 볼 수 없다. '지중해 기후에 적합했고 사회적 상황이나 날씨에 따라 유연하게 변형할 수 있었다. (p. 14)' 라는 모범적 답변으로 끝났다면 정말 너무 식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어쩌다 바지를 입게 됐고 왜 입게 됐는지 살피면서 '경건한 기독교인 몇몇은 손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속옷을 입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p. 18)' 라는 식의 유머를 곁들임으로써 역사를 읽고 있으나 역사를 읽고 있지 않는 것같은 편안함과 재미를 선사한다.

저자는 흥미로운 질문들을 통해 쉽고 발랄하게 시작하면서도, 턱수염과 면도의 유행변천사를 살펴보기도 하고, 남성 유방 축소와 원시 형태의 지방 흡입술 까지 있었으며, 화려한 연회에 등장하는 음식들에 놀라기도 하지만 '칠성장어의 이리(정액 덩어리), 강꼬치고기의 간, 꿩과 공작의 뇌, 홍학의 혀 등이 수북이 쌓인 거대한 접시가 등장했다. 이 음식의 요리로서의 가치는 의심스럽지만, 메시지는 명확하다. 음식은 권력이었다. (p. 58)' 같은 확실한 마무리를 통해 역사서로서의 빛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따라서 역사적 상식들도 다수 배울 수 있었다. 서력기원제도는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보편화되었다거나 요일의 명칭이 게르만 민족이 고안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현재까지도 다른 방식으로 요일을 표시하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 로마 귀족들은 상업에 대한 직접 투자는 금기였기에 노예들을 훈련시켜 상업, 수공업, 필경사, 대출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것, 키케로가 아내보다 훨씬 젊은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30년간 함께 산 아내를 떠났고 다소 빨리 이혼했다는 것, 델포이의 여사제가 바위에서 새어 나오는 증기로 인해 환각상태에서 예언을 했으리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향락용 증기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고 흡입한 종족은 스키타이인들이었다는 것, 경기장에 집어 넣을 동물들을 잡아들이느라 터키의 표범, 이란의 호랑이, 이집트의 하마, 북아프리카의 코끼리가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 등등 알쓸신잡용 상식들이 수두룩 ㅎㅎㅎ

또한 잘못 알고 있던 역사적 상식들을 수정하게 될 수 있기도 했다. 로마인이 납으로 된 수로관 때문에 납 중독으로 죽었다고들 하지만 사실 로마인들은 납에 독성이 있음을 알고 있어서 수로관 대부분을 토관으로 만들었다는 것,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고 해서 노예 수가 크게 줄지는 않았다는 것, 그리스·로마의 누드 조각품은 사실은 대단히 이례적이라는 것, 검투사들이 상대편 검투사를 죽이는 것은 경제적 여유때문에라도 많이 꺼려졌다는 것 오히려 자비를 베풀기를 권장했기에 악랄하기로 유명했던 콤모두스도 검투사와 싸울땐 목검으로 싸웠고 상대를 한번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 게르마니아 나 아일랜드는 정복을 못한 것이 아니라 정복함으로써 얻을 이익이 없었기에 굳이 정복하지 않았다는 것(그러나 경계지역에서의 교유로 인해 로마제국이 적을 성장시키는 경우가 됐다는 것) 등등등

새로 알게된 당대의 일상을 통해 역사적 생각거리들이 있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는데 예를 들어, '신들은 숭배자들의 마음을 읽거나 영혼을 살펴보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자신이 하사한 선물의 대가로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가장 효과적은 방법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p. 163)' 라는 내용을 보며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원하는 것을 빌었던 고대인들은 빈부 격차에 따라 제물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는데, 예수 한 명의 희생으로 모든 희생제물이 사라졌으니 예수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었겠구나 그래서 당대에 기독교가 빠르게 확산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었겠구나 싶기도 했고, 게다가 '주교에 의한 관리는 규모에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일종의 결속감을 주었다. 이는 전통적인 이교 신앙에서는 유례없는 것이었다. (p. 223)' 라는 걸 보면 개인으로서 점점 살기 힘들어지던 사회상이 어떻게 종교와 맞물릴 수 있었는지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서양에서는 논란?!거리인 '그리스·로마인의 진정한 후손은 누구일까?' 라는 마지막 질문에 대해

현대인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패망으로부터 20세대,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부터 약50세대,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70세대, 소크라테스로부터 80세대 쯤 떨어져 있다. 이 눈금자 위에서 유전이란 무의미하다. 그 누구도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의 후예라고 주장할 만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원하든 원치 않든 그리스·로마인들의 지혜와 어리석음을 물려받았다. 이 유산을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의 후예이다. (p. 384)

라고 현명하게 마무리 지음으로써 고대의 역사가 일부 지역의 역사가 아니라 모두가 알아야 할 역사임을 자연스레 깨닫게 한다. 뭐... 저렇게 따져도 극동지역에 사는 우리가 로마인의 후예라고 말하기엔 뭣하지만 여하튼 역사는 돌고도는 거니까... 게다가 지금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심 권력들을 이해하려면 세계사적 지식은 필수인 시대다. 그러니 역사책은 읽어야 하고 처음부터 역사적 사건들의 위압감에 눌리기 싫다면 이런 가벼운 책들로 고대사를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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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의 유토피아 -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연효숙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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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유토피아 사유를 풀기 위한 열쇳말

유토피아를 둘러싼 현대적 물음들

동서양 철학고전을 쉽고 입체적으로 읽도록 도와주는 시리즈라고 안내된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시리즈 중 한권인 이 책은 얇고 작은 책이라서 일단 겉보기만으로는 '고전은 어렵다'라는 부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기대했던 고전책은 아니었다. 나는 '모어의 유토피아'를 쉽게 설명해주는 책이려나 기대했던건데, 이 책은 '모어의 유토피아'를 먼저 읽고 난 후 읽었어야 했던 책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생각했던 질문들에 대해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어본 적 없는 내가 어찌 그 질문을 이해하며 하물며 답을 유추해볼 수 있었겠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모어의 '유토피아' 원전 번역서를 찾아 읽는 건데...싶었다.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기 전에 사전정보로 알아둘 만한 내용들도 꽤 있었기에 + - 퉁치는 걸로.

유토피아는 15,16세기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쓴 유명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모어는 어떤 시대에 살았을까? 그는 왜 <유토피아>라는 책을 쓰게 된 것일까? 토머스 모어가 살았던 때인 15,16세기 유럽 사회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였다. 흔히 암흑기라 불리는 1,000여년 동안 중세 유럽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고 새로운 기운이 곳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변화의 바람이 일어난 곳은 이탈리아였다. (p. 18) 유럽 사회를 변화시킨 것은 르네상스만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나 사상과 문화, 예술에서 새로운 기운이 퍼져나갈 때,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p. 21)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스위스, 프랑스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으로 중세 교회의 통일은 무너지고, 계파간 갈등과 대립이 심해져 유럽 각지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모어가 살았던 영국에서는 다소 엉뚱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p. 22) 헨리8세는 자신의 재혼을 관철시키기 위해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고 독특한 영국식 성공회를 만들어 스스로 수장이 되었다. (p. 23)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토머스 모어는 이렇게 교회가 구교와 신교로 나뉘는 것을 반대했다. 모어가 다른 데에서는 굉장히 진보적이었지만, 종교에서만큼은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p. 24)

모어가 살던 시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였고 종교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으며 무역의 활로가 점차 전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그러니까 모어는 급변하는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개혁적인 성향으로 비판적 관점을 가졌으나 종교에서만큼은 보수적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게 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는 이렇게 각 나라마다 앞다투어 신천지를 발견하려는 분위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p. 26)' 에서 알수 있듯이 새로운 땅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유럽땅에 국한되어 있던 상상력이 새로운 땅 즉 어쩌면 유토피아 같은 새로운 세상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력이 발휘되기 딱 좋은 때였던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지금 이 문제투성이 현실보다 좋은 곳, 하지만 그동안은 몰랐던 곳, 그러니 새로 발견되는 땅이 그러한 유토피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런 상상력의 흐름이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지금 눈앞의 현실속 문제점들이 적나라하면 적나라하게 보일 수록 더 꿈꾸게 되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유토피아>의 주요 등장인물은 신천지로 비유되는 유토피아 땅의 삶을 5년 동안이나 경험하고 온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이다. 이 라파엘이 참여한 탐험대가 바로 아메리고 베스푸치 일행이라고 모어는 상상력을 발휘해 설정한 것이다. (p. 26) 르네상스의 휴머니스트를 대표하는 에라스무스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의 교분이 상당히 지속되었다. (p. 28) 당시 영국은 장미전쟁에서 승리한 헨리7세가 리처드3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튜더왕조를 열고 있었다. 모어는 헨리7세와 여러 가지 정책 면에서 종종 충돌하곤 했다. (p. 29) 헨리7세와 종종 충돌했던 모어는 헨리8세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p. 30) 귀족과 성직자들이 로마 교황청에 헨리8세의 이혼 청구서를 제출하는 서류에 모어는 서명을 거부하고 공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해 헨리8세로부터 거듭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1534년 마침내 모어가 반역죄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히게 되었다. 15개월 동안 악명 높은 런던탑에 구금된 기간에도 그는 저술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35년 7월1일 모어는 재판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닷새후 단두대에 올랐다. (중략) 가톨릭 교회는 죽음을 선고받고도 의연히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굳건히 지킨 모어를 그의 400주기인 1935년에 성인으로 올렸다. (p. 33)

사실 <유토피아> 원전 번역본을 읽었다면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지식들은 아마도 해제에 설명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모어의 유토피아를 쉽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모어의 유토피아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들을 미리 던져주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저자는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한 현대적 버전의 질문들까지 던진다. 그런 질문들을 열쇳말로 삼아 왜 지금 이 현대에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원제는 <사회의 가장 좋은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 이다. <유토피아>를 몇 개의 핵심 개념으로 정의하면,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 사회, 미래를 위한 관점, 완벽한 사회, 새로운 법률제도, 인간적인 시선 등이 될 것이다. (p. 34)

<유토피아>의 원문이 조금 인용되고 있긴 하지만 그 양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책만으로는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해 뭐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토피아를 직접 탐험하고 돌아온 라파엘 이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마치 소설처럼 혹은 여행담처럼 서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분명 당시 영국사회에서는 나름 파격적인 사상이었음은 분명하다. 고대의 플라톤의 <국가> 부터 근대의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그 생각의 범위가 넓어보이는 <유토피아>는 무척 궁금한 고전이다. 이 책을 보니 고전이긴 하나 소설처럼 읽혀질 것도 같아 무척 궁금해진다. 저자는 마지막 챕터에 '모어의 <유토피아>와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될 여섯 권의 대표적인 책들을 소개 (p. 164)' 하고 있다. 이 부분을 보니 '톰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라는 책도 무척 궁금해진다. 또한 본문에 등장했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도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비록 이 책이 처음의 내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했으나 이렇게 읽고 싶은 책들을 남긴 것을 보면 이 책또한 읽어봄직한 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엔 좋은 책들이 어찌나 많은지...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시간은 없고... 여하튼 이 책이 속한 시리즈는 고전읽기를 할때 참고용으로 썩 괜찮은 책들이 될 것 같다. 디스토피아 소설이 난무하는 요즘 시대에 그만큼 유토피아가 저절로 꿈꿔지는 요즘 시대에 중세말의 <유토피아>를 찾아 읽어보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지, 이 책의 저자와 나는 어떤 질문을 공감하고 다른 질문을 생각하게 될지 숙제처럼 남은 이 궁금증을 언제 풀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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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온 미술관 - 길 위에서 만나는 예술
손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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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혼자 가지 않아도 좋은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거리 미술관 산책

2020년 한 해 동안 <국민일보>에 연재되었던 칼럼 '궁금한 미술'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우리가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굳이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일상 속에 미술품이 있다는 것. 하지만 언제든 볼 수 있다고 해서 그 작품의 작가, 제작 경위, 미학적 가치, 시대사적 맥락을 두루 알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거리 위 조각물과 건축물이 누구의 손을 거쳐 탄생했는지, 설치된 배경은 무엇인지, 어떤 점이 멋진지 등을 궁금해할 이들에게 '친절한 거리예술 안내서'가 될 내용을 담았다. - 책표지 앞날개 내용 中-

예술작품이라 하면 박물관이든 미술관이든 어딘가 좀 격조 높은? 곳에 있을 것 같고, 그런 곳의 야외전시장에서 보는 작품들 조차 실내에서 보는 작품들에 비해 대충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공공미술'을 막상 의식하고 나면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 길거리 곳곳 도심의 한복판에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궁금했다. 내가 봤더라도 그냥 스치고 지나갔을 그리하여 봤어도 기억나지 않을 그렇게 예.술.작.품. 인지 몰랐을 작품들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건지.

첫번째 소개 작품은 광화문 흥국생명 건물앞에 있는 <해머링 맨> 이었다. [ 흥국생명은 당시 '1%법'에 따라 이 작품을 주문했다. (중략) 흥국생명은 2008년 <해머링 맨>의 인체 윤곽이 멀리서 더 잘 보이도록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도로 쪽으로 5m 더 빼는 결단을 내렸다. 이 거대한 철제 조각상은 망치질하는 데 드는 전기료, 보험료 등 유지비만 1년에 7천만원 가량이 든다고 한다. 설치와 이전, 유지 과정에서 보여준 행보는 기업 오너의 미술 애호가 거리의 공공조각의 수준을 어떻게 업그레이드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p. 27) ] 그랬구나... 광화문에 가면 당연하게 눈에 보이는 그 거대한 입상이 수많은 사람들의 출퇴근길에 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공공미술작품이었구나... 이 작품에 비하면 두번째 소개되는 청계광장의 <스프링>은 그야말로 공공미술의 폐해애 가까웠다.

올덴버그에게 제시된 작품 가격은 무려340만달러 (당시 환율로 35억원). 해외 미술 시장에서도 보기 드문 거액이었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지속 가능한 녹색 성장 시대로의 이륙을 선언하는 기념비적 상징물을 외국인 작가에게 빼았겼다는 허탈감이 미술계를 휘정었다. 서울시는 다슬기 모양이라고 설명하지만, 소라를 닮은 게 분명한 조각의 형태도 생뚱맞았다. 그리고 설사 다슬기가 맞다고 해도 거기 왜 다슬기 모양의 조각이 들어서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던 미술인들 (p. 35) <스프링>을 제작하던 당시에는 이 과정이 없었다. 외국 유명 작가의 작품을 일방적으로 내리꽂은 것이다. 그때 여러 미술 단체에서 '외국 작가의 작품이 선정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공론화 과정이 빠진 것이 문제'라고 일제히 비난했다. <스프링>에 대해 미술계가 반감을 가지는 또 다른 이유는 올덴버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동안 청계천을 찾은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올덴버그는 한국을 단 한번도 찾지 않고 <스프링>을 디자인했다. (p. 38) 2007년 대선이 코앞인 시점이었다. 천천히 제대로 개울을 복원하고 조각물을 세우는 것은 대권 가도에 걸림돌이 될 게 뻔했다. 그는 '빨리빨리'를 거듭 외쳤을 것이다. 그 결과, '길게 누운 분수대' 거대한 시멘트 어항'으로 불리는 청계천이 탄생했다. 복원된 자연 하천이 아닌 한강과 지하수를 끌어와 흘려보내는 인공하천이다. 그러니 청계천 초입에 놓인 <스프링>은 허구이자 위장이다. (p. 40)

MB의 대권 야망 속에 서둘러 마무리된 청계천 공사와 공공미술 작품은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건만은 그의 위풍당당한 자랑질에 우리가 너무 쉽게 넘어갔던 것이 아닐까. 비싸게 들여온 외국작가의 작품들이 흉물 취급 당한 작품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있다고 해서 공공미술일지라도 소위 '작품'이려면 반드시 외국작가의 작품이어야만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DDP 앞에 서있는 거대한 인간꽃처럼 보이는 조형물의 작가는 김영원 조각가였다. 아무리 예술성이 높더라도 말도많고 탈도많은 건물인 DDP에 비해 나는 이 조각상의 예술성이 훨씬 더 마음에 와닿는 것 같았다. 앞선 사례들에서도 확인되지만 건물앞에 서있는 예술작품은 동상인 경우가 많다.

동상은 통치자가 국민에게 통치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서구에서는 19세기에 엄청나게 생겨났다. 민족적 우월감으로 영토를 넓혀가던 제국주의 시대는 애국주의 물결이 거셌고, 이런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수단은 영웅화된 인물의 동상을 공공장소에 높이 세우는 일이었다. 이성의 시대인 근대는 동상을 통해 영웅적인 인물의 강인한 정신력과 실천력을 보여주려 했다. (p. 62) <이순신 동상>자리에 예정돼 있었던 4·19기념탑은 5·16군사정변 이후 지금의 국립4·19민주묘지가 있는 곳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그리하여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은 박정희 시대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동상에 따라붙는 오명이기도 하다. (p. 65)

권력이 독재일때 그 권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분야는 없었다. 예술계도 마찬가지라서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조각상과 건물은 그 모양을 달리하게 되곤 했다. 공공미술이 아니라 권력자의 선호도에 맞춘 그런 작품들을 과연 공.공.미술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했던 '1%법'을 만들었기에 그나마 그런식의 공공미술이나마 확장되게 되었다.

때는 1983년. 서울시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건축 심의 조례를 강화했다. 핵심은 서울의 미관지구 안에 11층 이상, 건축면적 10000㎡이상 건물을 신축할 때 건축주가 공사비의 1% 이상을 조각과 벽화 등 '미술장식'에 쓰도록 한 것이다. 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준공검사를 받을 수 없도록 했다. ('건축물 미술장식'이라는 용어는 2011년부터 '건축물 미술작품'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하면서 도시환경을 개선하고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제13조에서 건축물 미술장식의 근거를 마련했다. 이는 권고 사항이었지만, 서울시가 선제적으로 '미술장식'을 의무화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1995년부터 의무화되면서 '1%법'으로 통칭되었으나, 2000년부터 설치 비용이 건축비의 1%에서 0.7%이하로 경감됐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은 거리 조형물 시장의 분수령이 된 계기였다. (p. 71)

공공미술작품이 흔해지는 만큼 그 작품성에 대해 둔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을때 뭔가 들어서면 초집중하여 보게 되지만 여기에도 하나 저기에도 하나 있게 되면 그냥 뭔가 있는가보다 하면서 지나치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지나친 공공미술 작품들 중에 은근 작품성 높은 작품들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고나서 좀 놀랍기도 했다. 저자는 도심 안의 또 다른 예술로 '건축'이야기도 풀어놓는다.

"객실 수는 많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수익은 적게 나도 좋습니다. 버킷 리스트에 올릴, 그런 건축물을 지어주세요. 우리나라에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그런 건축물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2015년 봄, 코오롱 그룹으로부터 리조트 설계를 요청받은 김찬중 대표는 이 같은 주문이 믿기지 않았다. (p. 117)

울릉도에 있다는 '코스모스 리조트' 는 2개동을 합쳐봐야 총 객실 수가 고작 12개. 리조트로서 경제성은 한참 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게 작고 소박하게 지음으로써 울릉도의 절경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풍광이었다. 여기... 꼭 가보고 싶다!!

이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이나 한옥의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물 이야기였다. 일명 '달항아리'로 불린다는 이 건물또한 오너가 경제성만을 추구하지 않을때 어떤 미학적 가치가 획득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DDP 건물은... 건축가 본인의 이력에는 상당한 장점이 됐겠지만... 글쎄...

1988년 서초구에 예술의 전당 음악당이 개관하기 전까지 10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연장 역할을 한 세종문화회관은 남북 체제 경쟁과 대화의 산물로 탄생했다. 그 시절 남북은 군사력·경제력 뿐 아니라 문화적 능력을 두고도 경쟁했다. 21세기인 지금, 그때 그 시절을 증거하고 있는 건축물이 세종문화회관이다. (p. 179)

애초 5층으로 설계됐던 국회의사당은 해방 후 중앙청(5층)으로 쓰던 총독부 건물보다 높아야 한다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6층으로 높아졌다. 이렇듯 권력자 입맛에 따라 시공 과정에서 누더기가 된 것이 국회의사당이다. (p. 189)

앞선 에피소드들에서 잠깐씩 이야기되기도 했지만 저자는 한 챕터를 역사이야기로 할애해서 공공미술 혹은 건축물과 관련된 역사를 들려준다. 예술의 전당이 왜 갓을 쓰게 됐는지 세운상가가 왜 '좌절된 유토피아'가 됐는지 등의 이런저런 뒷이야기들 모두 재미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압권은 국회의사당 뒷얘기였다. 건축가 누구도 자신이 참여했음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지금은 누가 지었다고 말할 수조차 없게된 기형의 건물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회의사당이라니...

오피스텔에 설치된 이 전광판 작품에 주목한 이유는, 이 작품이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에 의해 설치됐기 때문이다. 통상 건축물 미술작품은 조각이나 회화를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미디어아트다. 게다가 그걸 전광판 형식에 구현하니 신선하다. (p. 230)

시대가 변한 만큼 공공미술도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공공미술은 관점을 바꾸고 경계를 허물고 있다고 한다. 아파트 조경에서부터 전광판, 길가 혹은 계단 아래 등 작품이 위치하는 공간은 이제 반드시 건물앞이 아니었고 그 형태또한 동상이 다가 아니었다. 그 새로운 작품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서울로7017에 있다는 <윤슬> 이었다. 언젠가 서울로에 가게되면 이곳에 꼭 가봐야 겠다.

광화문 하면 떠오르는 풍경, 인천공항 하면 떠오르는 풍경, 녹사평역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곧 공공미술 작품이 녹아든 일상의 풍경이고 거리 갤러리 풍경이다. 제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을 하나하나 발견하는 재미를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길. 공공예술, 공공미술이 멀게 느껴졌던 사람들에게도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p. 296)

이 책은 그야말로 공공예술에 대한 도슨트투어가 맞았다. 이 이게 이런 작품이었어? 하며 새롭고 아니 이런 배경이 있었어? 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읽고나니 더 궁금해진다. 거리 곳곳에 또 어떤 예술작품들이 있을지... 저자가 2편을 내준다면 좋겠지만 그건 좀 시일이 걸릴 것 같으니까, 저자의 말대로 공공예술작품들 앞에 안내판이라도 어서 설치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그게 작.품.인지 정도는 알고 지나치게 될테니 말이다.

ps. 생각해보니 아파트마다 있는 이런저런 조형물들도 대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건지 모를 것들이 수두룩한데 설치할때 작품설명판도 함께 붙여주면 참 좋을 것 같다. 꼭 대작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작품일테니 그 의미를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실 내가 궁금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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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좋았던 리뷰 ㅎㅎ 축하드립니다 *^^*

LILLY 2022-03-15 11: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시소 첫번째 - 2022 시소 선정 작품집 시소 1
김리윤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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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여름,가을,겨울 가장 다채로웠던 시와 소설의 풍경을

한 권으로 만나는 '시소'

<시소>는 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2021년 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담은 책이다. 매 계절 발표된 시와 소설을 한 편씩 선정하여 좋은 작품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이 프로젝트는 각 작품마다 작가와의 인터뷰가 뒤따르고, 그 작품들과 인터뷰를 한권에 모아낸 책이 <시소>다.

문학지를 구독하지 않는 이상 발표되는 시와 소설들을 바로바로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볼 수 있기에, 잡지가 아니라 한권의 작품집을 선호하는 나같은 독자에게는 최신의 시와 소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한권의 <시소> 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1년의 사계절동안 발표되고 그 계절 마다 선정위원들이 신속하게 선별하여 <시소>에 담은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봄 - 시 : 안미옥 <사운드북> / 소설 : 손보미 <해변의 피크닉>

여름 - 시 : 신이인 <불시착> / 소설 : 이서수 <미조의 시대>

가을 - 시 : 김리윤 <영원에서 나가기> / 소설 : 최은영 <답신>

겨울 - 시 : 조혜은 <모래놀이> / 소설 : 염승숙 : <프리 더 웨일>

나에게 시란 한글로 쓰여졌어도 외계어로 읽히는 분야이기에 시를 읽고 시인의 인터뷰를 읽어도 시의 이해는 역시 무리였다. 따라서 소설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감상을 남겨두고자 한다.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하고 미심쩍고 불미스러운 그 느낌-그 당시에 나는 언제 어디서나 그런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무엇을 궁금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남자애들은 갑자기 키가 컸고, 골격이 자랐다. 여자애들 중 일부는 가슴이 나오고 엉덩이가 커졌다. 크고 작은 소동이 있었다. (p. 39 -해변의 피크닉 中)

이 작품은 열한살의 '나'라는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작품으로 이제 막 이차성징이 시작되려는 어린 소녀의 감정적 혼란을 다루고 있다. 어릴때 이혼한 아버지가 사고로 죽자 유일한 혈육인 손녀를 만나기 위해 시부모는 전 며느리와 딜을 했고 일곱살때부터 방학이면 부산에 내려가 한달씩 보내게 된 '나'는 열한살 여름방학때 처음으로 삼촌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렴풋이는 깨닫게 되는 가족간의 비틀어진 관계와 그 관계를 해석하는 어린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춘기소녀도 아닌 열한살의 '나'는 비틀어진 첫사랑을 꿈꾼다.

충조의 잘못도 있었고, 엄마의 잘못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론 내가 잘해야 되는 문제로 귀결되었던 지난날을 언니도 다 알았다. (p. 163)

우리는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하지만 둘 다 그걸 인정할 수 없었는데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우리가 함께 살 집을 구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5천만원은 아버지가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이었다. 우리는 그걸 너무나 잘 알았기에 절대로 기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의 집값은 아버지의 유산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어느새 아버지는 6평 남짓한 반지하방의 전세금만 남겨준 사람이 되어 있었다. (p. 178) (미조의 시대 中)

미조는 단순경리업무 구직중이지만 잘 되지 않고 있다. 엄마는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시를 쓰는 중이고 하나뿐인 오빠는 진작부터 가출해서 거의 절연상태다. 살고 있는 집이 재개발에 들어가자 집주인은 어서 방을 빼달라하는데 전재산인 5천만원으로는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반지하 전세방조차 구하기 힘든 상태다. 절친인 수영언니는 성인웹툰 어시로 그림을 그리는 중인데 너무 왜곡된 웹툰 내용에 스트레스 받아서 원형탈모가 진행중이다. 미조의 사정을 다 아는 수영언니는 미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미조야, 너 그거 아니?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야. (p. 184)'

네 나이때는 하루에 한쪽이나 두쪽의 일기를 꼭 써야 잠들 수 있었어.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일기의 길이는 점점 줄어들었고 요즘에는 그냥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어떤 손님을 만났는지 같은 내용을 짧게 메모하는 수준이야. 오늘이 어제와 달랐고 또 내일과도 다를 거라는 근거를 적어두는 거지. 기록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같은 날이 되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한꺼번에 삭제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거든. 아마 수감 생활을 하면서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 나는 그때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글을 썼다. (p. 245 답신 中)

자매가 있었다. 언니는 일곱살, 동생은 네살 일때 부모는 이혼을 했고 자매는 고모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자매를 떠났을때의 엄마 나이는 고작 스물일곱이었다. 아빠는 일용직을 하며 전국을 돌았고 자매는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는 심정으로 자랐다. 하지만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p. 268)' 만이 자매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언니는 열여덟에 만난 학교선생님과의 관계에서 임신을 하게 되고 빠른 결혼생활을 했지만 남편은 만삭의 아내에게 자신이 없을땐 보일러도 틀지 못하게 하고 동생이 있거나말거나 막일을 시키는 사람이었다. 아기가 태어난 이후 언니의 삶은 더 고달파 보였지만 언니는 늘 괜찮다고 남편은 좋은 사람이라고 동생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형부의 외도를 목격했고 언니에 대한 폭력을 눈앞에서 보게 된 순간 동생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니는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만들고 모른척' 했다. 그때 그 나이 스물세살이 된 조카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이 작품의 제목은 <답신>이다. 받은 편지도 없건만은 답신 이라니...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것일까.

주제넘지 말라고, 수경씨 제발 주제넘게 굴지 말라고... 그때 나는 그런 말을, 두 손에 다 쥘 수 없는 크기의 공처럼 어, 어, 어 소릴 내며 받아 안고는 어쩔 줄 몰랐다. (중략)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도, 나는 또 모르는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다. 공은 이미 저리로 굴려버렸다는 듯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왜 따져 묻디 않았을까. 화내지 않더라도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는 않아도 됐을 텐데. 아니, 당연히, 나는... 무서웠던 것 같다. (p. 347) 알고 있다. 나는 아주 느린 사람, 시간 가는 것에 느리고 감정이 내 속으로 드나드는, 들고 나는 지점을 곧장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즉각적인 것들은 종종 나를 상처 입혔으니까. 뒤늦은 후회와 자책으로 몰살당하는 기분에 휩싸이게 했으니까. 나는 점차로 무감해지는 것을 택하여 왔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바짝 외면하며 살아왔는지도. (p. 353 프리 더 웨일 中)

수영씨와 우상우씨는 함께 소설가를 꿈꾸는 사이였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수영씨만 등단하게 되고 우상우씨는 노동현장에 뛰어든다. 우상우씨가 사고로 죽었을때 수영씨의 뱃속엔 둘의 아이가 있었다. 혼자 아이를 낳고 맘카페에서 무상나눔 되는 품목들에 연연하며 아둥바둥 살다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수 있게 되자 교재전문출판사에 취직하게 됐지만 경력도 없이 나이도 있는 싱글맘으로 회사생활을 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아이는 수시로 아팠고 코로나때문에 어린이집에서도 가정보육을 권했지만 회사는 재택이 아닌 정상출근해야 했기에 종종거리며 사무실 눈칫밥을 먹던 중에 어느날 부터 노란쪽지가 돌기 시작한다. '프리 더 웨일' 이라고 쓰여진, 회사 게시판에 올라오는 족족 사라지던 '차별 철폐'라는 의미의 그 문구... 하지만 수영씨의 삶은 그 메모를 바라보는 것조차 무서웠다...

시를 읽는 것도 쉽지 않지만 단편소설을 읽는 것도 녹록치 않았다. 단편소설은 왜 그리 어두운 건지... 이 시대 싱글여성의 삶은 왜 그리 힘들기만 한건지.... 사계절 마다 발표된 작품이라고 해서 그 계절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긴 어느 작가가 발표 계절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쓰겠는가;;; 따라서 어느 계절에 발표되었든 2021년 이 한해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작품들은 일종의 '82년생 김지영'들의 이야기다. 인터뷰를 보면 작가들 본인들도 이런저런 육아고충을 토로하고 있었고 그러고 보니 모두 여성작가이자 비슷한 연령대라서 문화적 공감코드도 비슷했을 것 같다. 그렇게 이 책은 사계절의 각기 다른 시와 소설을 담았지만 서로 제법 어울리는 한권의 책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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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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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유대교에서 여성 랍비라는 것부터 색다른 책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여전히 진행중인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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