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내게 화학을 알려줘 내게 과학을 알려줘 1
닥터 스코 지음 / 푸른들녘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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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같은 화학 히어로가 되고 싶은 이에게 권하는 책

 

스파이더맨을 둘러싼 과학적 호기심들을 아주 유쾌발랄한 어투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보니 과학책을 읽고 있는 건지 스파이더맨 분석서를 읽고 있는 건지 헤깔릴 정도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 아주 격없이 친근하게 다가와 힘차게 악수하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해오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ㅎㅎ

저자는 과학을 전공했고 전공을 살린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이 종종 대중과학서도 쓰고 유투브 실험 영상도 올리는 활기찬 사람인듯 하다. 거기에 마블시리즈 중에서 스파이더맨 '찐' 덕후인 것 같다. 스파이더맨의 만화책 부터 영화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보니 저자가 알려주는 스파이더맨 이야기를 읽다보면 스파이더맨이 만화나 영화속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실존인물인것 마냥 여겨진다.

스파이더맨 이라는 친숙한 매개인물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과학적 호기심을 일으키고 있는 저자의 질문들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폭넓고 다양하다.

스파이더맨 하면 떠오르는 거미줄! 그 거미줄 용액부터 거미줄을 쏘는 스파이더맨과 그 스파이더맨의 수트 로 이어지는 내용들은 스파이더맨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영화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연상이 되는 재미가 있다.

나는 마블시리즈에 뒤늦게 흥미를 가진 사람이다. 거의 해마다 나오는 마블시리즈가 상영관들을 점령할때 한두번 보긴 했지만, 앞뒤 내용을 모르니 한참 뒤에 나오는 쿠키영상에 왜 그렇게 관심들을 갖고 기다리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다 지난 겨울 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이런저런 영화들을 찾아보게 되고 그러다 마블시리즈를 정주행하고 나서야 아~! 깨달았다. 역시 알고 봐야 더 재미있는 거였다. 이렇게 알고나니 이제 마블시리즈가 새로 나오면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 캐릭터가 왜 저러는지 웃으며 볼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본 마블시리즈 가 책읽을때 도움이 될 줄이야 ㅎㅎ 스파이더맨 영화도 마블시리즈에 속한 건 다 봤기에 덕후까지는 아니지만 저자의 스파이더맨 상황설명을 대충은 다 알아먹을 수 있었다. ^^

스파이더맨의 주무기인 거미줄 용액을 화학적으로 예상분석해보면서 스파이더맨의 본 인물인 과학영재 피터 파커의 생각을 추리하는 과정을 읽다보면 스파이더맨 까지는 아니더라도 피터 파커 라는 사람이 마치 실존하는 것 같다. 저자는 피터 파커라는 과학자의 사고과정을 따라가는 중 같달까 ㅎㅎ 스파이더맨이 쏜 거미줄의 특성을 연구해보고 스파이더맨이 입고 다니는 수트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까지 충족시키고 나면 조만간 업그레이드 된 스파이더맨이 우리 동네에 나타날 것만 같다. ^^

보너스로 실린 <완소 쿠키 자료> 에서는 어렵지 않은 실험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실험들을 유투부에서 직접 볼 수 있도록 QR코드도 함께 있어서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은 청소년들은 찾아봄직 하다.

이 쿠키자료가 끝이 아니다.

그 뒤에 <스파이더맨 연대기> 에서 스파이더맨 영화 기록과 소유권 분쟁의 간략한 설명과 스파이더맨 에게 보내는 애정어린 편지까지 읽고 나면 wow 저자의 스파이더맨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구나 싶다.ㅎ

청소년들에게 과학을 좀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면,

스파이더맨 거미줄의 근원인 웹플루이드의 정체는 무엇일까? 거미줄의 능력은 어느정도 일까? 스파이더맨은 어떻게 벽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스파이더맨의 안경이 어떤 렌즈인지? 등이 영화속 스파이더맨을 보며 궁금한적이 있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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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고전 살롱 : 가족 기담 - 인간의 본성을 뒤집고 비틀고 꿰뚫는
유광수 지음 / 유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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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다

가부장의 이중생활로부터 열녀 만들기 프로젝트, 자식 사랑 패러독스까지

'가족'을 둘러싼 잔혹하고 기이한 고전 살롱으로의 초대

 

 

'고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본제목보다 '가족기담'이라는 소제목에 더 눈길이 가는 책이었다. '고전'이라는 약간 고리타분한 분위기와 살롱이라는 얄궂은 단어의 조합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전'을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과 국내고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이겠거니 하는 약간의 관심으로 읽게된 책이었다.

그런데 웬걸.

읽는 족족 속이 뻥뻥 뚫리다 못해 가끔 혼자 키득거리며 웃음까지 터지게 한 이 책의 매력에 홀딱 빠져버렸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다 올바른데 어디서 이런 불온한 이야기들만 모아놨느냐고 핀잔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 잘 포장해놓은 이야기들 속에 꼭꼭 숨겨진 신음소리, 한숨소리, 통곡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그 헝크러진 소리들 속에서 인간의 내밀한 본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돌아보는 귀감이 되고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p. 7)

학교에서 우리는 많은 고전을 배웠다. 아이들 책에도 전래동화라는 이름으로 고전들이 스며들어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고전 속에서 저자는 뜻밖의 질문들을 꺼낸다. 그리고 현실감 터지는 분석들을 해낸다. 그야말로 기막히게 혁신적으로 고전을 다시 돌아보게 해준다.

고전에 등장하는 효자,효녀,열녀 이야기들을 보며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는가? 그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효자, 효녀가 되려하고 열녀가 되려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사랑이 샘솟는 가족이라고 믿었는데 영아살해와 근친상간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적은 없었는가? 가부장가부장 해도 가부장의 관습이 어느정도 였는지? 여성과 장애인 같은 약자들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저 재미있게 읽고 넘겼던 '고전'작품들 속에는 '인간본성'을 꿰뚫는 질문들이 수두룩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본성들이 하나씩하나씩 이야기속에서 은근슬쩍 드러날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잘못을 떠넘김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잘못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과격하고 더 극단적인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이다. 공범이기에 다급한 그 심경을 감추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대부분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가 몽둥이게 맞아죽고 배가 갈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연한 수순이다. 희생양은 죽어야 한다. 그래야 그 모든 죄가 희생양과 함께 사라지고, 그래야 공범자들의 죄가 씻겨 나가기 때문이다. 공범자들이 더 광분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 메커니즘이다. (p. 27)

<1관 불변의 희생양 메커니즘> 에서 소개하는 고전은 <쥐변신설화, 옹고집전, 배따라기> 이다.

공부하러 들어간 남편이 깍아버린 손톱발톱을 먹고 천년 묵은 쥐가 변신하여 남편행세를 했다는 '쥐변신설화' 에서 '쥐뿔도 몰랐냐'의 쥐뿔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돌아온 남편이 가짜(쥐)남편을 없애고 가짜를 알아보지 못한 부인은 죽임을 당했다. 함께 못알아본 부모는 멀쩡하고.

인색했던 옹고집을 벌주기 위해 짚인형 가짜 옹고집이 진짜 옹고집을 쫓아내는 옹고집전에서도 진짜가 돌아왔을때 웃음거리가 된 것은 부인 뿐이었다.

근대 소설가 김동인의 '배따라기' 에서도 '쥐잡기'는 의처증을 타고 부인과 동생을 쫓아내는 실마리가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순간 그 희생양은 '부인' 이었다.

이 모든 불편하고 괴롭고 힘겨운 상황의 근본 문제는 '부재'였다. 그 부재의 틈을 쥐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절간에 간 남편의 공간적 부재보다, 욕심으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옹고집의 상황적 부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의처증 남편의 심리적 부재이다. 자긍심 부재라는 그 열등감의 틈을 쥐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p. 52)

공포와 불안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곳을 파고든다. 그래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게 한다. 눈이 확 뒤집히게 하는 것이다. (p. 55)

서양의 마녀사냥이 서양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사람사는 세상에서는 어디든 언제든 그러한 일이 있었다. 희생양이 필요해지는 시기에 사람들에게 스며든 공포와 불안은 그렇게 누군가를 탓함으로써 자신을 위안하려 든다. 지금도 그렇게 우리대신 엉뚱하게 벌받고 있는 희생양이 있지 않을까?

국가적 차원에서 '적서차별' 과 함께 고안해낸 것이 '과부재혼금지' 였다. 남자들에게 적서차별이 있었다면 여성들에겐 재혼금지가 있었떤 것이다. 이 두 제도 밑에는 동일한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한정된 관직 숫자 문제다. (p. 60)

열녀 만들기 역시 효자 만들기와 같은 방법이 쓰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효자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 당사자가 큰 축복의 영예를 얻지만, 열녀는 만들어지는 순간 그 당사자는 최소한 피곤한 수절을 하든지 최악의 경우 죽어야 한다. 혜택? 그건 고스란히 엉뚱한 집안 식구들에게 남겨진다. (p. 73)

<2관 열녀 이데올리기> 에서 다루는 고전은 <열녀함양박씨전> 이다.

'관직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라는 생각을 깊이 해보지 못했었다. 나랏일 하는 관직의 숫자는 생각보다 적어서 서자 얼자 의 자리까지는 없었는데, 양반댁 과부가 재혼해서 정식?!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서자 얼자도 아니기에 관직쟁탈의 경쟁율을 높이는 존재가 되었다. 자리가 적은 만큼 대상자를 줄여야 했다. 관직의 혜택은 소수에게만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밀려난 양반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에는 특별한 명분이 필요했다. 효자가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며느리가 죽어야 나라가 집안을 알아주었다.

효자 효녀 열녀 의 문화는 도덕과 예절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열여덟 살 몸종이 있다. 늘 그렇듯이 찬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주인 어른 드실 차를 소반에 받쳐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날은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찻잔을 내려놓는 그녀의 거동을 샅샅이 훑어보던 주인어른이 갑자기 뒤에서 덮치는 것이 아닌가. 반항해도 소용없다. 하늘이 핑 돌고 난리가 아니다. 곧 모든 것이 무너지고 끝난다. 겁에 질린 울음이 터진 것도 겨우 그때였다. 며칠 후 그녀는 주인어른의 첩이 되어 외진 곳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들어앉는다. 어제까지 같이 걸레질을 하던 친구들이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기는 하지만 눈초리가 요상하다. 입이 열이 있어도 말할 수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인어른을 기다린다. 하지만 처음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홀로 지낸다. 이 어린 여자의 이름은 춘섬이다. 귀에 설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 끔찍한 날 이후 배가 불러 태어난 그녀 아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홍길동. 바로 그녀가 낳은 아들이다. (p. 91~92)

홍길동전을 동화로 읽어서 그런지 원전이 이렇게 폭력적이고 질펀한지 몰랐다. 무엇보다 홍길동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받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첩' 이라고만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단순히 첩 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이 '처첩' 문제는 굉장히 다양한 양상을 띤다. 왜냐하면 양반남자가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가 워낙 다양했기 때문이랄까. 그렇게 목숨줄을 거머쥔 한 남자에 의해 '첩'은 언제든 사악해질 수 있었다.

<3관 처첩의 세계> 에서 다루는 고전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춘향전> 고전을 몰라도 아마 이 세작품은 다 알것 같은, 이 유명한 세 작품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처첩'의 갈등은 단순히 여성들의 질투가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게임이었고 복수혈전이었다. 그리고 적서폐지를 그렇게 강하게 요구하던 홍길동은 율도국에서 '첩'을 만들어 가졌다. '길동 이놈도 역시 남자였던 것이다.'(p. 102)

19세기에 창작된 한 소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남자들은 이젠 기녀들에게 절개가 아니라 순결을 요구한다. 그녀들의 처녀성을 요구한다. 기녀와 처녀성.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또 그것을 이야기의 중요한 핵심으로 사용한다. 남자들의 꿈과 환상은 이제 로망을 넘어 '노망'수준으로 치닫는다. <옥루몽>이 그렇다. (p. 12)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조차 기녀들에게 성적 순결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와 은밀하고 은폐된 폭력의 문제를 제대로 분석해내지 못했다. 눈앞에 버젓이 적혀 있지만 그렇게 보지 못했던 것, 아니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말했듯이 그런 프로노그래피적 상황을 연출한 자들이 모두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p. 139)

<4관 가부장의 이중생활> 에서 다루는 고전 <구운몽, 옥루몽> 중 <옥루몽>은 잘 모르는 고전이었지만, 저자가 인용하는 고전마다 얼개를 다 설명해주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구운몽> <옥루몽> 다 '몽'자가 들어가는 걸로 보아 꿈이야기인데 이 꿈이 그야말로 남성들의 로망실현 그 자체다. 그리고 이 판타스틱한 꿈을 성취하는 주인공에 집중하다보면 '설마 주인공이 그랬겠어' 하며 주인공을 두둔하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의 로망을 자신의 것인양 꿈꾸며 주인공을 닮아간다.

조선시대 양명학을 이단으로 몰아 발도 못 붙이게 한 이유는 성리학의 사상적 체계가 매우 수준 높기에도 그랬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제 마음보다 세상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번드르르하게 늘어놓기 잘하는 훈련된 전문 빅마우스들이 듣기에, 왕수인의 '마음을 바르게 써야지' 라는 훈계가 날카로웠기 때문인 것 같다. 밖에서는 성인군자지만 안에서는 추잡한 음란마귀로 변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찔끔했기 때문인 것 같다. (p. 141)

시대의 사상 성리학이 양명학을 이긴 배경에는 이런 남성적 욕망이 숨어져 있었다. 스스로의 인격을 성찰하며 아는 만큼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양명학 보다 세상의 이치 자체를 연구하면 인격수양도 절로 된다는 성리학이 지배층 남성들에게 훨씬 편했던 것이다. 공부만 하면 성인군자가 된다고 믿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공부와 현실이 다를때 이성과 실천이 연결되지 않을때 얼마나 삶이 비참해지는지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인간 본연의 욕망이란 것이 누른다고 없어지고 눈감아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답답하게 갑갑하게 억압할수록 더 심해지는 것이 욕망이다.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에너지가 점점 터질 듯이 커지다가 어디 한 곳 토해낼 출구를 찾으면 정신없이 쏟아져 나온다. 양반 여자들에게 그 출구는 소설이었다. (p. 146)

<5관 욕망의 세계> 에서는 <옥루몽> 과 <홍계월전> 을 다룬다.

김탁환 작가의 <대소설의 시대> 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한글 사용이 보편화 되고 아녀자들도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원활해졌을 때 한글소설의 인기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렇게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쓰고 읽는 소설속 내용은 기존의 작품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했던 <옥루몽> 과 비교하는 <방한림전> 과 <홍계월전> 은 여성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말도 안되는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에 황부인이 몸부림을 친다. 사람들은 그것을 투기라고 매도했다. (p. 160)

그녀는 어릴 적부터 보고 듣고 알았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투기 갈등은 단순한 쟁총이 아니라 여자의 자기 위치 찾기로서의 정당한 갈등이었던 것이다. (p. 165)

<홍계월전>에서는 '처첩' 갈등을 다른 측면에서 재조명한다. 정실부인인 '황부인'의 몰락에 집중한다. 왜 황부인은 존중받지 못했는가?

저자가 설명하는 '르네 지라르 의 '욕망의 삼각형''이라는 이론에 무척 공감이 갔다. 욕망하는 주체가 목표대상을 곧장 추구하면 되는데 인간은 그러지 않고 목표대상보다 수준이 낮은 중간대상을 설정해서 그 중간대상 즉 매개자를 모방하려고 든다는 것이다. 감히 엄두도 못낼 목표 보다는, 이정도면 해볼법한 중간대상을 모방함으써 목표를 추구하다보니 주체는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거참... 인간의 심리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6관 - 무능열전 : 흥부전, 심청전, 변강쇠가> 였다.

할수 있는 거라곤 새끼 내지르는 일뿐이었던 흥부와 잘 하는 거라곤 섹스뿐인 기둥서방 변강쇠 둘 다 그저 못난 놈팡이일뿐, 무능하고 무기력한 핑계쟁이에 불과하다는 직설적인 저자의 풀이를 읽다보면 저절로 ㅋㅋㅋ 웃음이 났다. 그에 반해 심청전의 심봉사는 의외로 의지적 인간이었고 그랬기에 똑부러진 딸 심청이를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심봉사의 의지는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 배경에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폭력이 깔려 있었다.

심봉사는 장애가 있어서 무능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무기력하게 대한 것이다.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일을 할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회는 그가 할수 있는 일을 줄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앉아 '효성 지극한 딸의 봉양이나 받으시라'고 하는 것이 최대의 배려였다. 아무도 그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를 인간답게 대접한 사람은 오직 한명, 그의 딸 심청뿐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심봉사는 장애인이 아니라 한명의 사람, 아버지였다.

장애인을 무기력하게 보는 시선보다 더 혹독한 것은 따로 있다. 장애을 '웃음거리'로 보는 것, 그것을 넘어 '죄'로 '악'으로 보는 눈길이 장애인을 두번, 세번 죽인다. (p. 205)

심봉사도 무능하다고만 생각했다. 자신의 욕심에 딸을 팔아넘긴 대책없는 아비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자의 해석을 읽고 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예로 든 <피터팬> 의 후크선장도 <보물섬>의 존실버도 다른 동화속 마녀들도 다리를 절든 등이 굽든 결과적으로 장애인이었고 그 모습은 희화화 되어있었고 혐오화 되어 있었다. 심지어 '악인' 을 장애인의 모습을 한 인물이 대표함으로써 악을 대리화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장애인을 평범하게 볼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자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아비인 흥부의 모습을 보고자란 흥부네 아이들도 분명 사회에 제 몫을 다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심청이가 그렇게 야무지게 자란 것은 다 심봉사 덕분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자란다. 그건 맞는 말이다.

<손순매아> <헨젤과 그레텔> <장화홍련전> 을 예로들어 '은폐된 패륜'을 이야기 하는 '7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장화홍련전> 이었다.

먹고살것이 부족한데 할머니 반찬에 손을 대는 자식을 묻어버리러 산에 올라갔던 부모가 효심을 칭찬받는 이야기는 <손순매아>는 제목은 낯설어도 익히 아는 내용이다. <헨젤과 그레텔> 도 <손순매아> 도 친부모가 기근을 못이겨 자식을 버리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차라리 자식을 버리는 게 낫지 더한 짓을 한 부모가 <장화홍련전> 속 아버지인줄 미처 몰랐다.

대체 계모는 왜 이들을 죽인단 말인가? 아무 이득도 없는데. 말했듯이 전처소생 중에 아들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납득이 된다. 하지만 배좌수 집에는 그냥 시집가버리면 그만인 장화와 홍련 말고는 전처소생이 없다. 아들이 없단 말이다. 그런데도 계모는 장화와 홍련을 죽이려고 술수를 부린다. (p. 240)

도대체 배좌수는 다 큰 딸들을 왜 품에 품고 있었을까?왜 놓아주질 않았을까?배좌수는 끔찍한 비극에 대해 손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 모든 죄를 악독하고 사악한 계모와 그의 아들에게도 미뤄버리고 그는 다시 재기한다. 그는 새장가를 가서 다시 자식을 낳는다. 그렇게 고을을,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끝난다. (p. 251)

<장화홍련전> 하면 계모에게 시달리다 억울하게 죽은 자매의 이야기로만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계모는 자매를 죽일 이유가 딱히 없었다. 말그대로 시집보내면 끝이다. 하지만 자매의 친아버지가 장성한 두 딸을 시집보내지 않고 애지중지 한다. 그러다 계모가 꾸민 장화의 임신 누명에 사건당일 장화에게 자초지종을 묻지도 듣지도 않고 바로 계모의 계획을 승인한다. 언니가 죽자 홍련은 따라서 자살을 한다. 마을사또앞에 자매가 나타났을 때에도 장화는 침묵을 지킨다. 홍련만이 구구절절 하소연할 뿐이다. 왜였을까? 자신을 지켜줄 언니가 없어지자마자 홍련을 죽기를 결심했다. 홍련이 두려워했던 존재는 장화가 침묵해야 했던 존재는 계모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해와달이 된 오누이> <여우누이> 를 통해 <자식사랑 패러독스> 를 말하는 <8관> 을 읽다보면 지금의 현실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딸래미가 여우라는 걸 알았으면 간을 내어줄 것이 아니라 사냥하는 법을 알려줬어야 했다. 몰랐다면 편애의 색안경을 벗지 못했던 부모의 책임감을 통렬하게 깨우쳐야 한다.

마지막 <9관 가족의 재탄생 : 최고운전> 의 <최고운전> 은 처음 보는 고전이었다. <야래자설화> 와 <아기장수 설화> , <지하대적퇴치설화> 를 비틀어내고 꿰뚫어낸 <최고운전>은 신라시대 실존 인물인 최치원의 인생을 멋지게 형상화한 소설이라고 한다.

밤에 귀한 존재가 방문하고 간뒤 낳은 아들이 영웅이 된다는 <야래자설화> 와 별볼일 없는 평민집에 어느날 날개달린 아기장수가 탄생하자 두려움에 죽일 수밖에 없었던 <아기장수 설화> 그리고 귀한집에서 여자와 보물을 훔쳐가는 도둑을 귀인이 섬멸하는 <지하대적퇴치설화> 는 모두 <최고운전> 에 슬쩍슬쩍 섞여있는데 기존 설화의 결말들과는 전혀 다른 전개를 만들어냄으로써 최치원의 삶을 더 극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능력은 있으나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시대,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것이 발목을 잡는 상황, 나를 위한 욕심이 아니라 남을 위한 희망이 외면당하는 갑갑한 현실, 이는 꼭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만이 아니라 <최고운전>의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역시 반복되고 있다. (p. 307)

조선시대 소설가가 신라시대 인물로 당대를 풍자하는 것이나 조선시대 인물로 지금을 빗댈 수 있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역사는 늘 외양만 바꿀 뿐 비슷한 리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본성 또한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다. 역사도 사람도 너무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이런 생각때문에 고전을 읽는다. '고전'은 늘 지금의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더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듯 하다. 재밌으면서도 의미까지 있는 좋은 책이었다. 강추~!^^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라는 놀라운 명제를 천명했지만 그 말의 어려움만큼이나 실천은 더 어려운 듯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진정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던져지듯 있다는 무의미에서 허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오히려 그렇게 이유없이 던져진 듯하기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혜안이다. 본래부터 결정되고 정해진 것이 없기에, 오히려 본질적으로 구속하는 것이 없는 진정한 자유 상태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짐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어떠한 인간이다(본질)' 라는 것보다 '스스로 선택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실존)' 것이 더 먼저 있다는 거다. (p. 314)

 

 

 

-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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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역사 - 말과 글에 관한 궁금증을 풀다
데이비드 크리스털 지음, 서순승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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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에 관한 궁금증을 풀다

A Little BOOK of LANGUAGE

 

 

'소소의 책' 에서 출판된 이 교양 시리즈를 개인적으로 참 좋아한다. '철학의 역사' 도 좋았고 '고고학의 역사'도 좋았다. '세계종교의 역사'도 차례를 기다리며 지금 책장에서 대기중이다. 최신간인 이 '언어의 역사' 또한 앞서 나온 책들처럼 광범위한 분야를 아우르면서도 쉽게 읽혔고 시리즈의 통일된 표지가 역시나 예뼜다.

언어의 역사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일단 언어를 처음 시작하는 단계의 사람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 일단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기 위해 저자는 '베이비 토크' 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아기가 직접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부모는 아기에게 말을 건다. '토크'가 시작되는 셈이다.

아기는 모국어의 어떤 부분을 제일 먼저 배울까? 그것은 다름 아닌 리듬과 억양이다. 생후 9개월 된 영국·프랑스·중국 아기가 내는 소리를 각각 녹음하여 뒤섞은 다음 사람들에게 아기의 출생지를 구별하게 하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p. 26)

아기는 처음엔 울음소리만 낼 뿐이다. 그러다 한달한달 커갈수록 빠른 속도로 언어를 습득한다. 그리고 미처 단어를 내뱉기 전의 아직은 옹알이에 가까운 소리만으로도 우리는 아기의 모국어를 눈치챌 수 있다. 리듬과 억양!

아기가 언어를 배워나가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언어의 습득과정을 설명한다.

이해방법학습, 음파에 적응해 가면서 발음을 할 수 있게 되고 문법을 익힘으로써 대화하는 수준에 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나면 읽고 쓸수 있게 되고 그러려면 철자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철자에는 역사를 거친 변형이 있고 문법 규칙 또한 그렇기에 배우는 것이 만만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거기다 악센트와 방언 까지 있고 언제 부턴가 이중언어는 필수가 되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몇 개의 언어가 존재할까? 약6,000개다. 어쩌면 그보다 조금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언어가 빠른 속도로-몇 주마다 거의 한 개꼴로-사멸해가는 것도 그 한 가지 이유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언어가 발견되기도 한다. (p. 149)

언어는 아주 서서히 변한다. 하지만 일단 변화가 시작되면 필연적으로 하나의 언어 가족, 즉 어족을 형성한다. (p. 153)

6,000여 개에 달하는 전 세계의 언어는 모두 이런 식으로 특정한 어족에 편입된다. 문제는 많은 지역의 경우 우리가 의지할 역사적인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p. 154)

오늘날 인구어(印歐語) 혹은 인도유럽어라 불리는 언어가 바로 윌리엄 존스가 추정한 조상 언어다. 인도유럽어를 사용한 사람들의 정확한 거주지는 현재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들이 이동을 시작한 시기 또한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동쪽으로는 인도, 그리고 서쪽으로는 유럽까지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언어 또한 극적인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p. 157)

사람이 태어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원리를 상세히 설명한 다음 저자는 언어의 역사를 시작한다. 역사는 지금 세계의 현재 언어에서 출발한다. 지금 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사용하는 어족은 아마도 인도유럽어족 일 텐데 책속에 나오는 분포지도는 눈여겨볼 만 하다.

 

조상언어의 분포도를 보면서 언어라는 문자와 말 중에서 먼저 시작되었을 '말'의 기원을 추적한다. 인도유럽어족 분포도를 보면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쉬웠는데 그 이유가 바로 나왔다.

전 세계 언어 중 고립어는 수백 개나 된다. 여기에 서로 관계가 불명료한 언어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난다. 예를 들어 일본어와 한국어는 서로 관계가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유사성이 많지만, 차이점 또한 너무 많아 학자들 사이에서 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어족을 살펴보면 실제로 유사성보다 차이점이 훨씬 더 크다. (p. 164)

책에서 지속적으로 저자가 동양언어에 대해서는 일본어 언급을 주로 하고 있는것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어족을 따질 수 없는 고립어 중에서 한글만큼 과학성을 띤 체계적인 언어는 없을텐데 언어학자인 저자가 한국어를 모르고 일본어와 중국어의 특징정도만을 파악한 상태에서 잠깐의 비교대상으로만 한국어를 딱 한번 서술했다는 점이... 아쉽다.

여하튼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발성기관의 발달과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지능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문자가 생겨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기원전 8,000년 경이 인류가 언어능력을 갖추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시기라고 한다. 따라서 10만년 이라는 인류진화의 역사를 생각하면 언어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류 발전사에서 최초의 진정한 글쓰기 체게는 설형문자다. 이집트인도 또 다른 글쓰기 체계를 갖고 있었지만 그 출발 시점이 늦었다. 그리고 다른 지역, 이를테면 중국이나 중앙아메리카의 마야인 사이에서 발전된 문자 혹은 글쓰기 체계는 시기상 이보다 훨씬 뒤진다. 초기 중국 문자는 기원전 1200년경에, 그리고 마야문자는 기원전 5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글쓰기 체계는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전 세계의 다양한 지역을 무대로 여러 시대에 걸쳐 각긱 고유한 문자를 개발해왔다. (p. 177)

말은 다양한 지역에 퍼지면서도 서로의 연관성이 있어 어족을 형성할 수 있었던데 비해 말 이후 발달한 글은 정착한 그 곳에서 고유성을 띠며 발전했다. 언어라는 한단어로 부르고 있긴 하지만 말의 역사와 글의 역사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표기법을 보면 글이 아닌 다른 표기법(예를 들어 그림이라던가 기호...)은 만국공통으로 의미가 통하기도 한다. 언어에는 이런 비언어적 언어도 포함되어 있다.

말과 글은 언어가 표현되는 두 가지의 대표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수화)

수화 통역사들이 사용하는 수화의 유형도 나라마다 제각각이다. 영국 통역사는 영어 수화를, 프랑스 통역사는 프랑스어 수화를, 그리고 중국 통역사는 중국어 수화를 한다. 세계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수화가 수 세기 동안 진화해왔다. 아니, 어쩌면 역사가 더 깊은지도 모른다. (p. 193)

수화도 나라마다 달랐구나~! 신기하다. 손으로 하는 기호에 가까운 언어인 수화도 나라마다 다르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저자가 강조하듯이 '수화는 결코 단순한 원시적 몸짓이 아니라 구어와 문어 못지않게 복잡하고 유용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언어다'(p. 199) 라는 것이다.

전 세계 6,000여 개의 언어는 모두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든 언어에는 문장이 있다. 모든 언어에 명사와 동사가 있다. 모든 언어에 모음과 자음이 있다. 모든 언어에 리듬과 억양이 있다. 하지만 외국어를 배울 때는 여러 어려움에 부딪힌다. 다른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언어를 말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p. 203)

사람들은 누구나 대화를 하지만 그 방식이 결코 똑같지 않다. (p. 211)

언어의 비교를 통해 보면 언어를 학문적으로 분석하면 공통점을 다수 발견할 수 있지만 각각의 언어를 직접 사용할 때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말, 글, 수화는 한 언어가 살아 숨 쉬는 세 가지 방식이며, 동시에 그 언어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세 가지 수단이다. 건강한 언어라면 이 과정이 쉼 없이 진행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의 언어를 물려주고, 그 자식이 다시 그 언어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언어는 계속 생명을 이어간다. (p. 213)

언어에는 생명력이 있다. 따라서 살아있는 언어가 있는 반면 죽어가는 언어도 있다. 이렇게 '사용자 수가 극히 적어 곧 사멸할 가능성이 높은 언어를 위기언어 라고 한다. 위기언어 중 대다수는 주로 적도 근처에 위치한 나라를 중심으로 분포해 있다. 동남아시아지역-이를테면 파푸나유니기와 같은 나라-에 수백 개의 언어가 존재한다. 인도와 아프리카에도 수백 개의 언어가 존재하고, 남아메리카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언어가 존재한다. 이들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위기언어가 빠른 속도로 사멸해가고 있다'(p. 214) 고 한다. 이 곳의 언어들은 왜 사라지는 것일까? '대부분의 새로운 언어가 좀 더 나은 삶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p. 217)

새로운 언어는 사회에서 최고의 직업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옛 언어는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자의식을 유지시켜준다. 다시말해 당신의 정체성을 지켜준다. 두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당신은 두 세계를 넘나들며 최선의 것을 취할 수 있다. (p. 217)

소수민족의 언어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저자는 본인의 정체성을 지켜줄 모어와 현실생활에 필요한 외국어를 함께 익히기를 권유한다. 그렇게 언어를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

사라져 가는 언어가 있다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언어는 변한다. 언어의 변천과 변이를 살펴보면서 그 구체적인 증거처럼 직업어, 속어를 살펴본다. 사전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살펴보다보면 어원, 지명, 인명 을 통해 언어역사의 모습도 잠깐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언어적 특징은 무엇일까? 전자혁명, 문자메세지, 놀이 언어를 통해 현실언어들을 살펴 본후 이렇게 변화무쌍한 언어가 왜 필요한지 궁극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 모든 것은 왜 필요한 걸까? 인간은 굳이 왜 말하고 쓰고 수화하는 법을 배워야 했을까? 언어를 사용하는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언뜻 생각하면 아주 간단한 질문이다.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함이 아닌가. 지금까지 이 책에서 논의한 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p. 342)

언어의 1차적인 목적은 의사소통인것이 분명하나 언어의 필요성은 다른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음을 저자는 설명한다. 동물에게 말을 걸거나, 악센트나 방언처럼 정체성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표현하거나 사교를 위한 관계유지 뿐만 아니라 종교적 제의에도 필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을 하기도 한다. 의사소통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도 언어의 활용성은 무궁무진 하다. 특히나 언어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정치성을 띨수도 있고 문학성을 띨수도 있으며 개성적인 스타일을 가진 언어를 만들 수 있기도 하는등 언어는 복잡하기에 언어학 이라는 학문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다른 의사소통 수단과 감히 비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언어가 특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언어에 관한 택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학에서 언어를 연구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 403)

언어학의 목적은 가능한 한 많은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학은 수많은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p. 407)

나는 언어학이라고 들었을 때 어원학으로 잘못 이해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언어의 역사는 언어학의 역사는 언어의 구성원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문이었다. 따라서 꼭 역사가 아니어도 다양한 분야에 응용가능함을 알려주면서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언어세계에서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지를 조언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진정으로 언어에 관심 있다면 어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까? 나의 관심사는 대략 여섯 가지로 요약된다.

나는 여러분이 현재 전 세계에서 수많은 언어가 사멸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 점에 늘 관심을 갖기 바란다. 정치가들이 언어 다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만들 수 있는 주체는 다름 아닌 여러분이다.

나는 여러분이 비록 아직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지 않더라도 소수 언어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바란다. 주위에서 생경한 언어가 들려오면 일단 귀를 기울이고,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다시 들어보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나는 여러분이 가능한 한 많은 언어를 배워보겠다는 의지를 갖기 바란다. 따지고 보면 내가 집필한 언어 관련 도서도 모두 그런 도전 의식의 산물이다.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언어에 존재하는 다양성에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높이 평가하려고 노력하며, 현재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보라.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언어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타일에 관심을 갖기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언어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모국어를 배우거나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를 바란다. (p. 422~427)

언어는 삶과 뗄 수 없는 수단이자 방식이다. '언어의 역사'를 읽는 동안 언어의 자체의 기원 보다 언어와 사람과의 관계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점이 신선했다. 저자가 마지막 문단에 써놓은 '이것은 언어에 대한 '작은 책'이다. 하지만 언어는 큰 주제다'(p. 428) 라는 문장에 공감한다. 언어라는 주제가 너무 방대해서 내가 생각했던 언어의 역사는 너무 작은 범주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원제는 'A Little BOOK of LANGUAGE' 였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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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가 쉬워지는 제주여행 교과서 여행 시리즈
정은주 지음, 김도형 사진 / 길벗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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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꼭 가봐야 할 초등학교 과목별 여행지120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자연, 과학, 사회, 역사, 예술과 예체능 여행지가 한 권에

 

 

제주도는 늘 좋다.^^

4번인가 갔었는데 갈 때마다 새롭고 갔다와도 또 가고 싶어지는 곳이었다.

이 책은 유아나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에게 특히 유용한 책이긴 하지만, 어린 자녀가 없어도 제주도를 알고 보고 느끼게 해주는 책이라 나는 마냥 좋았다. 이렇게라도 제주도를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ㅎㅎ

이 책의 글을 쓴 이와 사진을 찍은 이는 부부다. 여행하는데 의견이 맞고 여행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부러울 때가 참 많다. 늘 떠나기만 하는 여행같지만 머무르는 여행도 있다. 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아마도 어린자녀를 두게 된 이후로 이 부부에게 여행의 관심분야도 달라진 듯 하다. 여행도 아이와 함께 아이를 위한 여행은 어른들만의 여행과 결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결의 여행도 참 좋아한다.

이 책의 유용성은 첫 장부터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일러두기> 에서 이 책의 구성을 알려준다. 페이지의 구성은 학습포인트, 여행지 기본정보, 사전조사를 해봐요, 엄마아빠랑 배워요, 구석구석 둘러보기, 체험과 이양기 즐기기, 여기도 가보자, TIP 등으로 다채로우면서 꼼꼼한 정리가 돋보인다.

목차를 보면서 또한번 감탄하게 된다.

제주시, 서귀포시, 제주동부, 제주서부, 제주의 섬 으로 지역별 목차가 그러려니 싶었는데, 목차뒤에 또다른 목차가 바로 이어진다.

바로 영역별 목차인데, 자연과학, 문화예술, 체험탐구, 사회역사 로 정리되는 목차를 보며 좋은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목차만 훝어봐도 일정에 따라 지역별로 묶어서 여행코스를 짤 수도 있고 목적에 따라 분야별로 묶어서 여행코스를 짤 수도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목차만 이렇게 상세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책의 뒤편에 색인도 있어서 원하는 장소를 찾아볼 수도 있고 기타 필요한 정보들도 있어서 활용성이 높아 보였다. 그야말로 제주도 종합백과사전 같달까.^^

컬러풀의 사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방구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요즘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고, 그 많은 곳들을 한줄한줄 정성들여 알려주는 글들이 때로는 기행문처럼 때로는 이야기처럼 읽혀지면서 각종 여행팁들까지 얻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정도가 아니라 일석다조 였다.

제주도의 구석구석을 책으로 보면서 들뜨는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역시나 놀러가고 싶은 마음은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시기가 적절해지는 데로 어서 제주도에 가고 싶다. 그리고 갈때는 이 책을 지도삼아 어디를 갈까 즐겁게 고민해보리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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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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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기 마련이다. 그 주류라는 것은 양적일수도 있고 질적일수도 있다. 또한 시간적일수도 있고 공간적일수도 있다. 여하튼 그러한 주류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비주류에는 항상 그것을 표현하는 수식어가 붙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화가들과 작가들이 남성일때 드물게 등장하는 여성화가들 작가들앞에는 꼭 '여성'화가 라거나 '여성'작가 라는 수식어가 붙었었다.

요즘은 아마도 '퀴어'라는 수식어가 그런 비주류의 상징어가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 제일 먼저 본것 같긴한데 나는 영상보다는 책을 주로 읽다보니 근래에 읽은 문화비평서나 문학에서 그 단어를 접함으로써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퀴어소설'이라는 표현이 거부감없이 읽히는 시대가 된건가 혹은 '퀴어소설'이라는 표현이 그냥 소설이라고만 표현되는 시대가 올건가 하는 그런 생각들... 그렇게 '퀴어소설' 이라는 분야가 아직은 신선한 내게 '퀴어소설' 인듯한데 아닌것도 같은 소설을 읽게 되었다. 바로 이 책이었다.

이 책에 엮인 소설들을 쓸 때 내가 가장 고민한 점은 문장도, 소재도, 플롯도 아니었다. 번번이 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직전까지 주인공의 성별을 고심했다. 그것은 내가 인위적으로 변경할 수 없는 흐름, 작품의 톤과 방향성을 결정짓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대체로 내가 그리는 남성 인물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그것을 회복하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했다. 한동안 나는 그것을 마땅하다 여겼는데, 그것은 내가 지닌 남성성에 대한 분노와 체념에서 비롯했다. 이와 다르게 여성 인물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음에도 그것을 회복하려는 조짐을 품은 채 결말에 이르렀다. 한동안 나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노력했는데, 그것은 내가 지닌 여성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긍정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돌이켜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나' 의 성별을 고민하지 않는다. (p. 248 작가의 말 中)

박선우 라는 낯선 이름의 작가가 쓴 단편8편을 실은 이 작품집은 '작가의 말'을 십분이해할만한 감성을 공감하게 해주었다. 따지고보면 성별을 왜 굳이 흑백

그논리로 구분해야 하는가? 모두 인간이고 누구에게나 강한면과 약한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 성격적 특징들을 굳이 남성적이다 여성적이다 할 거 뭐 있겠는가... 화자가 남성이었다가 여성이었다가 하는 8편의 소설을 읽고나면 남성이건 여성이건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어떤 감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저 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일 뿐이었다...

왜 어떤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남은 생을 고스란히 들여도 소거할 수 없는 얼룩을 남기고 떠나버리는 것일까. 어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p. 11)

그 시절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보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나였고,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나는 굳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은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p. 32)

그 지경이 되도록 취한 적은 난생처음이었고 다시는 없을 것 같다. 이제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뿐이었다. 내 남은 생에 더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리란 것 말이다. (p. 37)

밤의 물고기들 中

낯선 남자가 '누나와 나' 가 사는 아파트에 하룻밤 묵고 간다. '나'는 그의 방문이 어색하고 이상하다. 2미터 가까운 키에 근육질의 그 남자는 사랑하던 남자와 헤어진 후 슬픔을 못이겨 방황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와 '나'는 밤새 술을 마시게 된다. 술이 센편이었는데 만취한 '나'는 이 짧은 하룻밤의 기억으로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눈에는 점점 확대되어 보이는 지워지지않는 커다란 얼룩이 묻은 불량품 같은 자신을 처음 깨닫게 된다.

그런가. 그러더니 억양이 없는 어조로 되물었어. 거기서 여기까지 그렇게나 먼가.

멀지.

먼가. (p. 45)

언제가 취중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여러 번 게워내 아주 잊어버리려는 사람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p. 47)

지금 내가 여기에 길을 그리려고 한다 쳐. 이렇게, 길은 위로 뻗어나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끝내 소실점에 이르러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면 감상자는 이곳과 저곳이 꽤 멀리 떨어져 있구나, 저기가 끝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기 마련이잖아. 캔버스라는 평면에 깊이가 있는 게 아닌데도 마치 가상의 거리감을 실제인 양 의식하지.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릴 때나 감상할 때 한순간도 잊어선 안 된다고 봐.영지는 고개를 돌려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캔버스 위로 왼손을 펼쳐 보였다. 고작 이거라고. 기껏해야 여기서 저기까지는 한 뼘도 채 되지 않는다고 말이야. (p. 50)

이런식으로 상대를 등한시해야만-상대가 온 힘을 다해 쏟아내는 이야기를 온 힘을 다해 외면해야만-유지 가능한 관계가 과연 어떤 결말에 이를지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사실 그건 상상해볼 것도 없었다. (p. 56)

무릇 관계란 오래될수록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르고 허술해지기 마련이다. 영지는 어쩌면 우리도 이런 식으로 느슨해지다가 한순간에 툭 끊어져버리고 말겠지, 별것 아닌 일을 계기로 영영 볼 수 없게 되겠지,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일을 계기로 말이다. 그건 무서워, 이쪽으로 와줘, 라고 부탁하는 상대에게 음, 시간이 애매한데, 멀기도 하고, 그게 그렇게 무섭나, 라고 퉁명스레 대꾸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일 같은 것. 이 세계에서 단 두 사람만이 감지하게 될 무한한 거리의 확장을 의미할 터였다. (p. 61)

우리는 같은 곳에서 中

가깝다고 알았던 거리가 새삼 멀게 느껴질때, 오래되어 굳건하다 믿었던 관계가 모래성보다 더 부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런 순간을 잊지 못하고 술마시면 얘기하고 또하고 또하면서 스스로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가 약을 발랐다가 하면서 결국 스스로가 잊고 있었던 것은 평면위의 그림을 보면서 3차원 공간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뇌의 착각 이라는 점이었다. 감정의 연대가 끊어졌을때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을 뿐 실오라기 하나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모른채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먼저 그 얇은 실오라기를 버린 사람의 마음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취중진담이 아니라 취중망담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마주보는 한 공간이 좋은 것일까... 서로 한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 좋은 것일까... 결국 같은 자리인 것일까...

바닥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유리 벽 곳곳으로 날아와 맺혔다. 수십 개의 물방울에는 아주 조그마한 너와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그 안에 함께 있었고, 빛이 머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채로 반짝거렸다. (p. 93)

우두커니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우산 끝에 맺힌 빗방울에 시선이 머물렀다. 물방울은 서서히 몸집을 부풀리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가장 크고 분명해졌을 때 미련 없이 그랬다.

그날 나는 손을 뻗어 낙하하는 빗방울을 쥐어보려고 했다. 추락의 궤적을 자꾸만 낚아채려고 했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움켜쥐었다. 쥔 채로 입술 가까이 가져왔을 때에야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p. 98)

빛과 물방울의 색 中

퀴어페스티발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한 '나'는 마치 출근하듯이 스타벅스 카페에 규칙적으로 가고 머물고 돌아온다. 수십년만에 퍼붓는다는 장마빗속에서 갑자기 떠났던 '그'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우산끝에 매달린 물방울 같았고 '나'는 그가 떠나고 나서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장마비는 그쳐있었다. 물방울은 늘 서서히 몸집을 부풀리다가 가장 크고 분명해졌을 때 미련없이 떨어진다. 그 물방울이 찰나에 보여줬던 반짝거리던 '우리'를 기억하는 것은 행복일 수 있을까 아닐까...

이렇게 엉망으로 뒤엉킨 속내를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단 한마디로.

두 마디는 구차할 것 같았다. 세마디를 할 바에는 장문의 편지를 쓰고 말지. 그러나 문장이 길어지면 나도 모르게 떳떳하지 못한 뉘앙스를 흘릴 듯 했고, 미안하다 사랑한다 같은 표현을 반어로든 은유로든 농도만 다르게 써 보낸 뒤 밤마다 이불을 걷어찰 것 같았다. 그런 상상만으로 몸서리가 일었다. (p. 106)

정확한 한마디로 너와 나 사이를 매듭짓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그저 헤매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 이것도 사는 건가. (p. 107)

이제야 알 것 같아.

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p. 114)

느리게 추는 춤 中

욕을 해도 시원치가 않고 미련을 떨어봤자 돌이킬 수 없고 잡혀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 떠난 사람에게 혼란의 감정을 담아 하고 싶었던 딱 한단어는 결국 너였다. 그냥 너였다. 무슨 의미가 되었건 어떻게 들리건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너였다. 그뿐이다.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 사랑의 순간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안 하던 걸 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 문제인 건 아닐까, 하는 추측에 이르렀다. 어쩌면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닐까. 그럼 이제라도 한번 해볼까. 뭐든 저질러볼까. (p. 125)

그 얼굴. 이제껏 외면해왔던 그 얼굴을, 눈빛을, 나는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너는 갔다.

나는 남겨졌고, 그걸 이제야 알았다. (p. 145)

그 가을의 열대야 中

그냥 사랑하다가 자연스럽게 헤어진건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묻지 못했고 '너'는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서로 모르는 척 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갑자기 몸에 두드러기 올라오는 가을인데도 더웠던 밤에서야 '나'는 그때의 '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남겨진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너'를 위해 해야만 했던 일을 하지 않았던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너를 만나게 된다 해도, 너와 네 아들 앞에 선다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할 수나 있을까 싶다. 어째서 나 같은 삶에는 단 하나의 예시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 같은 사람들은 대체 어떠한 생을 견디다가 이렇다 할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것일까. 나는 그들처럼 소거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더 이상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을 뿐이야. 이토록 너를 기리워하는 이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제든 돌아와도 좋을 자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너에게 전해주고 싶을 뿐이다. 차마 어떤 대답을 듣지 못해도 괜찮아. 이제 내게 남은 바람은 그것뿐이다. (p. 154)

순간 그녀는 이 모든 일을 연후가 이미 겪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생에 간절히 염원할 단 하나의 이미지.

그게 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p. 183)

고요한 열정 中

다른 사람들의 삶은 평범해보이고 보통같고 정상같아서 흔하디 흔한 '예시'가 있어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가진 특별함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감추어야 하고 그래서 견뎌야 하고 그래서 스스로 답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느껴질때 그런 생각 들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생김새가 다 다르듯이 누구에게도 예시는 없는 것 같다. 그저 차이가 있다면 내가 바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답을 찾느냐 못찾느냐 가 아닐까.

간절한 마음에, 여자친구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았던 소원. 은수가 더 이상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올겨울에는 부모님이 계신 거제도에 가자고, 거기 몽돌해수욕장에서 소원 풍등을 띄우자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p. 192)

소원한 사이 中

단 6페이지로 씌여진 단편인데, 제목과 내용의 아이러니로 인해 인상깊었던 작품이었다. 소원한 사이 라고 하면 대게 멀어진 사이 라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아니었다. 소원처럼 가까이 하고 싶은 사이였다. 하지만 소원처럼 이루어 질 수 없어보이는 사이였다. 소원은 그런 것이 아닐까. 바라지만 바라기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 이루어졌다면 이미 소원이 아닌 것. 바라기만 하기에 소원이 될 수 있는 것.

'사랑의 파탄' 수업 중에 그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사랑이 지닌 특성 중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자기파괴성이다. (p. 209)

어째서 부끄러운가.

아무도 이경을 나무라지 않았다. 누구도 이경에게 잘못이 있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경은 그 일을 기점으로 자신이 조금씩 변해간다고 느꼇고, 변했다기보다 원래의 소심한 자신으로 돌아왔고, 더는 인생의 선택에 있어 마음이 움찔거리는 쪽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안락만을 찾아 쥐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적당히 억누르거나 모르는 체할 수 있었기에, 그런 마음은 종내 사라져버렸다. 다시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마치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청춘의 빛처럼. (p. 214)

생각해보니 그때 우리 참 어렸다. 그때는 우리가 다 큰 줄만 알고, 남아 있는 선택지가 몇 개 없는 줄만 알고, 겁먹은 짐승들처럼 매일 불안하고 초조해했던 것 같아. 사실 지금도 비슷하지. 그렇지만 예전과 똑같지는 않은 것 같다. 얼마 전에 교정보던 원고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 하늘에는 달이 태양을 가리는 순간에만 볼 수 있는 별들이 있다고 말이야. 개기일식이 일어나면 중력장에 의해 빛이 휘면서 태양 직전에 가려져 있던 별들을 볼 수 있다고 했지. 지구에서 태어난 생명체인 이상 결코 볼 수 없었던 존재들인데, 몇십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천체 현상으로 인해 잠깐이나마 볼 수 있다는 게 좀 신기하더라. 어쩌면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어. (p. 216)

휘는 빛 中

그렇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던 사이, 떠날 사람이기에 기꺼이 되어줄 수 있었던 메아리 없는 대나무숲같던 '나'는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조금은 갑작스럽게 이메일을 보낸다. 읽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매일 수신확인 체크를 하던 중에 답장이 온다. 그렇게 답장을 받고서야 '나'는 평소에는 볼 수 없지만 늘 태양에 가려져 있지만 볼수 없어도 존재하는 별처럼 '그녀'가 존재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세상의 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휘는 빛도 곧장 직진하는 빛도 다 제나름의 밝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는 안도했을까? 이제야 일탈할 수 있게 됐을까?

8편의 인물들은 다 제각각인 것 같으면서도 마치 한가족인 것처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의 솔직함이 더 와닿았고 그래서 더 멀지 않게 느껴졌다.

읽으면서 '어둠의 왼손'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어슐러 르 귄 이라는 판타지 거장의 작품이지만 판타지소설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혁명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작품이었다. 박선우의 소설을 읽으며 '어둠의 왼손'이 떠올랐던 이유는 이 판타지 소설속에 등장하는 한 외계종족의 특성때문이었다. 이 외계종족은 무성이다. 동시에 양성이다. 평소에는 남성이나 여성의 특징을 지니지 않은 무성이다가 필요에 따라 혹은 때에 따라 여성이 될수도 있고 남성이 될 수도 있다. 여하튼 성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외계종족은 지구인의 신체적 특징을 들으며 깜짝 놀란다. 지구인은 그럼 일년내내 발정기냐며 어떻게 그렇게 미개할 수 있냐며 ㅍㅎㅎㅎ

'양성'에 대한 신선한 생각으로는 고대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플라톤의 <향연> 에서 '에로스' 에 대한 의견을 돌아가며 말하던 중 아리스토파네스는 인류가 처음에는 양성동체였다는 것으로 에로스의 기원을 설명한다. 간단히 말하면 남녀가가 한몸이었는데 떨어져서 서로를 찾게된다는 것이랄까. 그런데 양성동체도 결국은 '양성'이다. 무성과 다르다.

박선우의 소설들을 읽으며 나는 '무성'과 '양성'의 중간지대를 경험한 느낌이었다. '성'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구분지어야 하나 구분을 짓긴 지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개념적으로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논쟁적이 될 수밖에 없는데 문학으로 읽으니 비록 구체적으로 정리되진 않더라도 마음으로 정리되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새로웠고 마음아팠고 좋았다. 그리고 응원한다. 무엇이 되었건 모두 사랑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이해할 수 있기 마련이다. 내 어항의 크기는 얼마만한 것일까? ^^

 

이게 뭐예요?

코이 잉어예요, 그가 말했다.

잉어라고요?

모르셨구나. 그는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코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맞춰 성장하는 물고기인데요. 가정용 어항에 넣어두면 5센티미터 남짓 자라고, 큰 수족관에 옮겨 놓으면 행동반경이 넓어진 만큼 1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까지 자라나요. 강에 풀어주면 1미터가 훌쩍 넘게 커지거요. 그는 코 밑을 문지르다가 덧붙였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좁은 공간에 가둬놓으면 티끌만 한 크기로 평생을 살게 된답니다. (p.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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