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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평점 :
무엇이든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기 마련이다. 그 주류라는 것은 양적일수도 있고 질적일수도 있다. 또한 시간적일수도 있고 공간적일수도 있다. 여하튼 그러한 주류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비주류에는 항상 그것을 표현하는 수식어가 붙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화가들과 작가들이 남성일때 드물게 등장하는 여성화가들 작가들앞에는 꼭 '여성'화가 라거나 '여성'작가 라는 수식어가 붙었었다.
요즘은 아마도 '퀴어'라는 수식어가 그런 비주류의 상징어가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 제일 먼저 본것 같긴한데 나는 영상보다는 책을 주로 읽다보니 근래에 읽은 문화비평서나 문학에서 그 단어를 접함으로써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퀴어소설'이라는 표현이 거부감없이 읽히는 시대가 된건가 혹은 '퀴어소설'이라는 표현이 그냥 소설이라고만 표현되는 시대가 올건가 하는 그런 생각들... 그렇게 '퀴어소설' 이라는 분야가 아직은 신선한 내게 '퀴어소설' 인듯한데 아닌것도 같은 소설을 읽게 되었다. 바로 이 책이었다.
이 책에 엮인 소설들을 쓸 때 내가 가장 고민한 점은 문장도, 소재도, 플롯도 아니었다. 번번이 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직전까지 주인공의 성별을 고심했다. 그것은 내가 인위적으로 변경할 수 없는 흐름, 작품의 톤과 방향성을 결정짓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대체로 내가 그리는 남성 인물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그것을 회복하지 못한 채 결말을 맞이했다. 한동안 나는 그것을 마땅하다 여겼는데, 그것은 내가 지닌 남성성에 대한 분노와 체념에서 비롯했다. 이와 다르게 여성 인물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음에도 그것을 회복하려는 조짐을 품은 채 결말에 이르렀다. 한동안 나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노력했는데, 그것은 내가 지닌 여성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긍정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돌이켜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나' 의 성별을 고민하지 않는다. (p. 248 작가의 말 中)
박선우 라는 낯선 이름의 작가가 쓴 단편8편을 실은 이 작품집은 '작가의 말'을 십분이해할만한 감성을 공감하게 해주었다. 따지고보면 성별을 왜 굳이 흑백
그논리로 구분해야 하는가? 모두 인간이고 누구에게나 강한면과 약한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 성격적 특징들을 굳이 남성적이다 여성적이다 할 거 뭐 있겠는가... 화자가 남성이었다가 여성이었다가 하는 8편의 소설을 읽고나면 남성이건 여성이건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어떤 감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저 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일 뿐이었다...
왜 어떤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남은 생을 고스란히 들여도 소거할 수 없는 얼룩을 남기고 떠나버리는 것일까. 어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p. 11)
그 시절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어보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나였고,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나는 굳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은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p. 32)
그 지경이 되도록 취한 적은 난생처음이었고 다시는 없을 것 같다. 이제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뿐이었다. 내 남은 생에 더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리란 것 말이다. (p. 37)
낯선 남자가 '누나와 나' 가 사는 아파트에 하룻밤 묵고 간다. '나'는 그의 방문이 어색하고 이상하다. 2미터 가까운 키에 근육질의 그 남자는 사랑하던 남자와 헤어진 후 슬픔을 못이겨 방황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와 '나'는 밤새 술을 마시게 된다. 술이 센편이었는데 만취한 '나'는 이 짧은 하룻밤의 기억으로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눈에는 점점 확대되어 보이는 지워지지않는 커다란 얼룩이 묻은 불량품 같은 자신을 처음 깨닫게 된다.
그런가. 그러더니 억양이 없는 어조로 되물었어. 거기서 여기까지 그렇게나 먼가.
멀지.
먼가. (p. 45)
언제가 취중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여러 번 게워내 아주 잊어버리려는 사람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p. 47)
지금 내가 여기에 길을 그리려고 한다 쳐. 이렇게, 길은 위로 뻗어나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끝내 소실점에 이르러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면 감상자는 이곳과 저곳이 꽤 멀리 떨어져 있구나, 저기가 끝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기 마련이잖아. 캔버스라는 평면에 깊이가 있는 게 아닌데도 마치 가상의 거리감을 실제인 양 의식하지.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릴 때나 감상할 때 한순간도 잊어선 안 된다고 봐.영지는 고개를 돌려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캔버스 위로 왼손을 펼쳐 보였다. 고작 이거라고. 기껏해야 여기서 저기까지는 한 뼘도 채 되지 않는다고 말이야. (p. 50)
이런식으로 상대를 등한시해야만-상대가 온 힘을 다해 쏟아내는 이야기를 온 힘을 다해 외면해야만-유지 가능한 관계가 과연 어떤 결말에 이를지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사실 그건 상상해볼 것도 없었다. (p. 56)
무릇 관계란 오래될수록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르고 허술해지기 마련이다. 영지는 어쩌면 우리도 이런 식으로 느슨해지다가 한순간에 툭 끊어져버리고 말겠지, 별것 아닌 일을 계기로 영영 볼 수 없게 되겠지,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일을 계기로 말이다. 그건 무서워, 이쪽으로 와줘, 라고 부탁하는 상대에게 음, 시간이 애매한데, 멀기도 하고, 그게 그렇게 무섭나, 라고 퉁명스레 대꾸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일 같은 것. 이 세계에서 단 두 사람만이 감지하게 될 무한한 거리의 확장을 의미할 터였다. (p. 61)
가깝다고 알았던 거리가 새삼 멀게 느껴질때, 오래되어 굳건하다 믿었던 관계가 모래성보다 더 부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런 순간을 잊지 못하고 술마시면 얘기하고 또하고 또하면서 스스로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가 약을 발랐다가 하면서 결국 스스로가 잊고 있었던 것은 평면위의 그림을 보면서 3차원 공간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뇌의 착각 이라는 점이었다. 감정의 연대가 끊어졌을때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을 뿐 실오라기 하나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모른채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먼저 그 얇은 실오라기를 버린 사람의 마음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취중진담이 아니라 취중망담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마주보는 한 공간이 좋은 것일까... 서로 한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 좋은 것일까... 결국 같은 자리인 것일까...
바닥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들이 유리 벽 곳곳으로 날아와 맺혔다. 수십 개의 물방울에는 아주 조그마한 너와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그 안에 함께 있었고, 빛이 머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채로 반짝거렸다. (p. 93)
우두커니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우산 끝에 맺힌 빗방울에 시선이 머물렀다. 물방울은 서서히 몸집을 부풀리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가장 크고 분명해졌을 때 미련 없이 그랬다.
그날 나는 손을 뻗어 낙하하는 빗방울을 쥐어보려고 했다. 추락의 궤적을 자꾸만 낚아채려고 했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움켜쥐었다. 쥔 채로 입술 가까이 가져왔을 때에야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p. 98)
퀴어페스티발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한 '나'는 마치 출근하듯이 스타벅스 카페에 규칙적으로 가고 머물고 돌아온다. 수십년만에 퍼붓는다는 장마빗속에서 갑자기 떠났던 '그'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우산끝에 매달린 물방울 같았고 '나'는 그가 떠나고 나서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장마비는 그쳐있었다. 물방울은 늘 서서히 몸집을 부풀리다가 가장 크고 분명해졌을 때 미련없이 떨어진다. 그 물방울이 찰나에 보여줬던 반짝거리던 '우리'를 기억하는 것은 행복일 수 있을까 아닐까...
이렇게 엉망으로 뒤엉킨 속내를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단 한마디로.
두 마디는 구차할 것 같았다. 세마디를 할 바에는 장문의 편지를 쓰고 말지. 그러나 문장이 길어지면 나도 모르게 떳떳하지 못한 뉘앙스를 흘릴 듯 했고, 미안하다 사랑한다 같은 표현을 반어로든 은유로든 농도만 다르게 써 보낸 뒤 밤마다 이불을 걷어찰 것 같았다. 그런 상상만으로 몸서리가 일었다. (p. 106)
정확한 한마디로 너와 나 사이를 매듭짓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좀처럼 알 수가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그저 헤매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 이것도 사는 건가. (p. 107)
이제야 알 것 같아.
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p. 114)
욕을 해도 시원치가 않고 미련을 떨어봤자 돌이킬 수 없고 잡혀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 떠난 사람에게 혼란의 감정을 담아 하고 싶었던 딱 한단어는 결국 너였다. 그냥 너였다. 무슨 의미가 되었건 어떻게 들리건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너였다. 그뿐이다.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 사랑의 순간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안 하던 걸 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 문제인 건 아닐까, 하는 추측에 이르렀다. 어쩌면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닐까. 그럼 이제라도 한번 해볼까. 뭐든 저질러볼까. (p. 125)
그 얼굴. 이제껏 외면해왔던 그 얼굴을, 눈빛을, 나는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너는 갔다.
나는 남겨졌고, 그걸 이제야 알았다. (p. 145)
그냥 사랑하다가 자연스럽게 헤어진건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묻지 못했고 '너'는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서로 모르는 척 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갑자기 몸에 두드러기 올라오는 가을인데도 더웠던 밤에서야 '나'는 그때의 '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남겨진 '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너'를 위해 해야만 했던 일을 하지 않았던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너를 만나게 된다 해도, 너와 네 아들 앞에 선다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할 수나 있을까 싶다. 어째서 나 같은 삶에는 단 하나의 예시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나 같은 사람들은 대체 어떠한 생을 견디다가 이렇다 할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것일까. 나는 그들처럼 소거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더 이상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을 뿐이야. 이토록 너를 기리워하는 이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제든 돌아와도 좋을 자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너에게 전해주고 싶을 뿐이다. 차마 어떤 대답을 듣지 못해도 괜찮아. 이제 내게 남은 바람은 그것뿐이다. (p. 154)
순간 그녀는 이 모든 일을 연후가 이미 겪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생에 간절히 염원할 단 하나의 이미지.
그게 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p. 183)
고요한 열정 中
다른 사람들의 삶은 평범해보이고 보통같고 정상같아서 흔하디 흔한 '예시'가 있어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가진 특별함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감추어야 하고 그래서 견뎌야 하고 그래서 스스로 답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느껴질때 그런 생각 들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생김새가 다 다르듯이 누구에게도 예시는 없는 것 같다. 그저 차이가 있다면 내가 바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답을 찾느냐 못찾느냐 가 아닐까.
간절한 마음에, 여자친구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았던 소원. 은수가 더 이상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해주세요.
올겨울에는 부모님이 계신 거제도에 가자고, 거기 몽돌해수욕장에서 소원 풍등을 띄우자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p. 192)
단 6페이지로 씌여진 단편인데, 제목과 내용의 아이러니로 인해 인상깊었던 작품이었다. 소원한 사이 라고 하면 대게 멀어진 사이 라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아니었다. 소원처럼 가까이 하고 싶은 사이였다. 하지만 소원처럼 이루어 질 수 없어보이는 사이였다. 소원은 그런 것이 아닐까. 바라지만 바라기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 이루어졌다면 이미 소원이 아닌 것. 바라기만 하기에 소원이 될 수 있는 것.
'사랑의 파탄' 수업 중에 그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사랑이 지닌 특성 중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자기파괴성이다. (p. 209)
어째서 부끄러운가.
아무도 이경을 나무라지 않았다. 누구도 이경에게 잘못이 있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경은 그 일을 기점으로 자신이 조금씩 변해간다고 느꼇고, 변했다기보다 원래의 소심한 자신으로 돌아왔고, 더는 인생의 선택에 있어 마음이 움찔거리는 쪽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안락만을 찾아 쥐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적당히 억누르거나 모르는 체할 수 있었기에, 그런 마음은 종내 사라져버렸다. 다시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마치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청춘의 빛처럼. (p. 214)
생각해보니 그때 우리 참 어렸다. 그때는 우리가 다 큰 줄만 알고, 남아 있는 선택지가 몇 개 없는 줄만 알고, 겁먹은 짐승들처럼 매일 불안하고 초조해했던 것 같아. 사실 지금도 비슷하지. 그렇지만 예전과 똑같지는 않은 것 같다. 얼마 전에 교정보던 원고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 하늘에는 달이 태양을 가리는 순간에만 볼 수 있는 별들이 있다고 말이야. 개기일식이 일어나면 중력장에 의해 빛이 휘면서 태양 직전에 가려져 있던 별들을 볼 수 있다고 했지. 지구에서 태어난 생명체인 이상 결코 볼 수 없었던 존재들인데, 몇십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천체 현상으로 인해 잠깐이나마 볼 수 있다는 게 좀 신기하더라. 어쩌면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어. (p. 216)
그렇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던 사이, 떠날 사람이기에 기꺼이 되어줄 수 있었던 메아리 없는 대나무숲같던 '나'는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조금은 갑작스럽게 이메일을 보낸다. 읽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매일 수신확인 체크를 하던 중에 답장이 온다. 그렇게 답장을 받고서야 '나'는 평소에는 볼 수 없지만 늘 태양에 가려져 있지만 볼수 없어도 존재하는 별처럼 '그녀'가 존재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세상의 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휘는 빛도 곧장 직진하는 빛도 다 제나름의 밝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는 안도했을까? 이제야 일탈할 수 있게 됐을까?
8편의 인물들은 다 제각각인 것 같으면서도 마치 한가족인 것처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의 솔직함이 더 와닿았고 그래서 더 멀지 않게 느껴졌다.
읽으면서 '어둠의 왼손'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어슐러 르 귄 이라는 판타지 거장의 작품이지만 판타지소설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혁명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작품이었다. 박선우의 소설을 읽으며 '어둠의 왼손'이 떠올랐던 이유는 이 판타지 소설속에 등장하는 한 외계종족의 특성때문이었다. 이 외계종족은 무성이다. 동시에 양성이다. 평소에는 남성이나 여성의 특징을 지니지 않은 무성이다가 필요에 따라 혹은 때에 따라 여성이 될수도 있고 남성이 될 수도 있다. 여하튼 성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외계종족은 지구인의 신체적 특징을 들으며 깜짝 놀란다. 지구인은 그럼 일년내내 발정기냐며 어떻게 그렇게 미개할 수 있냐며 ㅍㅎㅎㅎ
'양성'에 대한 신선한 생각으로는 고대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플라톤의 <향연> 에서 '에로스' 에 대한 의견을 돌아가며 말하던 중 아리스토파네스는 인류가 처음에는 양성동체였다는 것으로 에로스의 기원을 설명한다. 간단히 말하면 남녀가가 한몸이었는데 떨어져서 서로를 찾게된다는 것이랄까. 그런데 양성동체도 결국은 '양성'이다. 무성과 다르다.
박선우의 소설들을 읽으며 나는 '무성'과 '양성'의 중간지대를 경험한 느낌이었다. '성'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구분지어야 하나 구분을 짓긴 지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 개념적으로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논쟁적이 될 수밖에 없는데 문학으로 읽으니 비록 구체적으로 정리되진 않더라도 마음으로 정리되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새로웠고 마음아팠고 좋았다. 그리고 응원한다. 무엇이 되었건 모두 사랑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이해할 수 있기 마련이다. 내 어항의 크기는 얼마만한 것일까? ^^
이게 뭐예요?
코이 잉어예요, 그가 말했다.
잉어라고요?
모르셨구나. 그는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코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맞춰 성장하는 물고기인데요. 가정용 어항에 넣어두면 5센티미터 남짓 자라고, 큰 수족관에 옮겨 놓으면 행동반경이 넓어진 만큼 1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까지 자라나요. 강에 풀어주면 1미터가 훌쩍 넘게 커지거요. 그는 코 밑을 문지르다가 덧붙였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좁은 공간에 가둬놓으면 티끌만 한 크기로 평생을 살게 된답니다. (p. 35)